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3가지 요소가 구비될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그 3가지요소인 돈(Money), 시간(Time), 건강(Health)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이 과연
몇 이나 될까요?
특히 일반인들은 이 3가지를 만족시킬 즈음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거
아닐까 생각되어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게 상책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혼자 배낭 메고 다니던 트레킹에서 벗어나 오랜 만에
집사람과 여행에 나섰습니다.
부인네들은 대개 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을 선호하지만 나는 역사적이고 많이 걸어다니는
도보 여행을 선호하다보니 집사람의 의견은 다소 무시되고......
우쨌던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인류 역사의 보고인 이집트로 10일간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학교시절에 배웠던 4대 문명발상지(중국의 황화문명, 인도의 인더스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메소포타미아문명과 나일강의 이집트문명)에 포함된 이집트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나일강은 에티오피아에서 흐르는 청나일강과 수단에서 흐르는 백나일강이 합류해서
이집트유역에서는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는 강이기도 합니다.
이집트 문명은 BC 3,000 경에 풍성했던 문명으로 지금부터 5,000년 전에 이미 상형문자와
농사짓는 기술이 발달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설의 발달된 문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격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건국신화인 단군조선의 연대가 지금부터 약 4,350년(2,333년 + 2017년) 전
경인데 이집트는 이미 이때 문물들이나 생활도구들을 현시점에서 상형문자와 함께
접한다는게 도저히 믿기워지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건조하고 무더운 사막날씨에 유물들의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아 BC3,000년경의
미이라등과 유물들을 고스란히 눈으로 직접보고 손으로 만지는 감동의 여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스 로마가 신의 나라라고 배워왔지만, 알렉산드대왕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신화를 그리스나 로마에 접목시켜
이집트신화가 그리스 로마신화에 영향을 미쳐 그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이야기
였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신(神귀신신)의 종류에는
모든 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누'
태양의 신인 '라'
멤피스 최고의 신인 '프타'
공기와 습기의 신인 '슈 & 테프누트'
땅과 하늘의 신인 '게브 & 누트'
이집트 첫 번째 파라오였으며 죽은자의 왕인 '오시리스'
오시리시의 부인인 '이시스'
천둥과 사막, 싸움의 신인 '세트'
매의 머리를 가진 '호루스'
사라의 여신인 '하토르'
지혜의 신인 '토트'
죽은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아누비스'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크눔'
진리 정의의 여신인 '마트'
등으로 크게 알려져 있어, 이집트의 역사를 이해치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신의 역사입니다.
이집트는 이집트인, 베두인족,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함족이 99%로
(중동의 역사와 발전단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동인의 조상을 어족적(語族的)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동인의 조상은 함족(Hamite)과 셈족(Semites)으로 구분되는데,
함족은 동아프리카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약 3천 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후 페르시아나 그리스인, 셈족 등에게 정복되어 사실상 그 정체성을 상실했다.
다른 하나인 셈족은 성서에 나오는 노아(Noah)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셈(Sem)의 자손들로
주로 아라비아 반도 남부지역, 이란고원 등지에서 살았던 아랍민족을 지칭한다.
이들 중 일부 셈족은 기원전 3500년경 시나이 반도로 북상해 나일강에 정착,
함족과 결합해 이집트 문명의 건설자가 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한 일부는 바빌로니아인이 되었고,
기원전 2500년경 비옥한 초승달지역(Fertile Crescent)에 정착한 일부는 아무르인
(Amur), 구약성서의 아모리인(Amorites)이 되었다.
또한 일부는 동부 지중해에 정착해 페니키아인이 되었다.
셈족은 이후에도 이주를 거듭해 7세기경에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정복해
이라크에서 모로코까지 주민을 이슬람화 하게 된다.)
▼ 11/10 PM 김해공항에서 에어부산 탑승수속중입니다.
▼ 11/10 18시 출발 에어부산 여객기내 전경입니다. 저가 항공이지만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 11/10 PM 김포공항에 내려 인천공항으로 가기위해 15번 게이트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 11/10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11/11 00:15분 에티하드 항공으로 출국하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합니다.
▼ 11/10 AM 인천공항 탑승 게이트 조감도입니다.
▼ 11/10 AM 비행기 안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본 항로입니다.
인천공항에서 중국과 중동 상공을 거쳐 아부다비공항까지 약 10시간동안 이동해야 합니다.
▼ 11/10 AM 세계 3대 항공사라는 아부다비의 에티하드 A330항공기 내부 전경입니다.
▼ 11/10 에티하드항공사 로그입니다.
(에티하드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
에티하드항공은 아랍에미레이트(UAE)의 국영항공사입니다.
에티하드항공은 2003년 7월 왕실 (아미리) 칙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2003년 11월 상업항공 비행을 시작해 상업항공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항공사가
되었습니다.
에티하드항공은 아랍 최고의 서비스, 동서를 연결하는 서비스, 세련되고 따뜻하며 사려
깊은 서비스의 중심지로서 아부다비의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에티하드 항공의 목표는 항공업계 기존의 서비스를 변화하고 혁신을 이루어 21세기의
진정한 글로벌 항공사로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트래블 어워즈의 '세계 선두 항공사'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에티하드가 매년 다양한 상을
수상한 것은 세계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프리미엄 항공사로서의 지위를 보여줍니다.
에티하드는 세계 항공 수송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규모를 얻기 위해
동반 성장 전략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유기적 성장 외에도 탄탄한 공동운항 제휴 기반의 발전과 함께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공사에 대한 소수 지분 투자를 통해 저희 항공기가 운항하지 않는 수 백 개의 취항지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성과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 11/10 AM 10시간의 비행 끝에 환승지인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11/10 아부다비 공항에서 우리가 이집트로 타고갈 에티하드항공 여객기입니다.
▼ 11/10 아랍어로 공항명을 설치해놓은 것 같은데 제 눈에는 전부 창이나 칼같이 보입니다.
▼ 11/10 에티하드항공사를 이용하여 아부다비에서 이집트 카이로를 향해 약 2시간 이동합니다.
▼ 11/10 에티하드항공 A321-200 기종 항공기입니다.
▼ 11/10 기내 모니터를 통해본 아부다비에서 카이로까지 항로입니다.
▼ 11/10 우리가 타고 온 에티하드항공기 전경입니다.
▼ 11/10 카이로 공항에 도착하여 국내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청사를 나오면서 만나는
이집트 파라오 동상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이집트에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배꼽을 엄청
상징적으로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11/10 카이로 공항에서 룩소로 타고갈 이집트항공 소속 국내선여객기입니다.
▼ 11/10 카이로 공항에서 룩소까지는 약 1시간 반을 이동했습니다.
▼ 11/10 사막 가운데 만들어진 룩소공항 전경입니다.
이집트의 자연환경 자체가 나일강 주변만 농경지로 되어 있고, 나머지 지역은 거의
모레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11/10 룩소공항 수속후 출입문의 신전과 오벨리스크 사진들입니다.
▼ 11/10 룩소르 공항 전경입니다. 시골 공항답게 조용하게 느껴집니다.
▼ 11/10 룩소에 도착후 Steigenberger Nile Palace에 투숙합니다.
▼ 11/10 PM Steigenberger Nile Palace 야간 전경입니다.
▼ 11/10 PM Steigenberger Nile Palace의 석식 전경입니다.
음식이 우리 입맛에 거북하지 않고 먹을 만한 맛이었습니다
▼ 11/10 PM Steigenberger Nile Palace 야간 전경은 열대지방이라는 느낌이 팍 다가옵니다.
▼ 11/11 AM 아침에 바라본 Steigenberger Nile Palace 호텔로 규모가 엄청 났습니다.
▼ 11/11 AM 시내에는 이슬람국가 답게 이슬람사원의 첨탑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덴데라?)
고대도시인 타인트네테르트('신성한 기둥에서 나온 여자'라는 뜻, '텐티라'라고도 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단다라는 파라오 시대 상이집트 지방에 있던 여섯번째 주의 주도로서,
하늘과 번식의 여신인 하토르에게 바쳐진 도시였다.
하토르 신전은 이집트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신전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남아 있는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BC 305∼30)에 짓기 시작하여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AD 14∼37 재위) 때 완성되었지만, 이 건물이 서 있는 토대는 훨씬 더
오래되어서 적어도 제4왕조(BC 2613∼2494경)의 2번째 왕인 쿠푸(케오프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암(砂岩)으로 지은 이 신전은 말린 진흙벽돌담에 둘러싸인 8만 3,600㎡의 부지 안에
약79m의 길이로 세워져 있다.
신전 안에는 하토르 여신의 머리 모양을 새긴 18개의 둥근 기둥이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홀(hall)을 떠받치고 있어서,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천장에는 천체의 현상들이 조각되어 있고, 벽에는 이 신전을 방문한 왕의 거동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홀 바깥 쪽에는 6개의 둥근 기둥이 있는 작은 홀이 6개의 창고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홀은 다시 2개의 대기실로 이어져 있는데, 2번째 대기실을 지나면 여신상이 담긴
신성한 배를 모셔놓은 성소(聖所)가 나온다.
신전의 지붕 위에는 오시리스 신에게 바쳐진 여러 개의 예배당이 있는데,
한 예배당에서 12궁도가 새겨진 돌과 해시계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현재 파리에 소장되어 있다.
신전 뒤에는 작은 이시스 신전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신성한 연못이 있다.
이곳에서는 멘투호테프 2세(BC 2060~2010 재위)의 문도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지(聖池)의 동쪽에는 2개의 조산소(助産所)와 그리스도교 교회가 있다.
▼ 11/11 오전에 도착한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입니다.
(하토르 여신?)
'세트'와 '호루스'의 전쟁에서 가장 질려 버린 신은 태양신 '라'였다.
이 늙은 신은 힘센 '세트'가 왕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네이트' 여신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발했다.
게다가 인간들의 마음도 변하고 있었다.
'라'가 늙어서 이제는 자신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접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는 다른 신을 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태양신은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는 떠오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자 세상은 난리가 났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니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곡식도 자랄 수 없었다. 시간도 멈춰 버렸다.
그때 '라'를 달래기 위해 나타난 여신이 바로 '하토르'다.
'하토르'는 '라'가 태초에 '슈'와 '테프누트'를 만들고 나서 자신의 눈으로 만든 딸이다.
기쁨과 사랑의 여신 '하토르'는 아버지 '라'에게로 가서 온갖 애교를 부리며, 아름다운
춤으로 '라'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사랑하는 딸의 애교에 화가 풀린 라는 다시 떠오르기로 한다.
대신 자신을 화나게 한 인간을 응징하기로 맘 먹는다.
예전에 물에 빠진 '슈'와 '테프누트'를 구해준 '하토르'에게 '라'의 명령을 집행할 권한을
준 일이 있다.
'라'는 '하토르'에게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준 권한을 맘껏 이용하라고 '하토르'를 부추긴다.
머리에 암소의 뿔과 황금 원반을 두른 아름다운 여신 '하토르'는 라의 명령을 집행할 때는
무시무시하고 힘이 센 암사자로 변한다.
'하토르'는 암사자로 변해서 '라'를 무시한 인간들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 세상이 비명과 피로 얼룩졌다.
인간들은 사막으로 도망가면 '하토르'는 끝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잡아먹었다.
인간의 피 맛에 길들여진 암사자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다.
이쯤 되자 '라'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혼내주고 싶었을 뿐 완전히 멸망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제사장들에게 술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보리로 술을 만들어라. 오커의 즙을 짜서 거기에 섞어라."
오커는 물감의 원료가 되는 붉은색 황토다.
보리로 만든 술에 오커를 섞으니 마치 피같이 보였다. '하토르'가 잠든 사이 그 술을 사방
웅덩이마다 채워두었다.
잠에서 깨어난 '하토르'는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보고 피라고 생각했다.
허겁지겁 마셔보니 피를 먹었을 때보다 맛있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곤 잔뜩 술에 취해서 인간들을 응징하는 일 따위는 잊어버렸다.
마침내 '하토르'가 라의 궁으로 돌아가 곯아떨어지자, 인간들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라'와 '하토르'를 잊지 않고 술로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어느 날 '하토르'는 사막에서 신음하고 있는 '호루스'를 구해준다.
'호루스'는 '세트'의 공격을 받아 눈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토르'는 '호루스'의 눈을 치료해 주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덴데라 하토르신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제국은 분할되었으며 이집트는 그가 거느렸던 마케도니아 장군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렸다.
그의 후계자들은 로마 시대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덴데라에 있는 무덤은 이 시기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암소를 포함한 신성한 동물도 매장되었다.
'하토르' 여신이 취했던 형상 중 하나가 바로 암소였다.
그녀는 모든 어린 파라오에게 젖을 주었으며 종종 소의 귀가 달리고 두 개의 뿔 사이에
태양의 원반으로 치장된 왕관을 쓴 여인으로 묘사된다.
'하토르'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었으며, '음주를 지배하는 여주인'이라는 칭호로
춤과 환락과도 연관되었다.
그녀는 점차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가장 숭배한 신들 중 하나인 '이시스' 여신과 일치되었다.
덴데라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하토르' 신전은 예전에 있었던 신전을 대체하여
새로이 지어진 것으로, 그 이후에도 로마의 초기 황제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개조되고
증축되었다.
이집트 신전의 독특한 특징은 '치료소'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환자들은 여신이
보내 주는 치유의 꿈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밤을 보냈다.
신전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한쪽 외벽에는 기원전 30년에 죽은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과 함께 나타난 커다란 부조가 새겨져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여신과 동일시하기 위해 이러한 이미지를 사용했던 듯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시스에게 바치는 독립된
사원을 하나 지었다.
중앙 신전에 있는 그림에는 이후의 황제들이 이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서기 35년경–에는 다주실(hypostyle hall :
내부 공간이 기둥으로 받쳐진 건물)이 증축되었다.
이 홀의 기둥머리는 이시스 여신과 연관이 있는 고대 이집트의 타악기인 '시스트럼'
모양이며, 천장에는 점성학의 12궁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 일부는 55기에 콥트 교회 건물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토르 신전 [Temple of Hathor]
▼ 11/11 AM 덴데라 하토르신전 입구입니다.
▼ 11/11 AM 신전 입구의 석주와 입구 전경입니다.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 11/11 AM 가운데 두 개의 뿔사이에 태양의 형상을 가진 조각이 하토르여신입니다.
하토르여신 뒷쪽에는 매의 형상을 가진 호루스신의 형상입니다.
▼ 11/11 AM 이집트 대부분의 신전은 외벽에 그림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전은 주로 사암으로 지어졌고, 사암 외벽은 석회로 발라져 부조되어집니다.
아래 부조중 위가 동그랗고 아래가 십자형태가 앙크입니다.
(앙크의 의미?)
앙크(Ankh) 십자가는 이집트에서 신들과 파라오의 상징으로 매듭푸는 열쇠를 뜻한다.
앙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들과 파라오들의 상징이었다.
<고리 달린 십자가>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타우 십자가, 즉 T자형 십자가 위에 둥근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붙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이시스의 매듭>이라고도 불렀다.
둥근 고리를 이시스 여신과 동일시되던 생명나무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앙크는 인간이 신성에 도달하자면 어떤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매듭을 푸는 행위denouement를 통해서 인간 영혼의 진화가 대단원denouement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태양신 아톤에 대한 신앙을 창시한 파라오 아크나톤과 태양신을
섬기던 사제들의 손에 앙크가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특별한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여는 열쇠이자 속인들이 금단의 지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자물쇠로 여겨졌다.
장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사제들이 십자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장면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앙크는 때로 두 눈 사이의 이마에 그려지기도 했다.
이것을 죽음의 비의를 깨달은 자에게 그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저승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그것을 발설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발설하는 순간 자신의 알고 있던 것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콥트교도, 즉 이집트의 기독교도들 역시 앙크를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앙크는 인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인들에게 이것은 능동적인 원리와 수동적인 원리의 통일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남녀 양성이 한 몸에 결합되었음을 나타내는 성적 상징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이세욱, 임호경 옮김, 열린 책들,)
▼ 11/11 AM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입구 전경입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의 건물 일부입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의 기둥 상부에는 하토르 여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의 기둥입니다. 기둥의 굵기가 눈을 휘둥그레지게 합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의 천정 전경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부조들을 파손했다고 합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 각 방에는 그 시대의 생활상을 부조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 11/11 AM 나일강에 띄웠던 태양의 배 모양을 부조로 남겼습니다.
▼ 11/11 AM 여기도 부조들의 훼손이 심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 11/11 AM 가운데 하토르 여신과의 신화의 한 줄기 같은데.....
우측은 '무트여신'인 것 같습니다.
(무트(MUT)여신?)
원래는 테베의 독수리 여신이었으나,
제18 왕조 때 '아몬'신과 혼인해 양자 '콘스'와 함께 테베의 3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신왕국시대에 '아몬'과 '무트'의 혼인은 매년 테베에서 열린 중요한 의식 중 하나가 되었다.
하늘의 여신으로 활동하면서 '아몬'이 태고의 바다 '누'에서 하늘에 있는 본래의 거처로
솟아오를 때 그의 뒤에 서 있는 암소로 자주 등장했다.
'무트'는 '바스트'와 '세크메트' 같은 다른 중요한 여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대개 독수리나 암사자 머리를 하고 그 위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2중 왕관을 쓴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11/11 AM 하늘의 신인 '누트여신'이 천정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누트(NUT)여신?)
하늘의 여신 '누트'는 흔히 몸이 대지 위에서 아치 모양으로 길게 늘어난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슈'가 '누트'를 떠받쳤기 때문에, '누트'는 손가락 끝과 발가락만으로 대지를 짚고
있었다.
'누트'는 낮에는 '게브'와 떨어져 있지만 매일 밤 '게브'에게 내려와서 어둠을 만들었다.
낮에는 폭풍이 불었기 때문에, '누트'는 도중에 자신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나 산악
지역을 타고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간혹 '게브'를 태양과 달의 아버지라고도 했다.
그리고 '누트'도 어머니 또는 위대한 황소로서 태양과 달과 결합되었다.
태양과 달이 바로 황소의 눈이었던 것이다.
'라'는 할아버지 또는 아들로서 질투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누트'가 '게브'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누트'가 '게브'와 결혼하자, '라'는 '누트'가 연중 일정한 달에는 아이들을 낳을 수
없도록 정했다.
그렇지만 '토트'가 '누트'를 가엾게 여겨 달과 장기를 두어서 달에게서 72번째 빛을
획득했다.
이 72번째 빛이 5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이 이집트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기
전에 삽입된 윤일 이었다.
'누트'는 이 윤일 동안 연속해서 다섯 아이(오시리스, 호루스, 세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을 수 있었다.
'누트'는 원래 어머니-여신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아이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트'가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될 때 머리에 쓰고 있는 상형 문자는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궁과 물 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로는 복부에 별을 상징하는 수없이 많은 젖먹이 돼지 새끼들로 덮여 있는 암퇘지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누트'는 매일 아침 이 새끼 돼지들을 먹어버렸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는 아름다운 암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누트'는 '라' -'아툼'이 반역을 일으킨 지상의 왕국을 싫어하게 되고 눈이 자신에게 하늘로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면 이 암소의 모습을 했다.
'누트'는 높이 올라갈수록 무서워서 떨기 시작했기 때문에, '누트'의 네 발에 선택된 신들은
'호루스'와 '세트', '토트','소프두.이며, 이들은 온 대지를 상징한다.
'슈'는 '누트'의 배를 떠받쳤으며, 그 배는 태양 돛단배가 항해하는 하늘의 바다 또는 강이
되었다.
매일 아침 태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누트'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누트'는 사실상 라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딸이었다.
'케프리'가 지하 세계에서 나타날 때의 '누트'의 모습은 이런 관계를 상징한다.
이 때 '누트'는 눈이 깊은 바다에서 들어올려지는 태양 돛단배에서 풍뎅이를 데려오기 위해
내려간다.
'누트'가 태양을 낳을 때 흘린 피 때문에 새벽하늘은 핑크색을 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 부활한 태양 '누트'는 '케프리'와 결합되면서 죽은 자를 보호하는 여성 보호자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이 때 죽은 자는 많은 별이 있는 '누트'의 품안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누트'는 이런 역할을 하는 동안 죽은 자 위로 펼쳐지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관 뚜껑 내부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축복을 받고 죽은 자와 합쳐질 수 있도록 '누트'의
몸인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 11/11 AM 고대이집트시대의 우주의 천체를 나타낸 천정이라고 합니다.
▼ 11/11 AM 하늘의 '오시리스신'(머리 원뿔형모자)의 신화에 대한 벽화입니다.
▼ 11/11 AM 신전부근의 사막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위는 거의 사막산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11/11 AM 신전에서 외부로 나가면서 바라본 기둥과 부조 전경입니다.
건조한 날씨에 수천년이 지난 벽화이지만 채색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의 신전중에 이곳의 채색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 11/11 AM 신전 외부에 그려진 벽화에는 클레오파트라와 호루스신, 하토르,
클레오파트라 아들 카이사리온에 관한 부조라고 합니다.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은 클레오파트라 재임 중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며,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에 관한 부조라고 합니다.
카이사리온은 결국 로마군에 잡혀 가서 처형되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고 하지요.
▼ 11/11 AM 신전의 외부에 빗물 저수탱크 수조 전경입니다.
고대에는 가뭄에 대비하여 빗물을 풍부하게 저장하었다고 합니다.
▼ 11/11 AM 신전 외부 벽화와 벽 윗쪽으로 빗물을 모으는 수로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1 AM 빗물을 모을 수 있는 시설이 수 천년전인 고대에도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 11/11 AM 이 시설은 고대 건축물에는 다 설치되어 있는, 나일강의 물높이를 측정하는
시설로 나일강의 범람을 사전에 인지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합니다.
