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행 & 여행/해외여행

2016.05.19 ~ 05.30 실크로드 11박12일 일정(5/26일,8일째, 막고굴, 명사산, 월아천)

redstone5 2016. 6. 15. 18:20


   실크로드 탐방 8일째를 맞는 날입니다.

   오늘은 돈황의 태양호텔을 시작으로 중국 3대 석굴의 하나로 돈황 불교 예술의

   절정체인 막고굴(莫高窟)(유네스코 문화유산) 탐방과 바람이 불면 우는 소리를 낸다는

   모레산인 명사산(鳴沙山)에서 낙타타기를 체험하고 명사산의 오아시스인 월아천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후 유원역으로 이동하여 야간 침대 열차를 타고 선선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09:18 숙소인 돈황 태양호텔에서 약 30분간 이동후 돈황 막고굴의 홍보관에 도착합니다.     


   ▼ 09:22  막고굴 홍보관에 게시되어 있는 세계문화유산 막고굴에 대한 설명입니다.


      (돈황 막고굴 개략)

      여러 차례 역사적 사건을 겪은 돈황은 청대에 이르러 시가지가 새로 조성되었는데,

      현재 볼 수 있는 시가지의 모습은 청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돈황()시는 한대의 돈황군과 정확히 같은 장소는 아닌 듯하다.

      사막에 형성된 마을은 시대에 따라 자주 옮겨 다녔는데, 전란이나 재해로 마을이

      황폐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대의 돈황은 주변 어딘가의 모래에 묻혀있을지도 모른다.

      돈황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돈황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막고굴() 때문이다.

      돈황은 하서(西) 회랑지대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숙성 제일 서쪽에

      있는 현급()의 시이다.

      돈황은 또한 동쪽으로는 안서현(西)에 다다르고 서쪽으로는 낙강현()에

      닿아 있다.

      또한 남쪽으로는 숙북() 몽고족() 자치현(), 아흐새()

      하사흐족() 자치현과 이웃해 있으며, 북으로는 신강 하미()시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직선거리로 본다면 돈황은 북경에서 2천 ㎞, 서안에서 1,300여 ㎞ 떨어져 있으며,

      동경 92.30°~95.30°, 북위 39.35°~41.35° 사이에 위치해 있고, 동서의 길이가

      60~240㎞이며 남북의 폭은 90~190㎞이다.

      서남풍과 동북풍이 많이 불고, 기온은 7월에서 8월에 최고 44.1℃ 정도를 기록하며

      12월에서 1월 사이에는 최저 ‒24℃까지 내려간다.

      또 풍사()현상이 심하여 서남풍이 불 때면 지척의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이다.

      돈황의 북쪽으로는 소륵하(), 남으로는 당하()가 흐르며, 그 부근에는

      기련()산맥이 있고 남쪽으로 삼위산(), 그 서남쪽으로 명사산()이

      있다.

      돈황의 총면적은 31,200k㎡로서 성의 총면적의 7%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숙북현과 아흐새 두 현보다 조금 작다. 평방킬로미터 당 평균 3.39인이 살고 있고,

      한 사람 당 토지를 평균 443무씩 차지하여, 감숙성에서는 면적이 넓고 인가가

      드문 지역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돈황의 면적은 매우 크지만 오아시스 면적은 단 211만 무로 총면적의 100분의

      4.48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사막과 산지이다.

      그래서 돈황을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천()에서 감신공로를 타고 차를 달리면 양쪽으로 황량한 고비사막이 보이다가

      이윽고 녹음이 펼쳐진 오아시스 마을 안서(西)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돈황으로 가는 안돈공로로 들어선 후 110㎞ 정도 더 가면

      돈황 시내에 도착한다.

      막고굴은 돈황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으로, 버스로는 약 30분 거리에

      있으며, 위산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숲 속에 있다.

      굴 주변으로 가느다란 시냇물이 흐르며 주변은 온통 황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막고굴로 바로 가려면 돈황 시내까지 갈 필요가 없는 지름길이 있다.

      이 지름길에 들어서면 앞쪽으로 명사산이 보이는데, 명사산과 삼위산 사이의 계곡

      서쪽에 길이가 1㎞에 달하는 절벽의 남북으로 1.8㎞에 걸쳐 엄청난 석굴사원이 있다.

