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림동계곡 지명석입니다.
(화림동계곡?)
남계천의 경관을 따라 여덟 곳의 굽이마다 정자를 두었다는 화림동 계곡은 함양지역을
정자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했다.
덕유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의 명소마다 장식하듯
자리 잡았던 여덟 정자 중에서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의 네 곳밖에 남지 않았다.
더구나 최근의 화재로 가장 큰 규모의 농월정 마저 자취만을 남기고 있어 아쉬움이 더하다.
(현 농월정은 복구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음)
남아 있는 가장 큰 정자인 동호정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2층 누각으로 굵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듯한 기둥과 커다란 통나무의 한 면을 각을 파 자연스럽게 만든 계단의 모습이
특이하다.
단정한 모습으로 물가에 자리하는 군자정을 지나 계곡과 바위가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경관의 거연정은 화림동계곡 정자의 백미다.
구름다리를 건너 다가가는 정자의 2층 누각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아름답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림동계곡
이번(2017.06.17.토) 산행은 이벤트 행사로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는 트레킹으로 함양의
선비길 탐방로를 선정했습니다.
지난 주 함양의 황석산에 이어 금주에도 황석산을 바라보며 걷는 연속 2주의 함양행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할 정도로 함양은 묵향의 꽃이 활짝 핀 선비의 고장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과거를 보러가는 길도 경상좌도 쪽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이용했고, 경상우도의
선비들은 육십령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육십령이 함양군 서상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학풍으로는 경상좌도는 퇴계 이황선생의 영향이 컸고,
경상우도는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학풍으로 이어져 왔다고 하지만,
남명 조식 선생보다 50여년 빠른 시기의 인물로 함양은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향으로 일두 선생의 학풍이 번창하였고, 1552년 일두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남계서원을 세워 일두 정여창선생을 제향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비의 고장인 함양에 경상도를 대표하는 정자문화가 형상될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경치가 빼어난 화림동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정자를 연결하는 길이 최근에 '선비의 길'
명칭이 붙은 건 당영한 귀결이라 생각됩니다.
'선비의 길'은 본디 8정8담(八亭八潭)이라고 해서 8개의 정자가 8개의 담(潭) 옆에 있었는데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농월정(弄月亭) 등 4개를 제외하고는
없어져 버렸지만 함양군에서 최근에 하나씩 복구하여 이 정자를 연결하는 길을 만들어
관광객 및 트레커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호남의 정자가 전원생활 즉 목가적이라고 한다면 함양의 정자는 선비들의 유유자적
즉 놀이 문화의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이동은 통상적으로 선비의 길 1구간인 거연정부터 시작해서 농월정을 거쳐 2구간 날머리인
강풍루까지 이동하지만 오후 뙤약볕 햇살의 무더움을 피할 수 있는 그늘길이 다소 연결되는
1구간을 오후시간으로 잡아 광풍루에서 출발하여 농월정을 거쳐 거연정으로 이동후 거연정
부근에서 알탕을 즐기기로 하고 역순으로 길을 이어가는 이동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트레킹 개요)
1. 날짜 : 2017.06.17(토) 날씨 : 맑고 무더움
2. 걸린시간 : 11시10분 ~ 17시25분(약 5시간10분) - 알탕 및 여유있는 점심시간 포함
3. 이동, 도상거리 : 10.87km, 10.77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2.1km/h
휴식제외 : 2.5km/h
5. 고도 : 342m ~ 221m(121m)
6. 오르막 거리, 속도 : 5.46km, 3.88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5.41km, 4.01km/h
8. 휴식횟수 : 2회, 1시간30여분(중식시간 및 알탕시간)
9. 이동코스
광풍루▷ 오리숲▷ 관북마을회관▷구 로정▷ 월림마을회관▷ 농월정▷ 황암사 ▷ 람천정
▷ 경모정 ▷동호정 ▷영귀정 ▷군자정(멀리서 조망) ▷거연정
▼ 아래지도에는 통상적인 이동코스를 표기해놨지만 우리는 오후 뙤약볕을 피해 다소 그늘길이
있는 1구간을 오후에 이동하는 역코스를 선택했습니다.
▼ e산경표로 나타낸 개요입니다.
GPS off 시간이 늦어 약 5km정도가 추가되었습니다.
▼ 10:50 부산 서면에서 07시30분에 출발하여 지곡인터체인지에 약 3시간20만에 도착했습니다.
▼ 10:50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안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1:02 출발지인 함양군 안의면의 광풍루에 도착했습니다.