▼ 11/11 AM 연꽃 문양이 벽화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고대 이집트에서 연꽃은 태양의 상징으로 신성시되었다고합니다.
기원전 2700년경 페르넵왕의 분묘 벽면 돌조각에 연꽃을 그릇에 꽂은 모습이 등장한 이래로
수많은 이집트 벽화에 손에 연꽃을 든 여자들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연꽃은 국왕의 대관식 때 파피루스와 함께 신에게 반드시 바쳐지는 꽃이었다고 하고,
현재 이집트의 국화도 연꽃입니다.
▼ 11/11 AM 오전에 덴데라의 핫토르 신전의 탐방을 마치고 크루즈에 체크인했습니다.
크루즈는 4박5일동안 이용하면서 나일강변을 따라 형성된 고대 이집트의 고대 문물들을
주간에는 탐방하고 야간에는 나일강을 따라 이동하는 편한 여행일정으로 채워졌습니다.
▼ 11/11 AM 룩소의 나일강가의 선착장에 접안해 있는 크루즈 부근 전경으로 거의가 사막이었습니다.
▼ 11/11 AM 크루즈의 객실은 5성급 시설이었고, 제일 윗층에는 수영장등 오락시설,
호프 및 바베큐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 11/11 AM 룩소의 크루즈 전경으로 관광객을 태우고 주로 아스원까지 나일강을 따라 이동하며
주간에는 정박, 야간에는 이동하는 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테베의 유적들?)
테베에는 4군데의 주요유적지, 즉 카르나크, 룩소르, 왕들의 계곡, 왕비들의 계곡이
있으며 그밖에 왕들의 장제전도 중요하다.
파라오들이 자신의 무덤을 은밀한 왕들의 계곡에 감춘 신왕국시대에는 무덤보다 장제전의
겉치레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으며, 왕들은 장제전을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기 위해
경쟁했다(매장).
장제전은 지은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건물이었지만
모두 테베의 최고신인 아몬에게 바쳐졌고, 신왕국 신전의 독특하고 핵심적인 형태를
갖고 있었다(이집트 종교).
장제전들은 테베 서부의 골짜기 가장자리에 세워졌는데, 대체로 지형에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죽 늘어서 있다.
초기에 지어진 장제전은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다.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하트솁수트 여왕의 신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제18왕조의 대규모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장제건축).
이 여왕의 건축가인 세넨무트는 BC 1490년경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옆에 있는 절벽
구석에 일련의 주랑과 3층으로 이루어진 안뜰을 설계했다.
골짜기 쪽으로부터는 스핑크스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통해 접근하도록 되어 있고,
앞뜰에는 나무와 덩굴식물이 심어진 정원이 있었다.
계단식 대지를 등지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양쪽에는 회랑이 있었고,
이 회랑의 지붕은 2줄로 늘어선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다음 층에 있는 안뜰 서쪽에도 이와 비슷한 회랑이 뻗어 있었으며,
아누비스 신과 하토르 여신의 부속 예배당이 있었다.
맨 꼭대기층의 테라스에는 기둥이 늘어선 큰 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양쪽에는 예배당 및 뒤쪽 절벽을 파서 만든 성소가 있었다.
주랑과 예배당에 새겨진 많은 돋을새김 조각은 더없이 아름답고 매우 흥미롭다.
거기에는 2개의 오벨리스크를 거룻배에 실어 아스완에서 카르나크로 운반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과 하트솁수트 여왕이 기적적으로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이 있으며,
여왕이 홍해 건너편에 있는 향료의 땅 푼트로 파견한 해상무역단을 묘사한 조각도 있다.
아멘호테프 3세가 지은 장제전은 테베에 있는 모든 신전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화려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세의 파라오들은 이것을 거의 완전히 파괴해 버렸고,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몇 개의 토대와 높이가 10m나 되는 거대한 돌기둥,
그리고 멤논의 거상(巨像)이라고 부르는 2개의 조상뿐이다.
멤논의 거상은 한때 장제전의 탑문 앞에 있는 통로 양쪽에 서 있었지만,
지금은 농경지 한가운데에 외로운 파수꾼처럼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조상들은 아멘호테프 3세를 나타내고 있다.
머리에 쓴 관을 합하면 높이가 거의 22m나 되는데, 각각 하나의 돌덩어리를 잘라서 만든
것이다.
북쪽에 있는 조상은 이따금 해가 뜬 직후에 기묘하게 높은 소리를 냈기 때문에 고대에는
'노래하는 멤논'으로 유명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그의 왕비인 사비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로마 관광객들이
이 놀라운 소리를 듣기 위해 테베를 찾았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 석공들이 이 조상을 군데군데 수리한 후로
'노래하는 멤논'은 두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쿠르나에 있는 세티 1세의 신전은 일부만 남아 있고 앞뜰과 탑문은 사라졌다.
이 신전의 일부는 세티 1세의 아버지인 람세스 1세의 장례식에 바쳐졌는데 세티의 아들인
람세스 대왕이 완성했다.
람세스 대왕의 모습은 신전의 돋을새김 조각에 묘사되어 있다 .
벽은 파라오들이 여러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종교적인
장면들만으로 장식되어 있다(벽화).
라메세움이라고 부르는 람세스 2세(람세스 대왕)의 장제전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옛날의
웅장함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넓은 바깥 탑문은 람세스 2세가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인들과 싸우는 활기 찬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고, 내부 탑문은 카데시 전투 장면과 수확의 신 '민'의 축제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오시리스로 가장한 왕의 커다란 조상들이 안뜰의 기둥들을 장식하고 있다.
첫번째 안뜰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이 있었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거상의 높이는 18m가 넘고, 무게는 1,000t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2번째 안뜰 너머에 있는 다주식 큰 방은 카르나크 신전의 큰 방과 비슷하다(다주실).
그 너머에는 기둥으로 떠받친 방들과 지금은 사라진 성역이 있었다.
장제전 주위에는 높은 벽돌담이 있고, 이 담장 안에는 둥근 천장을 씌운 건물의 유적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군수품 창고, 마구간, 작업장, 그리고 장제전 관리인들이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라메세움을 '오지만디아스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마디나트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신전은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장제전들
가운데 가장 시대가 늦고 가장 남쪽에 있는 신전이다.
전체적인 설계는 라메세움을 본떴다.
넓은 정면 탑문과 2번째 탑문으로 분리되어 있고 주랑으로 둘러싸인 바깥쪽 뜰과 안뜰,
기둥으로 떠받친 큰 방과 그보다 작은 2개의 전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방들로 둘러싸인
성역 등이 라메세움과 비슷하다.
다주식 큰 방은 일부가 파괴되어 있고 기둥들은 첫번째나 2번째 받침대 높이까지
허물어져 있지만, 다른 것은 잘 보존되어 있다.
안쪽 방들의 벽에는 왕이 신들 앞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전차를 탄 왕이 리비아인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쓰러뜨리고, 아모리족의 도시를 공격하며,
포로로 잡은 리비아인과 아시아인 및 해적들을 아몬 신과 무트 신 앞으로 끌고 오는
전투 장면들도 묘사되어 있다.
신전의 바깥 벽에는 이집트인이 펠레세트인(필리스티아인)과 셰르덴인 및 셰켈레시인
등 '해양민족'과 벌인 대규모 해전이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거대한 탑문의 바깥쪽 정면에 새겨진 돋을새김도 뛰어나다.
이것은 갈대가 우거진 습지에서 파라오가 들소를 사냥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신전 옆에는 궁전 유적이 있다.
신전을 둘러싼 담장 동쪽에 나 있는 높은 문에는 요새처럼 총안이 뚫려 있다.
신전 구내에는 작은 신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투트모세 3세와 하트솁수트 시대에
지은 것이지만, 그후 여러 파라오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및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변형되거나 덧붙여졌다.
또다른 신전은 사이스 왕조의 한 여왕이 지은 작은 장제전이다.
여기에는 신성한 호수와 우물이 있고, 라메세움과 마찬가지로 진흙벽돌로 지은 집들과
둥근 천장을 씌운 군수품 창고의 유적이 남아 있다.
마디나트하부 신전 남쪽에 있는 유적은 테베 서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말카타에 있는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 왕비의 궁전이 그것이다.
사실은 4개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하나가 '위대한 왕비'의 것이다.
왕은 왕비를 위해 이 궁전에 호수를 만들었는데, 유람선을 띄울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 호수는 굴착된 커다란 물웅덩이로 판명되었으며 지금도 말카타 남동부까지 뻗어 있는
흙무더기선으로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난 증거를 토대로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이 호수는 나일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테베 이외에도 대도시가 있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테베만큼 많은 유산을
남겨준 도시는 없다.
역사적 장면이 묘사된 테베의 거대한 신전들, 고대인의 일상생활과 종교적 믿음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무덤들, 그리고 오늘날 세계의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을 채우고 있는 그 무수한
골동품들은 모두 그 유산의 일면이다.
고대 테베만큼 고대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 유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 11/11 PM 크루즈에 체크인 및 중식후 인근의 카르낙신전으로 탐방길에 나섰습니다.
아래 모형은 카르낙신전 모형도입니다.
(카르낙신전?)
태양신 아몬(Amun) 신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트(Mut) 신전, 몬투(Montu) 신전,
콘수(Khonsu) 신전 등 룩소르(Luxor)의 수호신들을 모신 신전들이 기본 신전들로
배치되어 있으며, 투트모세3세(Tuthmosis Ⅲ)의 신전,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Ⅱ)
및 3세의 신전, 람세스 3세(Ramses Ⅲ)의 신전 등 다수의 소규모 신전들도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제12왕조(BC 20세기) 때부터 건축되기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가(BC 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계속
증축되어왔으나,
기본 구조는 제1탑문(Pylon)이 건설된 제25왕조(BC 7세기) 때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신전 배치는 남북으로 되어 있으나, 아문 신전은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 신전 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500m~600m 정도 크기이다.
아몬(Amun) 신전 제1탑문(정문) 앞 입구에는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스핑크스
(Sphinx)들이 도열한 스핑크스 대로가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룩소르(Luxor) 신전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아몬 신전의 제1탑문을 지나면 제22왕조 때 건축된 대광장(Great Court)이 나온다.
넓이가 약 8,650㎡에 달하는 대광장의 북쪽에는 아문 신, 무트 신, 콘수 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두었던 세티 2세(Seti Ⅱ)의 신전이 있고, 대광장의 남쪽에는 람세스 3세(Ramses Ⅲ)의
신전이 있다.
대광장을 지나면 제2탑문 앞에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람세스 2세의 석상을 볼 수 있다.
제2탑문은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헤브(Horemheb)가 건축을 시작하여
제19왕조인 람세스 2세 때 완성되었다.
제2탑문을 지나면 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이 나오는데 그 넓이는 5,356㎡로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성 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가 건축하였으며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Seti Ⅰ)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 완공되었다.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 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으며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 있다.
제3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 때 건축되었으며, 제4탑문은 투트모세 1세(Tuthmosis Ⅰ) 때
건축된 것을 세티 2세가 복원하였다.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는 작은 광장(Small Court)이
위치하며, 이 광장에는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다(높이 23m, 무게 143톤).
제4탑문 안쪽에는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있다(높이 27.5m, 무게 320톤).
투트모세 1세와 3세가 건설한 제5탑문과 제6탑문을 지나면 태양신 아문의 성소에 도달한다.
지성소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방되어 일출과 일몰 때 햇살이 아문 신의 지성소를 비출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지성소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실은 투트모세 3세가 건축한 것이며 내실은 기원전 3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ios II)왕조가 건설하였다.
지성소 남쪽에는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 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가 있고,
성스러운 호수 입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이 있다.
호수 입구 쪽에 핫셉수트 여왕의 누워 있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이집트 개황, 2012. 5., 외교부)
▼ 11/11 PM 카르낙신전을 사진으로 촬영해서 부착해 놓은 전경입니다.
▼ 11/11 PM 제1 탑문 입구에 있는 양의 머리에 사자 몸통을 한 스핑크스가 나타납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 1탑문 앞의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한 스핑크스가 도열해 있습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 제 1탑문 전경입니다.
제1탑문(Pylon)은 이집트 제25왕조(BC 7세기) 때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 입구 스핑크스 앞에 설치되어 있는 오벨리스크 전경입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세티2세가 세운 오벨리스크라 합니다.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대체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캔 붉은 화강암 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었다.
피라미드형 꼭대기보다 정4각형 또는 직4각형의 밑바닥을 더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가끔 꼭대기는 호박금이라고 불리는 금·은의 합금으로 씌우기도 했다.
몸체의 사면에는 주로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나 왕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을
담은 상형문자로 장식되었다.
일찍이 제4왕조(BC 2613경~2494) 때부터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 세워진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 때 세워진 여러 태양신전들의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3.3m에 불과해 비교적
나지막한 편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는 세소트리스 1세(BC 1971~1928)가
재위하는 동안 세워진 것으로, 한때 태양신 레(Re)의 사원이 있었던 카이로 교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다.
투트모세 1세(BC 1525경~1512)가 카르나크에 세운 1쌍의 오벨리스크는 높이 24m이고,
정4각형으로 된 밑바닥 길이는 1.8m이며 무게는 143t에 이른다.
카르나크에 있는 하트솁수트 오벨리스크의 아래쪽에는, 채석장에서 이 거석을 깎아내는 데
7개월이 걸렸다고 새겨져 있다.
테베에 있는 하트솁수트 사원에는 나일 강을 통해 나룻배로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장면이 나와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인부들은 흙으로 만든 경사로를 이용해 따로 떨어진 발판 위로
오벨리스크의 몸체를 들어올리고 그것을 좌우로 움직여 자리를 잡아주었다.
페니키아인과 카나안인 등 다른 민족들도 이집트인들을 따라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으나
1개의 돌덩이로 만들지는 못했다.
로마 제국 동안 이집트에서 지금의 이탈리아로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가 옮겨졌다.
적어도 12개 정도가 로마 시로 옮겨갔으며, 그중 하나가 투트모세 3세(BC 1504~1450
재위)에 의해 카르나크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광장에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고대 오벨리스크로서 높이는 32m, 밑바닥 4면체
길이는 2.7m이며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져 꼭대기의 4면체 길이는 1.88m이고
그 무게는 약 230t에 이른다.
19세기말 이집트 정부는 1쌍의 오벨리스크를 둘로 나누어 미국과 영국에 각각 하나씩
주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뉴욕 시의 센트럴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런던 템스 강변에 서 있다.
이 2개의 오벨리스크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져 있지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BC 1500년경 투트모세 3세가 헬리오폴리스에 세운 이 오벨리스크는 그와 람세스 2세
(BC 1304경~1237경)를 위한 비문에 새겨져 있다.
전형적인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1.2m이고 밑바닥은
직4각형으로 가로 2.36m, 세로 2.33m이고 무게는 180t에 이른다.
이런 돌기둥들을 채석해 세웠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역학적 천재성과 무한한
인력 동원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가 되고 있다.
오늘날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로서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워싱턴 기념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884년 워싱턴 D. C.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169m로서 전망대와 내부계단 및
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추고 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스핑크스 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 11/11 PM 양의 머리와 사자의 몸통으로 만들어진 스핑크스상입니다.
(스핑크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지평선상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스핑크스와는 다르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1탑문을 지나면 만나는 대광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광장(Great Court)은
넓이가 약 8,650㎡에 달하며, 대광장의 북쪽에는 아문 신, 무트 신, 콘수 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두었던 세티 2세(Seti Ⅱ)의 신전이 있고, 대광장의 남쪽에는 람세스 3세(Ramses Ⅲ)의
신전이 있다(아래그림중 5번).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에 설치된 석주 전경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의 석주 전경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 석주를 당겨서 찍은 사진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2탑문을 지나 만나는 스핑크스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을 지나 2탑문 앞에서 만나는 붉은 화강암의 람세스2세
동상입니다.
람세스2세 동상 앞에는 그의 딸 조각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이 많습니다.
(람세스2세?)
람세스 2세(世)(Ramesses II, 1303년 ~ 1213년)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재위: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3년)이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해 번영하였다.
그는 호전적인 히타이트와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그 후 그들과 평화롭게 되었다.
람세 2세, 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었다.
람세스란 이름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라 메스 시스'의 그리스어 음이다.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24세에 즉위하여 66년간
통치한뒤 90세에 죽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첫 번째 왕비 네페르타리와 여러명의 왕비 및 측실과의 사이에서 현자(賢者)로써
명성이 높았던 카엠와세드, 후계자였던 메르에프타하를 시작으로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양자이며 왕의 아들이란 칭호를 하사받은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무엇보다 람세스왕의 전용 활이라 불리는 커다란 강궁이 남아 있는데,
왕 이외에는 아무도 당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로 뛰어난 전사였던 그가 많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역시 그들은 왕의 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치세 전반기에는 히타이트와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었다.
기원전 1274년 카데쉬 전투에서 직접 출정하여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쉬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달라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58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했다.
또한 카데쉬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방해했기에 훗날 재앙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람세스 2세는 또한 나일 제 1강을 넘어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람세스 2세는 전승 기념비를 많이 세웠고, 현재도 기념비의 상당수가 남아있는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아는 후에 이집트에 동화되어 본가 이집트의 쇠퇴를 구원하는 형태의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는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실리를 추구할 줄도 알아서 히타이트와
휴전을 맺어 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또한 아부심벨 신전, 카르나크 신전, 라메세움 등의 거대한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파라오들에게 있어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알릴 수 있는 건축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록 출애굽기에서는 파라오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지만, 일부 성서학자들은 구약
출애굽기의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추정에 의하면, 람세스 2세는 모세와 함께 세티 1세의 밑에서 영재교육을 받았으며
모세와는 시종일관 파라오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람세스 2세가 20대 초반이던 시기에 모세는 40살이였는데 이 무렵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노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독을 쳐 죽여 혁명을
획책하였다.
하지만 모세의 지지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는 파라오 계승권을 박탈당한 채
광야로 도주했다.
그 이후 람세스 2세가 파라오로 즉위하였으며 모세가 감독관을 쳐죽이고 도주하던
시기로부터 40년 후 모세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다시 람세스 2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람세스 2세가 노동력 손실을 우려하여 해방요구를 거부하자 야훼는 람세스 2세를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으로 굴복시킨다.
그래도 람세스 2세가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자 모세는 자기 민족들을 이끌고 도주하였으며
람세스 2세는 이를 추격하지만 야훼가 모세를 통해 홍해를 바람으로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건너게 한다.
이를 뒤쫓던 람세스 2세는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쳐지자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다만 구약의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인지는 논란이 있으며, 이 정도의 시기를 이집트의
출애굽 시기로 보는 후기설에 따른다고 해도, 오히려 람세스 2세의 아들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또한 출애굽기의 내용은 역사적 진위여부가 부정되기도 한다.
다만 람세스 2세의 상징성 때문에 매스미디아에서는 람세스 2세가 출애굽 시기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매스미디아를 신뢰하지 않는 부류들은 람세스2세를 모세시대 한참 이후의 애굽왕 으로 본다.
그 이유로, 성경의 연대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이 이집트18왕조때의 상황과 일치함에서
알 수 있으며, 람세스2세의 무덤에 새겨진 문양에서도 반유대적인 형상을 찾아볼 수 있다.
▼ 11/11 PM 람세스2세의 움직이는 형태의 동상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제2탑문 전의 람세스 동상 전경입니다.
▼ 11/11 PM 정면에서 찍은 람세스2세 동상과 그의 부인인 네페르타리가 조각된 석상입니다.
이집트 파라오들의 석상에는 부인을 무릎위에 세워 놓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높이를
무릎 높이보다 낮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람세스2세와 네페르타리 석상은
그 불문율을 깬 유일한 석상이라고 합니다.
▼ 11/11 PM 제2탑문을 지나 열주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은 그 넓이가 5,356㎡로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성 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가 건축하였으며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Seti Ⅰ)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 완공되었다.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 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으며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 있다.
▼ 11/11 PM 제2탑문을 지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가 건축한,
열주전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전경입니다.
(아멘호테프3세?)
이집트가 번영을 누리며 평화를 향유하던 시대에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이집트와 누비아에
거대한 건물들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재위 5년째에 이집트의 최남단 아쿠야타라 불리는 지역에 대해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뒤 나일 삼각주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요를 제외하고 그의 통치시대는 평화로웠다.
이 소요는 하푸의 아들이며 왕의 가장 뛰어난 관리인 아멘호테프가 육상과 해상으로
조심스레 이집트로 접근해 들어와 진압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아버지인 투트모세 4세와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2세처럼 사냥을 하며
보냈으며, 자신이 세운 공적을 널리 알려 기념하기 위해 2번에 걸쳐 커다란 스카라베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왕쇠똥구리 모양의 부적)를 만들었다.
아멘호테프는 집권 초기에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인 티이와 혼인했다.
정비(正妃)가 된 티이는 뒷날 개혁군주가 된 아크나톤을 낳았다.
재위 11년째에 그는 룩소르의 북쪽 160㎞ 떨어진 티이의 고향 마을인 아흐밈 근처에
거대한 인공연못을 파게 했다.
그는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의 재능을 이용해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였다.
여기에는 장제전(지금은 왕의 거대한 동상만이 남아 있는 멤논의 거상)을 세우고 누비아에
대규모의 신전을 세우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대 테베 지역에서는 룩소르 신전의 주요부분을 완성했으며 카르나크의 신전에는 탑문을
새로 세웠다.
또한 멤피스에도 많은 건물을 세웠다.
그는 당시 다른 강국들과 외교문제에 대해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다.
이 사실은 그와 아크나톤 왕이 주고받았던 외교문서들을 모아놓은 '아마르나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가 황금을 가지고 아시아로부터 말·구리·청금석(靑金石)을 사들였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도 아멘호테프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미탄니(시리아 북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강력한 왕국) 및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히타이트 왕국의 공주와도
정략결혼을 시도했다.
