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교산 + 경남/경남.부산 사 ~ 차

2017.07.01 산청 수양산/백운계곡

redstone5 2017. 7. 3. 17:02

   이번(2017.07.01.토) 산행은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계곡산행으로 이미  많이

   알려져 피서지를 각광을 받고 있는 지리산 언저리의 백운계곡(白雲谿谷)을 찾았습니다.


   당초 일기예보로는 비가 예상되었고, 가뭄속의 반가운 비 예보로 인해  산행 참가자가

   많지않았지만 날씨가 개인다는 일기에보가 나온 뒤에는 참가하겠다는 인원이 늘었습니다.

   산행 중 비온 뒤가 되어서 그런지 높은 습도로 힘든 산행이었고, 수량 풍부한 백운계곡도

   가뭄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는지 깊고 깊던 소(沼)에도 알탕은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의

   수량(水量)이었습니다.


   산행 들머리인 시천면 덕산마을은 조선 유학자의 거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고향으로, 고향 산청의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내기 위해 세웠던 산천재(山天齋)와

   남명 유적관을 둘러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남명 선생의 제자로 정인홍, 곽재우 등 은 북학파를 형성하여 임진왜란시 의병운동을 주도

   하기도 했습니다.


   지리산 천왕봉(天王峰, 1,915m)에서 뻗어나와 동쪽으로 자세를 낮추며 달리던 산줄기는

   경호강 인근 웅석봉(熊石峰)에서 우뚝 솟아난뒤 달뜨기 능선을 따라 시무산과 수양산으로

   흘러가고 그 왼쪽으로 발달된 계곡이 백운계곡입니다.


   백운계곡은 장쾌하게 뻗은 지리산의 달뜨기 능선에서 발원해서 오른쪽은 시무산(40.2.5m),

   수양산(502.3m), 벌목봉(743.0m)을, 왼쪽으로는 백운산을 두고 여러개의 폭포와 담의

   향연을 펼친 뒤 덕천강으로 이어집니다.


   백운계곡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첫째로,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에서 차를 이용하여 바로 들어가는 방법,

   둘째로, 단성면 운리에서 지리산 둘레길을 이용하여 접근하는 방법

   셋째로, 시천면 남명문회관에서 지리산 둘레길을인 마근담을 거쳐 접근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이용했던 단성면 사리마을 회관 앞에서 시무산, 수양산, 벌목봉 등 지리산

   태극종주 일부구간을 지나 지리산 둘레길 8구간(산청군 시천면 덕산마을 ~ 산청군 단성면

   운리마을까지 약 13.9km)을 만나서 백운계곡으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백운동계곡?)

   웅석봉 산자락이 길게 뻗어나와 덕천강으로 계류를 쏟아내는 백운동계곡은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와 백운폭포, 다섯곳의 폭포와 담이 있는 오담폭포,

   물살이 하늘로 오른다는 등천대가 유명하다.


   지리 산록 중에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계곡이 백운동 계곡이다.

   일찍이 남명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남명선생장지소(南冥先生杖之所)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으며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글을 지은 작품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지리 산록에 은거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큰 스승답게 세상의 탐욕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학문에 몰두한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글을

   백운동계곡에서 남긴 것이다.

   백운동계곡의 들머리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이어지는 20번 국도를 따라가다

   하동군 옥종면으로 갈라지는 칠정삼거리를 지나 1㎞여 지점에 있는 백운동계곡이란

   푯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웅석봉에서 내려 운산 자락이 길게 뻗어 나와 덕천강가에 닿으면서 계류를 쏟아 내는데

   이 계곡이 백운동 계곡이다.

   웅석봉은 경호강과 덕천강 가운데 자리해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

   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주며 어천 계곡과 청계 계곡의 물은 경호강으로,

   계림정 계곡과 백운동 계곡의 물은 덕천강으로 흘러 보낸다.

   계곡을 따라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점촌 마을에 들어서면 시원한 계류와 함께 ‘백운동’이란

   글자를 새긴 기암절벽과 ‘용문동천’임을 알리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널찍한 암반이 반긴다.

   그 위로는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知沼)가 있다.

   폭이 26m, 길이가 30m에 달하는데 주변이 모두 바위라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줄을 잇는다.

