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여행 6일째 일정은 가욕관시의 주강호텔을 출발하여
만리장성의 서쪽 관문인 사막위에 우뚝선 가욕관 탐방 후 돈황으로 이동키로 합니다.
어제 저녁 카메라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렌즈가 파손되어
오늘은 부득이 휴대폰으로 촬영하여 일기를 써 내려가야 합니다.
▼ 09:20 주강호텔을 출발하여 가욕관 성루 탐방을 위해 약 1시간을 달려 왔습니다.
(가욕관 성루 개략)
가욕관(중국어 정체: 嘉峪關, 간체: 嘉峪关, 병음: Jiāyù Guān, 가욕관)과는 간쑤 성
자위관 시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끝에 위치하는 관문이다.
산해관과 나란히 서쪽, 만리장성으로 중요한 관문으로서 알려져 있다.
가욕관은 자위관시의 남서 6km에 위치하는 하서회랑의 서쪽 가장 좁은 땅에 있다.
그곳에 두 개의 언덕 사이의 땅을 가욕산이라고 한다.
성벽의 일부는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있어 험준한 지형에 그 요새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가욕관은 둘레 733m, 높이 11m의 성벽에 둘러싸여 성 내부 지역은 33,500㎡ 이상이다.
황토를 판축으로 하여 굳힌 성벽이며, 서쪽은 벽돌을 겹쳐 쌓아 되어있다.
동서로 각각 누각(문루)과 옹성을 가지는 성문을 갖추어 동쪽을 광화문,
서쪽을 유원문이라고 한다.
서문에는 「자위관」의 편액이 걸려 있다.
관의 남북은 만리장성과 연결되어, 성벽의 구석 각부에는 노가가 설치되어 있다.
2개의 문의 북측에는 관의 최상부에 오를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자위관의 방어 설비는 크게 나누어 내곽, 외곽, 굴의 3개가 되고 있다.
만리장성으로 연결되는 관 중에서 유일하게 건설 당시 그대로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최동단에 있는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고 칭하며, 가욕관은 「천하제일웅관」
이라고 한다.
동서 실크로드의 요충지의 하나이며, 주위에는 돈황 막고굴과 같이 유명한 유적이
존재하며, 많은 벽화가 발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가욕관의 설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어,
만약을 위해 1개 의 벽돌만 여분으로 준비했는데, 가욕관의 완성 시에는 정확하게
1개만 벽돌이 남았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문서 상으로 남아 있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지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일화가 되고 있다. 명조 초기에 구축된 후, 티무르군에 대비하기 위해,
관의 방비는 강화되어 요새를 견고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동진을 진행시키기 전에 노쇠하여 전복되었다.
▼ 09:21 가욕관 성루 입구에는 기념품 판매대가 형성되어 있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계통의 각양각색의 기념품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 09:22 입구 매표소에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가욕관'이란 간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09:40 여기서도 타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줄을 서고 있습니다.
▼ 09:44 풍승 장군 동상이 서 있습니다.
(풍승 장군 개략)
명나라 봉양부(鳳陽府) 정원(定遠) 사람. 초명은 국승(國勝)이고, 종이(宗異)란
이름도 썼다.
용맹하고 지혜도 풍부했으며, 책 읽기를 좋아했고, 병법(兵法)에도 정통했다.
원나라 말 요새를 지어 스스로를 지켰고, 주원장(朱元璋)에게 귀순한 뒤 공을
세워 원수(元帥)가 되었다.
이후 진우량(陳友諒)과 장사성(張士誠)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여했고,
북으로는 산동과 하남을 차지했으며, 서쪽으로는 섬서(陜西)를 평정하는 일에
참가했다.
또 서북과 요양(遼陽)에서 원나라의 잔존 세력을 격파했다.
송국공(宋國公)에 봉해졌고,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으며, 이름이 개국공신
제3열에 올랐다. 나중에 공이 너무 높아 태조의 시기를 사서 사사(賜死)당했다.
▼ 09:44 가욕관 성의 성 주위로 적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자를 둘렀습니다.
(해자(垓子)란)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을 이용하여 적의
접근을 막는 성곽시설이다.
해자(垓字)는 호(壕) 또는 호참(壕塹)이라고도 불렀다.
경주와 같이 서남북에 하천이 있는 곳은 이것을 자연해자로 이용했으며 그렇지 않은
성곽에서는 인공해자를 팠다.
산성이 많은 한국에서는 물을 채우지 않는 해자가 많았는데 이를 간호(乾壕) 또는
황(隍)이라고 한다.
해자는 성벽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하며 방어목적 이외에 성벽 기초의
침수나 지하수위를 조절하는 역할도 있다.
또 해자에는 마름쇠(菱鐵)나 나무꼬챙이 등의 장애물을 설치하여 도강을 막았다.
▼ 09:49 '천하웅관'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동쪽 성문 전경입니다.
▼ 09:50 정면에서 찍은 전경으로 성 높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 09:50 동문의 규모를 알려놓은 현판입니다.
동문의 높이 4.2m, 폭 3.8m, 깊이 10.6m의 웅장한 규모를 나타냅니다.
