2014.11.01 사진으로 보는 경주 남산 고위봉 ~ 금오봉 사진일기
경주 남산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이 많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학창시절부터 많이 다녔던 곳이다.
이번 산행지 역시 일부 코스는 몇 번이나 갔던 코스지만 고위봉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에도 삼릉을 들머리로해서 금오봉을 거쳐 용장사지가 있는 용장골로 하산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용장마을을 들머리로 이무기능선, 고위봉, 이영재, 삼화령, 금오봉, 황금능선을
거쳐 포석정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선택했으나 황금능선이 휴식년제에 걸려 삼불사로
하산하는 코스로 급변경했다.
(산행 개략)
1. 산행날짜 : 2014.11.01(토), 날씨 : 개임(구름많음)
2. 산행시간 : 10시40분 ~ 16시 18분(5시간40분)
3. 이동, 도상거리 : 11.48km, 10.52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2.05km/h
휴식제외 : 2.28km/h
5. 고도 : 532m ~ 71m(461m) : 고위봉이 494m이니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5.22km, 1.88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5.82km, 2.59km/h
8. 휴식횟수, 시간 : 1회, 35분
9. 산행 코스 :
용장골→천우사→이무기능선→고위봉→백운재→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봉화대능선
→이영재→ 연화대좌→금오봉→바둑바위→배리석불입상→삼불사
(남산의 개략)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이 산 주변에는 신석기 말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신라시조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誕降)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奈乙神宮), 왕릉이 즐비하며, 도성(都城)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과,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있어 남산은 실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라 할 수 있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
이러한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비파바위(琵琶巖)의 부처님이 망덕사(望德寺)의 낙성재(落成齋)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진신석가(眞身釋迦)의 모습으로
바뀌어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누추한 승복을 입고 광주리에
물고기를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경흥국사(景興國師)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忠談)스님은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다공양(茶供養)을 올린 후 경덕왕(景德王)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려 군신(君臣)과
백성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佛像)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다.
남산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동남산 부처골 감실 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은 투박한 시골 할머니가
돌로 만든 집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와 어울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한국 최고(最古)의 감실불(龕室佛)이며, 7세기 중엽의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의상(石造彌勒三尊佛倚像)과 선방곡 석조여래삼존불(石造如來三尊佛)은 티없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에 불세계(佛世界)를 만다라적(曼多羅的)인 기법으로 새겨 놓은 탑곡 마애조상군
(磨崖造像群)은 사방의 불보살과 비천(飛天)들이 시시각각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웃는 모습들은 가히 환상적인 불세계를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국통일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신령스런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더욱 많은 탑과 불상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에 사방불(四方佛)을 더하여 조성한 칠불암(七佛庵) 마애조상군은
심산궁곡 바위 절벽을 부처님들이 머무는 하늘 나라로 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절을 세운
용기와 큰 바위를 쪼아 대불(大佛)들을 조성하여 화엄세계(華嚴世界)를 구현해 낸 신앙의
열정에는 그저 감격 할 뿐이다.
조선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용장계곡
용장사지(茸長寺址)의 석조삼륜대좌불(石造三輪臺坐佛)은 자연석 바위를 하대석으로 삼고
둥글둥글한 대좌를 삼단으로 놓아 그 위 연꽃 방석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바로 수미산(須彌山)
위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이신 대현(大賢)스님께서
염불하면서 돌면 이 미륵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남산 전체가 마애불의 보고(寶庫)이지만, 특히 냉골(삼릉계곡)은 마애불이 많다.
입가에 방글방글 미소를 머금은 채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마애관음보살입상
(磨崖觀音菩薩立像), 다듬지 않은 넓은 바위 면에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삼존불과, 극락으로 왕생(往生)하는 중생을 마중 나오시는 신비스런 모습의 내영아미타여래
(來迎阿彌陀如來)를 한 폭의 그림으로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얼굴은 원만상으로
조각하고 몸은 억센 선으로, 연화대좌는 부드럽고 희미한 선으로 처리하여, 기도하는 중생을
위하여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듯한 높이 6m의 상선암 마애대좌불(磨崖大坐佛) 등
남산 전체가 불보살의 세계를 옮겨 놓은 듯하다.