   또한 높이 4m 여의 백운폭포와 다섯 곳의 폭포와 담(潭)이 있다 하여 이름도 오담폭포인 곳을

   비롯해 ‘영남제일천석’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등천대(登天臺)는 정말 계류의 물보라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거세다.

   이외에도 옳은 소리만을 듣는다는 청의소(聽義沼), 아함소, 장군소, 용소 등의 소(沼)와

   탈속폭포, 용문폭포, 십오담폭포, 칠성폭포, 수왕성폭포 등이 있으며 사림 학파의 거두로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적 자주였던 남명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안빈낙도(安彬樂道)의 풍류를

   되새길 수 있는 계곡이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7.07.01(토)       날씨 : 맑음

   2. 산행시간 : 09:54 ~ 15:23(5시간28분)

   3. 이동, 도상거리 : 8.50km, 8.15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1.55km/h

                     휴식제외 : 2.00km/h

   5. 고도 : 771m ~130m(641m) -최고봉인 벌목봉이 743m이므로 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2.94km, 1.29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5.21km, 2.69km/h

   8. 휴식횟수, 시간 : 2회, 1시간13분

   9. 산행코스

      산청군 단성면 사리마을회관 앞  ~ 시무산 ~ 수양산 ~ 벌목봉 ~ 지리산둘레길 8구간 ~

      백운계곡 상류 ~ 용문사 대형주차장


   ▼ 산행코스 지도입니다.


   ▼ 산행지의 위치를 위성지도에 나타낸 것으로 하늘색 선 좌상부는 백두대간이고,

      아래 분기점에서 좌측은 호남정맥 우측은 낙남정맥 능선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 산행궤적을 확대해서 나타낸 위성지도입니다.


   ▼ 산행궤적을 등고선 지도에 나타낸 궤적입니다.


   ▼ 산행궤적을 해발고도표에 나타낸 그림으로 3개의 산으로 연결되는 궤적입니다.

      수양산 이후 안부에서 벌목봉 오르는 길은 급한 오르막의 경사길입니다.


   ▼ 09:35 부산 서면에서 07시30분에 출발한 버스는 단성인터체인지까지 약 2시간이 걸렸습니다.


   ▼ 09:51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인 산천재에 도착했습니다.


   ▼ 09:51 남명 조식선생이 산천재에서 돌아가셨을 때 선조대왕께서 내렸던 제문을 옮겨

      적은 비석입니다.


   ▼ 09:51 산천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산천재?)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

      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40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의 그 맑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속에 지금도 스며 있는 듯하다.

      산천재의 정원의 끝 강쪽 언덕에는 남명매보다는 뒤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또 산천재의 바깥뜰에는 수형이 아름답고 크게 자란 활엽상록수인 가시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09:51 남명 조식선생 기념관 앞에 도착해서 산행 준비를 한 후 기념관을 둘러보고

      산행을 하기로 합니다.


   ▼ 09:51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09:55(00h00m) 남명 기념관 입구의 출입문인 성성문(惺惺門) 전경입니다.

      성성문은 남명 선생이 늘 차고 다니시던 성성자(惺惺子)에서 이름을 따와 붙였다고 합니다.

      성성자는 '늘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언제나 잠들어버리려는 영혼을 스스로 경계

      하고자 남명은 스스로 깨어 있겠다는 의지로 움직일 때 마다 소리가 나는 방울을 차고

      다녔는데 이를 성성자라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 09:55(00h00m) 남명 조식 선생을 위한 기념관 전경입니다.


      (남명 조식 기념관?)

      남명 기념관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남명 조식(, 1501~1572) 선생의

      기념관이다.

      2001년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계기로 추진되어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외부 공간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 선생의 석상,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인 여재실 등이 있다.

      시천면에는 기념관 외에도 산천재를 비롯한 남명 조식의 유적지가 있다.

      제1 전시실은 조식 선생이 실천하는 학문으로 전환하는 데 계기가 된 서적들과

      <경의검()>, <성성자()> 등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진열돼 있다.

      제 2전시실은 남명의 제자를 주제로 제자들의 유물과 미니어처,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제 3전시실은 남명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공간으로 사숙() 및 문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남명 기념관 [南冥記念館]


   ▼ 09:56(00h01m) 기념관 본 건물 전경입니다.


   ▼ 09:56(00h01m) 남명 조식 선생 동상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은?)