▼ 09:55 가욕관의 관성 형태를 나타낸 관람도로 내성과 외성으로 쌓여져 있습니다.
▼ 09:56 동문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천하웅관'이란 비석입니다.
▼ 10:03 외성을 지나 내성 들어서기 전에 바라본 내성의 웅대한 규모입니다.
▼ 10:05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 10:11 '관제묘'란 사당인데 '관우를 모신 사당이라 합니다.
(관제묘란?)
도교(道敎)의 묘(廟)로, 삼국시대 촉나라 관우(關羽)를 제사하여 중국에서 가장
널리 신앙되었다.
시대에 따라 칙봉명(勅封名)이 바뀌어져 장무후(壯繆侯)묘, 관수형(關壽亨)후묘,
관왕묘 등 여러가지로 불렸으나 명말청초 때부터 관제묘로 개칭되었다.
또한 1914년 민국정부에서는 남송의 명장악비(岳飛)를 관제묘에 합사(合祀)하여
관악묘로 할 것을 명했으나 지방촌락에서는 실시되지 않은 예가 많다.
남송말기 경에 비롯되어 원대(元代)부터 각지에 널리 퍼졌다.
중앙이나 지방정부에서는 무묘(武廟)로서 받들었으나 서민들은 오히려 재신
(財神)으로 모셨다.
소촌락에서는 1전각(殿閣)에 불과하나 현성(縣城)급 이상에서는 희대(戱台), 대문,
액문(掖門), 종루, 고루(鼓樓), 동서의 배전(配殿), 대전(大殿)의 순서로 남에서
북향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뒤쪽으로 삼대전(三代殿, 오류)이 추가되었다.
원대의 유구(遺構) 산시성, 한성현, 효의촌의 관제묘(원 · 대덕 7년[1303] 창건,
청조에 종수), 산시성, 정양현, 성북관의 관왕묘(명 · 가정34년[1555] 중수), 허
난성, 우현, 백사진의 관제묘(원 · 지정9년[1349] 창건, 명 · 홍무19년[1368]
중수) 등이 남아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관제묘 [關帝廟, Guandimiao]
▼ 10:15 성곽 뒤로 멀리 치렌산맥의 만년설이 조망됩니다.
▼ 10:16 내성으로 들어가는 성문 전경입니다.
▼ 10:16 내성의 동쪽문을 광화문이라고 합니다.
▼ 10:19 내성의 성곽으로 말들이 올라가도록 만든 마도입니다.
▼ 10:19 성곽에서 바라본 내성 전경이고 멀리보이는 3층 건물이 내성의 서쪽문인
유원문의 누각 전경입니다.
▼ 10:22 광화루는 내성의 도쪽문인 광화문의 위쪽 누각을 말합니다.
명나라 시대(1506년)에 건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10:23 성곽에서 바라본 내성에 설치된 공연장입니다.
하루에 몇차례 관광객을 위해 공연한다고 합니다.
▼ 10:24 각루라고 하는 감시초소를 말합니다. 성곽 코너마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 10:25 성곽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으로 멀리보면 성곽이 이어져 있습니다.
가욕관은 남북으로 성곽이 쌓여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는 최후 보루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10:30 내성의 서쪽 문인 유원문 쪽에서 바라본 동쪽 광화문의 누각 광화루 전경입니다.
▼ 10:33 전설에 의하면 가욕관의 설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어,
만약을 위해 1개 의 벽돌만 여분으로 준비했는데, 가욕관의 완성 시에는 정확하게
1개만 벽돌이 남았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문서 상으로 남아 있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지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일화가 되고 있다.
▼ 10:33 자세히 보시면 위에 언급된 남아 있는 한 장의 벽돌이 성문 입구 위쪽에
얹혀 있다고 합니다.
▼ 10:35 가욕관의 내성 서쪽문인 유원문 위쪽의 누각을 유원루라고 합니다.
▼ 10:42 중국인들의 장사 수단입니다.
북 한 번 치는 데 10위안 우리돈으로 약 2천원입니다.
▼ 10:43 이분들은 정해진 시간에 공연을 하는 분들인데 대오를 맞춰 성내를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 10:46 가욕관 서쪽 문의 바깥 전경입니다. 끝없는 사막으로 이어집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이 가욕관을 거쳐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10:46 가욕관루 입니다. 가욕관의 외성 서쪽 문을 말합니다.
▼ 10:53 가욕관 서쪽 문에서 바라본 외성 바깥 쪽 전경입니다.
황무지인 사막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10:54 가욕관 서쪽 문루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 11:04 내성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공연 일정입니다.
그렇게 항홀하지는 않지만 그냥 서서 구경할 정도는 됩니다.
▼ 11:05 공연장면입니다.
▼ 11:24 가욕관 박물관으로 탐방하기로 합니다.
(가욕관 박물관 현황)
1988년 말, 가욕관시 신화남로에 세워진 장성 박물관은 만리장성에 관련된 것들만
전문적으로 다룬 박물관으로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전체 면적은 12312평방미터이며 전시면적만 1766평방미터로 주건물의 외형은
봉화대를 본땄다.