그의 외교서신은 아시리아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리아의 여러
봉신들에게도 보내졌다.
통치 말기에 병이 들었을 때는 미탄니의 지배자인 투시라타가 그의 치료를 위해 신의
조각상을 이집트로 보낸 일이 있다.
말년에는 왕비인 티이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멘호테프가 죽은 후 티이는
투시라타와 직접 서신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 11/11 PM 열주전의 외곽열주 전경입니다.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Seti Ⅰ)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 완공되었다.
(세티1세?)
이집트 제 19왕조의 왕(BC 1290~79 재위).
단 2년밖에 통치하지 못한 아버지 람세스 1세를 이어 위대한 람세스 왕가를 실질적으로
연 인물이다.
통치 초기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 제18왕조 말기의 혼란기에 부분적으로 잃었던
이집트의 위신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팔레스타인 북부와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적어도 1번 이상 히타이트의 왕인 무
와탈리스와 싸웠다.
그뒤 레바논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를 흐르는 오론테스 강가의 카데시를 국경으로 한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집트의 번영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국경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광산과 채석장을 개발하고, 우물을 팠으며, 무너져 내렸거나
손상을 입은 신전과 제단을 다시 세웠다.
또한 아버지가 시작한 것으로 카르나크에 거대한 열주전(列柱殿)을 건립하는 일을
계속했다.
이 열주전은 이집트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장엄한 기념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물은 자신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아비도스에 세운 신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신전을 오시리스 신을 비롯해 6명의 다른 신들에게 바쳤으며 섬세한 부조물로
치장했다.
그때 칠했던 색깔 중 일부는 아직도 선명하다.
신전 뒤에는 그의 기념비로 보이는 건축물이 하나 서 있다.
세티의 무덤은 테베 서쪽에 있는 '왕들의 계곡' 중 가장 훌륭하다.
아들인 람세스 2세가 그보다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세티 1세를 제19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기고 있다.(다음백과)
▼ 11/11 PM 열주전의 열주를 확대한 전경입니다.
(열주전?)
이집트 카르낙신전이 이집트에서 최대 규모라는 것은 높이 23m, 둘레 15m의기둥들로
이루어진 대열주전에서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 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으며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있다.
▼ 11/11 PM 제3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 때 건축되었으며, 제4탑문은 투트모세 1세
(Tuthmosis Ⅰ) 때 건축된 것을 세티 2세가 복원하였다고합니다.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는 작은 광장(Small Court)이 위치하며,
이 광장에는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습니다(높이 23m, 무게 143톤).
(투트모세1세?)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93~1482경 재위).
이집트 제국을 누비아(지금의 수단)까지 확장시키고 또 시리아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왕족이 아니었으나 그는 즉위하기 얼마 전쯤에 선왕의 딸과 결혼해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했다.
또 테베에서 발견된 예배소를 통해 기간은 확실하지 않지만 선왕과 공동 통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위하던 날 그는 누비아의 총독에게 자신의 새로운 명칭과 대관식을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재위 2년째 투트모세는 선왕 때의 국경을 넘어 강을 타고 누비아 깊숙이 원정했다.
길따라 새겨져 있는 비문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나일 제4폭포를 지나 카니사쿠르구스에
새 국경을 세웠다.
이 모험은 원정에 참여했던 2명의 상(上)이집트인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누비아로 깊숙이 밀고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에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금은 제18왕조 때 상당히 채굴되었다.
또다른 이유는 제3폭포 근처에 중심을 두고 있던 적대세력 쿠시 왕국이 제17왕조 때
이집트를 크게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누비아 전쟁이 끝난 뒤 투트모세는 얼마 전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던 아시아의 침략자
힉소스족을 계속 쫓아가 시리아의 카르체미시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밀고
들어갔다.
투트모세는 이집트 국내적으로는 테베에 있는 중왕국의 아몬 신전을 완전히 보수했다.
신전 둘레에 담을 쌓고 서쪽 끝에는 사이에 조그만 회랑이 있는 2개의 탑을 만들었다.
바깥 탑 앞에는 2개의 오벨리스크를 새로 세웠다.
투트모세 때 신전의 대칭양식은 신왕국시대 신전의 표본이 되었다.
그보다 먼저 죽은 두 아들 중 하나는 군사령관이 되어 신왕국시대의 군사 작전
중심지였던 지금의 카이로 근처 멤피스에서 근무했다.
후대왕들은 이를 본받아 왕세자를 멤피스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군사기술을 익히게 했다.
또한 투트모세는 테베에 있는 왕들의 무덤 계곡에 자신의 무덤을 세우도록 한 최초의
왕인데 자신의 무덤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한 듯하다.
그밖에 테베 서쪽의 다이르알마디나에 무덤 건설에 동원된 일꾼들의 마을을 세웠으며,
선왕이 시작한 공동묘지 건설의 지휘조직을 완성시킨 것도 그의 업적으로 추측된다.
재위기간은 여전히 불확실하나 최고 9년까지 확인된다.(다음백과)
▼ 11/11 PM 열주전의 열주를 확대한 전경으로 열주에도 상형문자로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 11/11 PM 신전의 지붕에는 저렇게 두터운 돌로 지붕을 덮어놓았습니다.
현재 보이는 지붕은 일부가 파괴된 상태로 하늘이 열려 있습니다.
▼ 11/11 PM 투트모세1세의 오벨리스크 전경입니다.
왼쪽 뒤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핫셉수트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입니다.
(핫셉수트여왕?)
하트셉수트(Hatshepsut, 기원전 1508년 - 기원전 1458년)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5번째 파라오이다.
하트셉수트란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이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하트셉수트의 치세를 역대 파라오의 치세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치세로 본다.
하트셉수트의 재위 기간은 이집트의 여왕 중 가장 길다. (약 20년)
그녀에게는 하트셉수트라는 이름 외에도 파라오로서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황금의 호루스로서 신성한 모습을 지닌 여인(네테레트),창조의 권능이 풍부한 여인
(우세레트), 해마다 녹음을 일구는 여인(아우제트 렌푸트),파라오로서 신성한 빛의
규칙을 상징하는 여인(마아트 카 라),신성한 라의 딸로서, 아몬과 한몸이 된 여인
(케네메트문)
하트셉수트는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정비(正妃)와의 사이에서 둔 유일한 자식으로,
이복동생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다. 병약했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였을 때,
의붓아들인 투트모세 3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투트모세 3세는 그의 의붓아들인 동시에 배다른 조카이기도 했다.
하트셉수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여러 고대 사료는 그녀의 치세에 대해 매우 빈약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근대 초기 역사가들은 하트셉수트가 조카 투트모세 3세가 7살이던 기원전 1479년부터
21살이 되는 기원전 1458년에 이르기까지 투트모세 3세의 섭정으로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기술하였다.
현대 사학자들은 그녀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였고, 기원전 3세기의 역사가 마네토가
기록한 것처럼 21년 9개월 동안 통치하였다고 보고 있다.(다음백과)
▼ 11/11 PM 제4탑문 안쪽에는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있습니다
(높이 27.5m, 무게 320톤).
▼ 11/11 PM 아몬신전의 지성소에 대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
▼ 11/11 PM 신전의 벽면을 상형문자로 채우고 있는 고대 이집트 왕들의 이름들이라고 합니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
이집트 신전이나 유물들을 보다 보면 매나 뱀, 사람을 닮은 그림 같은 기호를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기호들이 바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했던 상형문자라고합니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의미가 다양해서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1799년 8월 이집트의 로제타 마을에서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 등 3개의 언어가 함께 새겨진
자그마한 돌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이 이 비석에서 세 언어를 비교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햇습니다.
만약 이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이집트 인이 남긴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거라합니다.
▼ 11/11 PM 신전의 벽면에 있는 람세스2세 벽화입니다.
▼ 11/11 PM 신전의 채색된 벽화는 그때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와 당시 생활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 11/11 PM 신전 외부에서 바라본 신전의 일부 건물입니다.
▼ 11/11 PM 이집트 고대 유적을 둘러보면 람세스2세 동상이 가장 많은 것 같았습니다.
▼ 11/11 PM 태양신을 모신 아몬신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몬신?)
이름은 이집트어(語)로 '감추어진 존재'를 뜻한다.
기독교에서 기도가 끝날 때 사용하는 '아멘'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로마자로는 '아문(Amun)·아멘(Amen)·아몬(Amon)·암몬(Ammon) 등으로 쓴다.
이집트 창세신화 가운데 '헤르무폴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헤르무폴리스는 나일강 남쪽에 있는 도시로,
지명은 그리스신화의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는 나우·헤·아문 등의 여덟 신을 숭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바다에서 활동하였다.
아몬은 여신 아마우네트(Amaunet)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하며,
주로 신왕국시대의 테베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뒤에 태양신 라(Ra)와 결합하여 아문라(Amun-Re) 또는 아몬라라고 불리면서 오랫동안
이집트인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아문라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아몬신에 대한 숭배는 테베를 수도로 하는 이집트 전성기(BC 2050년경부터 약 1,000년간)
를 통해서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의 아톤 숭배와 아몬 배척을 제외하고는 널리 행해졌다.
또한 제22, 23왕조 무렵부터 점차 남하하여 에티오피아의 나파타가 중심이 되었고,
이집트에서의 아몬 신앙은 오시리스 신앙 속에 동화되어 갔다.
아몬이라는 이름과 리비아 베르베르어(語)의 아만(aman:물)을 동일시하는 해석도 있다.
또한 그 이름에 관해서도 일종의 비의(秘儀)가 전해지고 있다.
무트와의 사이에 혼스(콘스)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 세 신을 모신 카르나크 대신전(大神殿)은 유명하다.
아몬신은 초기에는 숫양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동물로 표현되었는데,
후에는 위가 편편한 관(冠) 위에 한 쌍의 날개를 장식한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몬 [Amon] (두산백과)
▼ 11/11 PM 태양신을 모신 아몬신전에 기독교인들의 침공시 그린 기독교 벽화입니다.
▼ 11/11 PM 이 석주는 이집트형보다는 유럽양식으로 만든 석주라고 합니다.
▼ 11/11 PM 위의 석주를 확대해서 찍은 사진으로 신전의 기둥은 주로 사암을 사용하고,
외부에 석회석을 발라 그림이나 글을 부조한다고 하는데 이 석회는 시간이 갈수록 시멘트화
되어 더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 11/11 PM 이 곳은 옛날 가상 식물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아프리카 각국 침략시 보았던
식물들을 조각해두었다고 합니다.
▼ 11/11 PM 신전을 만들때 사용한 석재 한 개의 크기를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 11/11 PM 입구 반대쪽의 문 전경입니다.
▼ 11/12 PM 지성소 남쪽의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 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1 PM 지성소 남쪽의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 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 전경입니다.
▼ 11/11 PM 지성소 남쪽의 성스러운 호수 입구에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 전경입니다.
(이집트의 딱정벌레?)
왕의 벌레.파라오의 벌레라고 신성시 되는 이 딱정벌레들은 쇠똥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쇠똥구리가 이렇게 신성시 되는 것은 "부활"이라는 인식이 강하기때문입니다.
쇠똥구리의 신인 케프리가 신성시되는 것도 바로 이 인식때문이라고 합니다.
태양신 아문라의 항해로 세상의 시작과 끝을 생각한 이집트인들은
아문라의 배를 삼켜 항해를 종결시킬려는 거대한 뱀인 아페피의 위협에서 셀케트의
보호로 항해를 계속 지속시킴으로써 태양의 순환을 부활로써 받아들여 "일출,아침"이
생겨났다고 믿고 있는데,
쇠똥구리의 생태도 이와 같이 유사합니다.(많은 곤충류의 벌레들도 그러하지만..)
짝찟기를 통해 굴려놓으며 저장한 똥덩어리와 같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죽은듯있다가..
다음 활동기에 어둠의 지표를 뚫고 해를 맞이하는 이 벌레야 말로 "부활"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 11/11 PM 지성소 호수 입구 쪽에 핫셉수트 여왕의 누워 있는 오벨리스크가 있습니다.
▼ 11/11 PM 3탑문과 4탑문사이의 비밀의 광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을 떠나면서 바라본 람세스2세의 벽화 그림입니다.
▼ 11/11 PM 카르낙 신전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을 신전을 떠나면서 찍었습니다.
▼ 11/11 PM 카르낙 신전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룩소르 신전을 찾았습니다.
(룩소르?)
고대 이집트 도시인 테베유적지의 남부지역에 붙여진 이름이다.
테베 남부는 '아몬 대신전(大神殿)'을 중심으로 성장했다(아몬 레 신전).
아랍어로 알우크수르인 지금의 이름은 '궁궐'을 뜻하지만 로마의 '카스트라'(castra:
당시의 유적이 인근에서 발굴되고 있음)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제18왕조 말기 아멘호테프 3세(BC 1390~53 재위)는 나일 강 가까이 있는 이곳에 강둑을
따라 아름다운 신전을 지어 이집트의 주신(主神) 아몬과 여신 무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콘스에게 바쳤다.
제18왕조(그 이전은 아닐지라도)에 일찍이 그곳에 신전이 있었겠지만,
그곳에 먼저 있던 건축물 중 남아 있는 것은 작은 부속건물뿐이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몬 대신전은 투탄카멘과 호렘헤브가 완성했고, 람세스 2세가
증축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에 이를 좀더 증축했다.
이 신전의 다주식(多柱式) 강당은 한때 그리스도교 교회로 쓰이기도 했으며 신전의
서쪽으로는 콥트 교회 유적지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아몬 대신전은 주랑(柱廊)으로 둘러싸인 큰 중정(中庭)과 그 너머 여러 개의 강당 및
작은 방들로 되어 있으며 한 강당에 화강암으로 된 알렉산더 대왕의 사당이 있다.
기둥이 늘어선 큰 복도의 3면을 멋진 파피루스 다발 기둥이 2줄로 둘러싸고 있는데,
그 기둥머리는 산형화 모양의 파피루스 꽃봉오리를 본딴 것이다.
북쪽 끝에 탑문(塔門)들로 둘러싸인 출입구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대신 높이 16m의 기둥
14개가 늘어선 웅장한 주랑을 증축했는데, 이 주랑은 신전의 가장 뛰어난 구조물이며
이 기둥머리 역시 파피루스 산형화 모양이다.
이 주랑은 카나크에 있는 것과 비슷한, 기둥이 많은 강당의 중앙 회중석(會衆席)을 만들려던
것일 수도 있으나 측면복도가 없고 양쪽 아래를 벽이 둘러싸고 있다.
람세스 2세는 바깥 뜰을 증축했는데 2열 주랑의 각 기둥 사이에 거대한 자신의 동상들을
만들고, 축제와 시리아 전쟁 장면을 조각한 높은 탑을 세웠다.
이 탑 앞에 거대한 파라오 상들과 1쌍의 방첨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남아 있으나 다른 하나는 1831년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옮겼다.
신전의 앞뜰에는 이 지방 이슬람교 성자인 셰이크 유수프 알하가그의 이슬람 사원이 있는데
이 성자의 축제에는 '오르페 신의 아름다운 축제'라는 고대 의식을 흉내내어 배로 행진을 한다.
2월 19일에 갖는 이 축제중에 아몬 신이 카나크로부터 크고 아름다운 배를 타고 축제 복장을
한 테베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룩소르에 있는 다른 신전을 찾아온다고 한다.
대(大) 주랑 벽의 부조(浮彫)는 이 축제에서 신성한 항해 행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입구에 있는 오벨리스크입니다.
당초에는 한 쌍이 있었지만 프랑스 침략군에 약탈되어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입구에 있는 람세스2세 동상입니다.
▼ 11/11 PM 고대 룩소르의 신전이 있는 테베지역의 위치 안내도입니다.
고대에는 카르낙신전에서 약 2km대로로 룩소르신전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앞의 스핑크스 상이 도열해 있는데 고대에는 이런 형태로
약 2km거리의 카르낙신전까지 이어졌다고합니다. 현재는 발굴중에 있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아 오벨리스크 하단에 있는 원숭이상이 아닌가??????
▼ 11/11 PM 룩소르신전 중 람세스2세전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내 람세스2세 광장 안내도입니다.
▼ 11/11 PM 대리석으로 조성된 람세스2세 동상의 훼손된 전경입니다.
▼ 11/11 PM 기둥 사이마다 람세스2세 석조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일부에 세워진 이슬람의 모스크 전경입니다.
가이드의 표현을 빌리면 당초 모스크가 지어질 위치까지 모래로 덮혀 있어 신전의 규모를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발굴해보니 모스크가 신전위에 설치된 걸 알수 있었다고 하네요.
▼ 11/11 PM 룩소르신전내 람세스2세 전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에 대한 생활상들이 벽화로 남아있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에 대한 생활상들이 벽화로 남아있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 석상 뒷면의 상형문자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의 좌상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의 좌상의 측면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와 그의 왕비 네페르타리 좌상 전경입니다.
(네페르타리?)
네페르타리(Nefertari, 기원전 1290년경 ~ 기원전 1255년)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로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부인 중 한 명이다.
람세스 2세가 매우 총애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녀를 위해 아부 심벨에 따로 신전을 만들었다
한다.
근처에 그녀의 무덤이 있는데 네페르타리의 무덤인 QV66은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무덤이다.
그녀의 이름인 네페르타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 많은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네페르타리가 13살 때, 15살의 람세스와 혼인을 하였고 람세스가 파라오에 오르자
이세트노프레트(Isetnofret)와 함께 왕비에 책봉된다.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초기 20년간 네페르타리는 왕비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람세스 2세가 파라오에 오른 지 25년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하며 슬하에 아들인 왕세자
아문-헤르-케페셰프(Amun-her-khepeshef)와 딸 메리타멘(Meritamen)을 두었다.
네페르타리가 죽자 메리타멘은 아버지 람세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 전을 지나 아멘호테프3세 전으로 이동합니다.
아멘호테프3세는 카르낙신전의 제2탑문을 지나 열주전의 12개 열주를 세운 왕으로
이집트가 번성하던 시기의 왕이라고 합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아멘호테프3세 전 광장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을 기독교 번성시 곱트교도들이 성전으로 사용하던 시기의
기독교 벽화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지붕을 거대한 돌로 덮어서 마감한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의 재건작업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지,박쥐 및 새배설물 등을 청소하여 기존 채색벽화를 재생하는 방법을 설명한 사진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채색벽화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 11/11 PM 호루스신으로부터 생명을 불어받는 의식인 것 같습니다.
▼ 11/11 PM 동물을 미이라로 만드는 방법을 묘사한 벽화라고 합니다.
▼ 11/11 PM 일몰시 룩소르 신전 전경입니다.
▼ 11/11 PM 신전내 웅장한 석주들에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 11/11 PM 오벨리스크를 뒤로하고 룩소르 신전 탐방을 마칩니다.
▼ 11/11 PM 버스에서 바라본 해질녘의 룩소르신전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박물관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나일강의 석양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박물관 외부 전경입니다. 람세스상이 주를 이룹니다.
박물관 내부는 별도의 돈을 지불해야 촬영이 가능하므로........
▼ 11/11 PM 룩소르박물관 탐방후 크루저로 돌아와 선상부페를 즐긴후 선상에서 공연중인
이집트 민속 춤을 관람합니다.
▼ 11/11 PM 크루즈갑판에서 바라본 룩스르 부근의 사막산 전경입니다.
▼ 11/12 AM 예정에 없던 새벽 열기구 체험을 신청했습니다.
열기구 탑승장소로 이동할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위해 아침일찍 나오면서 바라본 크루즈입니다.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위해 강을 건너는 보트 위에서 일정을 촬영하는 팀입니다.
아직도 비디오테이프로 제작한다고하니,
USB에 저장해야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하니 우리에게는 판매를 기대하지 못하고....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위해 강을 건너는 보트 위에서 찍은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2 AM 따뜻한 공기를 주입한 열기구가 상승하고 있는 전경입니다.
▼ 11/12 AM 열기구를 띄우기 위해 램프에 불을 붙인 전경입니다.
▼ 11/12 AM 타고 있는 옆쪽의 열기구를 찍었습니다.
▼ 11/12 AM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왕들의 묘지가 있는 왕가의 계곡 전경입니다.
▼ 11/12 AM 사막 상공에 펼쳐진 열기구 전경입니다.
▼ 11/12 AM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발굴중인 유적지입니다.
▼ 11/12 AM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왕비들의 묘지인 왕비의 계곡 전경입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아멘호테프3세 신전으로 현재 발굴 중이었습니다.
멤논의 거상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11/12 AM 신전의 지붕은 두터운 돌로된 사각형 육면채로 덮여져있었습니다.
▼ 11/12 AM 오후에 가볼 멤논의 거상 전경입니다.
▼ 11/12 AM 열기구에는 25명 정도가 타고 체험을 합니다.
▼ 11/12 AM 낮게 떠서 마을 바로 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11/12 AM 멤논의 거상의 크기를 옆의 당나귀수레와 비교하면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 11/12 AM 아직 준비 중인 열기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농부와 단봉 낙타입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발굴중인 아멘호테프3세 신전 전경입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사막과 농경지와의 구분이 담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11/12 AM 열기구에서 바라본 사막에서의 일출 장면입니다.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마치고 크루즈로 오는 길에 바라본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2 AM 크루즈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인근의 하셉슈트 장제전으로 가는 길에
거쳐야하는 기념품가게 전경입니다.
▼ 11/12 AM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하셉슈트장제전 모형입니다.
규모의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셉슈트장제전?)