      본관 창녕(). 자 건중(,). 호 남명(). 시호 문정(). 김우옹() ·

      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지금의 합천) 토골[]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 ·성운()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으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부당()과 뇌룡정()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

      () 문정왕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에 이어 정인홍() ·하항() ·김우옹 ·최영경() ·

      정구()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

      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을 제수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뒤에 )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

      ()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 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과

      아울러 의()를 강조하였다.

      즉 경의협지()를 표방하여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기대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 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09:56(00h01m) 남명 선생이 선조대왕에게 올린 무진봉사 원문을 한글로 새겨놓았습니다.


      (무진 봉사 내용중 일부)

      (전략)

      경상도 진주에 사는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주상전하께 상소하나이다.

      신이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아 임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겠기에

      감히 속마음을 다 쏟아 임금님께 아룁니다.(중략)


      인간의 일은 내버려 두시고 하늘의 이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입에 발린 이치일 뿐입니다.

      자신은 스스로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서 주위에서  들어 아는 것이 많은 것은

      귀 언저리의 학문에 지나지 않습니다.(중략)


      임금님 자신스스로가 수양되어 있지 않으면, 

      임금님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이 생길 수 없습니다.

      눈이 없으면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알 수가 없어

      사람을 쓰고 버리는 일을 잘못하게 됩니다.

      인재를 임금이 알아서 쓰지 못한다면,

      임금은 누구와 함께 정치를 이룰수 있겠습니까?(중략)


   ▼ 09:56 무진봉사의 연결부분입니다.


   ▼ 09:56 무진봉사 마지막 내용입니다.

      선조실록에서 옮겨온 내용이라는 마지막 비문 내용입니다.


   ▼ 09:59(00h04m) 남명 기념관 입구에는 남명 선생의 학문의 상징인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붙여져 있습니다.


      (신명사도(神明舍圖)?)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舍)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

      선생이 마음의 안과 밖을 잘 다스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치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신명사도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성곽으로 드러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경(敬)으로 설명하고 의(義)로써 실천하라 일러준다.


   ▼ 10:10(00h05m) 기념관 내에서 설치되어 있는 남명의 학맥도입니다.


      (남명학파의 학문?)

      1567년 5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하였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황기대승 등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와 기에 대한 이기 논쟁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1623년 인조반정1624년이괄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 중 김우옹한강 정구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후기까지 계승되었다.

      명종말엽에 이량 세력과 윤원형이 몰락했음에도 출사를 거부했고, 이기의 일파도 몰락했으며,

      선조 즉위 후에는 심통원 세력까지 제거되었지만 그는 조정에 출사하기를 거부하였다.

      선조 즉위 후 이황의 문도들과 이이의 추종세력 간의 이와 기 논쟁이 다시 벌어지자

      그는 이 모두 공리공담이라 비판하며, 실천과 궁행에 힘쓸 것을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들 중에는 이황의 문도, 이이의 문도들과 갈등하기도 했다.


   ▼ 10:01(00h06m) 남명 조식 선생의 묘갈명 및 신도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은?)

      묘갈명(墓碣銘)

      남명 선생의 묘소는 산천재 뒷산 임좌(壬坐)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손수 자리 잡은

      곳이다.

      묘갈명은 친구인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짓고, 글씨는 선생의 제자인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이 썼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비가 마모되자 다시 세웠는데, 현재의

      비는 1956년에 세운 것으로 글씨는 권창현(權昌鉉)이 썼다.


      신도비(神道碑)

      광해군 7년(1615년)에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남명 선생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자

      처음에는 문인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세웠으나

      인조반정으로 없애버렸다. 그 뒤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 미수(眉搜) 허목

      (許穆. 1595~1682)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다시 지었는데 현재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 10:01 남명 조식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입니다.


   ▼ 10:08(00h13m) 남명 조식 선생의 기념관을 탐방하고 본격적인 산행전 준비운동입니다.


   ▼ 10:10(00h15m) 지리산 둘레길 8구간의 덕산 출발점에서 이동을 시작합니다.


   ▼ 지리산 둘레길 개요도 입니다. 8코스는 우측 중간의 운리~덕산코스를 말합니다.


   ▼ 지리산 둘레길 8코스 13.9km의 상세지도입니다.

      우리가 산행으로 진행했던 루트는 산청군 글씨아래 운리~덕산이란 글씨의 짙은부분의

      코스를 따라 백운계곡으로 이동했습니다.


