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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 05.30 실크로드 11박12일 일정(5/25일,7일째, 야단지모,옥문관,돈황고성)

redstone5 2016. 6. 15. 18:20


   실크로드 12일의 일정 중  7일째 일정은 돈황의 태양호텔에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일정은 아침 식사후 고비사막 가운데에 있는 기묘한 모습의 작은 바위동산들이

   늘어서 있는 야단지모와 과거 실크로드의 중국 국경 역할을 한 옥문관, 그리고

   돈황고성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돈황고성 방문 이후 이 고장의 특산음식인 낙타발 요리로 석식을 하게 됩니다.


   (돈황시 개략)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 허시저우랑[西] 서쪽 끝,

      당허강[] 유역 사막지대에 있다.

      란저우[]와의 거리는 1,137km, 둔황석굴[]과는 25km 거리이다.

      연평균기온 9.4℃, 연평균강수량 32.9mm이다.

      타림분지 동쪽 변두리를 복쪽으로 흐르는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BC 1세기 초에 한()나라의 무제()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을 두고 부근에 위먼관[]·양관[]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과 한인()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타림분지의 한 오아시스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400∼421)이 둔황을 국도()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도 융성하여 첸포동[]으로 불리는 유명한 석굴사원의 조영()이 시작되었다.

      366년 전진()의 승려 낙준()에 의하여 시작된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은,

      그 뒤 북위()·서위(西)·북주()·수()·당()·5대()·송()·원()에 이르는

      1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뒤, 둔황은 북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

      즉 톈산남로[]와 톈산북로[]가 차지하는 교통상의 중요성이 바뀌어,

      남로에 대신하여 북로가 중요성을 더해가자,

      둔황은 그 번영을 북동쪽의 상락현(:지금의 西 부근)에 빼앗기고,

      명칭도 과주()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서역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대()에는 다시

      사주()로 고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방어 및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8세기 말에는 토번()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使)의 지방정권을 받게 되었다.

      한때 독립하여 금산국()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西)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둔황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 뒤, 원대()에 사주로()의 치소()가 되고, 명대()에

      사주위()가 되었으나 그 벽지화()는 피할 수 없었으며,

      또 과거의 불교 사찰이나 석굴사원도 쇠미해져서 청말()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둔황 모가오굴[]을 찾았을 때는 도사()와

      몇 사람의 라마중만이 살았다고 한다. 1987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1900년 석굴사원의 석굴군() 중의 하나인 둔황 모가오굴에서 2만 점의

      고문헌()·회화류()가 발견되어, 그것이 1907년 및 1908년에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등에 의하여 반출됨으로써, 세계의 동양학 및

      불교미술 연구에 기여하였다.

      간쑤성의 목화산출기지이며, 석유·금·전력·화학·식유()가공 등 소규모의 공업과

      주변에서 나는 밀·잡곡·대마()·유채 등의 농산물을 산출한다.

      란신철도[:]가 북쪽으로 지나며, 215·313·112국도는

      티베트·칭하이[] 등 성·자치구와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80개의 소학교와 14개의 중학교가 있다.

      오늘날 둔황에는 후이족[]의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으며,

      지금은 석굴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다.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둔황석굴, 웨야천[], 위먼관, 양관 등이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둔황 [Dunhuang, 敦煌(돈황)]


   ▼ 07:05  어제 저녁 늦은 술자리로 아침에 조금 피로함을 느꼈으나 오늘의 일정이 기대되어

     아침일찍 눈이 떠집니다. 한국시간으로는 아침 8시가 넘었습니다.


   ▼ 08:58  오늘은 9시부터 일정이 시작되는 조금 여유있는 일정입니다. 

      도로에는 사막의 먼지바람과 무더위를 줄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살수 작업을 했습니다.


   ▼ 08:58  어제 우리가 묵었던 돈황 태양호텔(★★★★급)전경입니다.

      오늘 저녁에도 이 호텔에서 묵어야하므로 챙겨서 가야할 짐이 거의 없습니다.


   ▼ 08:59 돈황지역의 유명한 관광지들을 인도 위에 새겨 박아 놓았습니다.

      막고굴, 월아천, 명사산, 아단지모 등등....


   ▼ 09:05  돈황 중심가에 있는 강으로 야경이 멋집니다.