고대 이집트 문명을 낳게 한 나일강은 총길이가 6,695km나 되며 그 양쪽 기슭에
여러 가지 다른 자연 환경과 기후 조건 아래 무수한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터스(Herodotus)의 말대로 이집트인들은 '지나치게 종교적'
이었으며 그들의 독특한 영혼관(靈魂觀)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건축물들을
짓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이며 잘 알려진 예가 고왕국(古王國, 기원전 3100~2181년경)의 피라미드
일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나일강 서안(西岸)에 위치한 고대 도시 테베(Thebes)의 데엘바흐리
(Deir-el-Bahari) 산 밑에 있는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
기원전 1458년경) 역시 그 못지 않게 이집트인들의 사후(死後) 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피라미드가 고왕국 파라오(Pharaoh, 신격화된 이집트 왕들을 지칭하는 말)들의 사후
세계를 위한 구조물이었다면 바위 절벽을 뚫고 축조된 무덤들은 중왕국(中王國, 1567년까지)
왕들의 무덤이었으며,
신왕국시대(기원전 약 1085년까지)에는 왕들의 무덤을 골짜기에 숨겨놓고 거기서 약간
떨어진 곳에 대규모 신전을 짓는 풍습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피라미드에 많은 보물들이 비장(秘藏)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잘
알려져 이들은 처음부터 도굴(盜掘)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왕들은 계속 무덤의 형태를 변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등극하자마자 무덤이나 자신들의 사후를 위한 장제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육신과 영혼(ka)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영혼은 육신 사후에도
계속 그 시체에 들어가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을 방부(防腐) 보존하는,
즉 미라로 만드는 기법을 발달시켰다.
또한, 미라화(化)한 시신이 그래도 훼손될 것에 대비하여 왕의 형상을 돌로 만들어
무덤 안에 넣어두기도 하여 ka로 하여금 언제나 깃들일 장소를 보장하고 육신이 생존시와
다름없는 편안한 생활을 영유하도록 갖가지 부장품을 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특한 영혼관으로 인하여 당시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인류 문화사를
위하여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집트 문명에 관한 연구는 나폴레옹이 1798년 이집트에 들어가 저 유명한
로젯타 스톤(Rosetta Stone)을 찾아온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돌에는 세 가지 언어로 된 명문(銘文)이 적혀 있었으며, 그 중 그리스어가 있었으므로
이를 기초로 19세기 초에 프랑스 언어학자 샹폴리옹(Champollion)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무덤이나 건물들의 벽을 가득 채운 상형문자 기록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20세기 초기부터 좀더 과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핫셉수트 여왕(재위 기간 기원전 1479~1458년)은 신왕국 제18왕조(기원전 1567~
1320년)의 다섯 번째 통치자이며 이집트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다.
그녀는 남편인 투트모시스 2세(Thutmoses Ⅱ)의 사후 자신의 친자(親子)가 아닌
어린 왕이 등극하자 실권을 쥐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역사상 여자가 왕이 된 예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모든 조각상이나 부조상에
남장(男裝)의 형태로 나타난다.
제18왕조는 이집트 역사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토가 확장된 때였다.
즉, 남쪽으로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Nubia : 현재의 Sudan)까지 정복하였고 핫셉수트
여왕대에는 푼트(Punt : 현재의 Somalia)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신왕국 왕들의 무덤이 밀집해 있는 '왕들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 근처의
데엘바흐리에 위치한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태양신 아문(Amun)과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이중 기능을 가진 건물이므로 엄격히 말하면 신전-사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건물은 모형에서 보는 것처럼 각각 램프로 연결된 세 단계의 열주식(列柱式) 테라스
구조로 되어 있다.
모형(핫셉수트 여왕 신전 및 다른 신전들의 모형 참조)에 표시된 다른 신전들은 현존하지
않으며 이 신전 역시 수만 톤의 모래 속에 몇 세기 동안 묻혀 있다가 재발견된 것이다.
이 신전은 1961년부터 폴란드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제일 위의 열주식 뒤로는 역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사각형의 공간이 있고 그 뒤로
바위산을 뚫고 들어간 곳에 신전의 성역(聖域)이 위치한다.
이 곳은 태양신의 돛단배(bark)를 두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 공간에서 더 뒤쪽으로 제2의 성역이 후대인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어졌으며 이곳은
신격화된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제일 위층 테라스의 기둥들 가운데 몇 개는 지하의 신(神)
오시리스(Osiris)의 형태로 표현된 여왕 자신의 조각상으로 되어 있다.
다른 기둥들은 사각형, 또는 16각형으로 되어 있다.
열주식 기둥 뒤의 내부에는 여왕의 치적(治績)과 생애를 미화한 부조들이 있다.
이들 부조나 신전 앞에 있던 여왕의 얼굴 모습을 한 스핑크스들은 그를 미워한 세력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몇 개는 조심스럽게 재구성되어 카이로 박물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장제전을 무엇보다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뒤의 천연 배경인 바위산이다.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드높은 바위 절벽은 신이 만든 열주식 구조인 양 대략
수직으로 파인 결이 또렷하여 그 아래 신전의 열주식 기둥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세계의 모든 건축이 어떤 형태로든지 자연과의 조화를 도모하기 마련인데 이 건축물처럼
그 자연 배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조화를 이루면서도 인위적인 구조물이라는 것을 변별할
수 있는 건물은 아마 다른 곳에서 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 세네무트(Senemut)는 여왕의 총애하는 신하이자 애인이었다고도
하며 그 공로로 여왕의 무덤 가까이 묻히게 되었다고도 한다.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이다.
고왕국 이전의 이집트 무덤 건축에서는 아치와 궁륭식 천장이 일부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기원전 3000년경 이후에는 모두 이 건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기둥과 상인방 구조
(post & lintel system)를 사용하였다.
직선적인 석재 기둥의 장엄하고 엄숙한 느낌이 신전 건축에 더 적합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건축 양식이 후에 그리스 열주식 신전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카이로에서 이곳까지는 비행기로, 또는 유람선으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두 방법이
있다.
대개 왕복 중 편도는 배를 이용하게 되어 있으며 이 뱃길이야말로 수천 년의 세월이 멈추어
선 듯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세계를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 영원을 향한 집념
(내가 본 세계의 건축, 2004. 7. 10., 대원사)
▼ 11/12 AM 하셉슈트장제전 실제 모습입니다.
모형에서 보는 건물들 중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되고 없습니다.
▼ 11/12 AM 거대한 바위산에 둘러쌓인 모습이 장관입니다.
▼ 11/12 AM 고사목이 한그루 있었는데 이는 하셉슈트여왕이 푼트지방(현재의 소말리아)
원정시 가지고 왔던, 벽화를 그릴 때 안료를 만들어 사용한 나무라고 합니다.
▼ 11/12 AM 유적지가 넓어 이동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 11/12 AM 장제전 앞의 하셉슈트여왕의 얼굴을 가진 황금색 스핑크스입니다.
▼ 11/12 AM 각 층으로 연결되는 램프를 통해 건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1/12 AM 기둥에는 남장을 한 오시리스형태의 하셉슈트여왕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습니다.
▼ 11/12 AM 건물 왼쪽의 사각기둥이 있는 하토르여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하토르여신전이라고 합니다.
▼ 11/12 AM 하셉슈터여왕시대 원정군의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라고 합니다.
▼ 11/12 AM 소의 형태로 변한 하토르여신입니다.
▼ 11/12 AM 건물터였던 곳으로 현재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 11/12 AM 나일강의 배가 벽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 11/12 AM 장제전 앞에는 매의 형태를 한 호루스의 석조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호루스신?)
하이집트의 다산의 신이자 죽은 왕들의 화신인 오시리스와 보호의 여신인 이시스의
아들이다.
매를 상징하는 호루스는 모든 자연물과 동일시한 신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눈은 태양과 달을 상징한다.
네켄에서 왕은 호루스의 화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즉 살아 있는 왕은 호루스와
동일시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호루스와 오시리스의 동생인 세트가 각각 하이집트와 상이집트의
신이었다.
그러나 세트는 오시리스를 살해했고 호루스와 적이 되었다.
이집트의 왕좌를 놓고 호루스는 세트와 싸워 승리했고, 이집트의 새 왕이 되었다.
이를 통해 왕권신성의 개념이 신화의 교의 속에 정립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호루스를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건조된 호루스 신전이 이집트 에드푸에 있다.
▼ 11/12 AM 장제전 앞에 있는 매의 형태를 한 호루스 석조물의 뒷모습입니다.
▼ 11/12 AM 오시리스형태의 남장을 한 하셉슈트여왕 조각상으로 신과 동격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 11/12 AM 장제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은 아문신의
기도실입니다. 현재 기도실 주위 공사로 어수선합니다.
(아문신?)
아문 (Amun 또는 아몬 Amon, 암몬 Ammon, 아멘 Amen)은 고대 이집트 신화의
신의 이름으로서 "숨겨진"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문은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테베에서 숭배되던 바람과 공기의 신으로서
후에 태양신 라(레)와 합쳐진 후 아문-라 또는 아문-레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신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기독교에서 기도가 끝나고 외치는 아멘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에 입성한 기원전 332년, 고대 이집트의 문명을
보고 스스로를 ‘아문의 아들’이라고 칭하였다.
아문은 주요 신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제우스, 로마인들은 주피터와 동일시하였다.
▼ 11/12 AM 장제전 탐방을 마치고 아침에 지나왔던 기념품가게를 지나옵니다.
▼ 11/12 AM 장제전 탐방 후 인근의 회교 사원입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
신왕국 시대에 테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룩소르 시 서쪽 다이르알바리의
바위산 깊은 계곡 속에 역대 파라오들이 건설한 공동 묘지가 있다.
이곳이 바로 투탕카멘 왕의 유적으로 유명한 '왕들의 계곡'이다.
'왕들의 계곡'이라는 명칭은 로제타스톤(비문이 새겨져 있는 고대 이집트의 돌.
이 비문으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옮긴이)
해석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의 고고학자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명명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거듭되는 도굴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무덤을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엘쿠른 산 계곡에 조성했던 것이다.
이곳은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쉽사리 도굴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 지역에 묘를 조성한 것은 제18 왕조 토트모세 1세부터 제20왕조 람세스 11세까지의
역대 파라오들로, 현재까지 계곡 동쪽에서 58기, 서쪽에서 4기 등 모두 62기의 묘가
발견되었다.
왕들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바위를 파서 만든 암굴묘이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위에 조그만 굴을 뚫거나 계곡 밑바닥을 파서 조성한 이 무덤들은,
입구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의 거리가 100미터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이다.
무덤 내부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계단과 경사로, 부속실(사적인 생활용품들을 넣어둔 방),
전실(종교 의식 등에 사용되는 도구를 넣어둔 방), 현실(관을 넣어둔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제18~19왕조에서 조성한 무덤에는 도굴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샤프트'라
불리는 깊은 수직갱(수직으로 떨어지는 깊은 갱)을 만들어놓은 것이 많다.
전실을 눈에 띄게 만들고, 주묘는 깊은 암굴 속에 숨기는 등 도굴 대책을 세웠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발굴된 무덤 중에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투탕카멘 왕의 무덤뿐이었다.
제20대 왕조 람세스 11세의 무덤이 마지막으로 조성된 후 왕들의 계곡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B.C.30년) 때까지는 그리스와 로마의
여행자들이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들의 계곡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세기 들어서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따라온 고고학자들이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을 발굴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영국인 탐험가 조반니 베르지오니가 람세스 1세와 세티 1세의 무덤을 발견하자,
세계 각지에서 고고학자와 탐험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하워드 카터에 의해 투탕카멘 왕의 무덤이 발견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왕들의 계곡에 들어 있던 보물들은 고고학자들이 발견하기 전에 이미 그 대부분이 도굴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왕들의 계곡이 가치가 떨어지는 유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도굴당한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보물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벽화였다.
제18왕조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는 『지하세계의 서(書) Book of That Which
is in the Underworld』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하세계의 서』는 지하세계[冥界]에 내려간 태양신이 새벽에 다시 솟아오르는 과정(재생)을
묘사한 것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 제19왕조 세티 1세의 무덤에서는 앞서 말했던 『지하세계의 서』와 천체도, 다수의 종교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천체도는 상당히 뛰어난 것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좌를
통해 시간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제20왕조 람세스 6세의 무덤에서는 세티 1세의 무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종교 문서와
『낮의 서와 밤의 서』라 불리는, 태양신의 움직임을 기록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또 대지의 신으로서 지하세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인 아켈을 칭송하는 벽화도 남아 있었다.
이렇게 왕들의 무덤에는 고대 이집트 세계를 알 수 있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
비록 도굴꾼들이 보물은 털어갔지만 고대 이집트의 문화만큼은 약탈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들의 계곡 [vally of the king] (고대유적, 2007. 6. 4., 도서출판 들녘)
▼ 11/12(일) AM 왕가의 계곡의 묘 위치도입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입구의 출입 통제소로 위험 물건 등의 반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 11/12(일) AM. 출입통제소 통과후 이동거리가 길어 연결차량을 이용해서 이동해야 합니다.
▼ 11/12(일) AM. 많은 무덤 중 가까운 곳 한 곳을 다녀오기로 합니다.
▼ 11/12(일) AM 19왕조의 메란타프8세 묘지 설명입니다.
▼ 11/12(일) AM. 20왕조의 람세스9세 왕의 묘지 설명입니다.
▼ 11/12(일) AM. 람세스9세 묘지 입구 전경입니다.
▼ 11/12(일) AM. 투탕카멘와의 묘지이지만 현재 보관한는 것이 아무것이 없다고해서 통과힙니다.
▼ 11/12(일) AM. 20왕조의 람세스4세의 묘지 설명입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 전경입니다. 계곡 안에 왕들의 묘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내 왕들의 묘지 위치안내도입니다.
▼ 11/12 PM 왕가의 계곡을 나와 멤논의 거상을 탐방합니다.
탐방객들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한 개의 돌로 이렇게 조각했다니....
▼ 11/12 PM 거상의 어깨에는 비둘기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 11/12 PM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크루즈로 복귀하였습니다.
▼ 11/12 PM 선상에서 수영 및 썬탠을 즐기는 외국인들을 보니.....
▼ 11/12 PM 거상의 탐방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니 수건으로 만들어 놓은 하트가 반깁니다.
▼ 11/12 PM 이건 새의 모양입니다.
▼ 11/12 PM 저녁식사후 크루즈는 운항을 시작하여 에두프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옆에 붙은 작은 보트는 크루즈를 따라 다니면서 특산물 장사를 하는 장사꾼입니다.
▼ 11/12 PM 선상에서 찍은 나일강의 일몰 전경입니다.
▼ 11/12 PM 갑문식 운하인 에스나운하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 11/12 AM 아침에 기상하여 선상에서 조식후 마차로 에두프의 호루스 신전으로 이동합니다.
▼ 11/12 AM 에두프의 마을 전경입니다.
(에두프?)
나일 강 서안에 있는 도시이다.
고대에 이 도시의 주신(主神)은 베데티테라고 불린 날개 달린 원반의 호루스(Horus of
the Winged Disk)였다.
호루스의 부인은 단다라의 해더 여신으로, 신왕국시대에는 해마다 공식방문 의식으로
이 여신상을 배에 실어 이드푸로 실어오곤 했다.
고대 이드푸의 주요기념물은 사암으로 만든 길이 138m, 너비 76m의 거대한 호루스 신전으로,
제18왕조(BC 1567~1320)의 사원이 있던 자리에 건립된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BC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짓기 시작하여 BC 57년 프톨레미 11세가
완성했는데, 이 건설작업은 상이집트 지방에서 민족주의 반란이 일어나 자주 중단되었다.
양각의 글과 장면들로 장식된 벽은 종교적 형상을 한 민족주의와 사원 예배의식의 독특한
모음집과도 같으며,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설계는 이집트 사원의 고전적 전례이기도 하다.
고대 도시에 흩어져 있는 많은 무덤과 공동묘지에서 많은 오스트라카(Ostraka:글씨가
새겨진 그릇 조각)와 파피루스에 쓴 문서들을 발굴했으며, 도시의 서쪽과 북쪽에 있는
네크로폴리스(死者의 도시)에서는 고왕국 관료들의 석실분묘들과 중왕국의 많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현대의 이드푸는 곡물·면화·대추야자열매 등의 거래 중심지이며, 제당공장이 있다.
나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이면서 카이로-아스완 철도선과 연결되었다.
▼ 11/12 AM 마차로 호루스 신전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입장료가 100이집트파운드이므로 우리 돈으로 6100원 정도로
적은 돈이 아닙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전경입니다.
이집트의 신전 중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신전이라고 합니다.
(호루스신?)
그의 눈은 태양과 달이다.
그는 원래 하(下)이집트의 신이었다.
그러나 네켄(그리스어로는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왕이 호루스의 화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집트가 네켄 출신 왕들에 의해 통일된 후 이 개념은 교리로 받아지게 되었다.
이집트 왕의 5개 별칭 중 첫번째가 호루스였고, 그 별칭으로 인해 왕과 호루스는
동일시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호루스와 세트 신(神)은 각각 하이집트와 상(上)이집트를 대표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BC 2400년경 오시리스 숭배가 이집트 전역에 퍼졌을 때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아들로서
신화 속으로 들어왔다.
자격을 갖추게 되자 호루스는 세트의 적대자가 되었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살해했고 호루스의 유산인 이집트의 왕좌를 놓고 호루스와 경쟁했다.
신화에 의하면 호루스는 세트를 패배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통치권을 장악했다.
싸움에서 호루스의 왼쪽 눈(즉 달)이 상처를 입었는데(이것은 달의 형상에 대한 신화학적 설
명이다) 신 토트에게 치료를 받았다. 회복된 눈의 모양은 강력한 부적이 되었다.
후대에 호루스는 많은 곳에서 지역 신으로 나타났고, 다양한 이름과 별명을 취했다.
예를 들어 하르마키스(하르엠아케트, 지평선 위에 있는 호루스)·하르포크라테스
(하르페크라드, 어린아이 호루스)·하르시에시스(하르페에세,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
하라크테(수평선의 호루스) 등이며, 카움움부(콤옴보)에서는 하로에리스(하르웨르,
연장자 호루스)라고 불렸다.
후에 호루스는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아폴로와 동일시되었고,
에드포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아폴리노폴리스(아폴로의 도시)라고 불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주요 호루스 신전들은 이집트 민족주의의 중심지가 되었고,
세트를 항복시킨 것은 점령자에 대한 이집트인의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에드포에서는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 신전에서의 일을 방해했지만, 호루스를 하마 모습의
세트를 창으로 찌르는 파라오로 묘사한 제의적 연극이 주기적으로 상연되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탑문 전경입니다.
(호루스신전?)
'하늘의 주인'인 호루스 신이 고대 이집트의 주요 신들 중 하나가 되자,
이후 모든 파라오는 자신을 '살아 있는 호루스', 지상 만물의 올바른 질서의 수호자와
동일시했다.
호루스를 둘러싼 신화는 서로 차이를 보이지만,
그는 주로 이시스와 오시리스 신의 아들로 숭배된다.
그는 종종 매의 머리를 한 인간, 매의 머리를 한 동물, 혹은 매 그 자체로 묘사된다.
에드푸 신전의 주 안뜰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조각상에서 호루스는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위풍당당한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호루스 신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신전에 있는 비문들은 고대 이집트의 의식과 축제, 사제들, 그리고 신화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현재의 신전은 보다 먼저 세워졌던 신전을 대체한 것으로, 여러 대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자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리스 출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집트의 신들과
신앙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이 신전은 180년이 지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입구 관문에는 호루스와 다른 신들, 그리고 적을 무찌르는 모습의 파라오가 나타나 있다.
관문 위에는 태양의 원반이 있는데, 양쪽으로 뱀이 둘러싸고 있다.
신전의 내부 성소에는 안에 황금으로 된 호루스 상을 감추어 두었으며 연마한 돌로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신전에는 방대한 도서관과 향수 제조소가 있었는데,
공장의 벽에는 향수와 향(香)의 제조법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일 년에 한 차례, 호루스의 어머니인 이시스 여신의 조각상이 북쪽 덴데라에 있는 그녀의
신전으로부터 금을 입힌 배에 실려 나일 강을 따라 에드푸로 실려 왔다.
그녀는 강변에 늘어선 환희에 찬 군중들 사이를 지나 '아름다운 만남의 축제'에서 행복과
환락 가운데 상징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생명을 주러 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루스 신전 [Temple of Horus]
▼ 11/12 AM 호루스신전 탑문에는 호루스 신화에 대한 부조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호루스 신전과 부조?)
호루스 신전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6대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기간에 건립되었습니다.
신전은 BC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BC 57년 유엘게테스 1세 때 끝났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5세 때의 불안한 상황으로 대부분의 공정은 주로 이 기간 중의 20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호루스와 세티 신 사이에 펼쳐졌던 거대한 전적지에 신전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의 신전은 오랜 시기에 걸쳐 이 곳에 연속해서 세워졌던 신전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신전 건축물은 호루스 상의 보호물로 고대의 초원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 곳에는 일찍이 지금의 건물 쪽으로 90도 각도로 람세스 2세의 작은 탑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 열주실을 포함한 주 신전은 1860년 마리에뜨(Mariette)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만남의 축연과 호루스와 그의 부인 하토르의 결혼기념일을 묘사한
거대한 부조들이 있습니다
이들 부조들은 대부분 첫 탑문 안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름철 세번째 달에는 성직자가 덴데라 신전에 있는 하토르의 범선(의식상의 배) 위에
그녀의 조상을 모셔두었다가 호루스와 하토르가 부부애를 나누기 위해 찾았던 것으로
믿었던 에드푸 신전으로 가져갔습니다.
매일 밤이면 신과 여신들이 탄생지(Mamissi)나 범선의 정박소에서 은거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아직까지도 탄생지로 가는 열주로 된 입구가 있으며,
주 신전의 바깥쪽 부조들은 여전히 색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그림들은 호루스와 하토르의 아들 하르소모투스(Harsomtus)의 탄생에 관한
의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 신전의 탑문은 약 36m 높이로 적들과 싸움을 벌이는 파라오의 전투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탑문 안의 열주 안마당에는 잘려진 원주들이 있고, 이것은 대 열주실로 이어집니다.