전시 내용은 크게 '춘추전국 장성', '진·한 장성', '북위·수·당·요·금 장성', '명 장성'
4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위대한 장성'을 주제로 하여 전국시대부터 명대까지 3천년간의 장성 건축사를 모형,
도표, 사진 등의 형식으로 1100여평의 전시실에 농축해 놓음으로써 장성 연구자들에게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며 일반 사람들에게도 중국 장성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진화해
가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였다.
▼ 11:26 입구에 '중화지혼'이란 돌비석이 서 있습니다.
▼ 11:31 가욕관을 설계하고 만든 풍승장군 상입니다.
풍승장군에 대해서는 가욕관 입구의 동상에서 설명드렸습니다.
▼ 11:36 가욕관 축소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외성과 내성이 확실히 구분되어지는 견고한 성으로 보입니다.
▼ 11:37 가욕관 박물관에 있는 지도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서안에서 출발하여 난주, 무위, 장액, 주천, 그리고 가욕관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일정은 고주, 돈황, 옥문관, 투루판, 우루무치까지 여정이 계속됩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현재 고비사막 가운데이고, 아래로 곤륜산맥이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이어집니다.
▼ 11:48 풍승장군이 가욕관을 세울 때 모습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 11:51 청나라시대 임척서라는 분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임척서?)
자 소목(少穆). 호 사촌노인(竢 村老人). 푸젠성[福建省] 출생.
1811년 진사(進士) ·지방관을 역임하며 수리사업(水利事業)에 힘쓰고,
승진을 거듭하여 장쑤순무[江蘇巡撫] ·양강(兩江)총독을 거쳐, 1837년 후광[湖廣]
총독이 되었다.
이듬해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자문(諮問)에 응하여 아편(阿片)의 엄금책(嚴禁策)을
진언(進言)하고, 임지(任地)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18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발탁되어 광둥[廣東]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고, 영국상인들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하여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강경수단을 써서 아편밀수의 근절을 꾀하였다.
전부터 중국의 개항(開港)과 자유무역 실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자국 상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임칙서는 해외사정을 연구하며 군비(軍備)를 강화하는 한편,
관민(官民)의 협력을 얻어 영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오히려 타협파(妥協派) 관료들에
의하여 전쟁도발자로 몰리게 되었고, 1840년 청나라 조정이 강화(講和)로 기울자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이리[伊犁]로 유배되었다.
후에 복직이 허락되어 1845년 산간[陝甘]총독, 1847년 윈구이[雲貴]총독을
역임하였다.
1850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흠차대신 광시순무[廣西巡撫]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병사하였다.
저서에 《임문충공정서(林文忠公政書)》 《임문충공유서(遺書)》 《신급록(信及錄)》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칙서 [林則徐]
▼ 12:54 가욕관 탐방을 마치고 돈황으로 이동합니다.
고비사막 가운데로 도로만이 보일 뿐입니다.
▼ 13:18 약 1시간 30분을 이동하여 중식 장소에 도착하여 간단한 식사를 합니다.
▼ 14:05 돈황으로 이동하는 길은 고비사막으로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 14:56 사막도 생각에 따라 생산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의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 15:14 돈황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집니다.
▼ 15:19 사막 가운데 덩그러니 집한 채만 있습니다.
알고보니 화장실이 있는 곳입니다.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 14:56 달리고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입니다.
그 와중에 사막 가운데 호수가 하나 펼쳐집니다.
▼ 17:19 약 3시간을 달려도 집 한채 보이지 않는 사막 가운데입니다.
▼ 18;10 약 4시간을 달려서 돈황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돈황 태양호텔(★★★★)입니다.
여장을 풀고 가이드와 함께 어제 파손된 카레라 렌즈 보수하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수리는 불가하고 대체품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남은 여정동안 사진 촬영이 가능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 20:04 카메라 렌즈를 구입하여 호텔로 돌아와 일행과 함께 시장 구경에 나섰습니다.
이 시간에 아직도 밝은 이유는 중국은 북경지역의 표준시를 전국에 걸쳐 사용한다고 합니다.
서역에 가까운 지역임에도 북경 표준시를 사용하다보니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어두워집니다.
▼ 20:05 호텔부근의 돈황시 중심가에 서있는 여자 동상인데 서역퐁의 동상입니다.
▼ 20:08 돈황에서는 저녁 식사를 재래시장에서 하기로 하고
인근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았습니다.
▼ 20:11 재래시장에는 기념품과 음식점이 깨끗하게 정렬 되어 있었습니다.
▼ 20:14 기념품점이 끝나고 나서 양꼬치 판매점이 나타납니다.
▼ 20:15 '돈황야시(敦煌夜市)'라는 간판이 서 있습니다.
▼ 20:22 양꼬치집의 주방장들입니다.
▼ 20:33 맛있게 익은 양꼬치 전경입니다.
독한 중국의 꼬량주와 함께 맛본 양꼬치가 일품이었습니다.
▼ 21:48 밤 10시가 다되어가는데도 아직 훤하게 밝은 하늘입니다.
▼ 24:37 늦은밤 숙소로 돌아와 하루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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