      돈황 석굴은 막고굴을 중심으로 한 옛 돈황군 관내의 모든 석굴을 말하는데, 막고굴,

      유림굴, 서천불동, 동천불동과 다섯 개의 묘석굴() 등 총 550여 개의 동굴과

      약 5만㎡의 벽화가 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석굴 중 막고굴의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가장 풍부하다.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석굴 사원은 전진() 건원() 2년(366)에 낙준()

      법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해지던 무렵으로 지금부터 약 1,600여 년 전이다.

      그로부터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이곳에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석공, 도공,

      목공, 시주들이 드나들면서 하나둘씩 굴을 팠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굴은

      약 천 개가량 된다.

      막고굴의 백미인 석굴이 대부분 당나라 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가장 풍성했던

      당나라 때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막고굴이란 이름의 유래인 '막고리'는 당대 사주 13향의 하나로 '막고향'에서 관할하던

      하나의 마을 이름이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돈황 시내에서 동남쪽인 막고굴로 가는 길의 7~8㎞쯤에

      불야묘()가 있는데, 묘 동쪽은 사막이었다고 한다.

      그 사막의 지세가 불야묘보다 훨씬 높고 사막 위에 황폐해진 무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막고리의 벌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은둔하던 처사들이 막고산에서 팠던 굴이 아마도 지금의 막고굴일 것이다.

      이미 돈황에 막고향과 막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벌판과 산도 막고원, 막고산으로 불

      렀을 것이며, 이곳에 팠던 석굴도 '막고굴'이라고 부른 것이다.

      따라서 '막고'는 오아시스보다 지세가 높은 고비사막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막고굴이 명사산의 깎아지른 절벽에 만들어졌으며,

      명사산은 주위보다 지세가 높은데, 사막의 '막()'자와 막고굴의 '막()'자는 고어에서는

      통용될 수 있다며 사막의 높은 곳에 판 동굴이기 때문에 막고굴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

      또 혹자는 처음 굴을 판 낙준() 법사의 도가 뛰어나 그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가 판 석굴을 막고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혹은 '막고'는 돌궐어에서 사막이란 뜻을 가진 말을 음역한 것으로, 막고굴은 바로 사막에

      판 동굴을 지칭한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굴 사원은 크고 작은 것을 전부 합해 492개인데,   

      이것을 모두 막고굴이라고 부른다.

      이곳 사람들은 막고굴을 보통 천불동()이라고 부르는데, 전진 건원 2년(366)에

      창건된 동굴식 법당이 당대에 이미 천여 개에 달하여 천불동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 '천불동'이란 이름도 사실은 정확하지 않다.

      '천불동'은 불상이 새겨진 절벽동굴의 통칭으로서 산서성 대동의 운강(),

      하남성 낙양의 용문(), 감숙성 천수의 맥적산(), 신강의 투루판, 선선()

      등에도 모두 '천불동'이란 명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직 돈황 한 곳에만 있는 것은 서천불동과 동천불동 등이다.

      그러나 스타인이 돈황에서 약탈해간 예술품을 책으로 펴낼 때, 그 책이름을 『천불동』

      이라고 한 후부터 '천불동'이란 이름은 막고굴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막고굴은 천여 년 동안 자연과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왔지만, 지금까지도 16국에서

      원대까지의 석굴 492개와 45,000㎡의 벽화, 채색 소조 2,300여 개, 당송 동굴

      목조건축 5곳이 남아있어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불교예술의 보고이다.

      1987년에 유네스코는 이곳을 진귀한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 09:22  막고굴의 홍보관에 돈황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입니다.

      막고굴 홍보관에서 2편의 영상 소개를 본 뒤에 막고굴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 10:24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막고굴 내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합니다.

      차창 양쪽으로 고비사막이 펼쳐집니다.


   ▼ 10:33 홍보관으로부터 약 10분간의 이동후 막고굴의 실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 10:35  막고굴 위쪽에 서있는 허물어진 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 10:35  막고굴 앞에는 건천(마른하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홍보관에서 약 10분을 셔틀버스로 이동해서 도착합니다.


   ▼ 10:37  막고굴 맞은 편 모래 언덕에는 여러종류의 탑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 10:39  막고굴 남구에서 북구까지의 개황도를 그려 놓았습니다.

      좌측이 남구이고 우측이 북구로 좌측 가운데가 높은 모양이 막고굴의 대표적인 남대불 입구입니다.


   ▼ 10:39  막고굴 앞쪽으로 은수원사시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습니다.