안마당 양쪽에 있는 문은 신전 뒷쪽과 벽면 안쪽으로 연결됩니다.
이곳에는 민간의 기록에서 나온 땅의 기부를 기록하고 있는 비문들과 호루스가 세티에게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호루스의 승리(10개의 작살)'로 불리우는 의식이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세티의 상징인 하마를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제1 열주실의 전면에는 호루스와 하토르를 경배하는 그림이 있고, 이곳에 매의 형상을
한 약 3m 높이의 하토르 신의 거대한 조상(맞은 편 호루스상은 파괴되었음)이 있습니다.
18개의 원주가 있는 대 열주실로 들어서면 1백여년전에 세워진 빛의 사용에 대해
주시하게 됩니다.
빛의 흐름과 기울음이 신비감을 느낄 만큼 아주 조화롭습니다.
홀 안쪽으로는 작은 방들이 있는데, 서쪽의 방은 예복을 입던 곳이고,
동쪽의 방은 성직자들이 그 날의 종교 의식을 준비하던 도서관이 있습니다.
이 홀 안에는 신전의 건립 의식을 포함해 신에게 봉납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 열주실을 지나면 제2 소 열주실이 나타납니다.
이 곳은 성직자들이 순결한 신성수를 얻었던 '나일의 방'이라 부르는 곳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덴데라의 신전과 비슷한 배치를 보여줍니다.
서쪽의 방에 있는 문은 매일 호루스의 조상을 바르는데 사용되었던 작업장과 봉납품을
저장하던 보고가 있습니다.
제2 열주실을 지나면 봉납소가 나타나고, 이어 전실(前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성소(至聖所)가 있습니다.
이 곳에는 넥타네보 2세가 지은 화강암으로 된 안치소가 있는데, 이 신전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입니다.
안치소 위에는 약 60cm 크기의 황금으로 장식된 목조 호루스 상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조상은 성직자들에 의해 옷이 입혀지고, 씻겨주고, 성유를 바르는 등 인간처럼
보호되었습니다.
지성소는 사당과 방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북쪽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호루스의
유물들이 저장되어 있었던 방들이 있는 '민의 사당'이 나타납니다.
신들의 왕관의 방, 오시리스의 방, 베스트의 방, 오시리스의 무덤, 승리자의 방(호루스),
복원된 의식용 범선, 콘수와 하토르의 사당, 태양신 레와 날개를 펴는 사당 등 주로
부활을 향해 여행하던 영혼들의 길을 수호해주었던 암사자 메히트 신에게 받쳐진
것입니다.
동쪽 사당의 앞면에는 덴데라의 태양의 뜰과 같은 '새해의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의 천장에는 누트 신의 모습과 함께 하루 12시간을 지나는 태양의 배의 여정을
묘사해놓고 있습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정면에서 바라본 탑문 전경입니다.
하토르와 호루스 새겨져 있는 신전 외곽벽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탑문 입구 좌우에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석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2 AM 관문위에 태양의 형상을 하고 있는 원반에 뱀의 형상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 11/12 AM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신입니다.
▼ 11/12 AM 이곳 벽화에도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인들의 벽화훼손이 심각했습니다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석상의 배경으로 하토르여신과 호루스신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 11/12 AM 신전 전 광장과 신전 전경입니다.
새들의 신전 훼손을 막기위해 앞에는 그물을 쳐놓은 상태입니다.
▼ 11/12 AM 신전 기둥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기둥 벽화 전경입니다.
생명의 문을 여는 앙크십자가는 어느 신전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석문을 지나면서 바라본 윗쪽 벽화 전경입니다.
▼ 11/12 AM 향수를 붓고 있는 호루스신 등의 벽화 전경입니다.
▼ 11/12 AM 신전 문앞을 지키고 있는 한 쌍의 호루스 석상중 좌측 석상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안 광장에서 바라본 외부 전경입니다.
▼ 11/12 AM 왼쪽에 설치되어 있는 호루스 석상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께 선물을 바치고 있는 부조그림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에 상형문자로 향수를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 11/12 AM 호루스의 어머니인 이시스여신의 조각상을 싣고오는 나일강의 배 벽화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지성소에 있는 신성한 배의 모형입니다.
▼ 11/12 AM 이곳에도 나일강의 범람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나일강 수위계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 11/12 AM 이집트의 신전에 잇는 부조를 보면 이렇게 전부 배꼽을 과대표현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인지??????
▼ 11/12 AM 호루스신전의 규모를 유추할 수 있는 벽면의 높이입니다.
▼ 11/12 AM 룩소지방을 안내한 현지인 가이드 인물사진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 부조로 나일강에서 그물을 이용 어로작업하는 내용과 창으로
하마인지 물개인지를 잡는 부조내용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 벽에 난 구멍에는 참새들의 보금자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 천정이 시컿게 그을린 자국은 이교도 침입으로 이곳이 한동안
생활터전으로 이용되면서 그을림의 흉터라고 합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의 부속건물들이 많았지만 훼손이 심한 상태였습니다. 그 이유는.....
▼ 11/12 AM 신전 경내에 지어진 일반인들의 주거지로, 신전의 자재로 지었기때문이라고.....
지금은 신전의 정화를 위해 주변 민가를 철수시키고 복원작업중이었습니다.
▼ 11/12 AM 크루즈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가 있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 11/12 PM 크루즈로 돌아놔 중식 후 숙소로 들어오니 오늘은 타올로 악어를 만들어 놨습니다.
▼ 11/12 PM 크루즈가 에두프를 떠나 콤옴보로 이동합니다.
나일강의 풍요로움이 여기서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11/12 PM 나일강의 풍요로움 반대쪽은 사막산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강변을 따라 화물열차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 11/12 PM 콤옴보 이동중에 바라본 나일강의 어부들 전경입니다.
▼ 11/12 PM 나일강의크루즈 전경입니다. 룩소르에서 시작해서 아스완까지 이동합니다.
▼ 11/12 PM 나일강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중 우측은 녹지와 녹지넘어 사막지형입니다.
▼ 11/12 PM 우측 강안에는 물소와 녹지 그리고 회교사원의 첨탑이 조망됩니다.
▼ 11/12 PM 곳곳의 강안(江岸) 초지에는 물소나 말들의 방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 11/12 PM 나일강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흐름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습니다.
▼ 11/12 PM 우리가 타고 있는 크루즈의 상부 데크 전경입니다.
▼ 11/12 PM 콤옴보 항에에 도착하여 선상에서 신전을 조망합니다.
콤옴보 신전 앞에 진열된 이집트 전통의상의 칼라풀한 색상들입니다.
(콤옴보?)
아스완 주에 있는 아스완 하이 댐에서 북쪽으로 48㎞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카움움부 시는 농산물시장이자 사탕수수 가공 및 조면업 중심지로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주요간선도로와 카이로-아스완 철도 사이에 있는 나일 강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동쪽에서 나일 협곡이 북에서 남으로 길이 32㎞, 너비 16㎞에 달하는 계곡으로
변한다.
1959~70년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면서 나세르 호가 새로 생기게 되자 거주지가
물에 잠기게 된 6만 명 이상의 누비아족 이집트인들이 이 계곡 근처로 이주해와 사막을
개간하여 만든 마을과 계획도시에 정착했다.
이주민들은 오늘날 댐의 수로를 통해 관개되는 경작지에서 사탕수수와 다른 여러
환금작물들을 재배하여 예로부터 자급해오던 밀과 옥수수의 부족분을 충당한다.
역사적으로 카움움부 남쪽에 펼쳐진 나일 강 유역에는 주로 누비아족 및 이집트인과
누비아족의 혼혈인들이 거주해왔다.
혼혈인들은 이외에도 수단 북부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카움움부에서 남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대 옴보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유적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와 로마 시대에 지어진 독특한 이중 신전으로
유명하다.
이 신전은 악어신인 세베크(수코스)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에게 봉헌되었던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신전의 탑문과 안뜰 일부가 강물에 쓸려 허물어졌다.
이 고대도시 터의 발굴조사는 1980년대초 이집트 고대유적 관리국에 의해 실시되었다.
카움움부 시는 나일 강 및 누비아에서 나일 강 유역에 이르는 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건설되어 헬레니즘 시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BC 305~30) 때는 독립된 옴보스 주의 주도로서 크게 번성했다.
▼ 11/12 PM 콤옴보 신전 전경입니다.
(콤옴보신전?)
콤옴보 신전은 왕조시대에 건축되어졌으며,
외양은 하나의 신전이지만 모든 구조가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이 신전에 악어의 신 소멕과 나이 먹은 호루스(호루스 신들 중 하나) 의 하나인
하르-와르의 두 신만을 모셨기 때문에 다른 신전과는 다른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집트 물의 신이며 악어의 신인 소벡은 나일강을 관장하는 신으로,
이 지역이 예로부터 악어의 도시라고 불리워지고 있다고 하며, 특히 이 지방에서는
악어의 신인 소벡을 우주 창조 당시 혼돈의 물에서 나타난 조화의 신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악어에 대하여 음식물도 바치기도 하고,악어의 행동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 등 악어를 숭배하는 사상이 성행했다고합니다.
이 지역은 악어들이 나일강으로부터 기어 올라와 햇빛을 쪼이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또한 호루스를 도와 세티를 물리치는 일을 돕고, 호루스의 아들들을 나일강에서
구해주었다고 믿기 때문에 소벡을 다른 신의 보호자같은 존재라고 인식되어 오고
있어 소벡을 파라오의 권력의 상징이라고도 합니다.
▼ 11/12 PM 콤옴보 신전 옆의 열주 전경입니다.
▼ 11/12 PM 측면에서 바라본 콤옴보 신전 전경입니다.
▼ 11/12 PM 파라오에게 생명의 열쇠인 앙크를 전달하는 모습의 부조입니다.
토트신, 하토르여신, 호루스신 등이 보입니다.
▼ 11/12 PM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부조 전경입니다.
▼ 11/12 PM 콤옴보 신전 석주에 새겨진 파라오가 악어형태의 소벡신 제물을 바치는 부조입니다.
▼ 11/12 PM 소벡신인 악어입니다.
▼ 11/12 PM 매의 형상인 호루스신의 문양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 11/12 PM 태양력을 표시한 상형문자라고 들었는데........
▼ 11/12 PM 여기에도 나일강의 수위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춰놓았습니다.
▼ 11/12 PM 측면에서 바라본 콤옴보신전 전경입니다.
▼ 11/12 PM 콤옴보신전 탐방 후 크루즈로 복귀했습니다.
▼ 11/12 PM 크루저로 돌아와 저녁 식사후 즐긴 누비안 전통 공연 전경입니다.
(누비아족?)
누비아족(Nubian)은 아프리카 수단 나일강 유역의 누비아 지방에 살며 동 수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며, 고대로부터 누비아인은 피부색으로 보아 북부의 <빨간노바>
와 남부의 <검은노바> 로 구분된다.
그들의 사회 조직, 관습,신앙 등은 아프리카적 요소가 강함으로,
수단,이집트 국경인 와디할파로부터 수단 중앙부의 할툼 사이에 30만 명 정도가 살며,
아나그, 바라브라, 빌크트, 디린, 미도비, 니마 등이 주된 종족이다.
원래 흑인계 인종이었으나,
이집트인 또는 아랍인과의 혼혈로 유럽적인 신체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바라브라족의 성인 남자는 신장 170 cm의 후리후리한 체격, 청동색의 피부, 계란형의 얼굴,
반듯한 코, 두툼한 입술, 물결 모양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다.
빌크트족은 유목으로, 그 밖의 누비아족은 농업으로 생활한다.
주식은 조와 피이며, 그 밖에 수박, 보리, 대추야자, 콩 등을 재배한다.
소로 수차를 돌려 [灌漑(관개): 물대기]를 하지만, 쟁기는 거의 쓰지 않는다.
모든 종족이 소 ·말 ·염소 ·양 등을 기르며 고기와 젖, 버터를 이용한다.
돼지는 니마족과 디린족만이 기른다.
집은 통 모양의 벽에 풀로 원추형의 지붕을 이은 것이며, 바라브라족만이 북아프리카식의
평평한 지붕에 직사각형을 이룬 가옥에서 생활한다.
디린족, 빌크트족, 미도비족은 王制(왕제)를 채택하였으나,
그 밖의 누비아족은 중앙집권 정부를 두지 않는다.
BC 2000년경부터 이집트 ·수단의 흑인왕국, 아랍의 베드윈족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 누비아족의 대부분은 부계제를 지키나, 디린족과 미도비족은 動産(동산)의 모계 상속,
아나그족과 미도비족은 정치적 직위의 모계 계승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어,
일찍이 누비아족 사회에서 모계제가 시행된 흔적을 보여준다.
(2017.11.14(화) 5일째 일정)
▼ 11/14 AM 밤새 크루즈는 아스완에 도착하여, 선상 조식후 버스로 아부심벨로 이동합니다.
이동시간은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버스 차창을 통해 보는 풍경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뿐입니다.
▼ 11/14 AM 사막의 일출 전경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 가는 길에 사막 가운데서 정차하여 사막의 아침 일출을 즐기고 있습니다.
▼ 11/14 AM 일출조망을 위해 정차중에 바라본 우리가 진행해야할 방향의 전경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의 대신전 전에 있는 휴게시설입니다.
이곳에서 간단한 아침식사와 차 한잔을 마시고 이동키로 합니다.
▼ 11/14 AM 휴게시설에서 본 이집트의 열대지방 꽃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 대소신전으로 향하는 강안길 전경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 대신전 뒷부분으로 신전관리구 및 이집트기가 게양되어 있습니다.
▼ 11/14 AM 아스완댐으로 인해 바다같이 거대한 댐으로 변한 나세르호 전경입니다.
▼ 11/14 AM 이동하면서 바라본 아부심벨의 대신전 측면 전경입니다.
(아부심벨?)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에 재발견되었다.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각각 놓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신전은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다.
신전 내부는 왕의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주신전의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이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960년대 토목공사에 의한 나일 강 수위의 상승으로 수몰 위험에 처했으나
구제되었다.
▼ 11/14 AM 이동하면서 바라본 아부심벨의 대신전 측면 전경입니다.
(대신전 1 ?)
주신전 앞에 있는 4개의 거대한 람세스 좌상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장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신전은 1960년대의 복잡한 토목공사에 의해 나일 강의 수위가 상승했을 때 수몰 위험을
모면하고 구제되었다.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지금의 쿠루스쿠)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 재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외부세계에 알려졌고,
1817년 이집트학 전문가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남쪽에 있는 1쌍의 좌상에 새겨진 낙서들은 BC 6세기에 이집트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새긴 것으로 초기 그리스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 신전 자체는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며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서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년에 어느 특정한 며칠간은 하루의 첫번째 햇살이 신전 전체를 꿰뚫으며 들어와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 제단까지 비치도록 지어졌다.
주신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1960년대초 이 근처의 아스완 하이 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아부 심벨 유적이 수몰당할
위험에 처하자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주관하여 이 유적을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 예술품 보존과 복원).
1964~66년에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기사·과학자 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팀과 노동자들이 절벽 꼭대기를 파서 2개의 신전을 완전히 들어내 강바닥에서 60m 높은
지점에 복구해놓았다.
▼ 11/14 AM 대신전의 또 다른 설명입니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의 통치자들 중 가장 강력했던 파라오의 하나였다.
여러 학자들은 그를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인 성경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와 동일 인물로 간주한다.
그는 기원전 1279년부터 66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1213년 사망했을 때는 여러
명의 아내와 첩들에게서 얻은 백 명이 넘는 자녀들을 남겼다고 한다.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은 다른 어떤 파라오들의 것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채의 신전을 세우고, 증축하고, 장식했다.
누비아의 아부 심벨의 산자락에 조각된 태양신에게 바친 그의 신전은,
발치에 작게 조각된 다른 가족들을 두고 왕관을 쓴 채 옥좌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모습을
나타낸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바위를 깎아 조각되었으며 건물의 파사드를 지배하고 있는 높이 20m 이상의 이 조각상들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아(自我)상'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지방 부족들에게 파라오가
지닌 초인적인 힘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다.
파사드 꼭대기에는 개코원숭이들이 태양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신전 내부에는 파라오의 조각상과 그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들이
있다.
1813년 스위스의 동양학자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되었을 때,
이 신전은 거의 완전히 모래에 뒤덮여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굴꾼인 조반니 벨초니가 1817년 무덤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몽땅 다 가져가 버렸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에게 바쳐진 두 번째 신전이자 좀 더 작은 신전이,
람세스 2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라고까지 일컬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해 건축되었다.
1960년대 초반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고 있을 무렵,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인 캠페인을
일으켜 자금과 전문적인 기술을 동원해 아부 심벨의 신전들이 나세르 호수의 물에 잠기지
않도록 더 높은 지대로 옮겼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부 심벨 신전 [Abu Simbel Temples]
▼ 11/14 AM 람세스2세 석상 아래에는 그의 왕비와 딸들의 부조가 같이 서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개의 석상 중 좌측 2개의 석상 전경인데 두번째 석상은 훼손이 심한 상태입니다.
▼ 11/14 AM 람세스2세의 4개 석상 중 우측 석상은 상태가 그나마 양호했습니다.
▼ 11/14 AM 우측의 람세스2세 석상 아래에도 왕비와 그의 자녀상들이 함께합니다.
▼ 11/14 AM 대신전쪽에서 바라본 소신전 전경입니다.
▼ 11/14 AM 이집트는 정쟁이 자주 발생되는 국가라 그런지 군경의 총기 휴대가 상시화 되어
있습니다. 경비중인 보안요원이 총기룰 휴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11/14 AM 대신전쪽에서 바라본 소신전의 전체 규모입니다.
▼ 11/14 AM 대신전 내부의 부조 전경입니다.
▼ 11/14 AM 대신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문고리에 보면 생명의 열쇠인 앙카가 걸려 있는 걸 볼 수있습니다.
열쇠를 들고 사진도 찍을 수도 있습니다.
▼ 11/14 AM 소신전쪽에서 바라본 대신전 전경입니다.
사람의 크기를 비교하면 신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11/14 AM 소신전 전경입니다.
(아부심벨 소신전?)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상·하 이집트를 통일했던 위대한 람세스 2세는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도 깊었던 모양이다.
대신전의 옆에 위치한 아부심벨 소신 전에는 규모는 1/4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람세스 2세
본인과 그의 왕비를 번갈아 조각해 놓은 6개의 석상이 만들어져있다.
대신전에 받은 충격과 놀라움 때문인지 대충 보게 되는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소신전
내부의 각 기둥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토록 오래전 세상을 다 가졌던 위대한 왕이 부부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남겼다는 것도
참 재미있다.(오마이뉴스 '사표쓰고 떠난 세계일주 '중에서)
▼ 11/14 AM 소신전 앞의 석조 부조상인 왕비상은 하토르여신과 동격 모양으로 부조되었습니다.
▼ 11/14 AM 아부심벨 대/소신전을 떠나면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 11/14 AM 열대지방의 처음 보는 꽃이어서....
▼ 11/14 AM 아스완댐을 만들면서 생긴 바다처럼 넓은 나세르호입니다.
(나세르호?)
1960년대에 착공하여 1971년에 준공된 아스완 하이 댐으로 나일 강 물이 모아지면서
생겼다.
총용량이 1,640억㎥인 나세르 호의 물을 하류로 방출하여 관개함으로써 32만 4,000㏊의
경지가 늘어났고, 28만 3,400㏊의 범람지를 영구 관개지로 개조시켰다.
호수에는 식용 물고기를 기른다.
1980년대 초반에 토지개간사업을 호수 주위의 사막에서 시작했다.
이집트에 속한 호수의 북쪽 2/3는 가말 아브델 나세르 대통령(1956~70)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 호라 부르며, 수단에 속한 남쪽 1/3은 누비아 호라 부른다.
▼ 11/14 AM 아스완댐으로 인해 수몰직전의 바위산의 신전을 옮기기위해 부분부분 토막낸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11/14 AM 이집트 지도를 통해서 바라본 여행지역입니다.
제일 윗쪽 카이로에 도착후 국내선으로 룩소공항으로 이동 룩소에서 시작하여 덴데라, 룩소르,
에두프, 콤옴보, 필레, 아스완, 아부심벨를 거쳐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까지의 여정 지역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의 대소신전 탐방을 마치고 크루즈로 돌아오면서 목격한 말로만 들어보던
사막에서 볼 수 있는 신기루 현상입니다. 착시현상으로 마치 호수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 11/14 AM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가운데 도로와 도로옆으로 같이 달리는 철탑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습니다.
▼ 11/14 AM 아침 일찍 건넜던 아스완댐의 도로를 따라 크루즈로 돌아갑니다.
▼ 11/14 PM 크루즈로 돌아가는 길에 이집트의 아스완 거리 전경입니다.
(아스완(Aswan)?)
나일 강의 범람원과 인접지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길고 좁은 모양의 아스완은 이집트의 나일 강변 최남단의 주이며, 짧은 남쪽의 경계선은
수단과의 국경선의 일부를 이룬다.
나일 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사암·화강암·섬록암의 언덕들은 말라버린 지 오래된 옛 하천들로
개석되어 있다.
주도인 아스완과 수단 국경도시인 와디할파에서 나일 강은 화강암층을 뚫고 흐르는데,
암층을 서서히 침식하여 강 가운데에 폭포로 불리는 급류와 섬들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수상교통에 장애가 되었고, 그결과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에 아스완을 국경으로
정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아스완 시의 바로 상류 쪽에 옛 아스완 댐이 있으며, 그곳에서 약 6㎞ 남쪽에 세계적인
대토목공사의 하나로 1970년에 완공된 아스완 하이 댐이 있다.