부처님 나라를 그리는 간절한 신앙은 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용장계곡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200여m가 넘는 높은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상층기단을 쌓고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삼층석탑을 쌓았으니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오.
탑 위 푸른 하늘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부처님 세계가 되니, 서라벌 벌판은 부처님이
굽어보는 복된 땅이 되는 것이다.
위 산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최근 복원한 잠늠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왕궁지였던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과 남산리 사지(寺址)
서삼층석탑에 이르러서는 상층기단부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四天王)의 장수(將帥)이니 탑의 기단부가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네이버 지식 검색에서)
▼ 용장마을을 들머리로해서 삼불사로 하산한 산행 위성궤적입니다.
▼ 등고선 산행궤적입니다.
▼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악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산입니다.
좌측 높은 곳이 고위봉(495m), 우측 높은 곳이 금오봉(467.9m)입니다.
▼ 용장마을에 주차장이 없어 100m전방에 있는 팔영마을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 남산 안내도입니다.
▼ 오늘 산행 코스는
용장골→천우사→이무기능선→고위봉→백운재→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봉화대능선→
이영재→연화대좌→금오봉→바둑바위→배리석불입상→삼불사 주차장입니다.
▼ 버스가 도착한 위치입니다.
▼ 안전한 산행을 위한 몸풀기를 하고 있습니다.
▼ 몸풀기를 끝내고 산행을 위해 용장골 주차장을 출발하기 시작합니다.
▼ 국도를 벗어나 용장골로 들어섭니다.
▼ '만수국'입니다. 얼마전 네팔 도착시 만수국으로 만들어진 환영 꽃다발이 생각납니다.
▼ 용장마을 입구에서 '산수유' 열매도 만났습니다.
▼ '감국'이라고 합니다.
다년생 식물로 높이 30 ~ 70cm 내외이며, 황국이라고도 하고, 전체에 짧은 털이 있습니다.
줄기는 가늘고 길며 잎은 어긋나고 짙은 녹색이며, 꽃은 선명한 황색으로 향기가 좋습니다.
약재로 사용되며, 두통,열감기,폐렴,기관지염,위염,장염,종기,향균작용 등에 이용된다고 합니다.
▼ 따지 않은 감들이 나무에 그대로 달려있습니다.
▼ 다람쥐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용장사지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고위봉 쪽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 삼거리에서 용장사지쪽으로 가는 길 전경입니다.
▼ 우리는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 현위치에서 천우사를 거쳐 고위봉쪽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 고위봉으로 가는 관리사무소 앞을 통과합니다.
▼ 관리사무소 앞의 산행 길라잡이 입니다.
▼ 본격젹인 산행이 시작됩니다.
▼ 철모르는 진달래입니다. 간혹 사람도 이런 류의 사람이......
▼ 앞이 트이는 전망대에서 경주들판을 바라봅니다.
▼ 내려다보이는 절이 천우사인 것 같습니다.
▼ 본격적인 들머리부터 가파른 경사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 용장마을에서 1.6km를 진행했고, 고위봉까지는 1.2km남았습니다.
▼ 암릉이 시작됩니다.
이무기 능선은 공룡 능선까지는 안되어도 이와 버금간다는 뜻으로 이름붙여진 것 같습니다.
▼ 고위봉 1.2km남은 이정표인데 긴급구조 이정목과는 약간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 앞선 회원들은 위쪽 암릉에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 날씨 탓이었는지남산의 단풍들은 그렇게 이쁘지를 못합니다.
▼ 암릉을 타고 올라오다 직벽에는 우회하는 코스도 있습니다.
▼ 계속되는 암릉 능선입니다. 로프가 필요치는 않으나 약간 까다로운 구간도 있습니다.
▼ 지나온 이무기 암릉능선이 조망됩니다.
▼ 이어지는 암릉능선입니다.
▼ 암릉전망대에서 바라본 경주들판이 누런 가을색으로 펼쳐집니다.
▼ 선등하는 회원들은 벌써 저멀리 널따란 바위 위에 도착했습니다.