▼ 11:03 광풍루 정면 전경입니다.
▼ 11:03 광풍루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1:10(00h00m) 광풍루를 떠나 안의교를 거쳐 본격적인 트레킹에 들어갑니다.
▼ 11:10(00h00m) 광풍루앞 교량에서 바라본 우리가 진행해야할 오리숲 전경입니다.
아마 숲의 전체 길이가 5 리(5 里)여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11:11(00h01m) 광풍루에서 교량을 건너 오리숲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만나는 이정표입니다.
▼ 11:12(00h02m) 광풍루 건너편에서 바라본 광풍루 전경입니다.
▼ 11:12(00h02m) 오 리숲 앞쪽으로 정리되어 있는 안음현시절의 현감 선정비등입니다.
(안음현 유래)
안음현은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의 두 현이 합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이안현은 신라의 마리현(馬利縣)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757년(경덕왕 16)에 이안현으로 개칭, 천령군(天嶺郡:함양)의 영현이 되었다.
감음현은 본래 신라의 남내현(南內縣)이었다가 757년에 여선현(餘善縣)으로 개칭,
거창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감음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안현과 감음현은 1018년(현종 9)에 합주(陜州:합천)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감음현에 감무를 둠으로써 감음현이 독립되고 이안현이 감음현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417년(태종 17)에 고을의 중심지를 이안현에 두게 되자 이름을
안음현으로 바꾸었다.
1728(영조 4)~36년에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되어 읍이 혁파(革罷)되기도 했다.
1767년에 읍명을 안의현(安義縣)으로 개칭했다.
안음의 별호는 화림(花林)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고종 32)에 진주부 안의군, 1896년에 경상남도 안의군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안의군이 폐지되고, 안의군의 서상면과 서하면은 그대로,
현내면·황곡면·초참면이 안의면으로, 대대면·지대면이 대지면으로 통합되어 함양군에 편입되고,
북상면은 그대로, 남리면·동리면이 마리면으로, 북하면·고현면이 위천면으로 통합되어
거창군에 편입되었다.
▼ 11:12(00h02m) 정리되어 있는 9개의 선정비를 보면
1. 만력17년(1589년) 선조 17년~? (1584 ~ ?)
현감 정후호인 청정비(縣監 鄭侯好仁 淸政碑)
2. 선조 34년~35(1601~1602)
안음현감 연후충수 선정비(安陰縣監 延侯忠秀 善政碑)
3. 인조7년(1629)
현감 홍후호 청덕비(縣監 洪侯鎬 淸德碑)
4. 기묘년(1639) 인조11년~16년(1633~1638)
현감 심후장세 선정비(縣監 沈侯長世 善政碑)
5. 정해년(1707) 숙종26년~31년(1700~1705)
현감 정후중만 청정제민비(縣監 鄭侯重萬 淸政濟民碑)
6. 숭정4년 병오(1726)숙종41년~45년(1715~1719)
현감 이후의록 영세불망비(縣監 李候宜祿 永世不忘悲)
7. 숭정4년 병오(1726)숙종45년~46년(1719~1720)
현감 어후유룡 청덕애민선정비(縣監 漁候有龍 淸德愛民善政碑)
8. 숭정4년 병오(1726)영조1(1725)
현감 유후학기 애민선정비(縣監 兪候學基 愛民善政碑)
9. 숭정4년 병오(1726)영조1(1725)
현감 유후학기 인정비(縣監 兪候學基 仁政碑)입니다.
선정비(善政碑) : 불망비라고도 하는데, 선정을 베푼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고을사람들이 세워주는 비석이다.
▼ 11:12(00h02m) 정리하어 모아 놓은 선정비 전경입니다.
▼ 11:13(00h03m) 선정비 두 번째 블록을 보면
11. 순조29~32(1829~1832)
현감 서후....유여(縣監 徐候....有여)
12. 무오년(1858) 철종6~8(1855~1857)
현감 김후재현 애민선정비(縣監 金候在顯 愛民善政碑)
13. 동치4년 을축(1865) 철종11~고종1년(1860~1864)
현감 박후재영 애민선정비(縣監 朴候濟鍈 愛民善政碑)
14. 숭정기원후갑신(1884) 고종16~18(1879~1881)
현감 이후상학 영세불망비(縣監 李候象學 永世不忘碑)
15. 계미년(1893) 고종22~23(1885~1886)
현감 홍후기주 애민선정비(縣監 洪候岐周 愛民善政碑)
16. 정유년(1897) 고종28~30(1891~1893)
현감겸조방장 조공원식도제척평비(縣監兼助防將 趙公元植 道齊斥平碑)
17. 고종31~32(1894~1895)
군수 남후만리 애민선정비(郡守 南候萬里 愛民善政碑)
18. 관찰사......(觀察使.....)