   ▼ 10:40  막고굴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 글입니다.


      (둔황의 성장과정)

      둔황은 실크로드로 가는 관문으로 당나라 때까지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던 오아시스 도시였다.

      당시 번영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세계 최대 석굴사원 막고굴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 해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실크로드가 문명의 교역 창구로서

      역할이 약화되고 둔황의 석굴사원도 점차 퇴색되었다. 

      막고굴은 둔황 시가지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명사산 기슭에 있다.

      산 비탈에 암벽에 벌집처럼 1000여 개의 석굴이 뚫려 있는데,

      이 때문에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막고굴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불교가 둔황에서 꽃피운 결과물로,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승려·화가·석공·도공들이 드나들며 쌓아간 종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석굴사원 가운데 발굴된 것은 492개인데 용도에 따라 예배굴과 참선굴로 나뉜다.

      예배굴은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견줘 승려가 거처하면서 참선하는 참선굴은 감실과 측실이 딸려 있다.

      어떤 석굴이든 벽면은 모두 채색 벽화로 덮여 있으며, 채색된 조각상이 놓여 있다.

      벽화는 건식 프레스코 화법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석가 일대기나 극락과 해탈을 열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벽화를 한 줄로 전시 한다면 그길이가 54Km 에 이른다고 한다.

      총 2400여 구가 발견된 채색 조각상은 불상·보살상·제자상 등으로 과장된

      색채가 특징이다.

      둔황 석굴사원에서 석굴의 조각 외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둔황 문헌’이다.

      1900년 제17호 굴에서 경전·문서·자수 등이 5만 점 이상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방대하여 이를 연구하는 ‘둔황학’이 탄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발견자 왕원록이 외국 조사대에게 헐값에 팔아 넘겨서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6천여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고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도 둔황에서 발견되어 프랑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둔황 막고굴 [Mogao Caves, 敦煌 莫高窟]


   ▼ 10:52  중국 3대 석굴 중 막고굴 입구입니다.

      중국의 3대 석굴이라면 돈황의 막고굴, 낙양의 용문석굴, 산시성의 운강석굴을

      말합니다.

     

      (중국 3대 석굴)

      천 년의 세월, 천개의 동굴 - 돈황 석굴
      간쑤성에 위치한 도시 돈황이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지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명실상부의 실크로드 요지답게 돈황에서 핀 중국 고대 불교 문화의 화려함은

      그 어떤 고대 문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문화가 융합되어 돈황은 당대 7, 8세기

      중엽에 걸쳐 돈황 예술을 만들어 낸다.

      그 화려한 돈황 예술 중에서도 돈황 막석굴이 유난히 돋보이는데 약 1천여 개의

     석굴이 있다 하여 천불동으로도 불린다.

      현재 그 중 492개만이 발굴되어 공개되고 있다.

      돈황 석굴은 발굴과정에서 제17호 굴에서 경전, 문서, 자수 등 5만점 이상의

      문헌이 발견 되었는게 특징이다.

      그 내용이 방대하여 이를 연구하는‘돈황학’이 탄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방대한 돈황 문헌이 발견 당시 헐값에 팔리거나 약탈 당해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것은 6천 여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라시대의 혜초 스님이 쓴 당나라-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책이 현재 프랑스 박물관에 있게 된 사연은 이 때문이다.

      막고굴의 위치 또한 명품인데 막고굴이 위치한 명사산은 바람에 모래가 흘러내릴 때마다

      나는 소리 때문에 '모래가 운다'는 '명사'라는 이름이 붙은 산으로 일출과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명사산 아래 있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인 월아천(月牙泉)은

      천년이 넘게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물로 알려 져있다.

      돈황석굴은 198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및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불연(佛缘)의 땅 고도 낙양의 불교예술 - 용문석굴
      중국 하남성 낙양의 용문산과 향산의 암벽을 따라 조성된 용문석굴은 북위北魏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태화 18년(太和, 494)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도 당나라,

      송나라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조성되어왔다.

      석굴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나뉘어 자리하고 있다.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명문, 40여 개의 탑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이 중국식 복식을 한 상현좌가 발달했다.

      상현좌는 불상의 옷자락이 표면 및 좌우편으로 길게 늘여 뜨려 진 형식을 말한다.

