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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 3 (2017.11.17(금) ~ 19(일))

redstone5 2018. 2. 2. 15:22

      (2018.11.17.금. 8일째)

      ▼ 11/17 금 AM. 묵었던 카이로의 메르디안 피라미드 호텔 외부 전경입니다.


      ▼ 11/17 금 AM. 메르디안 피라미드호텔의 1층 로비 전경입니다.

         중국 관광객들로인해 시장판보다도 더 질서가 없는 엉망진창 그모습입니다.


      ▼ 11/17 금 AM. 호텔 앞의 참새들입니다. 한국의 참새와 다름이 없습니다.


      ▼ 11/17 금 AM. 호텔 앞 전경으로 열대나라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 11/17 금 AM. 버스를 이용하여 약 3시간에 걸친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 이동이 시작됩니다.


      ▼ 11/17 금 AM. 알렉산드리아 이동중 에 들린 휴게소입니다.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고, 우리나라로 표현하면 고속도로 휴게소쯤.......


      ▼ 11/17 금 AM. 휴게소에서 바라본 이슬람사원의 첨탑입니다.


      ▼ 11/17 금 AM. 이집트 제2의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첫목적지인 

         카타콤을 찾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도시를 건설한 후 수도로 삼았으며,

         고대에는 헬레니즘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지중해 연안 나일 강 삼각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 도시는 지금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183㎞ 떨어져 있다.

         지중해로 뻗은 T자 모양의 갑이 염호(마리우트 또는 마레오티스)와 바다 사이를 가르면서

         형성된 돌출부에 있다.

         이 T자 모양의 자루부분은 원래 파로스 섬과 연결되는 방파제였는데,

         점차 바닥에 실트가 쌓이면서 2개의 항구(동쪽의 구항구와 서쪽의 신항구) 사이에 낀

         지협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지만 겨울에는 가끔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이 도시는 근교의 농업 배후지와 함께 하나의 주(州)를 이루고 있다.

         주민 대다수는 상업·공업·해운업·어업에 종사하며, 부두에서 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면직물·종이·초콜릿·가공식품·아스팔트·기름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이곳에서 생산하는 면은 최고 수출품으로 꼽힌다.

         아울러 곡물과 채소도 주요수출품에 속하며, 차·커피·목재·천연양모·기계류 등이

         수입되고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부르키움(그리스), 라코티스(이집트), 레기오 유다이오룸(유다 왕국),

         파로스 등의 고대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파로스의 동쪽 끝에는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거대한 등대

         (파로스의 등대)가 세워져 있었다.

         미단 앗타흐리르(해방지구, 이전의 무하마드 알리 지구)는 현대식 도시의 심장부이다.

         고대도시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폼페이의 기둥과 카움앗슈카파의 히드리아누스

         지하묘지는 아직 그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이 훼손되었다.


         이 도시에는 알렉산드리아대학교(1942), 무아사 병원과 간호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들이

         있고, 그외에 그리스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주교 도서관과 그리스 로마 박물관 등이 있다.

         해변도로인 알자이시(군용)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14.4㎞ 이상 뻗어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나일 강 삼각주 개발의 거점도시로 철도·도로·항공망을 두루 갖추고 있는

         요지이다.

         이곳의 항구는 잘 발달되어 있으며, 방파제를 비롯해 선창과 부두 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있는 폼페이의 기둥 전경입니다. 볼 게 없다는 이유로 그냥 버스에서 외관 구경만....


         (카타콤?)

         이 명칭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3세기 후반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유해를

         잠시 동안 안장했던 것으로 유명한 산세바스티아노 성당(로마 시 근처 아피아 街道에 있음)의

         지하묘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의미가 확대되어 로마 시 주변의 모든 지하묘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뒤 다시 또 의미가 확대되어 원래 매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의 여부와 관계 없이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모든 지하 시설물들을 한데 묶어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그 예로 파리의 카타콤이라는 것은 원래는 사용하지 않는 채석장이었으나 1787년부터

        묘지로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카타콤은 매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을 했다.