▼ 11:14(00h04m) 현위치는 오 리숲으로, 광풍루에서 안의교를 거쳐 이동했습니다.
▼ 11:16(00h06m) 멀리 황석산이 조망됩니다.
황석산 아래에는 우리가 들러야할 정유재란시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민관군의 추모사당인
황암사(黃巖嗣)가 있습니다.
▼ 11:18(00h08m) 어릴때 먹거리가 부족할 때 먹었던 삐삐라는 풀입니다.
▼ 11:19(00h09m) 관북마을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헤 육십령로를 가로질러 건넙니다.
▼ 11:20(00h10m) 육십령로를 건넌후 구로정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1:20(00h10m) 구로정 가는 방향 전경입니다. 땡볕길이 이어집니다.
▼ 11:21(00h11m) '끈끈이대나물'입니다.
(끈끈이대나물?)
1년 또는 2년생 초본으로 종자로 번식한다.
유럽이 원산지이며 관상식물로 들어온 귀화식물이고 전국에 분포하며 들에서 자란다.
원줄기는 높이 40~60cm 정도이고 전체에 분백색이 돌며 털이 없고 가지가 갈라지며 윗마디에서
점액을 분비한다.
마주나는 잎의 잎몸은 길이 3~5cm, 너비 1~2cm 정도의 난형이다.
6~8월에 개화하며 홍색 또는 백색의 꽃이 핀다.
삭과는 긴 타원형이고 대가 있으며 끝이 6개로 갈라진다.
‘끈끈이장구채’와 달리 잎은 난형 내지 넓은 피침형이며 꽃은 홍색, 백색으로 산방상으로 달린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어릴 때에는 식용한다.
▼ 11:22(00h12m) 관북마을회관 앞으로 지나갑니다.
마을명의 유래는 '역말'이라고도 부르며 옛날에 역참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말로 관북(官北)이라는 이름은 옛 안음현의 청사가 있는 곳의 북쪽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생긴 시대나 마을을 개척한 씨족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남쪽 하천에 오리숲이 있다.
▼ 나리꽃입니다.
▼ 11:22(00h12m) 구로정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1:22(00h12m) 구로정 1.2km 전방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11:23(00h13m) 선비의길 2구간은 그늘 없는 땡볕입니다.
오전 햇살이 강하지 않을 때 2구간을 이동하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 11:25(00h15m) '사철채송화'입니다. 일명 '송엽국'이라고도 합니다.
▼ 11:31(00h21m) 가뭄으로 수량이 부족해서인지 하천의 바윗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 11:31(00h21m) 강가의 '찔레꽃'입니다.
▼ 11:37(00h27m) 구로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 11:38(00h28m) 구로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구로정(九老亭) 설명 내용?)
소재 :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563(성북)
성북마을에 있으며 야은(野隱) 이은석(李殷錫), 중암(中菴) 이교희(李敎喜),
석초(石樵) 이한석(李翰奭), 성천(醒川) 양두영(梁斗永), 금계(錦溪) 이규용(李圭鏞),
서암(西巖) 노응주(盧應柱), 만송(晩松) 박원기(朴源箕), 모암(慕菴) 이보원(李輔源),
우선(愚仙) 백헌기(白憲基) 9인이 수계를 하여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1955년에 자손들이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나 규모가 작은 편으로 시멘트기와를
얹었다. 노수열이 지은 구로정시판이 걸려있다.
▼ 11:38(00h28m) 구로정 전경입니다. 잠시 들러 막걸리 한 잔으로 옛정취를 느껴봅니다.
▼ 11:39(00h29m) 구로정내에 붙어 있는 구로정기(九老亭記)입니다.
▼ 11:40(00h30m) 구로정이 있게한 9분의 자손을 나열한 현황판입니다.
구로정계원자손록(九老亭契員子孫錄)....구로정의 자식과 손자들의 기록이라는 ......
▼ 11:42(00h32m)'신감채'입니다.
▼ 11:43(00h33m) 월내리 월림마을로 가는 '선비의 길'과 포장도로입니다.
우리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선비의 길'로 이동합니다.