   ▼ 10:13(00h18m) 이동중 마을 벽에 새겨진 남명선생이 삼족당에게 보낸 내용입니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김극일(金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김준손(金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 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

      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가 있다.


   ▼ 10:15(00h20m) 지리산둘레길 8구간 입구 마근담 방향을 지나쳐 들머리로 향해 이동합니다.


   ▼ 10:15(00h20m) 덕산교를 지나갑니다.


   ▼ 10:16(00h21m) 들머리는 산청군 단성면 사리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합니다.


   ▼ 10:17(00h22m) 사리마을회관 앞에서 좌측으로 산길로 접어듭니다.


   ▼ 10:17(00h22m) 들머리 입구에는 약간의 콘크리트포장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10:18(00h23m) 들머리부근의 '개망초꽃'입니다.


   ▼ 10:19(00h24m) 개암나무에 '개암열매'가 달려있습니다. 


   ▼ 10:20(00h25m) '때죽나무'열매입니다.

      독성이 강해 찧어서 냇가에 풀어놓아 민물고기를 잡곤했습니다.


   ▼ 10:20(00h25m) '미국자리공'입니다.


   ▼ 10:24(00h29m) 초입에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 10:27(00h32m) 오르막이 지속 이어집니다.


   ▼ 10:32(00h37m) 잘 알려지지 않은 산임에도 많은 산꾼들이 다녀 갔나봅니다.


  ▼ 10:38(00h43m) 적송으로 이루어진 삼림이 울창합니다.


   ▼ 10:47(00h52m) '비비추'입니다.

      비비추는 원래 '비비취'라고 불리던 것이 '비비추'가 되었다고 한다.

      잎이 마치 비비듯이 쭈글쭈글하고 뒤틀려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혹은 독성이 있어 식용할 때는 많이 비벼서 씻은 후 먹는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 10:49(00h54m) '노루발꽃'의 결실입니다.

      우리나라 산지 숲속에 흔한 여러해살이 풀 가운데, 겨울 숲 바닥에서 잎을 푸르게 유지하는

      종이다. 한자명 녹제초(鹿蹄草)는 사슴발굽 출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는 사슴 대신에 노루가 흔해서인지 노루발풀로 바꿔 부르고 있다.

      노루발풀은 땅 속 근권의 다양한 토양 곰팡이들 도움으로 살아가는 일종의 부생식물이기

      때문에 공기(산소)와 쉽게 접하는 지표면 가까이에 많이 분포한다.


   ▼ 11:00(01h05m) 산행 시작 한 시간만에 삼각점이 있는 시무산에 도착합니다.


   ▼ 11:00(01h05m) 삼각점의 설명입니다.


   ▼ 11:00(01h05m) 시무산 정상입니다. 정상석은 없고 정상표시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00(01h05m) 시무산 정상에 있는 돌무더기인데 용도는?????


   ▼ 11:12(01h17m) 시무산 정상에서 수양산 방향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어집니다.


   ▼ 11:32(01h37m) '노각나무'입니다.

      나무의 수피가 마치 사슴뿔처럼 보드랍고 황금 빛을 띤다고 해서 '녹각(鹿角)나무'라고

      부르다가 '노각나무'로 변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줄기는 수피가 벗겨지면서 회갈색과 황갈색이 얼룩무늬처럼 보여지며 전체 수피는

      매끈하다고 합니다.


   ▼ 11:36(01h41m) 앞쪽으로 수양산을 지나 이어지는 벌목봉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 11:43(01h48m) 잘 빠진 참나무 한 그루입니다.


   ▼ 11:47(01h52m) 수양산 직전에 폐묘지가 있는 약간의 넓은 공터를 만납니다.


   ▼ 11:47(01h52m) 수양산 정상에 있는 삼각점 표식입니다.


   ▼ 11:47(01h52m) 삼각점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50(01h55m) 지리산 태극종주코스의 한 구간인 수양산 정상입니다.