         사람이 죽었을 경우 지하에 있는 가족 납골당에서 매장일과 기일을 맞아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을 치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시절 장례식이 있을 때마다 수반되었던 성체성사도 이 납골당에서

         치러졌다.

         어떤 카타콤은 커다란 방과 부속 예배실을 갖추고 있어 이곳에서 성인과 순교자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실상의 성소(聖所)로서의 기능을 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산세바스티아노 사원의 카타콤에 있는 트리클리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를 기리는 음식(refrigeria)을 함께

         먹고 성인들에 대한 자신의 기도문을 벽에다 새겼다.


         카타콤에는 교묘한 구조로 되어 있고 비밀통로가 있어서 모래밭이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박해와 소요 사태가 닥쳤을 때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그 예로 교황 식스투스 2세와 4명의 부제(副祭)들은 258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할 때 산세바스티아노 사원의 카타콤 안에서 붙잡혀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민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곳으로 피신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카타콤을 비밀 예배장소로 사용했다는 통념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3세기경 로마 시에는 5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교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마다 집을 나와 비밀리에 카타콤으로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어떤 종류의 예배이든지 간에 카타콤의 길고 좁은 통로를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보이며,

         성 칼릭스투스 카타콤에 있는 '교황의 예배실'과 같은 가장 큰 공간을 가진 예배실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40명 정도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도나 이교도 모두 죽음을 불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묘지에서 죽은 자를 기리며 함께 식사를 하거나 미사를 보았을지는 몰라도

         이 카타콤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보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카타콤은 그리스도교도나 로마인만이 유일하게 만들어낸 것은 전혀 아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돌로 된 지하의 굴 속에 매장하는 관습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권의 어느 지역에서든지 카타콤을 발견할 수 있다.

         몰타에서는 이 섬의 고대 수도 근처에, 시칠리아에서는 타오르미나와 시라쿠사

        근처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집트에서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근처에 있다.

         레바논의 시돈(지금의 사이다) 근처를 비롯해 튀니지의 하드루메툼(지금의 수사) 근처에

         카타콤이 있으며 이탈리아에는 여러 곳에 널리 분포해 있으나 특히 나폴리 주변과

         고대 에트루리아 지역에 많이 있다.

         로마에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카타콤은 시 중심부에서 4.8㎞ 정도 반경 안에 분포해

         있다.

         40개의 굴방이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도시로 들어오는 간선도로 근처에서 발견된다.

         이것들은 알려져 있는 모든 카타콤 가운데 큰 편에 속하는 것들로 일부는 관람객들에

         개방된다.


      ▼ 11/17 금 AM. 지하 공동묘지로 들어갑니다.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폰 화면입니다.



      ▼ 11/17 금 AM. 죽음의 관들이 들어갔던 자리입니다.



      ▼ 11/17 금 AM. 지표면에서 이 통로로 관들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 11/17 금 AM. 발굴 도중 발견된 인골들이라고 합니다.


      ▼ 11/17 금 AM. 관들이 놓였던 곳에는 이런 벽화들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 11/17 금 AM. 전체적인 개요를 그려놓은 사진인데 이 모형도를 보면 전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 11/17 금 AM. 카타콤을 떠나 폼페이 기둥이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폼페이의 기둥?)

         지금의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이 적은데,

         이 폼페이의 기둥은 그 적은 유물 중 하나이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상을 얹기 위해 세워진 것이므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높이 30m, 지름은 상부 2.3m, 기부 2.7m나 되는 큰 기둥이다.

         아스완에서 가져간 적색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토대의 돌은 세티 1세와 프사메티코스 등의 유적에서 모은 것들이다.

         한편 이 기둥은 항해 중인 배들의 목표물로도 이용되었다 한다.