▼ 11:43(00h33m) 도로를 건너서 직진길은 '선비의 길'이고 우측은 포장도로입니다.
▼ 11:43(00h33m) 선비의 길로 가는 목교 전경입니다.
▼ 11:45(00h35m) 강가운데 서있는 남근석입니다.
자연석인지 인공으로 만들어 세운 것인지는???????
▼ 11:46(00h36m) '수레국화'입니다.
▼ 11:47(00h37m) 선비의 길로 이동하는 땡볕길 전경입니다.
▼ 11:51(00h41m) 전형적인 시골마을처럼 마을앞 동구나무가 서있습니다.
▼ 11:52(00h42m) '도라지꽃'입니다.
▼ 11:54(00h44m) 건너야 할 월림마을 앞 교량이 눈에 들어옵니다.
▼ 11:55(00h45m) 월림(다수)마을 전경입니다.
월림(月林)마을 유래는 물이 좋고 많다 하여 다수(多水)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약 5백여년 전 경주최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마을에 화재가 많이 발생하여 마을 뒤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해마다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가 화재 예방으로 혹은 화재 발생시에 사용했다고 하며 그 후로는 화재가 발생치
않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해마다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다.
▼ 11:55(00h45m) 월림마을 직전 좌측으로 교량을 지나서 농월정으로 향합니다.
▼ 11:55(00h45m) 우리가 지나왔던 선비의 길은 감국산책로로 명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11:55(00h45m) 월림마을회관 전경입니다.
▼ 11:55(00h45m) 월림마을 안내도입니다.
▼ 11:56(00h46m) 월림마을에 있는 동네 쉼터인 월소정(月沼亭) 전경입니다.
▼ 11:56(00h46m) 농월정 가는 교량위에서 바라본 월소정 전경입니다.
▼ 11:58(00h48m) 교량을 건너 육십령로 우측으로 이동합니다.
관북마을에서 건넜던 도로와 연결되는 도로입니다.
▼ 11:58(00h48m) 교량을 건너 월림(다수)마을 우측으로 강둑을 따라 이동해야 합니다.
▼ 11:59(00h49m) 농월정 1.1km전방 이정표로 선비의 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 11:59(00h49m) 강둑을 따라 뜨거운 땡볕길로 이동합니다.
▼ 12:01(00h51m) 다슬기를 잡는 분은 노동이겠지만 보는 우리는 시원함을 느낍니다.
▼ 12:02(00h52m) 가뭄으로 물이 말라 물고기가 다니는 어도(魚道)까지 말라있습니다.
▼ 12:06(00h56m) '금계국'이 만발해 있습니다.
▼ 12:07(00h57m) 가뭄으로 하천바닥이 말라있는 모습니다.
▼ 12:09(00h59m) '자귀목꽃'입니다.
▼ 12:10(01h00m) 농월정 맞은편 새로 조성하고 있는 오토캠핑장 시설입니다.
▼ 12:10(01h00m)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콩밭 전경입니다. 농심이 타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 12:14(01h04m) 농월정 맞은편에 새로 조성중인 오토캠핑장 안내도입니다.
▼ 12:18(01h08m) 농월정 맞은편 먹거리 상가에서 농월정교를 통해 농월정으로 이동합니다.
▼ 12:19(01h09m) 농월정 앞으로 흐르는 수량 풍부해야 할 하천도 물이 마르긴 마찬가지입니다.
▼ 12:20(01h10m) 농월정교에서 바라본 새로 조성중이 오토캠핑장 한옥 전경입니다.
▼ 12:20(01h10m) 농월정교에서 농월정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용하는 철계단입니다.
▼ 12:21(01h11m) '개망초'입니다.
▼ 12:24(01h14m) 즐거운 점심시간입니다. 약 1시간의 여유있는 점심시간을 보냈습니다.
▼ 13:30(02h20m) 농월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농월정 안내문 내용?)
농월정(弄月亭)
조선 중기때의 학자인 함양 안의면 성북마을 출신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 傅, 1571~
1639)공께서 광해군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시면서 방대한 너럭바위(넓은바위)와 주변 경관이
수려한 이곳에 서당을 짓고 심신을 수련하셨습니다.
인조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등을 지내셨으며 말년에는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를 않고 1637년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시면서 쉬던 곳으로 몇 차례 중수를
거쳤습니다.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 앞 오른 쪽 암반에 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자를 후손들이
힘있게 새겨놓았습니다.
달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 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으며 계곡의 위쪽으로 황석산 등산로가 시작됩니다.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傅)?)