      10만 점이 넘는 불상 중 봉선사[奉先寺]의 대형 비로자나불은 폭 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의 전체높이가 17.4m에 이르며, 귀 길이만도 1.9m나 된다.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인데,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자신의 자비로운 모습을 남기기 위해 모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용문석굴의 불상은 머리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불상의 머리가 복을 가져온다고 전해져 많은 불상의 머리들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문석굴은 2000년 11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교미술의 정수라 불린다.


      중국 최대 석굴 사원 – 운강석굴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대동의 운강석굴이 처음 사료에 언급 된 것은 북위(北魏)의

      역사서 《위서(魏書)》의 《석로지(釋老志)이다.

      이에 따르면, 사문통(沙門統:종교장관) 담요(曇曜)가 당시 문성제(文成帝)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446년 북위 태무제가 폐불 한 뒤 6년 만의 일이다.

      당시 대동은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의 도시로 각광

      받으며 인도, 서역제국, 중국 동북부 동이족의 문화와 불교예술의 집결지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운강 석굴은 자연의 사암 절벽을 개착해 만들었다.

      동서로 약 1km, 현존하는 주요 석굴만 53개이며 조형은 5만여 개나 되어 중국 최대

      규모의 석굴 사원이라 불린다.

      또한 웅대하고 큰 불상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 보통 불상이 13미터 이상이고,

      가장 큰 불상은 제5굴 중앙의 좌불로 최대 17미터에 이른다.

      반면에 가장 작은 불상은 10센티미터도 안 된다.

      또한 운강 석굴은 특이하게도 채색 불상을 볼 수 가 있다.

       3대 석굴 가운데서도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이 석굴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10:58  막고굴 입장권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막고굴 주위는 황량한 모래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11:03  석굴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입구 번호만 한 장 찍었습니다.

      촬영시 카메라 후레쉬 불빛으로 인해 석굴내 벽화의 오손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것은 아니지만 세계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취지에서 규칙을 따라야 하겠지요.


   ▼ 11:08  1961년에 중국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기념석입니다.


   ▼ 11:09 막고굴의 이름을 가져온 최대불상이 있는 남구쪽 남대불 전경입니다.


   ▼ 11:11  막고굴 130굴의 사진입니다.

      석굴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전시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막고굴 역내에서 가장 큰 대불로 남대불이라고 하고 당나라시대 705년 ~ 781년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높이 26m의대불입니다.


   ▼ 11:12  148번 굴은 와불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열반경변상도라고 부처님의 열반 때를 표현한 모습이라 합니다.

      역시 전시된 사진을 찍었습니다.


   ▼ 11:12  둔황 벽화의 탈색 과정을  100년 전과 대비해서 게시해 두었습니다.

      채색부분이 많이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11:20  측면에서 바라본 막고굴 남대불 전경입니다.


   ▼ 11:34  이 석굴에는 처마가 달려 있고, 천정에 벽화가 그려져 있지만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습니다.


   ▼ 11:34  고문서 등  5만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17호굴 전경입니다.

      이 곳에서 신라의 혜초스님이 기록한 '왕오천축국전'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왕오천축국전 개략)

      필사본. 1권 1책.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704∼787)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뒤

      727년(성덕왕 26)에 쓴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의

      둔황[]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하였으며 중국의 나진옥()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때는 벌써 불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소승()이 구행()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

      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하는 독신자()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은 없고 벌전()만 있는 법률, 장()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 12:07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대한 설명글입니다.


   ▼ 12:14 티벳인의 생활상에 대해 기록해 놓은 박물관내 게시물입니다. 


   ▼ 12:14 둔황석굴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해둔 박물관내 게시물입니다.


   ▼ 12:14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분황 석굴을 훼손하거나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12:14  석굴내 불상을 만드는 과정을 박물관에 전시해 두었습니다.


   ▼ 12:14 둔황석굴의 벽화 채색을 위한 천연 염료를 만든 재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12:23  막고굴 남쪽구역의 상세 개황도입니다.


   ▼ 12:23  막고굴 북쪽구역의 상세 개황도입니다.


   ▼ 12:24  둔황석굴의 벽화에 채색했던 염료를 들여왔던 곳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 12:35  둔황 석굴을 뒤로하고 명사산으로 이동합니다.

      명사산 도착 직전에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 후에 명사산으로 가도록 합니다.


   ▼ 14:15  약 1시간 이상의 식사시간을 마치고 명사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 14:16  명사산 입구에 있는 명사산이 품고 있는 월아천 표지석입니다.