         주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세라피스 신을 모시던 신전 세라페움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 11/17 금 AM. 알렉산드리아 대학생들의 맑은 표정입니다.


      ▼ 11/17 금 AM. 파로스등대 자리에 세워진 성벽입니다.      

         15세기 이슬람시대에 세워진 3층 구조의 카이트베이 요새입니다.

         기원전 3세기 최초의 등대인 파로스 등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요새로

         3층에 오스만터키시대에 사용했던 대포와 무기고가 있다고 합니다.


         (파로스 등대?)

         가장 유명한 고대의 등대로 기술적인 위업이며 이후 세워진 모든 등대의 원형이다.

         BC 280년경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토스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 안에 있는 파로스 섬에 세웠고 높이가 135m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등대는 3단식으로 맨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며

         모두 약간 안쪽으로 쏠리게 지어졌다.

         폭이 넓은 나선형 경사로가 옥탑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옥탑에서 밤에 불을 밝혔다.

         이 등대 위에는 거대한 조상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를 태양신 헬리오스의 형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등대는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불가사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최초의 목록은 그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꼽고 있음). 중세 아랍인들은 꼭대기 등대를 작은 모스크로 바꾸었다.

         이 등대는 12세기 이후에 무너졌으며 1477년경 맘루크 술탄 카이트 베이는 그 잔해를

         이용해 요새를 지었다.


      ▼ 11/17 금 AM. 카이트베이 요새 전경입니다.



      ▼ 11/17 금 AM. 알렉사드리아 시내에 있는 순국 군인 위령비가 있습니다.


      ▼ 11/17 금 AM. 점심때 먹은 알렉산드리아의 생선구이 특식이라고 합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에 조성된 휴양시설을 점시 둘러 보았습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시설에서 바라본 대통령 하계 별장인 몬타자 궁전 전경입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시설의 입구 전경입니다.



      ▼ 11/17 금 PM. 이집트대통령 하계 휴양시설인 몬타자 궁전 원경입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시설에서 낮시간을 즐기는 이집트인들입니다.


      ▼ 11/17 금 PM. 이집트 소녀들은 사진 찍기를 엄청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지내의 꽤 깊을 것 같은 바다인데......


      ▼ 11/17 금 PM. 대통령 하계 휴양지인 몬타자 궁전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북동쪽 17km지점의 몬타자 비치 기슭의 조금 높은 구릉 위에 있다.

         원래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1892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정원에는 수백 그루의 야자나무가 있고,

         스포츠 시설이며 레스토랑, 매점 등도 갖추어져 있다.

         150ha의 부지 안에 있는 팔레스틴 호텔은 별장 하나를 개조한 것으로 분위기가 좋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업적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서관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이후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기원전 323~283년) 혹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246년) 때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46~120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후속인 아킬라스가 카이사르의 해상 능력을

         제한하려자 카이사르의 배에 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반면에 에드워드 기븐은 도서관이 391년 세라페이온의 파괴를 지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빌로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역시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도서관이 파괴된 후에,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세라페이온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대신 이용했다.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념하고 그것에 필적한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2002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서 개관했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알렉산드대왕의 흉상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2세와

         왕비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는 광산과 광대한 삼림, 넓은 목초지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민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아민타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마케도니아군의

         군력을 확충하고 여기에 그리스군의 전술을 도입하여 전력과 전술에서 완벽한 최강의

         군대를 만든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살 때 사나운 명마를 단숨에 길들일 정도로 용맹했고,

         열여섯 살 때까지 그리스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사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무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으로 탁월한 학문을 겸비했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으며 자랐다.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과 전쟁을 하러 떠나자 알렉산드로스는 왕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마케도니아 인들의 지배에 저항하여 트라키아의 마에디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에디 족의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하고 그들을 영토에서 내쫓은 후

         그 자리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부자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의 대부분을 정복한 다음 코린토스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반페르시아 연합이 결성된 것처럼 '그리스 연합(Hellenic Alliance)'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스파르타만이 제외되었다.  