      돈황지역도 오아시스에 있는 도심지역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물이 풍부한 편입니다.


   ▼ 09:33  고비사막 가운데 있는 명사산과 한나라시대의 만리장성인 토성이 보입니다.


   ▼ 10:08  차창을 통해서 바라본 사막지역의 풍경입니다.

      사막지역에서 자라는 풀은 간혹 보이지만 나무 한 그루 볼 수가 없습니다.


   ▼ 10:22  돈황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문입니다.

      호텔에서 출발한지 1시간20여분만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갑니다.

      중간에 마땅히 화장실에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필히 쉬어야 합니다.


   ▼ 10:25 현위치가 옥문관 입구에 있는 휴게시설로 옥문관 옆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거쳐

      아단지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10:46  아단지모는 옥문관 옆을 지나서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가야하며,

      아직 개발이 덜 끝난 곳으로 포장된 도로는 없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합니다.

      우측 옆에 보이는 옥문관은 아단지모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탐방하기로 합니다. 


   ▼ 12:03  사막지역의 비포장도로로 지속 달려 나가야 합니다.

      벌써 아침에 호텔을 출발한지 3시간째 비포장 사막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 13:07  사막지역 4시간을 달려 아단지모 국가 지질공원에 도착합니다.


   ▼ 13:07  첫눈에 보기에도 사막지대에 작은 바위들이 범상치 않습니다.

      야단지모는 최근에 개발된 곳으로 아직 도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한국인들이 아직 많이 찾지 않은 곳이라 합니다.


   ▼ 13:14  아단지모의 '돈황아단'이라는 표지석이 앞에 있습니다.


      (아단지모 개략)

      아단()은 위구르어로 흙무덤으로 이루어진 절벽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건조지대에서 바람에 의해 생겨난 일종의 풍식() 지형을 말하며 둔황성

      서북 180㎞ 지점 뤄부보() 와지()의 동부와 서부 및 북부 지역에서

      대규모로 분포하고 있다.

      아단지모는 마귀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길을 분간하기가

      어렵고 자성이 강해 나침반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으며 밤에는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사람들을 오싹하게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둔황() 아단지모()의 총 면적은 400㎢로 동서와 남북 각각 20㎞에

      걸쳐 분포하며 고고학자에 따르면 약 70~30만 년 전에 형성된 지형이라고 한다.

      당시 이곳은 기후가 습하고 강수량이 많아 잡초가 우거진 광활한 호수였으나

      약 30만년 전부터 가뭄에 의해 호수가 점차 말라 바닥의 침전물이 지면에 들어났고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바람에 의해 표면의 자갈과 모래는 다 날려가고 규칙적인

      계곡이 만들어졌으며 굳어버린 흙 등성이가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면서 신기한

      형태의 자연경관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곳에는 불탑, 궁전, 술병, 고촌락 등 갖가지 형상의 흙무덤이 마치 진짜와 같아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 질서정연하게 형성된 자연의 산물로 예술품 그

       자체로 보기 드문 천연조소박물관()을 만들어냈다.

      2001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영웅(), 천맥전기(),

      제천대성 손오공(), 대둔황() 등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하여 이를 통해 더욱 크 명성을 얻게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단지모 [雅丹地貌]


   ▼ 13:20 아단지모 부근에  하나 밖에 없는 식당에서 1식4찬으로 점심식사를 합니다.


   ▼ 14:38  식당앞에서 바라본 아단지모의 전경입니다.


   ▼ 13:48  이곳에서 표를 끊어 들어가야 구역내 셔틀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 13:48  이곳에서 셔틀버스를 탑승해서 이동하면서 탐방해야합니다.


   ▼ 13:51  사막에 있는 바위들이 마치 바다위의 섬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13:51 사막 가운데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이동 합니다.


   ▼ 14:04  차창으로 보이는 단아지모의 전경입니다.



   ▼ 14:06  사자상의 바위입니다.


   ▼ 14:07  사자상에 대한 표식입니다.

      금사영빈(金獅迎賓)이란 '금사자가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 14:10  '금사영빈'을 설명한 글입니다. 


   ▼ 14:19  차창으로 비치는 사막 가운데 바위가 마치 요새처럼 느껴집니다. 