      (명사산 개략)

      밍사산(, 명사산)은 간쑤성(, 감숙성) 주취안시(, 주천시)

      현급 둔황시(, 돈황시)의 성 남쪽 5㎞ 지점, 바단지린(, 파단길림)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과도지대에 위치한 거대한 용()과 같은

      모양으로 유사()가 퇴적되어 이루어진 산으로 둔황(, 돈황), 사분두(),

      향사만() 및 파리곤()의 중국내 4대 밍사산(, 명사산)의 하나이다.

      이 산은 동쪽의
막고굴()에서 시작하여 서쪽은 수이포산(, 수불산)

      아래의 당하() 저수지까지 총 40여 ㎞이며 남북으로는 약 20여 ㎞, 최고 높이는

      1,715m이다.

      산봉우리가 빽빽하고 기복이 심하며 마치 칼로 자른 듯 가파르며 경관이 특이하고

      아름다워 둔황팔경()의 하나이다.

      사주도독부도경()에 따르면 이 산은 이동성이 커서 산봉우리도 변하며

      때로는 깊은 골짜기가 언덕으로 바뀌고 높은 절벽이 골짜기로 변하고 저녁에 없던 것이

      아침이 되면 하늘 높이 솟아나 있기도 한다.

      산 중앙에 있는 연못은 모래에 파묻히지 않으며 사람과 말이 밟으면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난다고 기재되어 있다.

      산 북쪽 기슭에 있는 웨야취안(, 월아천)은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달

      모양 같이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No. 1-35)로 지정된 막고굴()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밍사산 [鸣沙山, Mount Míngshā]


      (월아천 개략)

      월아천()은 명사산 안에 있는 초생달 모양의 작은 못으로,

      남북의 길이가 약 200m, 폭이 50m 정도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수심이 깊은데, 제일 깊은 곳은 5m 정도이며 물색이 맑아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아침에는 햇살을 받아 붉은빛, 낮에는 하늘빛을 받아 에메랄드빛, 그리고 저녁에는

      명사산의 모래빛을 받아 잿빛으로 변한다고 한다.

      월아천의 물은 돈황 남쪽에 솟아있는 곤륜산맥의 눈이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매년 광풍이 불어도 이곳만큼은 좀처럼 모래에 덮이지 않아 기이하게 여겨졌으며,

      예로부터 이곳에 살았던 칠성초와 같은 생물이 평생 늙지 않아 '만천()'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신선이 산다고 하여 도교사원을 지었고, 단오날이면 근처의 사람들이

      몰려와 액을 막고 장수를 비는 의미로 명사산 정상에서부터 월아천까지 모래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명사산·월아천


   ▼ 14:18 명사산 월아천에 들어가는 입장권입니다.


   ▼ 14:18 명사산 전체 관람을 위한 조감도입니다.


   ▼ 14:21  우측 정상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월아천의 전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습니다.


   ▼ 14:28  이 문을 통해 명사산 월아천으로 들어갑니다.


   ▼ 14:28  출입문을 들어서자 마자 만나는 명사산의 아름다움입니다.


   ▼ 14:30  명사산 산명석입니다.


   ▼ 14:31  출입문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보고 찍은 전경입니다.


   ▼ 14:32  명사산 낙타타기 체험 전경을 카메라에 담아봤습니다.



   ▼ 14:36  명사산 모레 썰매장 전경입니다.


   ▼ 14:37  비행기가 내뿜은 연기가 마치 모레산 정상과 연결된 것 같이.....


   ▼ 14:40  월아천 전경입니다.

      모래산 가운데 호수라......  정말 보기에도 신기해 보입니다. 



   ▼ 14:44  월아천 바로 앞에 '제일천'이라는 돌비석이 서 있습니다.


    ▼ 14:44  도교 사당 앞에 설치되어 있는 월아천이라는 입간판입니다. 


   ▼ 14:44  월아천의 오아시스 호수 전경입니다.


   ▼ 14:46  월어천의 유래에 대한 설명입니다.



   ▼ 14:47  월아천에 있는 도교사원 전경입니다.


      (도교란?)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장자()를 

      중심으로 한 도가()사상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시대에 패국()의 풍읍()에서 태어난 장도릉()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 ·홍콩[]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를 배우고

      금단법()을 터득한 뒤 곡명산()에 들어가 도서()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 또는 미적()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과 손자 노()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과 갈홍()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가 전래 종교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 또는

      옥황상제()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 ·무시천존() ·

      범형천존()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도 원시천존의 화신()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 ·문창제군() ·후토() ·서낭신[

      ·조군(: 중의 한 ) ·화합신() ·삼관() ·재신() ·개격신()

      ·동악대제(:) 등 수많은 신들을 제사지낸다.