         필리포스는 이 연합의 이름을 헤게몬(Hegemon, '최고 사령관'이라는 뜻)이라고 지은 후

         페르시아 제국에 복수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펠라로 돌아온 후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Cleopatra Eurydice)와 재혼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자 필리포스의 장수 중 하나였던 아탈로스는 이 결혼에서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기대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묘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서 그녀의 삼촌 아탈로스는

         술을 마시며 자신의 조카딸이 필리포스보다 훨씬 젊으니 이제 그녀에게서 마케도니아 인들이

         늘 신에게 기도하던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해서 컵을 그의 머리 위로 던지며 "그럼 나는 사생아란 말이냐!"

         라고 외쳤다.

         필리포스는 아탈로스의 편을 들어 칼을 뽑아들고 아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술에 취한 탓인지

         지나치게 화가 난 탓인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걸 보라. 유럽을 지나 아시아까지 정복할 준비를 하는 사내가

         겨우 자리를 지나가다가 넘어졌구나"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빠져나가 일리리아에서 왕실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6개월 후 가족의 친구인 코린트인 데마라토스가 필리포스를 설득하여 그를 돌아오게 해주었다.


         기원전 336년, 에게 근방에서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필리포스는 자신의 경비대장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파우사니아스는 도망치려 했으나 포도 줄기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인

         페르디카스와 레오나토스에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약관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그는 평생 왕위를 노리고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게 된다.

         필리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배지의 주민들이 데모스테네스의 주도하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평정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이 살아 있을 때부터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현장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의 소소한 반란들이 평정되자 아버지인 필리포스 때부터 준비해오던 페르시아

         원정을 다시 시작했다.


         페르시아 정복이 끝났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사들을 다독여가며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했다.

         인도에서도 연전연승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인도 동부 점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힌두쿠시 산맥을 겨우 넘은 군사들이 더 이상의 전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회군했다.

         원정을 계속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는 스스로를 아몬 신(神)의 아들이며 파라오라

         칭하고 신흥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그는 정복지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그는 서양의 마케도니아-그리스의 문화와 동방의 페르시아-인도 문화를 한데 아우른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아울러 두 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제국을 꿈꾸며 동·서양 융화정책을 펴나갔다.

         그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다리우스의 딸과 결혼했고, 뒤이어 마케도니아 남성들이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군이든 왕실에서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원전 323년, 갑자기 열병에 걸려 신음하던 젊은 대왕은 자리에 누운 지 불과 열흘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였기에 후계자를 두었을 리 없었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여 세운 거대한 제국은 그의 사후 주인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왕위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계속되었다.(다음백과 중에서)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내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인쇄기 등입니다. 


      ▼ 11/17 금 PM. 새롭게 건설된 도서관은 태양열 유리로 지붕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 11/17 금 PM. 도서관 앞의 조형물로 지구를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전면벽에는 세계 각국의 문자를 표현해놨는데

         한글의 몇 글자도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 11/18 토 AM. 알렉산드리아 일정을 마치고 카이로의 호텔로 돌아와 숙박 후

         실질적인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짐을 챙겨 버스에 오릅니다.


      ▼ 11/18 토 AM. 쿠푸왕 피라미드 입구의 호텔 전경입니다.

         이 호텔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카이로회담이 열린 우리로서는 역사적인 곳입니다.


         (카이로선언?)

         제1차 회담(1943. 11. 22~26)에서 연합국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했다.

         또한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11월 27일 발표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관하여 내린 최초의 공식성명이었다.


         그 주요내용은 ① 미국·영국·중국 3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한다.

         ②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응징하나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③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 만주·타이완 등의 중국에 대한 반환,

         일체의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의 구축(驅逐) 등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었다.


         이상의 내용들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된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

         제1차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 처칠과 루스벨트는 요시프 스탈린과 테헤란 회담을 위해 이란으로

         갔다가 카이로로 다시 돌아왔다.