▼ 우리가 진행해야할 고위봉 정상 방향입니다.
▼ 침엽수인 소나무도 가을을 타나 봅니다.
▼ 이무기 능선상에 위치한 긴급구조 3번목입니다.
▼ 고위봉 정상 방향 전경입니다. 암릉이 이어집니다.
▼ 고위봉 0.7km 남은 이정목을 지나갑니다.
▼ 이 나무는 제법 이쁘게 가을색을 입고 있습니다.
▼ 암릉길 사이로 간혹 소나무 멋지게 자라고 있는힐링하기 좋은 산길도 나타납니다.
▼ 첫번째 로프를 만났습니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로프길이 제법 연결됩니다.
▼ 두번째 로프입니다. 제법 길게 연결된 로프도 있습니다.
▼ 세 번째 로프입니다. 이곳은 제법 까다로워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 바위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입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것 같습니다.
▼ 네 번째 로프입니다.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우리가 지나온 암릉능선을 조망합니다.
▼ 바위전망대에서 내려가는 로프구간입니다.
▼ 고위봉 정상까지 암릉이 이어져 있는 전경입니다.
▼ 다섯 번째 로프구간입니다. 여기도 약간 까다로운 구간입니다.
▼ 투구같이 생긴 바위 옆으로 지나갑니다.
▼ 이 바위는 한쌍의 암수같이 꼭 맞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 고위봉 0.2km를 남긴 긴급구조 4번 이정목을 지나갑니다.
▼ 오르막이 계속 이어집니다.
▼ 경사가 급하고 위험한 곳에는 데크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 절벽위 소나무 한그루가 멋있게 자라고 있습니다.
▼ 우리가 지나온 능선을 조망합니다. 암릉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 멋진 바위의 자태!
▼ 바위틈새를 자리잡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이 돋보입니다.
▼ 중식장소인 헬기장 직전의 계단입니다.
▼ 먼저 도착한 회원님들이 헬기장에서 점심식사 중입니다.
▼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입니다.
▼ 식사후에는 말끔히 뒷정리를 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고위봉 정상으로 향합니다.
▼ 경주 남산 고위봉! 정상석은 고위산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 고위봉 정상에서 칠불암 방향으로 길을 이어 갑니다.
▼ 칠불암 방향으로 이어가는 길 전경입니다.
▼ 가을색이 지나간 자락의 흔적이 바닥에 모여있습니다.
▼ 칠불암 방향 1km전방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백운재 방향 가는 길은 유순한 길로 이어집니다.
▼ 백운재에 도착했습니다. 용장마을로 하산하는 삼거리입니다. 우리는 칠불암 방향으로.....
▼ 용장마을로 하산하는 길 전경이고, 우리는 직진으로 이동합니다.
▼ 가을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낙엽길입니다.
▼ 새갓골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삼거리이정목을 지나갑니다. 우리는 칠불암 방향으로....
▼ 이곳에서 칠불암 직벽 위에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친견하기위해 우측으로 이동합니다.
▼ 신선암 방향으로 가는 중에 만난 분재형 소나무입니다.
▼ 보물 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친견합니다.
▼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을 친견하고 다시 칠불암 삼거리로 되돌아 나왔습니다.
▼ 보일듯 말듯 애기 단풍입니다.
▼ 용장사계곡삼거리를 통과합니다. 금오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우리가 지나온 고위봉 정상이 저멀리 조망됩니다.
▼ 애국가 남산위의 소나무는 아니지만......
▼ 남산 금오봉 정상이 손에 잡힐 듯이 나타납니다.
▼ 능선을 따라 이동하기 위해 데크계단을 이동합니다.
▼ 원래는 흙속의 나무뿌리 였을 건데.....
▼ 바위틈새를 요리저리 빠져 이동합니다.
▼ 바위사이를 통과하기도 합니다.
▼ 이영재 1km전방의 구조표시목을 통과합니다.
▼ 이영재로 향하는 급경사길이 나타납니다.
▼ 이영재로 향하는 데크계단길이 이어집니다.
▼ 이영재에 도착했습니다. 금오봉 1.7km전방 이정목을 지나갑니다.