      한편 도교의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부적) ·옥결(:) ·영도(:) ·보록(:

      의 연혁) ·계율(:의 율법) ·위의(: 등의 의식) ·방법(:귀신을

      쫓는 ) ·중술( ·) ·기전(: 등의 전기) ·찬송(:) ·

      표주(:귀신에게 하는 ) 등으로 이루어졌다

      금주()나 부록() 등 방술을 행하는 것도 이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특정한 날과 시간에 목욕재계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지, 명경()이나 호부()를

     차고 다니면 요괴()를 피할 수 있다는 따위가 방술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 태식법()으로 충화기()를 받아들여 장생하는 수련인

      내단(), ② 황금 ·수은과 약물들을 복용하거나 몸에 주입하는 외단(),

      ③ 음기()를 취해서 양기()를 충만하게 하는 방중술() 등이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수련 결과, 상자()는 허공에 올라가 우주에 소요하는 천선()이

      되고, 중자()는 36동천()과 72복지()에서 사는 지선()이 되며,

     하자()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와 같은 연단술()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 ·무속() ·산악()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 장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

      ·선풍()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

      생() 보진()을 도모하는 사람이있어 단학()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 ·영성() ·산신(), 그리고 무속()과

      더불어 도참()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을 희구하는 양재기복()의 기축()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를 바라는 재초(: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1105~1130)은 복원궁()이라는 도관(:

      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위 2년에 연경궁() 후원에 있는

      옥청정()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을 모시고 달마다 초

      제()를 지냈고 청연각()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이라는 도교습속()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1506~

      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 ·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 용호비결() 등의 도서()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 ·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교 [道敎] (두산백과)


   ▼ 14:47 오아시스 주위에는 풍부한 수량으로 수목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 14:47  월아천 도교사당 내에서 바라본 고건축물입니다.


   ▼ 14:52  명사산 월아천 전체에 대한 개략도입니다. 


   ▼ 14:52  명사산 월아천에 대한 설명 내용입니다.


   ▼ 14:52  명사산 월아천의 도교사원에 대한 각건물에 대한 명칭을 적어둔 분포도입니다.


   ▼ 14:53  월아천 도교 사원에서 바라본 호수 전경입니다.


   ▼ 14:59  명사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입니다.

      모래산 가파름으로 올라가기가 힘들어 줄과 나무로된 사다리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 15:00  오르는 사다리 옆으로 모레썰매장이 있어 월아천을 찾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합니다.


   ▼ 15:04  명사산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월아천 전경입니다.

      오아시스라는 게 정말 신기하게 형성되나 봅니다.


   ▼ 15:05  월아천 옆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주차장 및 녹지 휴게시설입니다.


   ▼ 15:05  월아천 옆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녹지시설이 지척에 있습니다.


   ▼ 15:15  정상 너머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산입니다.


   ▼ 15:05  월아천 앞의 명사산 정상 전경입니다.


   ▼ 16:58  명사산을 내려와서 명사산 내의 낙타타기 체험에 도전합니다.




   ▼ 19:19  명사산을 떠나 야간 침대열차를 타기 위해 유원역으로 이동합니다.

      류안역으로 이동하는 도로 좌우에는 고비사막으로 모래만이 둘러쌓여 있습니다.


   19:19  유원역에서 선선역으로 이동하는 기차표입니다.

      침대열차를 이용하여 약 8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


   ▼ 19:19  유원역으로 이동하는 길 주위 풍경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이 이어집니다.



   ▼ 23:12  식사후 돈황에서 3시간여를 달려 유원역에 도착했습니다.

      유원역에서의 역구내로 진입절차는 어지간한 항공기 보안 검색보다

      강했습니다. 라이타 등은 물론 흉기등은 아예 지닐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신강 위구르 자치지역으로 들어가는 여행객들이라 강한 보안 검색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 23:14  신강 위구르 자치지역인 선선역으로 이동할 기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차 시간표는 별 의미없이 표시되고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기차가 들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차를 타러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침대칸이래야 제대로 발뻗고 누울 수 없는 그런 침대칸이라

   이동 내내 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