         제2차 카이로 회담(1943. 12. 2~7)에서 처칠과 루스벨트는 터키의 I. 이뇌뉘 대통령을 설득해

         터키를 연합국측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 11/18 토 AM. 차창으로 바라본 호텔 건물 전경입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가 밀집해 있는 고대 왕들의 무덤군 앞에 있는 최대규모의

         쿠푸왕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이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3개의 피라미드는 내부·외부가 모두 고대에 이미 도굴당해 시체안치실에 있던 껴묻거리

         [副葬品] 대부분이 사라졌다.

         무른 흰색 석회석의 외벽도 거의 모두 벗겨져버렸기 때문에 피라미드들의 높이가 원래보다

         낮아져 대피라미드도 지금은 138m 높이에 불과하다.

         가운데 있는 카프레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삽도(揷圖)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석회석

         외벽이 남아 있다.


         쿠푸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옆면 경사가 51°52'이며 밑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 있다.

         대피라미드의 중심부는 황색 석회암 벽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거의 없어진 바깥벽과

         내부통로는 그보다 고운 입자의 옅은 색조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시체안치실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1개당 평균 2.5t 무게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쿠푸는 다른 두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정교함이나 공법에서 탁월한 걸작품이다.

         특히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사용된 돌덩어리들의 크기와 무게를 고려할 때 설계의 기하학적

         정밀성이나 돌을 깎은 정확도는 감탄할 만하다.

         아직 제자리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외벽 돌들은 무게가 16t까지 나가는 것도 있지만 이 외벽

         돌은 물론 내벽까지도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어느 곳의 석조건축보다도 더 정교하게

         연접되어 있다.


         대피라미드의 입구는 북쪽 측면, 지상 약 18m 위에 있다.

         입구에서 비탈져 내려가는 복도는 피라미드 내부를 경사지게 내려가 피라미드가 서 있는

         돌이 많이 섞인 표토층을 지나 완성되지 않은 지하실에서 끝난다.

         이 하강 복도는 올라가는 복도로 연결되는데, 이를 따라가면 여왕의 방으로 알려진 방과 46m

         길이의 커다란 경사진 회랑(回廊)이 나온다.

         이 회랑의 윗부분에는 흔히 왕의 방으로 불리는, 시체안치실로 통하는 길고 좁은 통로가 있다.

         왕의 방 내부 벽과 천장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방에서 2개의 좁은 구멍이 내부를 비스듬하게 통과해 외부로 나 있는데,

         이것이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것인지 통풍을 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왕의 방 위쪽에는 거대한 화강암 석판이 수평으로 배치된 5칸의 방이 있는데,

         석판을 설치한 목적은 시체안치실 천장에 놓인 석재 덩어리들이 누르는 엄청난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피라미드를 세운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한 해답이 없으나 당시 이집트인들은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는 고패와 도르래가 없었으므로 벽돌·흙·모래로 제방을 쌓고 그 제방 위로

         썰매·굴림대·지렛대를 이용하여 돌을 끌어올린 듯하다.


         제방은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면서 점점 높고 길어졌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으며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나일의 홍수로 들에서 할 일이 없을 때 피라미드

         공사를 진행한 듯하다.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葬祭殿)과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피라미드의 남쪽 카프레 계곡 사원 부근에는 대(大)스핑크스가 있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 스핑크스는 얼굴은 카프레 왕이고 몸은 누워 있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길이는 약 73m, 높이는 20m에 달한다.


         1925년 쿠푸의 둑길 상단 가까이에서 쿠푸의 어머니 헤테페레스 여왕의 장비(葬備)를 담고

         있는 구덩무덤이 발견되었다.