이 댐에서 남쪽으로 수단 국경까지 거의 240㎞나 되는 구간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구릉성의
사막 불모지로 도로도 없고 철도도 없다.
본래의 강 유역은 범람하여 나세르 호가 되었다.
1968년 하이 댐이 가동되면서부터 아스완 주에서 여름에만 관개되던 많은 토지가 연중
관개지로 바뀌었다.
사탕수수·렌즈콩·옥수수·밀 등이 아스완 시의 북쪽 지역에서 경작된다.
아스완 주의 산업은 하이 댐과 카움움부 시, 이드푸 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위의 두 도시에는
제당공장들이 있다.
아스완 시 주변에서는 오래 전부터 화강암이 채석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대리석 채석장들이
생겼다.
아스완 주는 고대의 기념물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관광지로서도 각광받는 곳이다.
1960년대에 나세르 호의 수위가 높아져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한 이집트의 신전들이
국제학술기관의 대대적인 보존사업에 의해 고지대로 옮겨졌는데, 가장 복잡한 공사가 수행된
곳은 아부심벨과 필라에였다.
▼ 11/14 PM 크루즈로 돌아와 휴식을 위해 숙소에 들어오니 이번에는 코끼리 형상이.....
▼ 11/14 PM 크루즈에서 바라본 여유로운 모습의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4 PM 시간을 내어 아스완 전통시장을 찾았습니다.
열대지방이어서 그런지 각종 풍부한 과일들이 눈을 현혹 시켰습니다.
▼ 11/14 PM 전시되어 있는 옷들도 우리의 시골장터같이 호화찬란한 색깔로 .....
▼ 11/14 PM 시골장터의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 11/14 PM 아랍풍의 이집트인의 얼굴입니다. 누비아인은 짙은 검정색 피부를 가졌습니다.
▼ 11/14 PM 각종 과일이나 채소들이 나일강변에서 사시사철 대량 재배되어 가격도 저렴합니다.
▼ 11/14 PM 우리나라 60년대에 사용하던 저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 11/14 PM 열대지방의 차(茶)종류인데 이곳에서 유명한 무궁화꽃잎차를 구입하였습니다.
▼ 11/14 PM 이집트의 개들은 거의 떠돌이 개인데 사람들이 별로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 11/14 PM 크루즈로 돌아와 저녁 선상부페로 배를 채웠습니다.
후식으로 먹은 이집트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망고입니다. 당도가 최고였습니다.
▼ 11/14 PM 식사후 필레에 있는 신전의 빛의 향연 관람을 하기위해 도착합니다.
(필레(Philae) ?)
이집트 아스완 주의 아스완 시에서 남남서쪽으로 11㎞ 떨어져 있다.
이곳의 옛 이집트 이름은 프알레크였고, 콥트어에서 유래한 필라크('끝' 또는 '먼 곳'
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이 섬이 누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섬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관례적으로 쓰는 이름은 그리스어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천일야화 The Thousand
and one Nights〉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을 따 크사르아나스알우주드라고도 했다.
크기가 460×150㎞인 충적층으로 덮인 필라이의 화강암 암반은 나일 강이 최고 수위로
범람할 때도 그 위로 솟아 있었으나 1902, 1907년에 아스완 댐이 들어서면서 저수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침수되기 전에 이곳을 보려고 옛 신전과 제단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현재 지명인 자지라트알비르바('신전의 섬'이라는 뜻)라는 이름도 얻었다.
초기 이집트 시대부터 이 섬은 이시스 여신에게 바쳐졌는데, 알려진 최초의 건축물은
쿠시 왕조 25대 파라오인 타하르카(BC 689~664 재위)가 지은 것이다.
알려진 최초의 신전은 사이테스(BC 664~525)가 건축한 것으로서 허물어진 채 발견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건물로 재사용되었다.
30대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넥타네보 2세(BC 360~343 재위)가 지금의 주랑(柱廊)을
증축했다.
이 파라오는 이후 1952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던 통치자 중에서 유일한 본토 출신의
통치자였다.
이시스 신전 복합 건조물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와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완성했다.
그러나 그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BC 27~AD 37)
때 시작한 내부 장식들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이 신전들의 서쪽에 간이 건조물을, 동쪽에 문을
증축했다.
이집트 신들에게 헌사된 또다른 건축물로는 임호테프에 바쳐진 신전과 하토르에게 바쳐진 신전,
그리고 오시리스·호루스·넵티스에게 바쳐진 예배당 등이 있다.
신전은 로마 시대에 계속 번영했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378년부터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통치기(527~565)에는
문을 닫지 않았다.
이시스 여신을 섬기던 사제들은 상(上)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는데 이는 그들이
와디알라키 근처의 금광을 차지하고 있었고 쿠반에 있는 대상로(隊商路) 종착지를 관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바다에 부족과 블레미에 부족이 계속해서 이시스를 섬겼기 때문에 누비아에서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이집트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한편 이집트를 다스린 로마와 비잔틴 통치자들은 연례의식 때 여신의 형상을 빌려주어
이집트 본토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괴롭힌 이들 부족을 관리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임 후기에 이시스 신전은 교회로 바뀌었고, 융성하던 도시 안에 다른 2개의
콥트 교회도 세워졌다.
이 모든 건조물은 옛 아스완 댐 뒤쪽이 부분적으로 침수되기 전에 탐사되고,
증축되었다(1895~96).
그후 1907년 세밀한 검사 결과 장식물의 채색 부분이 염분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 상류 쪽의 아스완 하이 댐의 완성과 함께 신전들이 물 위로 다시 드러났을 때는
제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발견되어 이것들을 근처의 더 높은 곳인 아길키아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필라이의 본모습과 같이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신전들은 어느 정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려 1980년에 재건되었다.
▼ 11/14 PM 필레신전의 빛의 향연 공연시 요일별 시간대에 따라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아라비아어로 설명되어 지고 있었습니다.
▼ 11/14 PM 어두운 밤호수를 조그마한 모타보트로 필레섬으로 이동하여 신전의
빛의 향연 공연을 관람합니다.
(필레(Philae)신전?)
필레는 아스완 남쪽에 위치한 섬이다.
이곳에 고대 이잡트의 이시스여신을 위한 신전이 있는데 , 이 신전 역시 아스완 하이댐
공사로 인해 다른 섬, 아킬라카 섬으로 옮겨졌다.
이시스신전은 유네스코 프로젝트에 의해 필레에서 아킬라카로 이동되었으며
세게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원래 있었던 섬의 이름이 필레여서 아직도 필레신전으로 불리고 있다.
(이시스여신?)
이시스라는 이름은 '왕좌'를 뜻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그리스어로 바꾼 것이다.
왕좌는 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 화신은 여자, 즉 왕의 어머니였으며 사실상 왕의
창조주였다.
고대 이시스 숭배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피라미드 원문(BC 2375경~2200경)
에서도 이시스가 살해된 자기의 남편 오시리스 신을 애도했다는 언급을 제외하면 그에 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시스에 관한 전설은 이시스가 본래 독립된 신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시리스의 아내로서 이시스가 주역을 맡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시리스가 죽은 후이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 조각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재결합했으며, 그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했고, 자신의 권능으로 그를 소생시켰다.
전설에 의하면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가 장성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시스는 세트의 누이이기도 했기 때문에 호루스와 세트의 최후의 전투 때 마음이
흔들렸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이시스는 세트를 동정하다가 전투 도중에 호루스에게 참수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학과 민간신앙에서는 공적으로 이시스와 호루스를 완전한 모자관계로 선언했다.
이시스가 아들을 보호한 것은 보호여신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이지만 이시스의 주요특징은
그녀의 능력이 다른 모든 신들의 능력을 능가하는 위대한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시스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왜냐하면 죽음의 신 아누비스조차도 이시스에게는 굴복했기 때문이다.
여신 네프티스·네이트·셀케트 등과 함께 이시스는 특별히 죽은 자를 보호하는 신이었다.
으뜸 가는 어머니 여신인 이시스는 유사한 기능을 가진 다른 여러 여신과 관계를 가지면서
점점 다양한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호루스와 여신 하토르('호루스의 집'이라는 뜻)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하토르와 이시스는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해졌다.
신을 별과 관련지을 때 이시스는 천랑성과 동일시되었다.
이시스는 왕좌 위에 혼자서 아이 호루스를 데리고 앉아 있든가, 아니면 관(棺) 앞에 무릎을
꿇고 있든가 하면서 머리에 왕위를 상징하는 상형문자를 달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시스 숭배의식은 이 여신이 추수보다는 인간사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즉 이시스는 애도자로서 죽은 자와 관계된 모든 의식에서 주신 역할을 했고, 마법사로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자들을 소생시켰으며, 어머니로서 생명의 원천이었다.
이시스 숭배는 아마도 하(下)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이집트 전역으로 퍼져나간 듯하다.
아크밈에서 이시스는 풍요의 신 '민'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 전역에 이시스를 숭배하는 중요한 신전들이 있었으며, 후에는 누비아까지
이시스 숭배가 퍼져나갔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이 신에게 봉헌된 신전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이시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항해자들의 수호여신'이 되었다.
이시스 숭배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지중해 전해안 지대로
퍼져나갔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비의식이 발전했는데, 그 핵심은 유명한
그리스의 엘레우시스 신비의식과 유사하다.
▼ 11/14 PM 필레의 소리의 향연은 이집티 신화르 각색하여 빛과 소리로 공연하는 것을
말하며, 내용을 알아들을 수있으면 참 좋았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필레 신전을 빛으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태냅니다.
(필레신전)
▼ 11/14 PM 한 곳에서만 위치해서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이동해 가면서
각 장소에 맞는 빛과 소리로 내용을 전파합니다.
▼ 11/14 PM 핫토르신과 호루스신 그리고 이스신의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 11/14 PM 지나는 복도에 새겨진 부조들이 눈길을 끕니다.
▼ 11/14 PM 공연의 마지막 부분으로 멋진 장면이 연출됩니다.
필레 공연 후 크루즈로 복귀합니다.
(2018.11.15.수 6일째 일정 )
▼ 11/15(수) AM 기상후 선상부페 조식후 갑판 데크에서 바라본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5(수) AM 나일강의 댐하류에 있는 바위섬등의 전경입니다.
▼ 11/15(수) AM 조식후 버스로 아스완하이댐 견학에 나섭니다.
▼ 11/15(수) AM 아스완댐으로 이동시 바라본 녹지 지역과 사막지역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을 보면
터빈 최대용량 : 175,000 K.W
터빈최대방전량 : 346㎦/sec
저수지 길이 : 500km
저수구역 : 600㎢
저수 총용량 : 162,000백만.㎥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
이집트 아스완에 세워진 이 댐은 1970년에 완공되었으며(1971년 정식으로 개통),
약 10억 달러의 경비가 소모되었다.
이 댐의 높이는 111m, 댐 마루부 길이는 3,830m, 부피는 4,430만㎥에 이르며,
이 댐의 저수지인 나세르 호의 총용적은 1,690억㎥에 이른다.
나일 강의 1년 총방류량 중에서 약 740억㎥의 물이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 555억㎥는
이집트에, 나머지는 수단에 분배된다.이 댐의 건설로 나세르 호는 이집트로 약 320㎞,
수단(상류)으로 160㎞ 이상 확장되었는데, 이때문에 아부 심벨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전이 물에 잠기게 되자 많은 비용을 들여 옮겨야만 했고, 9만 명의 이집트 농부와
수단 누비아 지역의 유목민이 이주를 해야 했으며, 5만 명의 이집트인은 아스완의
북쪽 50㎞ 지점에 위치한 카움 움부 계곡으로 이주해 누바리아라는 새로운 농경지구를
형성했고, 대부분의 수단인은 수단의 카슴 알키바 근처에 다시 정착했다.
아스완 하이 댐은 이집트에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으며, 해마다 발생하는 나일 강
홍수를 사상 처음으로 통제했다.
이 댐은 홍수 때 물을 저장한 후 적절하게 방출하여 관계농지의 효용성을 높이고,
수십만 ㏊의 새로운 땅에 물을 공급하고, 아스완 근처의 운항을 더욱 원활하게 했으며
엄청난 양의 전력(210만kW)을 생산했다.
또한 깊이 90m, 평균 폭 22㎞에 이르는 댐의 저수지는 어업의 육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댐은 몇 가지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나일 강 양쪽
농경지의 생산성 저하이다.
이것은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 강의 홍수를 댐이 통제하기 때문에, 홍수가 실어나르던
풍부하고 비옥한 침적토가 이제 저수지와 수로에 모이게 되어 물이 불어나더라도
경작지에는 더이상 침적토가 쌓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집트는 해마다 약 100만t의 인공비료를 사용하지만 홍수가 공급해주던 4,000만t의
침적토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아스완 하이 댐에서 6㎞ 아래 위치한 아스완 댐은 1902년에 완공되었으며,
1912, 1933년에는 댐 마루를 높였다.
이 댐은 나일 강의 홍수가 끝날 무렵인 늦가을에 약 493억㎥의 물을 저장한다.
한때 2,142m의 댐 마루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긴 댐 중의 하나였던 이 댐은 180개의
수문을 열어 엄청난 침적토과 함께 나일 강의 전홍수량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을 보면
댐의 최대 높이 : 111m
댐의 최고부분의 길이 : 3,830m
댐의 기저부분의 폭 : 980m
댐의 최고부분의 폭 : 40m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댐의 크기 : 기자의 피라미드의 17배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건설 시작일 : 1960.1월
강줄기 변경 : 1964.5.15
건설 종료일 : 1971.01월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의 단면도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서 바라본 댐 하류전경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바라본 발전 설비 전경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서 바라본 나세르호수 전경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서 이집트 현지 가이드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의 폭이 40m로 2차선 도로 및 녹지 지역이 있습니다.
▼ 11/15(수) AM 곳곳에 보안요원 및 군인들이 완전무장한채 경비에 임하고 있습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있는 대리석에 음각한 댐명인 것 같습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을 떠나 아스완 시내의 대리석 광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곳으로 고대 이집트시대 오벨리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화강암 사이에 쐐기나무를 박아 그곳에 물을 부어 나무를 부풀려 절단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으며, 높이 41m에 무게 1,267톤의 미완성 오베리스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11/15(수) AM 미완성 오벨리스크 전경입니다.
▼ 11/15(수) AM 화강암에 나무 쐐기를 박아 물에 부풀리는 방법으로 절단한 모습입니다.
▼ 11/15(수) AM 미완성 오벨리스크의 상부쪽 전경입니다.
▼ 11/15(수) AM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작업 중 상부의 균열로 인해 추가 작업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하고있다고 합니다.
▼ 11/15(수) AM 화강암 채석장에서 바라본 시내의 공동묘지 전경입니다.
▼ 11/15(수) AM 화강암 채석장을 나오면서 뒤돌아본 전경입니다.
▼ 11/15(수) AM 미완성오벨리스크 탐방을 마치고 인근의 누비안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 11/15(수) AM 누비안박물관 앞뜰의 조그마한 오벨리스크입니다.
▼ 11/15(수) AM 누비안 박물관 뜰에 있는 각국의 글씨가 각자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글도 눈에 띄입니다.
▼ 11/15(수) AM 누비안 박물관 앞 전경입니다.
박물관 내 촬영이 불가하여 전시실내 사진은..........
▼ 11/15(수) PM 주간 일정을 마치고 숙소인 아스완의 HELNAN ASWAN HOTEL에
여정을 풀었습니다.
▼ 11/15(수) PM 호텔 로비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 부근의 사막산에 보여지는 주택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에서 바라본 아스완 지역의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5(수) PM 나일강의 전통돛배인 펠루카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의 부대시설인 풀장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 앞 나일강가의 전통 돛배인 펠루카체험을 하기로 합니다.
▼ 11/15(수) PM 전통 돛배인 펠루카에서 공연중인 이집트 청년인데 이 공연 후
선상 즉석에서 기념품 판매가 이루어졌습니다.
▼ 11/15(수) PM 펠루카에서 바라본 건축중인 아파트 전경입니다.
이집트에도 개발 열기가 한창이었습니다.
▼ 11/15(수) PM 나일강의 전통돛배인 펠루카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에서 바라본 이슬람 사원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 선상 즉석에서 벌어진 기념품 판매 전경입니다.
▼ 11/15(수) PM 나일강에서 선상 공연으로 돈을 벌고 있는 이집트 어린이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에서 바라본 일몰 전경입니다.
▼ 11/15(수) PM 나일강, 펠루카, 일몰의 환상적인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체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 11/15(수) PM 호텔에서 바라본 일몰 전경입니다.
▼ 11/15(수) PM 저녁 식사후 인근 마트에 구경을 나갔습니다.
여기서도 풍성한 과일을 눈으로 즐기고 맛있는 망고를 구입했습니다.
(2018.11.16.목 카이로 이동)
▼ 11/16(목) AM 여행일정의 후반부로 아침에 기상하여 룩소공항으로 이동하여
이집트항공사의 항공기로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로 향합니다.
▼ 11/16(목) AM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하여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 탐방에
나섭니다.
(카이로(Cairo)?)
나일 강 하류가 로제타와 다미에타의 두 지류로 갈라지는 지점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시가지의 대부분은 강의 우안에 조성되어 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이 대도시는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카이로 시는 카이로 주의 거의 전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시의 전체적인 모양은 남쪽으로는 나일 계곡이 사막의 단층애들 사이로 쐐기처럼 박혀
있어 좁고, 북쪽으로는 계곡이 나일 삼각주로 이어지면서 아주 넓어지는 부채꼴이다.
수세기에 걸쳐 이 도시는 나일 강의 한 수로가 유로를 바꿈으로써 홍수의 범람으로부터
벗어난 땅으로 확대되었다.
카이로는 남북 방향으로 길게 연장되었으며 강의 서쪽 기슭으로도 확대되었는데,
다만 지형과 관개에 드는 비용 관계로 서쪽 사막으로의 확장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기후는 사막기후로 낮에는 고온건조하지만 밤에는 나일 강의 강바람으로 서늘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짧은 겨울 동안에만 적은 양의 비가 내린다.
카이로의 경제는 처음부터 행정·상업·무역·공업이 기반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대규모 공업으로는 직물(주로 면직물)·철강·소비재 생산과 식품·담배
가공이 있다.
그밖에 상당한 부분의 전통공예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집트의 주요 은행, 금융회사, 운송회사의 대부분이 카이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카이로의 가장 오래된 3개 지구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슬럼가가 되었으며,
이 슬럼가들은 서구화된 중핵지대를 에워싸고 있다.
이 3개 지구 가운데 가장 큰 지구는 파티마 시로, 이곳에는 바이바르스 1세 사원과
살라딘의 성채를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이 많다.
현대화된 도심지(알아즈바키야)와 도심지 근처의 우아한 상업·주택 지구들은
빈민지역들과 매우 심한 대조를 보인다.
가장 큰 길인 알쿠르니시 중앙로는 강과 평행으로 뻗어 있으며,
길 양쪽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나일 강에 있는 섬들인 앗자말리크와 알루다는 주로 주택과 휴양을 위한 구역이다.
중하류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는 구역의 남쪽에는 '사자(死者)의 도시'로 알려진
지대가 있다.
초기 종교지도자들의 절묘한 성골(聖骨) 사원과 영묘들이 있어 사자의 도시로 불리는
이곳에 카이로의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밀집해서 모여 사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주택난을
알 수 있다.
건축은 고대 이집트, 로마, 중세의 아라비아와 터키, 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어우러져 풍부하고 다양하다.
멤피스 근처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이 대도시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카이로에는 등록된 사적이 400개가 넘어 아프리카나 중동의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모두가 130년부터 19세기초 사이에 건립된 것들이다.
카이로는 이집트의 고등교육 중심지로서 아랍 중동의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교육기관으로는 카이로대학교를 비롯하여 아인샴스대학교, 알아자르대학교,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카대학교 등이 있다.
카이로의 많은 문화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집트 (국립)박물관, 이슬람 미술박물관,
국립도서관이며, 그밖에 많은 사원과 바자(bazaar 市場)가 있다.
옛날에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마차와 당나귀들은 자동차·버스·교외열차 등으로 거의
대체되었으며, 아프리카 최초의 지하철 시스템인 카이로 지하철이 1987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다.
카이로는 다른 주요도시들과 철도로 연결되며, 헬리오폴리스 너머에는 카이로 국제공항이 있다.
▼ 11/16(목) AM 이집트 사카라지역의 계단식 피라미드입니다.
(사카라(Saqqarah)?)
카이로 남서쪽으로 24㎞ 지점,
지금의 아랍 마을 사카라의 서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북쪽의 아부시르에서부터 남쪽의
다수르까지 8㎞ 정도 뻗어 있는 사막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퍼져 있다.
가장 오래된 유적은 이 고분터의 북쪽 끝에 있는 고대의 무덤지역에 있는 것들인데,
이곳에서 이집트 역사의 아주 초기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진흙벽돌 무덤(마스타바)들이
발견되었다.
분묘 안에서 발견된 저장 단지에는 제1왕조 왕들의 이름이 씌어 있지만,
고대 왕들은 상이집트의 아비도스에 묻혔기 때문에 이 무덤들은 당시 고위 관리들의
것으로 보인다.
고대 무덤지역의 남쪽에는 제3왕조(BC 2650경~2575경)의 2번째 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건축물이 있다.
조세르의 건축가 임호테프는 왕을 위하여 6개의 계단으로 된 피라미드 모양의 새로운
무덤을 고안했다.
맨 밑바닥에 진흙벽돌·나무·갈대로 만들었던 본래의 건축 구조를 바꾸어 처음으로
양질의 석회석으로 거대한 현관과 마당을 만들었다.