1571(선조 4)∼1639(인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아버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영(榮)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문화유씨
(文化柳氏)로 판관(判官) 희필(希畢)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임
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
(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
(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년(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 3책이 있다.
▼ 13:30(02h20m) 농월정 전경입니다.
▼ 13:34(02h24m) 농월정에서 거연정을 향해 물길을 건넌 회원들입니다.
물이 많이 불어 있을 때는 물길을 건널수 없지만 가뭄으로 쉽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 13:35(02h25m) 물이 불어서 건너기 힘들어야 할 물길이.......
▼ 13:35(02h25m) 물이 있어야 할 너럭바위들에는 바짝 말라있습니다.
▼ 13:35(02h25m) 농월정 상류 방향 전경입니다.
물이 불어 있을 때의 위험 표지는 가뭄에 아무 의미없이 공중에서 나부끼고 있습니다.
▼ 13:36(02h26m) 워험표지판도 가뭄에는 그다지......
▼ 13:36(02h26m) 물이 넘쳐야 할 소(沼)에도 수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입니다.
▼ 13:38(02h28m) 계곡길을 벗어나서 데크길로 이동합니다.
▼ 13:39(02h29m) 데크길에서 바라본 농월정 방향 계곡 전경입니다.
너럭바위와 곳곳의 소(沼) 선비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할 만합니다.
▼ 13:40(02h30m) 다음 목적지인 황암사 0.4km 전방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13:44(02h34m) 황암사 직전 교량을 지나갑니다.
▼ 13:46(02h36m) 황암사 입구에 있는 관리실과 화장실입니다.
▼ 13:46(02h36m) 선비길 안내도입니다. 현위치가 황암사입니다.
▼ 13:47(02h37m) 함양군 함양8경 관광안내도입니다.
우리는 함양 8경 중 6번째인 화림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8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① 상림사계 :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상림의 4계절 풍경
② 용추비경 : 용추계곡과 기백산의 빼어난 경치
③ 칠선시류 : 일곱선녀들이 노닐던 지리산 칠선계곡
④ 덕유운해 : 남덕유산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신비로움
⑤ 금대지리 : 금대 앞에서의 장엄한 지리산 조망
⑥ 화림풍류 : 선비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화림동 계곡
⑦ 서암석불 : 벽송사와 서암정사의 고즈넉한 풍경과 경이로운 석불
⑧ 대봉철쭉 : 백운산으로부터 대봉산까지 이어지는 봄 철쭉의 아름다움
▼ 13:47(02h37m) 황암사에 대한 설명 안내입니다.
(내용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명 중 우군 7만5천명이 음력8월16일에
가또(加藤達也), 구로다((黑田藤弘) 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3일간
(8월16일 ~ 8월18일)처절한 공방전이었다.
이 때 안의 현감 곽준(郭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의 7개
고을(거창, 초계, 합천, 삼가, 함양, 산청, 안의)의주민들을 모아 관민남녀 혼연일체가
되어, 피아간이 포격과 함께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과 맞서 활과 창칼과 투석전으로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음력 8월18일에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참여한 주민과 병사의 수를 일부 사서(史書)에서는 50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수 천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숙종 40년(1714년)에 황석산 밑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라 사액되어 당시 황석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왔으나 일제 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추모행사마저 중지되었다.
1987년 황석산성이 사전 제322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역민의 정성을 모아 2001년
호국의총을 정화하고 사당을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2001년 9월
▼ 13:47(02h37m) 황암사로 들어가는 홍살문입니다.
▼ 13:51(02h41m) 황암사를 중건하면서 세운 중건 기념비입니다.
▼ 13:52(02h42m) 황석산성 순국 사적비입니다.
▼ 13:52(02h42m) 황암사(黃巖祠) 전경입니다.
▼ 13:52(02h42m) 황암사 건물 뒤쪽에 의총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 13:52(02h42m) 황암사 내에 있는 황석산성 순국선열 충혼비 전경입니다.
▼ 14:08(02h58m) 황암사를 떠나 거연정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만난 참나리입니다.
▼ 14:13(03h03m) 그늘 우거진 이동길이 푸르릅니다.
▼ 14:23(03h13m) 탄생숲 조성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는데 농촌의 인구 감소가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 14:39(03h29m) 람천정 전경입니다. 최근에 세워진 정자 같았습니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오래 된 정자 같지는 않았습니다.
▼ 14:39(03h29m) 람천장을 지나 경모정 방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 14:42(03h32m) 선비길 이동중에 바라본 황석산 정상 전경입니다.