   ▼ 14:21 '사신인면(獅身人面)' 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사신인면'이란 사자몸에 사람얼굴 형상의 바위라는 뜻입니다.


   ▼ 14:23  어떻게보면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 같기도 합니다.


   ▼ 14:27  '사신인면' 바위를 뒤로하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멋진 탑같이 생긴 바위입니다.



   ▼ 14:29  고비사막의 끝없는 지평선이 눈에 들어옵니다.


   ▼ 14:32  아단지모 구역내 중간 지역에 휴게소 및 화장실이 있는 곳에 사막 짚차를

      체험하는 곳도 있습니다.

      '아단'이리는 중국표현은 야르당에서 온 표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야르당(Yardang)이란?)

      풍식지형(風蝕地形)의 일종으로 거의 평행하는 좁고 긴 요지(凹地)에 의해 격리되어있는

      좁고 긴 열상(列狀)의 언덕.

      플라야를 만드는 호성층(湖成層) 등 비교적 부드러운 퇴적물이 침식 되어 생긴 것과

      경·연암(硬軟岩)으로 이루어진 암석이 풍식을 받아서 생긴 것이 있다.


      후자는 암석 야르당 또는 초이겐이라고 불리며 평행암릉을 형성한다.


      야르당은 풍향에 평행하고 종단면의 모양은 바람받이쪽으로 둥글며 바람의 지쪽으로

      내려가면서 좁고 길게 뻗는다.


      1903년 S. 헤딘이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 탐험 때 발견했고 30년 E. 블랙웰더가

      야르당이라고 명명했다.


      풍식지형으로 보고 있으나 일부에는 우식(雨蝕)의 일종인 릴워시(rill wash)와

      유수(流水)의 영향도 인정되며 상세한 형성과정은 아직 불투명하다.


      이란에는 칼루트(Kalut)라 불리는 부드러운 점토질 사암(砂岩)으로 이루어진

      평행암릉이 일려져 있는데, 풍식·릴워시·이류(泥流)·홍수 등의 복합영력에 의해

      야르당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지형을 용퇴(龍堆)라 한다.


   ▼ 14:34  휴게소 바로 앞쪽으로 들어가면 공작새 바위가 있습니다. 


   ▼ 14:34  공작새 바위쪽으로 이동합니다.


   ▼ 14:37  공작새 바위전경입니다.

      이곳에는 바람의 세기가 강합니다.  


   ▼ 14:42  공작새 바위 쪽에서 바라본 아단짐보의 경치가 정말 멋집니다.

      푸른하늘과 금빛 사막과 바위들의 조화가 눈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 14:42  이건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수반위에 올려진 수석이라고나 할까?


   ▼ 14:43  공작새 바위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니 아프리카에 사는 '미어켓' 같이 보입니다. 


   ▼ 14:44  공작새 바위를 전체적으로 옮겨본 전경입니다.


   ▼ 14:47 공작새바위 탐방을 마치고 다시 셔틀버스가 있는 휴게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지평선과 맛닿은 푸른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 15:04  '서해함대'라는 명칭은 사막위의 바위들이 마치 바다위의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습니다.


   ▼ 15:04  서해 함대의 모습들입니다.


   ▼ 15:28  약 1시간 40분간의 야단지모 탐방을 마치고 옥문관으로 이동할려고 합니다.



   ▼ 17:25 약 2시간을 비포장도로로 이동해서 옥문관앞에 도착했습니다.

      버스 주차장에 설치되어 있는 조감도입니다.

      우리는 좌측 19번 야단경구에서 16번의 옥문관이 있는 문화유적유람구로 이동했습니다.

      16번 탐방이 끝나면 우측 8번의 돈황고성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 17:30  옥문관 입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소방반성유지(小方盤城遺址) 

      영문으로 Small Fangfan Castle 로 표시된 유적입니다.

     

      (옥문관 개략)

      오아시스로 북도의 관문.

      1907년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둔황() 북서쪽 약 100km 지점에 있는 소방반성

      ()을 조사하다가 여기서 옥문도위()라는 문자가 있는 목간()을

      발견함으로써, 이곳이 바로 ‘옥문관(위먼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설치된 옥문관은 시대에 따라 몇번 자리를 옮긴다.

     남북조시대에는
안서(西)에서 고창(, 하미)으로 가는 길이 오아시스로의 주요

      북도로 되자, 옥문관은 안서현 동쪽에 있는 도로 연변으로 이전된다.