▼ 통일전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삼거리 이정목입니다. 우리는 금오봉쪽으로 이동을 계속합니다.
▼ 임도를 만납니다. 임도를 따라 금오봉 쪽으로 이동합니다.
▼ 삼화령에서 바라본 우리가 지나온 능선입니다.
이무기능선을 따라 고위봉, 백운재를 거쳐 지나왔습니다.
▼ 실제 전경을 사진으로 옮겼습니다.
▼ 가을색이 유별나게 묻어있는 나뭇잎입니다.
▼ 삼화령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가 씌여있었습니다.
▼ 해설판 바로위 언덕에 연화대좌가 보입니다.
▼ '벌개미취'입니다.
별개미취라고도 한다. 습지에서 자란다. 높이 50∼60cm이다. 옆으로 벋는 뿌리줄기에서
원줄기가 곧게 자라고, 홈과 줄이 있다. 뿌리에 달린 잎은 꽃이 필 때 진다.
줄기에 달린 잎은 어긋나고 바소꼴이며 길이 12∼19cm, 나비 1.5∼3cm로서 딱딱하고
양 끝이 뾰족하다.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져서 줄 모양이 된다.
꽃은 6∼10월에 피는데, 두화(頭花)는 연한 자줏빛이며 지름 4∼5cm로서 줄기와 가지 끝에
1송이씩 달린다.
총포는 공을 반으로 잘라놓은 모양이며 지름 약 8mm, 길이 약 13mm이다.
포조각은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털이 나고 4줄로 늘어선다.
열매는 수과(瘦果)로서 바소꼴이고 11월에 익는다.
길이 4mm, 지름 1.3mm 정도이고 털과 관모가 없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한국 특산종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충청북도·경기도 등지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 우리는 현위치에서 금오봉,바둑바위,삼불사로 하산합니다.
당초 계획은 금오봉,팔각정터,금오정,포석정으로 하산할려고 했으나 황금능성이
휴식년제로 출입통제되고 있었습니다.
▼ 용장골에 대한 해설판입니다.
▼ 용장사지 삼거리에서 우리는 금오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임도에서 좌측 금오봉 산길로 접어듭니다.
▼ 비파골에 대한 해설판입니다.
▼ 금오산 정상석에 도착했습니다.
▼ 약수골 입구 삼거리에서 우리는 삼릉주차장쪽으로 이동합니다.
▼ 현위치에서 바둑바위를 거쳐서 삼불사로 이동해야합니다.
▼ 남산과 망산의 유래에 대한 해설판입니다.
▼ 산행 막바지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을 낙엽이 멋지게 길바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 서서히 해발 고도를 낮추고 있습니다.
▼ 인간의 힘입니다.
바닥에 깔린 뿌리를 밟다보니 이렇게 닳아져 뿌리나이테가 나타납니다.
▼ 하산 데크계단길이 나타납니다.
▼ 상사바위에 대한 해설판입니다.
▼ 상사바위전경입니다.
▼ 삼불사 1.5km 전방 이정목을 지나갑니다.
▼ 남산바위전망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 남산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경주 들판에 대한 설명판입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실전경입니다. 운무로 희미하게 조망됩니다.
▼ 삼릉과 삼불사로 향하는 삼거리 이정목입니다. 우리는 삼불사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지나온 산중턱에는 가을색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 삼불사 1km전방 이정목을 지나갑니다.
▼ 산죽길이 나타납니다.
▼ 삼불사 400m전방 긴급 구조표시목 13-1번을 지나갑니다.
▼ 배리석불입상이 있는 삼불사에 도착했습니다.
(삼불사 개략)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절이 있는 남산은 신라의 4대 영지로 불교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근래에 들어와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법당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삼존석불입상과 석탑 등이 전한다.
이 중 삼존석불입상은 남산의 여러 불교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며
일명 삼체석불(三體石佛)로 불리는데, 절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본래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3년에 발굴하여 다시 세운 것으로, 가운데 불상은 2.6m이고,
좌우 보살상은 각각 2.3m 크기이다.
