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4(화) 5일째 일정)
▼ 11/14 AM 밤새 크루즈는 아스완에 도착하여, 선상 조식후 버스로 아부심벨로 이동합니다.
이동시간은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버스 차창을 통해 보는 풍경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뿐입니다.
▼ 11/14 AM 사막의 일출 전경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 가는 길에 사막 가운데서 정차하여 사막의 아침 일출을 즐기고 있습니다.
▼ 11/14 AM 아부심벨의 대신전 전에 있는 휴게시설입니다.
이곳에서 간단한 아침식사와 차 한잔을 마시고 이동키로 합니다.
▼ 11/14 AM 휴게시설에서 본 이집트의 열대지방 꽃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 대소신전으로 향하는 강안길 전경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 대신전 뒷부분으로 신전관리구 및 이집트기가 게양되어 있습니다.
▼ 11/14 AM 아스완댐으로 인해 바다같이 거대한 댐으로 변한 나세르호 전경입니다.
▼ 11/14 AM 이동하면서 바라본 아부심벨의 대신전 측면 전경입니다.
(아부심벨?)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에 재발견되었다.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각각 놓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신전은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다.
신전 내부는 왕의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주신전의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이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960년대 토목공사에 의한 나일 강 수위의 상승으로 수몰 위험에 처했으나
구제되었다.
▼ 11/14 AM 이동하면서 바라본 아부심벨의 대신전 측면 전경입니다.
(대신전 1 ?)
주신전 앞에 있는 4개의 거대한 람세스 좌상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장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신전은 1960년대의 복잡한 토목공사에 의해 나일 강의 수위가 상승했을 때 수몰 위험을
모면하고 구제되었다.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지금의 쿠루스쿠)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 재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외부세계에 알려졌고,
1817년 이집트학 전문가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남쪽에 있는 1쌍의 좌상에 새겨진 낙서들은 BC 6세기에 이집트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새긴 것으로 초기 그리스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 신전 자체는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며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서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년에 어느 특정한 며칠간은 하루의 첫번째 햇살이 신전 전체를 꿰뚫으며 들어와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 제단까지 비치도록 지어졌다.
주신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1960년대초 이 근처의 아스완 하이 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아부 심벨 유적이 수몰당할
위험에 처하자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주관하여 이 유적을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 예술품 보존과 복원).
1964~66년에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기사·과학자 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팀과 노동자들이 절벽 꼭대기를 파서 2개의 신전을 완전히 들어내 강바닥에서 60m 높은
지점에 복구해놓았다.
▼ 11/14 AM 대신전의 또 다른 설명입니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의 통치자들 중 가장 강력했던 파라오의 하나였다.
여러 학자들은 그를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인 성경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와 동일 인물로 간주한다.
그는 기원전 1279년부터 66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1213년 사망했을 때는 여러
명의 아내와 첩들에게서 얻은 백 명이 넘는 자녀들을 남겼다고 한다.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은 다른 어떤 파라오들의 것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채의 신전을 세우고, 증축하고, 장식했다.
누비아의 아부 심벨의 산자락에 조각된 태양신에게 바친 그의 신전은,
발치에 작게 조각된 다른 가족들을 두고 왕관을 쓴 채 옥좌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모습을
나타낸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바위를 깎아 조각되었으며 건물의 파사드를 지배하고 있는 높이 20m 이상의 이 조각상들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아(自我)상'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지방 부족들에게 파라오가
지닌 초인적인 힘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다.
파사드 꼭대기에는 개코원숭이들이 태양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신전 내부에는 파라오의 조각상과 그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들이
있다.
1813년 스위스의 동양학자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되었을 때,
이 신전은 거의 완전히 모래에 뒤덮여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굴꾼인 조반니 벨초니가 1817년 무덤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몽땅 다 가져가 버렸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에게 바쳐진 두 번째 신전이자 좀 더 작은 신전이,
람세스 2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라고까지 일컬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해 건축되었다.
1960년대 초반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고 있을 무렵,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인 캠페인을
일으켜 자금과 전문적인 기술을 동원해 아부 심벨의 신전들이 나세르 호수의 물에 잠기지
않도록 더 높은 지대로 옮겼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부 심벨 신전 [Abu Simbel Temples]
▼ 11/14 AM 람세스2세 석상 아래에는 그의 왕비와 딸들의 부조가 같이 서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개의 석상 중 좌측 2개의 석상 전경인데 두번째 석상은 훼손이 심한 상태입니다.