         돌이 들어찬 깊은 구덩의 밑바닥에는 여왕의 빈 돌널[石棺]이 제4왕조 장인(匠人)들의 탁월한

         예술성과 완벽한 기술을 보여주는 가구와 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3개의 피라미드 둘레에는 왕들의 친척이나 대신(大臣)들의 장지(葬地)로 사용된 '마스타바'로

         불리는, 꼭대기가 평평한 장례용 구조물의 큰 분포지가 있다.

         

         기자에는 격자모형으로 늘어서 있는 제4왕조의 중심적 마스타바를 비롯한 많은 마스타바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몇 개는 제3왕조(BC 2650~2575경)의 것이고,

         나머지는 제5~6왕조(BC 2465~2150경)의 것이다.




      ▼ 11/18 토 AM. 3개의 피라미드에 관한 이집트 관광청의 안내도 설명입니다.


      ▼ 11/18 토 AM. 쿠푸의 피라미드 건축물의 안내도입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에서 금해야 할 사항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의 원래 입구가 위에 있고,

         아래 구멍은 도굴을 위해 뚫은 구멍이라 합니다.


         (쿠푸왕 피라미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서쪽 13킬로미터 지점.

         광활한 기자의 모래 언덕에 피라미드 세 기가 우뚝 서 있다.

         쿠푸 왕, 카프라 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다.

         이들은 모두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로 꼽히는 고왕국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고왕국 시대는 기원전 2686년경부터 기원전 2181년경으로 제3왕조부터 제6왕조 시기를

         일컫는다.

         소위 피라미드 시대로 불리는 이 시대는 강력한 전제 군주인 파라오가 등장해 많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특히 현재까지 형태가 보존된 이집트 전역의 피라미드 70여 기 가운데 가장 큰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는 엄청난 규모와 복잡한 내부 공간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쿠푸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2대 왕으로 대략 기원전 2589년경부터 기원전 2566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4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스네프루와 왕후 헤테프헤레스 사이에서 태어난 쿠푸는 어린 시절

         ‘크눔-쿠푸(Khnum-Khufu)’라고 불렸다.

         이는 ‘크눔 신이 보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인류를 창조한 위대한 크눔 신이 보호해 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위대한 존재라고 풀이된다.

         파라오로 불리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전제 군주인 동시에

         신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수장으로서 파라오는 상하 이집트의 주인인 동시에 모든 신전의 주인,

         즉 신관이기도 했다.

         파라오는 제사를 주관하고 신전을 건설했으며, 외부의 침략자들로부터 왕국을 보호하는

         수장이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파라오는 태양신 라(Ra)에게 점지받아 이집트 땅을 다스리는 신적인

         존재였으며, 지상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파라오는 신화 속의 호루스가 이집트에 강림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파라오는 육신의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 세계에서도 이집트를

         다스리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지평선 아래로 떨어져 ‘죽어 버린’ 태양이 내일이면 어김없이 ‘살아 돌아오듯이’ 파라오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인이 시체를 미라로 만들고, 묘 안에 현세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있는 내세의 공간을

         만들고, 수많은 부장품들을 묻은 것은 이처럼 생명의 불사(不死)와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만들어진 건축물이었다.

         쿠푸의 아버지 스네프루는 세 기의 피라미드를 가지고 있었다.


         쿠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피라미드의 건축을 지시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 제2권에

         따르면 이 공사에는 10만 명의 인원이 3개월씩 교대로 노역에 동원되어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투린 파피루스(Judicial Papyrus of Turin)의 기록에 따르면 약 23년간의 재위 기간

         대부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카이로 교외의 기자에 남아 있는 이 피라미드는 밑변이 230미터이고 높이가 147미터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꼭대기의 10미터 가량이 파손된 상태다.