▼ 14:44(03h34m) 경모정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4:44(03h34m) 경모정 전경입니다.
▼ 14:45(03h35m) 경모정 건너편 계곡의 커다라 바위에 음각된 이름들이 보이지만.....
▼ 14:46(03h36m) 경모정을 지나 거련정 방향으로 길을 옮깁니다.
이 구간에도 그늘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14:46(03h36m) '애기똥풀'입니다.
▼ 14:48(03h38m) 호성마을 100m전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14:49(03h39m) 호성마을 회관 앞을 지나갑니다.
▼ 14:51(03h41m) 동호정 0.9km전방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14:51(03h41m) 이동길이 농로로 그늘없는 길이 이어집니다.
▼ 14:55(03h45m) 동호정 600m전방 이정표입니다.
▼ 14:57(03h47m) 선비길 중에는 농로로 이어진 길로 다소 불편한 길들도 있습니다.
▼ 15:00(03h50m) '산수국꽃'입니다.
▼ 15:02(03h52m) 동호정 200m전방 이정표입니다.
▼ 15:02(03h52m) 물길을 건너 육지속의 섬처럼 생긴 솔섬으로 이동합니다.
▼ 15:03(03h53m) 동호정 가는길이 물길을 건너야 합니다.
▼ 15:05(03h55m) 동호정 앞 너럭바위에 도착합니다.
▼ 15:07(03h57m) 동호정 전경입니다.
(동호정 유래)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을 했다는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90년 경에 지은 것이다.
장만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서하면 황산마을에 내려와 지금 정자가 있는 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선생이 즐겨 찾았던 그 물가에 정자를 세운 것이다.
‘차일암’이라는 암반 바위와 짙푸른 숲, 여유 있게 흐르는 물줄기가 평온한 기운을 내뿜는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물과 너럭바위와 물 건너 숲의 풍경이 한가로우면서도 풍요롭다.
정자 천장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다.
보통 용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데 이곳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15:13(04h03m) 동호정을 지나 거연정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 15:13(04h03m) 선비의 길을 역순으로 이동하므로 고도가 조금씩 높아짐을 알 수 있습니다.
▼ 15:19(04h09m) 데크길들이 걷기 좋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 15:28(04h18m) 사과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 15:30(04h20m) 거연정 1km전방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15:33(04h23m) 영귀장을 지나 군자정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5:35(04h25m) 영귀정, 군자정 가는 길은 다시 낮은 오르막을 올라서 가야 합니다.
▼ 다곡교를 지나 영귀정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군자정으로 갈려면 거연정에 다시 밑으로 이동했어야 하지만....
▼ 15:37(04h27m) 정자가 아닌 그냥 휴게쉼터가 하나 지어져 있었습니다.
▼ 15:41(04h31m) 영귀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 15:43(04h33m) 이 부근은 사유지로서 그냥 지나치면서 보고 가야했습니다.
▼ 15:45(04h35m) 영귀정 전경입니다. 영귀정도 유서깊은 정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 군자정 전경입니다. 이곳은 시간관계상 탐방치 못하고 선두팀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 정여창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면
(정여창(鄭汝昌) 선생?)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이다.
▼ 15:48(04h38m) 이곳에서 봉전교를 거너야 군자정도 볼 수 있었지만 알탕 욕심으로
탐방로를 따라 이동하여 거연정으로 윗쪽 사람들의 눈을 피하다보니.....
▼ 15:48(04h38m) 알탕 장소로 이동 중에 바라본 거연정 전경입니다.
▼ 15:49(04h39m) 탐방로로 이동하여.....
▼ 15:51(04h41m) 거연정 윗쪽에서 햇볕에 달구어진 몸의 온도를 내렸습니다.
▼ 16:17(05h07m) 알탕한 장소입니다. 가뭄에 물이 말랐지만.....
▼ 이렇게 시원한 알탕을.....
▼ 16:20(05h10m) 알탕후 찾아간 거연정 안내문입니다.
▼ 16:21(05h11m) 거연정 전경입니다.
▼ 16:21(05h11m) 거연정 옆에도 맑은물이 넘치도록 있어야 하지만 가뭄으로....
▼ 16:24(05h14m) 함양군 서하면 봉전마을 거연정 휴게소에서 오늘 하루 산행을 전부
종료합니다.
트레킹 시간은 점심시간 및 알탕시간을 포함해서 약 5시간 10여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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