제4왕조의 셉세스카프는 관 모양의 무덤인 마스타바트 알파라운을 건축했고,
제5왕조의 여러 왕들도 사카라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제5왕조의 마지막 왕인 우나스 때 처음으로 자신의 피라미드 방 벽에 사후 보호와 내세의
삶에 대한 보장을 위해 피라미드 텍스트를 새겼으며, 지하 밀실에 피라미드 텍스트를
새기는 이러한 관행은 제6왕조 때에도 계속되었다.
테티를 제외한 제6왕조의 왕들은 우나스의 피라미드 남쪽에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남쪽 끝에 있는 것은 제13왕조(BC 1756경~1630경)의 것이다.
왕들의 피라미드 부근에는 고왕국시대(BC 2575경~2130경) 귀족들의 분묘가 있고 무덤
안에는 그들의 일상생활이 묘사된 벽화가 새겨져 있다.
중왕국시대(BC 1938~1600경)에는 지방 무덤이 유행하여 사카라에는 상대적으로 무덤을
적게 지었다.
그러나 신왕국시대(BC 1539~1075)에 들어와서 멤피스가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그때부터 수많은 무덤들이 사카라에 만들어졌으며,
그중에는 BC 1975년에 재발견한, 아름답게 장식한 호렘헤브 장군(후에는 파라오)의
무덤도 있다.
또 그때부터 이집트인들은 사카라에 큰 지하 회랑을 지어 성우(聖牛)를 묻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세라페움이다.
사카라에 지어진 무덤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웅장한 무덤들은 사이스 왕조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 여러 통치자들의 것이다.
사카라 북서쪽 부분에 있는 제3왕조와 제4왕조의 분묘터 아래에는 지하 통로가 있으며,
그 안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아이비스(ibis:따오기류) 미라가 수천 개 들어 있다.
▼ 11/16(목) AM 사카라지역의 오래된 피라미드 모습입니다.
▼ 11/16(목) AM 사카라지역의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훼손으로 보수 중이었습니다.
(조세르 계단식 피라미드?)
사카라 피라미드로 알려진 이 피라미드의 정식 명칭은 조세르 피라미드(Djoser
Pyramid)'다.
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의 조세르왕(BC 2665~BC 2645) 때 지어진 이집트의
첫 피라미드라서 그 이름이 붙었다.
계단식 네모뿔 형상이어서 '스텝(Step)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세계 건축역사의 한 장을 이루는 인류 최초의 피라미드식 석조 건물이다.
높이가 6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여서 맑은 날씨에는 약 30㎞ 떨어진 카이로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쿠푸왕 대피라미드(144m) 높이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지만 이전 파라오의 묘에 비해선
압도적인 크기다.
이전 왕들의 직육면체 형태 '마스타바' 묘보다 60배 이상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세르 피라미드 원형은 세계 최초 피라미드라는 말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보존돼 있다.
지난 10월 현장을 찾아갔을 때 정면과 우측면 1층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4천700년 전에 지어졌다고 믿기가 어려울 만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듯했다.
이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얼마나 강력한 왕권과 기술력이 필요했을까?
요즘의 일반적 주거 형태인 아파트로 따지면 대략 20층 높이다.
밑변의 길이는 동서로 121m, 남북으로 109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웅대함은 고대 파라오가 신과 같은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어떤 귀족이나 지방 토호 세력도 파라오의 권위에 덤비지 못했다는 얘기다.
조세르 파라오는 이 피라미드를 통해 영생을 꿈꾸면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었을
것이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축은 당시 재상이자 탁월한 건축가였던 임호테프가 총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호테프는 이집트 고대사에서 '건축의 신'이나 '창조의 신 프타의 아들'로 기록될 만큼
신격화된 인물이다.
그는 당시로써는 기존의 마스타바 왕묘 설계에서 최소 6발짝을 더 나아가 거대한 마스타바
6개를 쌓아 올린 새로운 모양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창조했다.
왕묘 조성과 건축에 관한 당시 사고와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조세르 피라미드 단지에는 6층짜리 석조 건축물만 있지 않다는 점이다.
피라미드의 유일한 출입구와 연결된 기둥형 복도와 더불어 거대한 안뜰,
장제신전 등이 피라미드 복합체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신전의 담벼락에는 13개의 가짜 문과 남쪽 끝자락에 1개의 진짜 문이 있다.
이 진짜 문이 지금의 유일한 출입문으로 남아 있다.
이 문을 거쳐 신전 내부로 들어서면 높이 6.6m의 기둥 20개가 나란히 서 있는 장엄한
분위기를 맞게 된다.
기둥 복도를 지나 안뜰의 중앙에 서면 바로 오른편에 세트 신전이 보인다.
파라오가 내세에 위대한 신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기원했던 신성한 장소다.
직선과 곡선 형태의 암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신전이다.
신전 곳곳의 기둥 돌 이음새 부분을 둥글게 표현한 점도 눈길을 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일찌감치 건축과 예술의 조화를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기둥 복도를 나서면 안뜰이 나오는데 지금은 사막으로 변해 있다.
이 때문에 모래 위를 걸으면서 피라미드를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파라오 시대에 안뜰에서는 왕위갱신제라는 세트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안뜰 가운데에 이 축제의 흔적이 남이 있다.
세트는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이 끝나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겨울철 초반에
진행된 축제다. (연합이매진 2017.12.13일 기사 퍼옴)
▼ 11/16(목) AM 계단식 피라미드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6(목) AM 측면에서 바라본 죠세르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죠세르피라미드 옆의 신전 입구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옆 신전과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 신전의 통로입니다.
▼ 11/16(목) AM 신전을 지나 설치된 조세르피라미드 안내글입니다.
▼ 11/16(목) AM 신전을 지나 바라본 조세르피라미드 측면 전경입니다.
▼ 11/16(목) AM 보수중인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피라미드 주위의 체험용 낙타와 계단식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게단식 피라미드 옆의 물을 모아 놓았던 수조설비물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에 붙은 신전으로 우리가 지나왔던 건물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를 떠나 멤피스 가는 길에 바라본 야자수 과수원전경입니다.
▼ 11/16(목) AM 농촌지역의 전경으로 야자수가 경계표식으로 심겨두었습니다.
▼ 11/16(목) AM 멤피스에 있는 수상 유적으로.....
▼ 11/16(목) AM 멤피스에 도착했습니다.
(멤피스(MEMPHIS)?)
멤피스는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3000년 경 파라오 메네스에 의해 창건되었다.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제 1주(州)였던 이네브 헤지(Aneb-Hetch)의 수도이자
기원전 2200년까지의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수도였다.
그 후 중왕국 시대에 테베스로 수도를 천도한 뒤에도 멤피스는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으며, 신왕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의 중심지였다.
멤피스의 고대 이집트 이름은 이네브 헤지(흰 담)였으며, 중왕국 시대에는 앙크 타위라고
불리기도 했다.
의미는 두 땅의 생명이라는 뜻으로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 사이의 전략적인 요충지임을
강조하는 이름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멘네페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콥트어로는 멘페였으며, 멤피스라는 이름은 이것의 그리스식 변형으로 원래는 이집트 6왕조
페피 1세의 피라미드의 이름이었다.
현대의 도시 미트 라히나, 다슈르, 사카라, 아부시르, 아부 고라브와 자위에트 엘라리안,
카이로 남부가 멤피스의 행정 영역내에 위치하였다.
멤피스의 유적은 카이로에서 20 km 남쪽 나일강 서쪽에 있다.
▼ 11/16(목) 미국의 지원으로 고대멤피스 유적을 발굴한다는 안내문입니다.
(멤피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승(傳承)에 따르면 멤피스는 BC 2925년 무렵 메네스가
세웠다고 한다.
메네스는 선사시대의 두 왕국인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를 통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왕이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으나,
그가 멤피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든가 또는 그 도시가 아주 일찍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곳은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두 왕국의 경계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분명히 정치적인
이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멤피스가 받들었던 신(神)은 수공업자와 장인(匠人)의 수호신이자 어떤 점에서는
창조주이기도 했던 프타였다.
프타 대(大)신전은 그 도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멤피스 신학이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한 문헌에 따르면, 프타는 마음과 말씀의 힘으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즉 인간이라는 개념이 창조주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다음 신의 말씀 그 자체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헌은 창조의 행위를 물리적인 것에 빗대는 인습적인 관례에서 벗어나 있고
추상(抽象)의 정도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이집트에서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것이며,
또한 멤피스 사제들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도시의 원래 이름은 '하얀 벽'으로 원래는 회반죽을 칠한 벽돌로 벽을 쌓은 왕궁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얀색은 하이집트 왕의 색깔이었으므로 그 색깔은 또한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도시의 부지 자체에서는 메네스 시대의 유물이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멤피스의 묘역에서 나온 유물로 보면 그 도시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에 대한 전승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사카라에서 발견된 제1왕조 및 제2왕조 시대(BC 2925경~2650경)의 정교하게 안치된
커다란 무덤들은 왕들의 무덤이었다고 주장되어왔으나,
일부 학자들은 멤피스가 그 두 왕조의 유일한, 심지어는 주된 수도였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다.
BC 3세기의 역사가인 마네토에 따르면 제1왕조와 제2왕조는 상이집트의 아비도스
근처에 있는 티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4각형 돌로 만든 이 시대의 무덤들이 아비도스에서 발굴되었는데, 학자들은 그 무덤이
초기 왕조 시대의 왕릉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타르칸이나 아부루와이시 같은 곳에도 그 시대에 속한
중요한 무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이들 무덤 가운데 어떤 것이 왕이나 대신의 무덤이고, 어떤 것이 단순한 기념물인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 11/16(목) AM 멤피스에서의 람세스2세 석상 설명입니다.
▼ 11/16(목) AM 건물내에 보관되어 있는 람세스2세 석상입니다.
(람세스 2세?)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왕(재위 B.C. 1304경~1237경) 세티 1세의 아들.
100세까지 산듯하다.
치세초기(B.C. 1300경) 시리아의 가데슈에서 히타이트 연합군과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즉위 21년에 히타이트왕 하타실리스(Khatasilis)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치세 후반에는 누비아 지방도 안정되어, 이집트 왕국은 평화리에 번영하였으며
다니스, 멤피스, 테베, 누비아 등 전국토에 걸쳐 그가 좋아하는 기념적 건조물이 건립되었다.
아부 심벨 신전, 테베 서지구의 장제전(라메세움), 아비도스의 신전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조상은 매우 많아, 특히 아부심벨과 멤피스에 있는 거상을 비롯 토리노의 이집트
미술관소장인 좌상(테베 출토, 흑색 화강암제, 높이 194cm)은 걸작으로서 알려져 있고,
왕명을 고쳐서 자기 이름을 새긴것도 적지 않다.
왕묘는 ‘왕가의 계곡’에 있으나(제7호), 벽면장식은 거의 파손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람세스 2세 [Ramesses II]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 11/16(목) AM 람세스상의 상반신 전경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박물관 내의 람세스2세상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박물과 내에 보관된 부조 부분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 박물관내에 보관된 유물로 용도를........
▼ 11/16(목) AM 멤피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의 3인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에는 프타, 그의 부인 세크메타, 그의 아들 네페르템 그리고 람세스2세에 대한
설명입니다.
(프타(Ptah)?)
프타 (Ptah, Ptaha, Peteh, Tathenen, Tanen)는 고대 이집트 신화의 창조신이다.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의 남편이다. 하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지배한 최고의 신으로
일컬어지며, 미라가 된 남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프타의 이름은 건립자라는 뜻이 있으며, 지혜의 신인 토트의 명령에 따라 천지창조를
마치고 정의를 확립하였다고 전해지는 신이다.
파괴와 재생의 여신인 아내 세크메트, 농작물의 신이자 의술의 신인 아들 네페르템과
더불어 멤피스의 3신이며, 이집트의 신들 가운데 아몬,라에 이어 제3위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장인과 예술가의 보호신, 모든 기술의 위대한 발명가로 불리며, 신·인간·가축 등 모든
생물체는 프타의 심장과 혀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멤피스 곳곳에 신전이 세워져 해마다 화려한 제의가 치러졌는데, 미라로 만들어진 프타는
머리에는 꼭 달라붙는 모자를 쓰고, 턱에는 긴 가짜 수염을 달았으며, 몸은 모시 옷으로
감겨 있다.
왼손에는 생명·힘·영속·전지전능을 상징하는 왕의 지팡이를 들고 있다.
우주의 창조신, 가축의 신으로도 불린다.
그리스신화의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 로마신화의 불카누스와 동일시된다.
▼ 11/16(목) AM 위 글이 설명한 멤피스의 3인방과 람세스 부조입니다.
▼ 11/16(목) AM 핫토르여신의 흉상입니다.
▼ 11/16(목) AM 람세스2새 상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아몬 오피스2세를 상징한 설화석고 스핑크스라고 합니다.
아몬 오피스2세는 룩소르신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파라오라고 합니다.
▼ 11/16(목) AM 멤피스의 스핑크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의 스핑크스 정면상 전경입니다.
▼ 11/16(목) AM 람세스2세의 정면상 전경입니다.
▼ 11/16(목) PM 멤피스탐방을 마치고 이집트국립박물관을 탐방합니다.
박물관 탐방시 찍은 유물은 별도 작성합니다.
▼ 11/16(목) PM 이집트국립박물관을 떠나 숙소로 돌아오면서 바라본 일몰전경입니다.
▼ 11/16(목) PM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본 피라밋 전경입니다.
▼ 11/16(목) PM 멤피스 부근의 마을 전경입니다.
▼ 11/16(목) PM 이집트의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쓰레기도 거의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지등을 수집해서 재활용한다고 합니다.
▼ 11/16(목) PM 일정을 끝내고 잠시 시간을 내어 이집트 유명 향수가게를 들렀습니다.
우리나라말을 섞은 안내가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 11/16(목) PM 한국어로 만들어진 향수 종류표입니다.
▼ 11/16(목) PM 숙소로 돌아오는 길 전경으로 이곳에도 교통난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2018.11.17.금. 8일째)
▼ 11/17 금 AM. 묵었던 카이로의 메르디안 피라미드 호텔 외부 전경입니다.
▼ 11/17 금 AM. 메르디안 피라미드호텔의 1층 로비 전경입니다.
중국 관광객들로인해 시장판보다도 더 질서가 없는 엉망진창 그모습입니다.
▼ 11/17 금 AM. 호텔 앞의 참새들입니다. 한국의 참새와 다름이 없습니다.
▼ 11/17 금 AM. 호텔 앞 전경으로 열대나라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 11/17 금 AM. 버스를 이용하여 약 3시간에 걸친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 이동이 시작됩니다.
▼ 11/17 금 AM. 알렉산드리아 이동중 에 들린 휴게소입니다.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고, 우리나라로 표현하면 고속도로 휴게소쯤.......
▼ 11/17 금 AM. 휴게소에서 바라본 이슬람사원의 첨탑입니다.
▼ 11/17 금 AM. 이집트 제2의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첫목적지인
카타콤을 찾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도시를 건설한 후 수도로 삼았으며,
고대에는 헬레니즘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지중해 연안 나일 강 삼각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 도시는 지금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183㎞ 떨어져 있다.
지중해로 뻗은 T자 모양의 갑이 염호(마리우트 또는 마레오티스)와 바다 사이를 가르면서
형성된 돌출부에 있다.
이 T자 모양의 자루부분은 원래 파로스 섬과 연결되는 방파제였는데,
점차 바닥에 실트가 쌓이면서 2개의 항구(동쪽의 구항구와 서쪽의 신항구) 사이에 낀
지협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지만 겨울에는 가끔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이 도시는 근교의 농업 배후지와 함께 하나의 주(州)를 이루고 있다.
주민 대다수는 상업·공업·해운업·어업에 종사하며, 부두에서 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면직물·종이·초콜릿·가공식품·아스팔트·기름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이곳에서 생산하는 면은 최고 수출품으로 꼽힌다.
아울러 곡물과 채소도 주요수출품에 속하며, 차·커피·목재·천연양모·기계류 등이
수입되고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부르키움(그리스), 라코티스(이집트), 레기오 유다이오룸(유다 왕국),
파로스 등의 고대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파로스의 동쪽 끝에는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거대한 등대
(파로스의 등대)가 세워져 있었다.
미단 앗타흐리르(해방지구, 이전의 무하마드 알리 지구)는 현대식 도시의 심장부이다.
고대도시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폼페이의 기둥과 카움앗슈카파의 히드리아누스
지하묘지는 아직 그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이 훼손되었다.
이 도시에는 알렉산드리아대학교(1942), 무아사 병원과 간호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들이
있고, 그외에 그리스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주교 도서관과 그리스 로마 박물관 등이 있다.
해변도로인 알자이시(군용)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14.4㎞ 이상 뻗어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나일 강 삼각주 개발의 거점도시로 철도·도로·항공망을 두루 갖추고 있는
요지이다.
이곳의 항구는 잘 발달되어 있으며, 방파제를 비롯해 선창과 부두 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카타콤?)
이 명칭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3세기 후반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유해를
잠시 동안 안장했던 것으로 유명한 산세바스티아노 성당(로마 시 근처 아피아 街道에 있음)의
지하묘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의미가 확대되어 로마 시 주변의 모든 지하묘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뒤 다시 또 의미가 확대되어 원래 매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의 여부와 관계 없이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모든 지하 시설물들을 한데 묶어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그 예로 파리의 카타콤이라는 것은 원래는 사용하지 않는 채석장이었으나 1787년부터
묘지로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카타콤은 매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을 했다.
사람이 죽었을 경우 지하에 있는 가족 납골당에서 매장일과 기일을 맞아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을 치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시절 장례식이 있을 때마다 수반되었던 성체성사도 이 납골당에서
치러졌다.
어떤 카타콤은 커다란 방과 부속 예배실을 갖추고 있어 이곳에서 성인과 순교자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실상의 성소(聖所)로서의 기능을 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산세바스티아노 사원의 카타콤에 있는 트리클리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를 기리는 음식(refrigeria)을 함께
먹고 성인들에 대한 자신의 기도문을 벽에다 새겼다.
카타콤에는 교묘한 구조로 되어 있고 비밀통로가 있어서 모래밭이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박해와 소요 사태가 닥쳤을 때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그 예로 교황 식스투스 2세와 4명의 부제(副祭)들은 258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할 때 산세바스티아노 사원의 카타콤 안에서 붙잡혀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민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곳으로 피신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카타콤을 비밀 예배장소로 사용했다는 통념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3세기경 로마 시에는 5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교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마다 집을 나와 비밀리에 카타콤으로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어떤 종류의 예배이든지 간에 카타콤의 길고 좁은 통로를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보이며,
성 칼릭스투스 카타콤에 있는 '교황의 예배실'과 같은 가장 큰 공간을 가진 예배실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40명 정도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도나 이교도 모두 죽음을 불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묘지에서 죽은 자를 기리며 함께 식사를 하거나 미사를 보았을지는 몰라도
이 카타콤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보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카타콤은 그리스도교도나 로마인만이 유일하게 만들어낸 것은 전혀 아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돌로 된 지하의 굴 속에 매장하는 관습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권의 어느 지역에서든지 카타콤을 발견할 수 있다.
몰타에서는 이 섬의 고대 수도 근처에, 시칠리아에서는 타오르미나와 시라쿠사
근처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집트에서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근처에 있다.
레바논의 시돈(지금의 사이다) 근처를 비롯해 튀니지의 하드루메툼(지금의 수사) 근처에
카타콤이 있으며 이탈리아에는 여러 곳에 널리 분포해 있으나 특히 나폴리 주변과
고대 에트루리아 지역에 많이 있다.
로마에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카타콤은 시 중심부에서 4.8㎞ 정도 반경 안에 분포해
있다.
40개의 굴방이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도시로 들어오는 간선도로 근처에서 발견된다.
이것들은 알려져 있는 모든 카타콤 가운데 큰 편에 속하는 것들로 일부는 관람객들에
개방된다.
▼ 11/17 금 AM. 지하 공동묘지로 들어갑니다.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폰 화면입니다.
▼ 11/17 금 AM. 죽음의 관들이 들어갔던 자리입니다.
▼ 11/17 금 AM. 지표면에서 이 통로로 관들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 11/17 금 AM. 발굴 도중 발견된 인골들이라고 합니다.
▼ 11/17 금 AM. 관들이 놓였던 곳에는 이런 벽화들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 11/17 금 AM. 전체적인 개요를 그려놓은 사진인데 이 모형도를 보면 전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 11/17 금 AM. 카타콤을 떠나 폼페이 기둥이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폼페이의 기둥?)
지금의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이 적은데,
이 폼페이의 기둥은 그 적은 유물 중 하나이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상을 얹기 위해 세워진 것이므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높이 30m, 지름은 상부 2.3m, 기부 2.7m나 되는 큰 기둥이다.
아스완에서 가져간 적색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토대의 돌은 세티 1세와 프사메티코스 등의 유적에서 모은 것들이다.
한편 이 기둥은 항해 중인 배들의 목표물로도 이용되었다 한다.
주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세라피스 신을 모시던 신전 세라페움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 11/17 금 AM. 알렉산드리아 대학생들의 맑은 표정입니다.
▼ 11/17 금 AM. 파로스등대 자리에 세워진 성벽입니다.
15세기 이슬람시대에 세워진 3층 구조의 카이트베이 요새입니다.
기원전 3세기 최초의 등대인 파로스 등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요새로
3층에 오스만터키시대에 사용했던 대포와 무기고가 있다고 합니다.
(파로스 등대?)
가장 유명한 고대의 등대로 기술적인 위업이며 이후 세워진 모든 등대의 원형이다.
BC 280년경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토스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 안에 있는 파로스 섬에 세웠고 높이가 135m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등대는 3단식으로 맨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며
모두 약간 안쪽으로 쏠리게 지어졌다.