         2.5톤짜리 석회암과 화강암 돌덩이 230만 개를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올 틈도 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린 형태로 파손된 꼭대기에는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석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의 건축 기술로 어떻게 큰 돌을 100미터가 넘는 높이로 들어 올려 정확하게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피라미드의 정밀한 구조와 당시의 연장 수준으로 보아 이집트 인들이 고도로 발달된

         기하학적 이론과 석재 가공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대피라미드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긴 터널과 대회랑, 왕의 방, 왕비의 방, 내려가는 통로, 올라가는 통로, 수평 통로, 환기통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그 구조는 물론 용도를 알 수 없는 빈 공간도 적지 않다.

         현재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로는 9세기경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

         대피라미드를 도굴할 때 뚫어 놓은 입구를 활용한 것이다.

         알 마문이 피라미드 안의 부장품을 모조리 챙겨 간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이 피라미드는 텅 비어 있다.

         파라오의 방에 무덤이 하나 있지만 쿠푸의 유골은커녕 찢긴 천 조각이나 부서진 자기의

         흔적조차 없다.

         때문에 누군가 앞서 도굴하기 전부터 이미 텅 빈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근거에서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건축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1954년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두 척의 태양의 배가 발견되면서

         일축되었다.

         태양의 배는 죽은 파라오의 영혼이 저승에서 배를 타고 여행한다는 관점에 따라 부장품으로

         넣어진 것이다.

         파라오의 텅 빈 방에 대해서는 도굴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부러 ‘파라오의 방’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중요한 부장품은 다른 곳에 숨겨 두었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전자파 레이더로 정밀 검색한 결과 대피라미드 내부에 세 군데 정도의 비밀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절대 군주인 파라오가 자신의 내세를 담보하고 현세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에 강제 동원했다는 설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쿠푸가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폭정을 휘둘렀다고 주장했다.

         내세에서의 부활을 비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쿠푸가 가신들을 노예로 삼고 딸들을 매음굴로

         보냈으며,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피라미드의 노역자들이 임금을 받고 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늘날에는 피라미드 건설이 나일 강의 범람 기간 동안 실업자가 된 농민들을 부양하기 위한

         이집트 시대의 뉴딜 정책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 11/18 토 AM. 위의 문은 원래 피라미드로 통하는 문이었고,

         아래 문은 도굴을 위해 칼리프 알 마문이 뚫은 문이라고 합니다.


      ▼ 11/18 토 AM. 현재 이용되고 있는 문을 지키는 경찰들입니다. 카메라 반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 11/18 토 AM. 원래 통로로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돌로 막혀 있다가 어느 시점에

         돌이 무너져 내리면서 통로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 11/18 토 AM. 측면으로 바라본 피라미드의 위용입니다.


      ▼ 11/18 토 AM. 사람의 키높이와 비교하면 쌓여진 돌하나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11/18 토 AM. 아빠와 함께온 이집트 애기입니다. 눈이 초롱초롱 이뿝니다.


      ▼ 11/18 토 AM. 모서리에서 바라본 피라미드의 위용입니다. 운무로 맑지 못하지만.....



      ▼ 11/18 토 AM. 피라미드 옆에서 낙타를 태워주고 돈벌이를 하는 이집트인들입니다.


      ▼ 11/18 토 AM. 대피라미드 옆의 왕비와 자녀들의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 옆의 넓게 깔린 돌들은 행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단이라고 합니다.


      ▼ 11/18 토 AM. 태양의 배 박물관 외관 전경입니다.


         (태양의 배?)

         태양의 신 라(La)가 우주를 여행할 때 태양의 배를 이용한다는 전설에 따라 쿠푸왕이 사후

         하늘을 여행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다.

         일본 자본에 의해 발굴된 이배는 14년간의 복원을 거쳐 현재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옆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발굴된 곳의 흔적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11/18 토 AM. 태양이 배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 게시판입니다.

         성인 기준으로 80이집트파운드이면 약 4800원 정도됩니다.

         그기에 카메라티켓 50이집트파운드(3,000원정도), 비디오티켓 300이집트파운드

         (18,000원 정도)가 추가된다고 하니........