▼ 11/14 AM 람세스2세의 4개 석상 중 우측 석상은 상태가 그나마 양호했습니다.
▼ 11/14 AM 우측의 람세스2세 석상 아래에도 왕비와 그의 자녀상들이 함께합니다.
▼ 11/14 AM 대신전쪽에서 바라본 소신전 전경입니다.
▼ 11/14 AM 이집트는 정쟁이 자주 발생되는 국가라 그런지 군경의 총기 휴대가 상시화 되어
있습니다. 경비중인 보안요원이 총기룰 휴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11/14 AM 대신전쪽에서 바라본 소신전의 전체 규모입니다.
▼ 11/14 AM 대신전내의 부조 전경입니다.
▼ 11/14 AM 대신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문고리에 보면 생명의 열쇠인 앙카가 걸려 있는 걸 볼 수있습니다.
열쇠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 11/14 AM 소신전쪽에서 바라본 대신전 전경입니다.
사람의 크기를 비교하면 신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11/14 AM 소신전 전경입니다.
(아부심벨 소신전?)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상·하 이집트를 통일했던 위대한 람세스 2세는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도 깊었던 모양이다.
대신전의 옆에 위치한 아부심벨 소신 전에는 규모는 1/4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람세스 2세
본인과 그의 왕비를 번갈아 조각해 놓은 6개의 석상이 만들어져있다.
대신전에 받은 충격과 놀라움 때문인지 대충 보게 되는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소신전
내부의 각 기둥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토록 오래전 세상을 다 가졌던 위대한 왕이 부부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남겼다는 것도
참 재미있다.(오마이뉴스 '사표쓰고 떠난 세계일주 '중에서)
▼ 11/14 AM 소신전 앞의 석조 부조상인 왕비는 하토르여신과 동격 모양으로 부조되었습니다.
▼ 11/14 AM 아부심벨 대/소신전을 떠나면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 11/14 AM 열대지방의 처음 보는 꽃이어서....
▼ 11/14 AM 아스완댐을 만들면서 생긴 바다처럼 넓은 나세르호입니다.
(나세르호?)
1960년대에 착공하여 1971년에 준공된 아스완 하이 댐으로 나일 강 물이 모아지면서
생겼다.
총용량이 1,640억㎥인 나세르 호의 물을 하류로 방출하여 관개함으로써 32만 4,000㏊의
경지가 늘어났고, 28만 3,400㏊의 범람지를 영구 관개지로 개조시켰다.
호수에는 식용 물고기를 기른다.
1980년대 초반에 토지개간사업을 호수 주위의 사막에서 시작했다.
이집트에 속한 호수의 북쪽 2/3는 가말 아브델 나세르 대통령(1956~70)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 호라 부르며, 수단에 속한 남쪽 1/3은 누비아 호라 부른다.
▼ 11/14 AM 아스완댐으로 인해 수몰직전의 바위산의 신전을 옮기기위해 부분부분 토막낸
표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 11/14 AM 이집트 지도를 통해서 바라본 여행지역입니다.
제일 윗쪽 카이로에 도착후 국내선으로 룩소공항으로 이동 룩소에서 시작하여 덴데라, 룩소르,
에두프, 콤옴보, 필레, 아스완, 아부심벨를 거쳐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까지의 여정 지역입니다.
▼ 11/14 AM 아부심벨의 대소신전 탐방을 마치고 크루즈로 돌아오면서 목격한 말로만 들어보던
사막에서 볼 수 있는 신기루 현상입니다. 착시현상으로 마치 호수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 11/14 AM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가운데 도로와 도로옆으로 같이 달리는 철탑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습니다.
▼ 11/14 AM 아침 일찍 건넜던 아스완댐의 도로를 따라 크루즈로 돌아갑니다.
▼ 11/14 PM 크루즈로 돌아가는 길에 이집트의 아스완 거리 전경입니다.
(아스완(Aswan)?)
나일 강의 범람원과 인접지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길고 좁은 모양의 아스완은 이집트의 나일 강변 최남단의 주이며, 짧은 남쪽의 경계선은
수단과의 국경선의 일부를 이룬다.
나일 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사암·화강암·섬록암의 언덕들은 말라버린 지 오래된 옛 하천들로
개석되어 있다.