폭이 넓은 나선형 경사로가 옥탑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옥탑에서 밤에 불을 밝혔다.
이 등대 위에는 거대한 조상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를 태양신 헬리오스의 형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등대는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불가사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최초의 목록은 그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꼽고 있음). 중세 아랍인들은 꼭대기 등대를 작은 모스크로 바꾸었다.
이 등대는 12세기 이후에 무너졌으며 1477년경 맘루크 술탄 카이트 베이는 그 잔해를
이용해 요새를 지었다.
▼ 11/17 금 AM. 카이트베이 요새 전경입니다.
▼ 11/17 금 AM. 알렉사드리아 시내에 있는 순국 군인 위령비가 있습니다.
▼ 11/17 금 AM. 점심때 먹은 알렉산드리아의 생선구이 특식이라고 합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에 조성된 휴양시설을 점시 둘러 보았습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시설에서 바라본 대통령 하계 별장인 몬타자 궁전 전경입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시설의 입구 전경입니다.
▼ 11/17 금 PM. 이집트대통령 하계 휴양시설인 몬타자 궁전 원경입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시설에서 낮시간을 즐기는 이집트인들입니다.
▼ 11/17 금 PM. 이집트 소녀들은 사진 찍기를 엄청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 11/17 금 PM. 카이트베이 휴양지내의 꽤 깊을 것 같은 바다인데......
▼ 11/17 금 PM. 대통령 하계 휴양지인 몬타자 궁전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북동쪽 17km지점의 몬타자 비치 기슭의 조금 높은 구릉 위에 있다.
원래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1892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정원에는 수백 그루의 야자나무가 있고,
스포츠 시설이며 레스토랑, 매점 등도 갖추어져 있다.
150ha의 부지 안에 있는 팔레스틴 호텔은 별장 하나를 개조한 것으로 분위기가 좋다.
▼ 11/17 금 PM. 신약성경의 마가복음 저자인 마가의 알렉산드리아 전도여행 기념비입니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업적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서관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이후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기원전 323~283년) 혹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246년) 때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46~120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후속인 아킬라스가 카이사르의 해상 능력을
제한하려자 카이사르의 배에 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반면에 에드워드 기븐은 도서관이 391년 세라페이온의 파괴를 지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빌로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역시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도서관이 파괴된 후에,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세라페이온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대신 이용했다.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념하고 그것에 필적한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2002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서 개관했다.
▼ 11/17 금 PM. 새롭게 건설된 도서관 실내 전경입니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내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인쇄기 등입니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알렉산드대왕의 흉상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2세와
왕비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는 광산과 광대한 삼림, 넓은 목초지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민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아민타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마케도니아군의
군력을 확충하고 여기에 그리스군의 전술을 도입하여 전력과 전술에서 완벽한 최강의
군대를 만든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살 때 사나운 명마를 단숨에 길들일 정도로 용맹했고,
열여섯 살 때까지 그리스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사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무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으로 탁월한 학문을 겸비했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으며 자랐다.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과 전쟁을 하러 떠나자 알렉산드로스는 왕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마케도니아 인들의 지배에 저항하여 트라키아의 마에디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에디 족의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하고 그들을 영토에서 내쫓은 후
그 자리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부자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의 대부분을 정복한 다음 코린토스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반페르시아 연합이 결성된 것처럼 '그리스 연합(Hellenic Alliance)'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스파르타만이 제외되었다.
필리포스는 이 연합의 이름을 헤게몬(Hegemon, '최고 사령관'이라는 뜻)이라고 지은 후
페르시아 제국에 복수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펠라로 돌아온 후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Cleopatra Eurydice)와 재혼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자 필리포스의 장수 중 하나였던 아탈로스는 이 결혼에서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기대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묘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서 그녀의 삼촌 아탈로스는
술을 마시며 자신의 조카딸이 필리포스보다 훨씬 젊으니 이제 그녀에게서 마케도니아 인들이
늘 신에게 기도하던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해서 컵을 그의 머리 위로 던지며 "그럼 나는 사생아란 말이냐!"
라고 외쳤다.
필리포스는 아탈로스의 편을 들어 칼을 뽑아들고 아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술에 취한 탓인지
지나치게 화가 난 탓인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걸 보라. 유럽을 지나 아시아까지 정복할 준비를 하는 사내가
겨우 자리를 지나가다가 넘어졌구나"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빠져나가 일리리아에서 왕실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6개월 후 가족의 친구인 코린트인 데마라토스가 필리포스를 설득하여 그를 돌아오게 해주었다.
기원전 336년, 에게 근방에서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필리포스는 자신의 경비대장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파우사니아스는 도망치려 했으나 포도 줄기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인
페르디카스와 레오나토스에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약관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그는 평생 왕위를 노리고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게 된다.
필리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배지의 주민들이 데모스테네스의 주도하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평정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이 살아 있을 때부터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현장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의 소소한 반란들이 평정되자 아버지인 필리포스 때부터 준비해오던 페르시아
원정을 다시 시작했다.
페르시아 정복이 끝났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사들을 다독여가며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했다.
인도에서도 연전연승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인도 동부 점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힌두쿠시 산맥을 겨우 넘은 군사들이 더 이상의 전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회군했다.
원정을 계속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는 스스로를 아몬 신(神)의 아들이며 파라오라
칭하고 신흥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그는 정복지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그는 서양의 마케도니아-그리스의 문화와 동방의 페르시아-인도 문화를 한데 아우른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아울러 두 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제국을 꿈꾸며 동·서양 융화정책을 펴나갔다.
그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다리우스의 딸과 결혼했고, 뒤이어 마케도니아 남성들이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군이든 왕실에서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원전 323년, 갑자기 열병에 걸려 신음하던 젊은 대왕은 자리에 누운 지 불과 열흘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였기에 후계자를 두었을 리 없었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여 세운 거대한 제국은 그의 사후 주인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왕위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계속되었다.(다음백과 중에서)
▼ 11/17 금 PM. 새롭게 건설된 도서관은 태양열 유리로 지붕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 11/17 금 PM. 도서관 앞의 조형물로 지구를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 11/17 금 PM.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전면벽에는 세계 각국의 문자를 표현해놨는데
한글의 몇 글자도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 11/18 토 AM. 알렉산드리아 일정을 마치고 카이로의 호텔로 돌아와 숙박 후
실질적인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짐을 챙겨 버스에 오릅니다.
▼ 11/18 토 AM. 쿠푸왕 피라미드 입구의 호텔 전경입니다.
이 호텔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카이로회담이 열린 우리로서는 역사적인 곳입니다.
(카이로선언?)
제1차 회담(1943. 11. 22~26)에서 연합국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했다.
또한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11월 27일 발표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관하여 내린 최초의 공식성명이었다.
그 주요내용은 ① 미국·영국·중국 3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한다.
②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응징하나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③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 만주·타이완 등의 중국에 대한 반환,
일체의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의 구축(驅逐) 등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었다.
이상의 내용들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된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
제1차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 처칠과 루스벨트는 요시프 스탈린과 테헤란 회담을 위해 이란으로
갔다가 카이로로 다시 돌아왔다.
제2차 카이로 회담(1943. 12. 2~7)에서 처칠과 루스벨트는 터키의 I. 이뇌뉘 대통령을 설득해
터키를 연합국측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 11/18 토 AM. 차창으로 바라본 호텔 건물 전경입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가 밀집해 있는 고대 왕들의 무덤군 앞에 있는 최대규모의
쿠푸왕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이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3개의 피라미드는 내부·외부가 모두 고대에 이미 도굴당해 시체안치실에 있던 껴묻거리
[副葬品] 대부분이 사라졌다.
무른 흰색 석회석의 외벽도 거의 모두 벗겨져버렸기 때문에 피라미드들의 높이가 원래보다
낮아져 대피라미드도 지금은 138m 높이에 불과하다.
가운데 있는 카프레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삽도(揷圖)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석회석
외벽이 남아 있다.
쿠푸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옆면 경사가 51°52'이며 밑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 있다.
대피라미드의 중심부는 황색 석회암 벽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거의 없어진 바깥벽과
내부통로는 그보다 고운 입자의 옅은 색조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시체안치실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1개당 평균 2.5t 무게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쿠푸는 다른 두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정교함이나 공법에서 탁월한 걸작품이다.
특히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사용된 돌덩어리들의 크기와 무게를 고려할 때 설계의 기하학적
정밀성이나 돌을 깎은 정확도는 감탄할 만하다.
아직 제자리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외벽 돌들은 무게가 16t까지 나가는 것도 있지만 이 외벽
돌은 물론 내벽까지도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어느 곳의 석조건축보다도 더 정교하게
연접되어 있다.
대피라미드의 입구는 북쪽 측면, 지상 약 18m 위에 있다.
입구에서 비탈져 내려가는 복도는 피라미드 내부를 경사지게 내려가 피라미드가 서 있는
돌이 많이 섞인 표토층을 지나 완성되지 않은 지하실에서 끝난다.
이 하강 복도는 올라가는 복도로 연결되는데, 이를 따라가면 여왕의 방으로 알려진 방과 46m
길이의 커다란 경사진 회랑(回廊)이 나온다.
이 회랑의 윗부분에는 흔히 왕의 방으로 불리는, 시체안치실로 통하는 길고 좁은 통로가 있다.
왕의 방 내부 벽과 천장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방에서 2개의 좁은 구멍이 내부를 비스듬하게 통과해 외부로 나 있는데,
이것이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것인지 통풍을 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왕의 방 위쪽에는 거대한 화강암 석판이 수평으로 배치된 5칸의 방이 있는데,
석판을 설치한 목적은 시체안치실 천장에 놓인 석재 덩어리들이 누르는 엄청난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피라미드를 세운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한 해답이 없으나 당시 이집트인들은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는 고패와 도르래가 없었으므로 벽돌·흙·모래로 제방을 쌓고 그 제방 위로
썰매·굴림대·지렛대를 이용하여 돌을 끌어올린 듯하다.
제방은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면서 점점 높고 길어졌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으며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나일의 홍수로 들에서 할 일이 없을 때 피라미드
공사를 진행한 듯하다.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葬祭殿)과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피라미드의 남쪽 카프레 계곡 사원 부근에는 대(大)스핑크스가 있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 스핑크스는 얼굴은 카프레 왕이고 몸은 누워 있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길이는 약 73m, 높이는 20m에 달한다.
1925년 쿠푸의 둑길 상단 가까이에서 쿠푸의 어머니 헤테페레스 여왕의 장비(葬備)를 담고
있는 구덩무덤이 발견되었다.
돌이 들어찬 깊은 구덩의 밑바닥에는 여왕의 빈 돌널[石棺]이 제4왕조 장인(匠人)들의 탁월한
예술성과 완벽한 기술을 보여주는 가구와 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3개의 피라미드 둘레에는 왕들의 친척이나 대신(大臣)들의 장지(葬地)로 사용된 '마스타바'로
불리는, 꼭대기가 평평한 장례용 구조물의 큰 분포지가 있다.
기자에는 격자모형으로 늘어서 있는 제4왕조의 중심적 마스타바를 비롯한 많은 마스타바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몇 개는 제3왕조(BC 2650~2575경)의 것이고,
나머지는 제5~6왕조(BC 2465~2150경)의 것이다.
▼ 11/18 토 AM. 3개의 피라미드에 관한 이집트 관광청의 안내도 설명입니다.
▼ 11/18 토 AM. 쿠푸의 피라미드 건축물의 안내도입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에서 금해야 할 사항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의 원래 입구가 위에 있지만 숨겨져있었고,
아래 구멍은 도굴을 위해 뚫은 구멍이라 합니다.
(쿠푸왕 피라미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서쪽 13킬로미터 지점.
광활한 기자의 모래 언덕에 피라미드 세 기가 우뚝 서 있다.
쿠푸 왕, 카프라 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다.
이들은 모두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로 꼽히는 고왕국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고왕국 시대는 기원전 2686년경부터 기원전 2181년경으로 제3왕조부터 제6왕조 시기를
일컫는다.
소위 피라미드 시대로 불리는 이 시대는 강력한 전제 군주인 파라오가 등장해 많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특히 현재까지 형태가 보존된 이집트 전역의 피라미드 70여 기 가운데 가장 큰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는 엄청난 규모와 복잡한 내부 공간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쿠푸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2대 왕으로 대략 기원전 2589년경부터 기원전 2566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4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스네프루와 왕후 헤테프헤레스 사이에서 태어난 쿠푸는 어린 시절
‘크눔-쿠푸(Khnum-Khufu)’라고 불렸다.
이는 ‘크눔 신이 보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인류를 창조한 위대한 크눔 신이 보호해 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위대한 존재라고 풀이된다.
파라오로 불리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전제 군주인 동시에
신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수장으로서 파라오는 상하 이집트의 주인인 동시에 모든 신전의 주인,
즉 신관이기도 했다.
파라오는 제사를 주관하고 신전을 건설했으며, 외부의 침략자들로부터 왕국을 보호하는
수장이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파라오는 태양신 라(Ra)에게 점지받아 이집트 땅을 다스리는 신적인
존재였으며, 지상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파라오는 신화 속의 호루스가 이집트에 강림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파라오는 육신의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 세계에서도 이집트를
다스리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지평선 아래로 떨어져 ‘죽어 버린’ 태양이 내일이면 어김없이 ‘살아 돌아오듯이’ 파라오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인이 시체를 미라로 만들고, 묘 안에 현세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있는 내세의 공간을
만들고, 수많은 부장품들을 묻은 것은 이처럼 생명의 불사(不死)와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만들어진 건축물이었다.
쿠푸의 아버지 스네프루는 세 기의 피라미드를 가지고 있었다.
쿠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피라미드의 건축을 지시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 제2권에
따르면 이 공사에는 10만 명의 인원이 3개월씩 교대로 노역에 동원되어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투린 파피루스(Judicial Papyrus of Turin)의 기록에 따르면 약 23년간의 재위 기간
대부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카이로 교외의 기자에 남아 있는 이 피라미드는 밑변이 230미터이고 높이가 147미터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꼭대기의 10미터 가량이 파손된 상태다.
2.5톤짜리 석회암과 화강암 돌덩이 230만 개를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올 틈도 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린 형태로 파손된 꼭대기에는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석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의 건축 기술로 어떻게 큰 돌을 100미터가 넘는 높이로 들어 올려 정확하게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피라미드의 정밀한 구조와 당시의 연장 수준으로 보아 이집트 인들이 고도로 발달된
기하학적 이론과 석재 가공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대피라미드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긴 터널과 대회랑, 왕의 방, 왕비의 방, 내려가는 통로, 올라가는 통로, 수평 통로, 환기통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그 구조는 물론 용도를 알 수 없는 빈 공간도 적지 않다.
현재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로는 9세기경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
대피라미드를 도굴할 때 뚫어 놓은 입구를 활용한 것이다.
알 마문이 피라미드 안의 부장품을 모조리 챙겨 간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이 피라미드는 텅 비어 있다.
파라오의 방에 무덤이 하나 있지만 쿠푸의 유골은커녕 찢긴 천 조각이나 부서진 자기의
흔적조차 없다.
때문에 누군가 앞서 도굴하기 전부터 이미 텅 빈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근거에서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건축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1954년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두 척의 태양의 배가 발견되면서
일축되었다.
태양의 배는 죽은 파라오의 영혼이 저승에서 배를 타고 여행한다는 관점에 따라 부장품으로
넣어진 것이다.
파라오의 텅 빈 방에 대해서는 도굴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부러 ‘파라오의 방’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중요한 부장품은 다른 곳에 숨겨 두었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전자파 레이더로 정밀 검색한 결과 대피라미드 내부에 세 군데 정도의 비밀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절대 군주인 파라오가 자신의 내세를 담보하고 현세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에 강제 동원했다는 설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쿠푸가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폭정을 휘둘렀다고 주장했다.
내세에서의 부활을 비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쿠푸가 가신들을 노예로 삼고 딸들을 매음굴로
보냈으며,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피라미드의 노역자들이 임금을 받고 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늘날에는 피라미드 건설이 나일 강의 범람 기간 동안 실업자가 된 농민들을 부양하기 위한
이집트 시대의 뉴딜 정책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 11/18 토 AM. 위의 문은 원래 피라미드로 통하는 문이었고 돌들로 숨겨져 있어
아래 문은 도굴을 위해 칼리프 알 마문이 뚫은 문이라고 합니다.
▼ 11/18 토 AM. 현재 이용되고 있는 문을 지키는 경찰들입니다. 카메라 반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 11/18 토 AM. 원래 통로로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돌로 막혀 있다가 어느 시점에
돌이 무너져 내리면서 통로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 11/18 토 AM. 측면으로 바라본 피라미드의 위용입니다.
▼ 11/18 토 AM. 사람의 키높이와 비교하면 쌓여진 돌하나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11/18 토 AM. 아빠와 함께온 이집트 애기입니다. 눈이 초롱초롱 이뿝니다.
▼ 11/18 토 AM. 모서리에서 바라본 피라미드의 위용입니다. 운무로 맑지 못하지만.....
▼ 11/18 토 AM. 피라미드 옆에서 낙타를 태워주고 돈벌이를 하는 이집트인들입니다.
사진 촬영에 인당 1불입니다.
▼ 11/18 토 AM. 대피라미드 옆의 왕비와 자녀들의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 옆의 넓게 깔린 돌들은 행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제단이라고 합니다.
▼ 11/18 토 AM. 태양의 배 박물관 외관 전경입니다.
(태양의 배?)
태양의 신 라(La)가 우주를 여행할 때 태양의 배를 이용한다는 전설에 따라 쿠푸왕이 사후
하늘을 여행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다.
일본 자본에 의해 발굴된 이배는 14년간의 복원을 거쳐 현재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옆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발굴된 곳의 흔적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11/18 토 AM. 태양이 배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 게시판입니다.
성인 기준으로 80이집트파운드이면 약 4800원 정도됩니다.
그기에 카메라티켓 50이집트파운드(3,000원정도), 비디오티켓 300이집트파운드
(18,000원 정도)가 추가된다고 하니........
▼ 11/18 토 AM. 태양의 배를 묻고 덮었던 지붕석들입니다.
▼ 11/18 토 AM. 이곳이 태양의 배를 묻었던 곳으로 발굴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 11/18 토 AM. 태양의 배 실물 전경입니다. 카메라 소지를 하지 않아 휴대폰으로.....
▼ 11/18 토 AM. 4,500년 전의 목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 11/18 토 AM. 쿠푸왕 피라미드 주변 이동 순로를 게시해 놓았습니다.
▼ 11/18 토 AM. 쿠푸왕 피라미드를 포함 3개의 피라미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왔지만
운무로 꽝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기자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가 세웠다.
대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 4번째 왕 카프레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 6번째 왕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높이 66m이다.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고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 11/18 토 AM. 조망좋은곳이라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상품 장사꾼들이 진을치고 있습니다.
▼ 11/18 토 AM. 이집트의 대학생들이 졸업기념으로 이곳을 방문했나 봅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 탐방을 마치고 스핑크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 11/18 토 AM. 차창을 통해 찍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입니다.
마치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지키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이용해 야간 공연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8 토 AM. 신전문을 통해 스핑크스 옆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11/18 토 AM. 측면에서 바라본 스핑크스 전경입니다.
(기자의 대스핑크스?)
일반적으로 스핑크스는 카프레가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 이후 한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
훗날 이집트의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래에 파묻힌 스핑크스
옆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스핑크스가 투트모세 4세에게 “내 몸을 덮고 있는 모래를
다 걷어 주면 너를 왕(파라오)으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했다.
투트모세는 즉시 잠에서 깨어나 모래를 깨끗이 걷어내고 뒷날 왕이 되었다.
기자의 대 스핑크스는 전체 길이 60미터 높이 20미터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대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쌓아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있던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보통 대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기 때문에 카프레 왕 때인 기원전 25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선 카프레 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제작법이
다르고 석재의 산지와 공법도 달랐다.
그리고 최근 스핑크스 주위에 있는 벽에서 큰 홈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지질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홈들은 홍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홍수는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때에나 있었다.
하지만 빙하기에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만큼의 문명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현재로서는 없다.
지금, 대 스핑크스의 코는 깨져 있다.
대 스핑크스뿐 아니라 이집트 안의 석상은 거의 다 코가 없다.
나폴레옹이 대포를 쏘아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나, 문화재에 심취해 있던
나폴레옹이 그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슬람교의 우상 숭배 금지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슬람 교도들이 스핑크스의 코를 부수면 스핑크스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스핑크스 코를 상대로 사격 연습을 하였다는
설도 있다.
▼ 11/18 토 AM. 스핑크스는 파라오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형상화하였다고 합니다.
▼ 11/18 토 AM. 신전에서 피라미드로 가는 통로 전경입니다.
▼ 11/18 토 AM. 스핑크르 탐방을 마치고 되돌아나가는 통로에 인파들의 행진입니다.
▼ 11/18 토 AM. 기자의 대표적인 피라미드 3개가 조망되는 위치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가장 우측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 11/18 토 AM.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탐방 후 인근 이집트 부페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 11/18 토 PM. 중식후 귀국을 위하여 공항으로 이동로의 전경입니다.
▼ 11/18 토 PM. 곳곳에 회교사원의 첨탑이 조망됩니다.
▼ 11/18 토 PM. 이동중에 바라본 카이로 시내의 아파트 전경입니다.
▼ 11/18 토 PM. 카이로 공항 출국장에 도착합니다.
▼ 11/18 토 PM. 카이로에서 아부다비로 이동할 에티하드항공 여객기입니다.
▼ 11/18 토 PM. 아부다비에서 환승후 인천공항으로 이동 중에 있습니다.
11/19일 11시45분에 인천 영종 공항에 도착하여 9박10일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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