      ▼ 11/18 토 AM. 태양의 배를 묻고 덮었던 지붕석들입니다.


      ▼ 11/18 토 AM. 이곳이 태양의 배를 묻었던 곳으로 발굴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 11/18 토 AM. 태양의 배 실물 전경입니다. 카메라 소지를 하지 않아 휴대폰으로.....


      ▼ 11/18 토 AM. 4,500년 전의 목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 11/18 토 AM. 쿠푸왕 피라미드 주변 이동 순로를 게시해 놓앗습니다.


      ▼ 11/18 토 AM. 쿠푸왕 피라미드를 포함 3개의 피라미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왔지만

         운무로 꽝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기자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가 세웠다.

         대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 4번째 왕 카프레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 6번째 왕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높이 66m이다.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고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 11/18 토 AM. 조망좋은곳이라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상품 장사꾼들이 진을치고 있습니다.


      ▼ 11/18 토 AM. 이집트의 대학생들이 졸업기념으로 이곳을 방문했나 봅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 탐방을 마치고 스핑크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 11/18 토 AM. 차창을 통해 찍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입니다.

         마치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지키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이용해 야간 공연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8 토 AM. 신전문을 통해 스핑크스 옆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11/18 토 AM. 측면에서 바라본 스핑크스 전경입니다.


         (기자의 대스핑크스?)

         일반적으로 스핑크스는 카프레가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 이후 한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

         훗날 이집트의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래에 파묻힌 스핑크스

         옆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스핑크스가 투트모세 4세에게 “내 몸을 덮고 있는 모래를

         다 걷어 주면 너를 왕(파라오)으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했다.

         투트모세는 즉시 잠에서 깨어나 모래를 깨끗이 걷어내고 뒷날 왕이 되었다.



         기자의 대 스핑크스는 전체 길이 60미터 높이 20미터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대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쌓아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있던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보통 대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기 때문에 카프레 왕 때인 기원전 25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선 카프레 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제작법이

         다르고 석재의 산지와 공법도 달랐다.

         그리고 최근 스핑크스 주위에 있는 벽에서 큰 홈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지질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홈들은 홍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홍수는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때에나 있었다.

         하지만 빙하기에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만큼의 문명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현재로서는 없다.



         지금, 대 스핑크스의 코는 깨져 있다.

         대 스핑크스뿐 아니라 이집트 안의 석상은 거의 다 코가 없다.

         나폴레옹이 대포를 쏘아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나, 문화재에 심취해 있던

         나폴레옹이 그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슬람교의 우상 숭배 금지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슬람 교도들이 스핑크스의 코를 부수면 스핑크스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스핑크스 코를 상대로 사격 연습을 하였다는

         설도 있다.




      ▼ 11/18 토 AM. 스핑크스는 파라오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형상화하였다고 합니다. 


      ▼ 11/18 토 AM. 신전에서 피라미드로 가는 통로 전경입니다.


      ▼ 11/18 토 AM. 스핑크르 탐방을 마치고 되돌아나가는 통로에 인파들의 행진입니다.


      ▼ 11/18 토 AM. 기자의 대표적인 피라미드 3개가 조망되는 위치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가장 우측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탐방 후 인근 이집트 부페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 11/18 토 PM. 중식후 귀국을 위하여 공항으로 이동로의 전경입니다.


      ▼ 11/18 토 PM. 곳곳에 회교사원의 첨탑이 조망됩니다.


      ▼ 11/18 토 PM. 이동중에 바라본 카이로 시내의 아파트 전경입니다.


      ▼ 11/18 토 PM. 카이로 공항 출국장에 도착합니다.


      ▼ 11/18 토 PM. 카이로에서 아부다비로 이동할 에티하드항공 여객기입니다.


      ▼ 11/18 토 PM. 아부다비에서 환승후 인천공항으로 이동 중에 있습니다.



      11/19일 11시45분에 인천 영종 공항에 도착하여 9박10일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