      당나라 초기 현장()은 바로 이곳을 지나 고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후기에는 토번()이 이곳으로 진출하자, 둔황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으로 옥문관을 이전하게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옥문관 [玉門關]


      (현장법사란???)

      이름 위(). 진혜()의 아들. 허난성[] 뤄양[] 동쪽에 있는 

      거우스현[] 출생. 10세에 뤄양 정토사()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장안() ·청두[]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

      (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떠났다.

      도중 고창국() 왕 국문태()의 대접을 받았으며,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는데,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와 파미르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야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태종()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한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西)》 (12권)를 저술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 17:34  옥문관 유적 전경입니다.     


   ▼ 17:36  옥문관의 서쪽 문이 있던 전경입니다.

      옥문관의 서쪽 문으로 당시에는 서역에서 오는 상인들이나 사람들이 서쪽 문으로 들어와서

      북쪽문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성루의 나쪽으로는 강물이 있어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완벽한

      관문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17:38  옥문관 내부의 북쪽문 전경입니다.

      서역에서 오는 사람들이 서쪽문으로 들어와서 북쪽문을 통해 중국으로 간다고 합니다.


   ▼ 17:38  옥문관이 번성허던 시기에는 큰강이어서 사람이 다니기 힘든

      곳이라했는데 지금이 수량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 17:38  옥문관 남쪽 전경으로 당시에는 큰강으로 사람이 다니지 못했고,

      옥문관을 통해서만 중국쪽으로 완래가 가능했었다고 합니다,


   ▼ 17:43  우측 문이 서역쪽으로 연결되는 옥문관의 서쪽문이고,

      좌측이 중국과 연결되는 옥문관의 북쪽문이라고 합니다.


   ▼ 17:50  옥문관 주차장으로 되돌아 나와 바라본 옥문관 유적 전경입니다. 


   ▼ 18:47  옥문관을 뒤로 하고 돈황고성 탐방을 위해 이동합니다.


   ▼ 19:02  한 시간 정도를 이동후 돈황 고성에 도착했습니다.


      (돈황고성 개략)

      돈황고성 유적지 대신 돈황에서 서쪽으로 27km 떨어져 있는 중국 최대 사막의

      영화촬영 셋트장(동서 718m, 남북 1132m)으로 돈황고성을 만들었습니다.

      1987년 중일 합작으로 “돈황(敦煌)”이란 영화를 찍을 때 사주고성(沙州古城 

      사주는 돈황의 옛 이름)을 모방하여 만든 것인데 건축면적만 1.27만㎢나 됩니다. 

      고대 건축 풍격을 잘 갖추고 있는데, 이 안에는 전당포,주막, 밥 집,실크 상점,

      주택과 사찰도 제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북송 시대의 고창(高昌 신강에 소재했던 왕국의 하나), 돈황, 감주(甘州),

      흥경(興京)과 변량변량)의 5개 거리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 19:02  돈황고성에서 바라본 명사산 전경입니다.


   ▼ 19:06 돈황 고성에서 촬영한 영화를 게시해 둔 글입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영화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촬영했다고 합니다.


   ▼ 19:07  세트장에는 옛날 중국의 각 시대별 거리가 재현되어 있습니다.



   ▼ 19:18  돈황고성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 19:07  약 30분 정도의 돈황고성 탐방을 마치고 돈황시내의 식위천이라는 전문식당에서

      낙타발바닥요리로 저녁을 해결합니다.

      6 ~ 8조각의 낙타발바닥 요리가 약 3만원 정도로 고가(高價)라고 합니다.

      맛은 우리가 먹는 도가니 수육과 비슷합니다.



   ▼ 21:55  식사후 돈황시내 구경을 나섭니다.

      곳곳에 저녁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 22:01  돈황시내의 강에 있는 분수대입니다.

      10시를 넘었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고 있습니다.



   ▼ 22:01  돈황시내에서 바라본 명사산의 석양 전경입니다.


   ▼ 22:04  석양시점에 바라본 분수전경입니다.



   ▼ 22:17  강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놓아 무더위를 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돈황시내의 강가에서 하루의 무더위를 식힌후 숙소로 돌아와 7일째 하루를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