주도인 아스완과 수단 국경도시인 와디할파에서 나일 강은 화강암층을 뚫고 흐르는데,
암층을 서서히 침식하여 강 가운데에 폭포로 불리는 급류와 섬들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수상교통에 장애가 되었고, 그결과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에 아스완을 국경으로
정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아스완 시의 바로 상류 쪽에 옛 아스완 댐이 있으며, 그곳에서 약 6㎞ 남쪽에 세계적인
대토목공사의 하나로 1970년에 완공된 아스완 하이 댐이 있다.
이 댐에서 남쪽으로 수단 국경까지 거의 240㎞나 되는 구간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구릉성의
사막 불모지로 도로도 없고 철도도 없다.
본래의 강 유역은 범람하여 나세르 호가 되었다.
1968년 하이 댐이 가동되면서부터 아스완 주에서 여름에만 관개되던 많은 토지가 연중
관개지로 바뀌었다.
사탕수수·렌즈콩·옥수수·밀 등이 아스완 시의 북쪽 지역에서 경작된다.
아스완 주의 산업은 하이 댐과 카움움부 시, 이드푸 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위의 두 도시에는
제당공장들이 있다.
아스완 시 주변에서는 오래 전부터 화강암이 채석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대리석 채석장들이
생겼다.
아스완 주는 고대의 기념물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관광지로서도 각광받는 곳이다.
1960년대에 나세르 호의 수위가 높아져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한 이집트의 신전들이
국제학술기관의 대대적인 보존사업에 의해 고지대로 옮겨졌는데, 가장 복잡한 공사가 수행된
곳은 아부심벨과 필라에였다.
▼ 11/14 PM 크루즈로 돌아와 휴식을 위해 숙소에 들어오니 이번에는 코끼리 형상이.....
▼ 11/14 PM 크루즈에서 바라본 한가로운 모습의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4 PM 시간을 내어 아스완 전통시장을 찾았습니다.
열대지방이어서 그런지 각종 풍부한 과일들이 눈을 현혹 시켰습니다.
▼ 11/14 PM 전시되어 있는 옷들도 우리의 시골장터같이 호화찬란한 색깔로 .....
▼ 11/14 PM 시골장터의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 11/14 PM 아랍풍의 이집트인의 얼굴입니다. 누비아인은 짙은 검정색 피부를 가졌습니다.
▼ 11/14 PM 각종 과일이나 채소들이 나일강변에서 사시사철 대량 재배되어 가격도 저렴합니다.
▼ 11/14 PM 우리나라 60년대에 사용하던 저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 11/14 PM 열대지방의 차(茶)종류인데 이곳에서 유명한 무궁화꽃잎차를 구입하였습니다.
▼ 11/14 PM 이집트의 개들은 거의 떠돌이 개인데 별로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 11/14 PM 크루즈로 돌아와 저녁 선상부페로 배를 채웠습니다.
후식으로 먹은 이집트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망고입니다. 당도가 최고였습니다.
▼ 11/14 PM 식사후 필레에 있는 신전의 빛의 향연 관람을 하기위해 도착합니다.
(필레(Philae) ?)
이집트 아스완 주의 아스완 시에서 남남서쪽으로 11㎞ 떨어져 있다.
이곳의 옛 이집트 이름은 프알레크였고, 콥트어에서 유래한 필라크('끝' 또는 '먼 곳'
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이 섬이 누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섬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관례적으로 쓰는 이름은 그리스어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천일야화 The Thousand
and one Nights〉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을 따 크사르아나스알우주드라고도 했다.
크기가 460×150㎞인 충적층으로 덮인 필라이의 화강암 암반은 나일 강이 최고 수위로
범람할 때도 그 위로 솟아 있었으나 1902, 1907년에 아스완 댐이 들어서면서 저수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침수되기 전에 이곳을 보려고 옛 신전과 제단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현재 지명인 자지라트알비르바('신전의 섬'이라는 뜻)라는 이름도 얻었다.
초기 이집트 시대부터 이 섬은 이시스 여신에게 바쳐졌는데, 알려진 최초의 건축물은
쿠시 왕조 25대 파라오인 타하르카(BC 689~664 재위)가 지은 것이다.
알려진 최초의 신전은 사이테스(BC 664~525)가 건축한 것으로서 허물어진 채 발견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건물로 재사용되었다.
30대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넥타네보 2세(BC 360~343 재위)가 지금의 주랑(柱廊)을
증축했다.
이 파라오는 이후 1952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던 통치자 중에서 유일한 본토 출신의
통치자였다.
이시스 신전 복합 건조물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와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완성했다.
그러나 그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BC 27~AD 37)
때 시작한 내부 장식들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이 신전들의 서쪽에 간이 건조물을, 동쪽에 문을
증축했다.