      지리산 태극종주코스는 덕산 사리마을을 기점으로 ~ 시무산 ~ 수양산 ~ 벌목봉 ~ 926봉

      ~ 웅석봉 ~ 밤머리재 ~ 왕등재 ~ 왕등습지 ~ 하봉 ~ 천왕봉 ~ 장터모 산장 ~ 촛대봉 ~

      선비샘 ~ 벽소령산장 ~ 형제봉 ~ 연하천산장 ~ 삼도봉 ~ 임걸령샘터 ~ 노고단 ~ 성삼재

      ~ 고리봉 ~ 만복대 ~ 세걸산 ~ 바래봉 ~ 덕두봉 ~ 인월마을까지 약90km(실거리 100km)

      에 달하는 웅장한 코스로 덕두산에서 웅석봉까지 이어지는 마루금이 태극모양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리산 태극 종주 개념도입니다.



   ▼ 11:50(01h55m) 수양산 정상 전경입니다.


   ▼ 11:50(01h55m) 수양산 정상에서 벌목봉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1:56(02h01m) 이동중 보이는 벌목봉 전경입니다.

      이곳에서 약 40분간의 점심식사 시간을 갖고 벌목봉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2:36(02h41m) 중식후 벌목봉 오르막 직전 안부 전경입니다.

      이곳은 고사리 재배지인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고사리가 지천입니다.


   ▼ 12:42(02h47m) 안부를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이 벌목봉 정상까지 이어집니다.

      약 300m정도의 오르막을 치고 올라야 합니다.


   ▼ 13:18(03h23m) '칼퀴잎'꽃입니다.


   ▼ 13:22(03h27m) '우산나물꽃'입니다.

      숲 속의 그늘진 곳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꽃은 7 ~ 8월에 피며, 열매는 8 ~9월에 익는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 13:29(03h34m) 벌목봉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식사후 안부로부터 심한 오르막의 연속으로 기진맥진했습니다.


   ▼ 13:29(03h34m) 정상 바로 옆에 폐헬기장이 있습니다.


   ▼ 13:37(03h42m) '승마꽃'입니다.


   ▼ 13:38(03h43m) '우산나물꽃'입니다.


   ▼ 13:39(03h44m) '가막살나무'의 꽃이 피고난 뒤의 전경입니다.


   ▼ 13:40(03h45m) '은방울꽃' 군락을 지나갑니다.


   ▼ 13:43(03h48m) '승마'입니다.


   ▼ 13:56(04h01m) 벌목봉을 지나 지리산 둘레길 마근담에서 운리로 가는 사거리를 만납니다.

      진행 방향에서 ← 덕산(마근담)방향, ↑ 웅석봉 방향, →운리(백운계곡)방향입니다.


   ▼ 13:56(04h01m) 지리산 둘레길 표식입니다.

      좌측으로는 마근담방향, 우측으로는 운리방향입니다.


   ▼ 13:58(04h03m) '석잠풀'입니다.


   ▼ 13:58(04h03m) '까치수염'입니다.


   ▼ 14:03(04h08m) '꿀풀'입니다.


   ▼ 14:05(04h10m) 사거리에서 운리방향으로 10분 정도 이동후 만나는 지리산 둘레길

      이정목입니다. 이곳에서 백운계곡과 운리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 14:05(04h10m) 삼거리 이정표입니다.

     진행방향(마근담)에서 ↑하면 지리산 둘레길 8코스인 운리방향이고, → 백운계곡 방향입니다.


   ▼ 14:05(04h10m) 삼거리에 세워져있는 목장승들입니다.


   ▼ 14:10(04h15m) 계곡을 따라가면서 곳곳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그렇지만 가뭄으로 수량이 평소보다 풍부하지 못합니다.


   ▼ 14:23(04h28m) 많은 산꾼들이 다녀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14:26(04h31m) 백우동계곡에서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느껴봅니다.


   ▼ 14:27(04h32m) 남명선생장구지소가 있는 곳입니다.


   ▼ 14:32(04h37m) 이곳에서 무더운 여름날을 벗어나봅니다.


   ▼ 15:12(05h17m) 곳곳에 폭포들과 담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 15:12(05h17m) 이곳은 큰폭포와 담이 어우러진 곳입니다.


   ▼ 15:13(05h18m) 폭우시 위험구역에 대한 안내입니다.


   ▼ 15:13(05h18m) 곳곳에 위험 표식판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5:13(05h18m)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곳으로 화장실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 15:13(05h18m) 아직 피서철로는 이른철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 15:16(05h21m) 계곡에는 작은 폭포들과 담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 15:16(05h21m) 계곡 막바지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 15:17(05h22m) 이곳에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