그 중에서도 연화대좌에 있는 왼쪽 보살상이 가장 뛰어난 조각품이다.
광배에 다섯 불상을 다시 새겼는데, 불상 뒤에 광배가 또 있어 매우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7세기 때의 작품으로 보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 배리석불입상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본존(本尊) 높이 2.75m, 왼쪽 협시상(脇侍像) 높이 2.36m, 오른쪽 협시상 높이 2.36m이다.
조선시대에 무너진 것을 1923년 복원하였다.
얼굴과 몸이 어린아이를 묘사한 점은 장창곡 삼존상과 같으나 장식적이고 생경한 것은
신라 조각 사상 새로운 양식의 등장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肉髻)는 2중이며 소발(素髮)이다.
목은 없어 머리가 그대로 원통형 체구 위에 얹혀 있으며, 어깨선을 제외하고는 몸의
굴곡을 느낄 수 없다.
손은 큼직하고 시무외(施無畏)·여인원(與願印)을 짓고 있으며, 어깨에 걸친 법의(法衣)는
묵직하며, 앞면에 U 凸형 무늬가 4줄 있다.
이같이 둔중하고 강직한 작풍(作風)이 불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나, 동안(童顔)과
균형을 잃은 체구 등의 수법은 따뜻한 생명을 실감하게 하는 자신감이 넘친 기법이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이 있을 뿐이며 불상과 같은 돌로 만들었으나 거의 깨어졌다.
이 원형 두광은 얼굴·신체·의(衣)무늬 등과 함께 이 불상의 제작연대를 입증해 준다.
왼쪽 보살은 좀 수척하며 기법상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쓴 얼굴은 눈을 바로 뜨고 미소를 띠고 있다.
허리는 가늘고 뒤틀려 있어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며, 하체에도 다소 입체감이 나타나
있다.
이 보살은 목걸이, 허리의 띠매듭, 다리에 드리운 U형 천의(天衣) 자락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천의는 무거워 보인다.
오른쪽 보살은 왼쪽 보살과 달리 본본불에 가까우며 특히 장식적이다.
얼굴도 본존과 같이 눈을 내리뜨고 몸도 무겁게 처리되었다.
목걸이는 두드러지게 굵고 3가닥 선의 가운데 커다란 꽃을 장식한 점은 장창곡 좌보살상과
비슷하다.
천의도 묵중한 데다가 턱마저 없으며, 무겁고 굵은 달개[瓔珞]가 발등까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장식적 효과는 수(隋)나라 때의 보살과 흡사하여 수나라 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이다.
머리의 원형 두광에는 화불(化佛) 5구가 있고, 그 사이마다 꽃무늬가 있다.
대좌(臺座)는 원통형이며, 위아래에 겹잎연꽃무늬[複瓣蓮花紋]를 앙련과 복련의 형태로
조각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 삼불사 주차장쪽으로 이동합니다.
▼ 도로에 나뒹구는 가을채색이 이쁘게보입니다.
▼ 삼불사 입구 표식입니다.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합니다.
▼ 포석정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각상입니다.
▼ 지마왕릉 표지석입니다.
(지마왕릉)
신라 제 6대 지마니질금의 능으로 전해오는 왕릉은 포석정 남쪽 200m지점의 서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17m, 높이 3.4m의 소형분에 속한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능은 경사를 이용하여 한 단 높은 곳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능의 위치가 산기슭인 점과 봉분이 소규모라는 점을 들어 피장자가 지마니질금과는
관계없는 신라 중대 이후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강인구, 2000)
현재의 왕릉 비정은 17세기말부터 경주박씨의 족보 간행사업 일환으로 이루어 졌다.
이들은 박씨왕들의 무덤군으로 비정된 오릉(五陵)을 기준으로 남산 서북변 일대에
박씨왕릉을 위치비정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1730년 경주 선비 유의건이 쓴 「나릉진안설(羅陵眞贗說)」을 통해
정리되었다.(이근직, 1995; 강인구, 2000) 무덤은 1971년에 사적 제221호
“지마왕릉(祇摩王陵)”으로 지정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포석정 주차장에 도착해서 오늘의 여정을 모두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