이집트 신들에게 헌사된 또다른 건축물로는 임호테프에 바쳐진 신전과 하토르에게 바쳐진 신전,
그리고 오시리스·호루스·넵티스에게 바쳐진 예배당 등이 있다.
신전은 로마 시대에 계속 번영했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378년부터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통치기(527~565)에는
문을 닫지 않았다.
이시스 여신을 섬기던 사제들은 상(上)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는데 이는 그들이
와디알라키 근처의 금광을 차지하고 있었고 쿠반에 있는 대상로(隊商路) 종착지를 관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바다에 부족과 블레미에 부족이 계속해서 이시스를 섬겼기 때문에 누비아에서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이집트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한편 이집트를 다스린 로마와 비잔틴 통치자들은 연례의식 때 여신의 형상을 빌려주어
이집트 본토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괴롭힌 이들 부족을 관리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임 후기에 이시스 신전은 교회로 바뀌었고, 융성하던 도시 안에 다른 2개의
콥트 교회도 세워졌다.
이 모든 건조물은 옛 아스완 댐 뒤쪽이 부분적으로 침수되기 전에 탐사되고,
증축되었다(1895~96).
그후 1907년 세밀한 검사 결과 장식물의 채색 부분이 염분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 상류 쪽의 아스완 하이 댐의 완성과 함께 신전들이 물 위로 다시 드러났을 때는
제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발견되어 이것들을 근처의 더 높은 곳인 아길키아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필라이의 본모습과 같이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신전들은 어느 정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려 1980년에 재건되었다.
▼ 11/14 PM 필레신전의 빛의 향연 공연시 요일별 시간대에 따라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아라비아어로 설명되어 지고 있었습니다.
▼ 11/14 PM 어두운 밤호수를 조그마한 모타보트로 필레섬으로 이동하여 신전의
빛의 향연 공연을 관람합니다.
(필레(Philae)신전?)
필레는 아스완 남쪽에 위치한 섬이다.
이곳에 고대 이잡트의 이시스여신을 위한 신전이 있는데 , 이 신전 역시 아스완 하이댐
공사로 인해 다른 섬, 아킬라카 섬으로 옮겨졌다.
이시스신전은 유네스코 프로젝트에 의해 필레에서 아킬라카로 이동되었으며
세게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원래 있었던 섬의 이름이 필레여서 아직도 필레신전으로 불리고 있다.
(이시스여신?)
이시스라는 이름은 '왕좌'를 뜻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그리스어로 바꾼 것이다.
왕좌는 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 화신은 여자, 즉 왕의 어머니였으며 사실상 왕의
창조주였다.
고대 이시스 숭배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피라미드 원문(BC 2375경~2200경)
에서도 이시스가 살해된 자기의 남편 오시리스 신을 애도했다는 언급을 제외하면 그에 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시스에 관한 전설은 이시스가 본래 독립된 신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시리스의 아내로서 이시스가 주역을 맡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시리스가 죽은 후이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 조각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재결합했으며, 그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했고, 자신의 권능으로 그를 소생시켰다.
전설에 의하면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가 장성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시스는 세트의 누이이기도 했기 때문에 호루스와 세트의 최후의 전투 때 마음이
흔들렸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이시스는 세트를 동정하다가 전투 도중에 호루스에게 참수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학과 민간신앙에서는 공적으로 이시스와 호루스를 완전한 모자관계로 선언했다.
이시스가 아들을 보호한 것은 보호여신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이지만 이시스의 주요특징은
그녀의 능력이 다른 모든 신들의 능력을 능가하는 위대한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시스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왜냐하면 죽음의 신 아누비스조차도 이시스에게는 굴복했기 때문이다.
여신 네프티스·네이트·셀케트 등과 함께 이시스는 특별히 죽은 자를 보호하는 신이었다.
으뜸 가는 어머니 여신인 이시스는 유사한 기능을 가진 다른 여러 여신과 관계를 가지면서
점점 다양한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호루스와 여신 하토르('호루스의 집'이라는 뜻)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하토르와 이시스는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해졌다.
신을 별과 관련지을 때 이시스는 천랑성과 동일시되었다.
이시스는 왕좌 위에 혼자서 아이 호루스를 데리고 앉아 있든가, 아니면 관(棺) 앞에 무릎을
꿇고 있든가 하면서 머리에 왕위를 상징하는 상형문자를 달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시스 숭배의식은 이 여신이 추수보다는 인간사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즉 이시스는 애도자로서 죽은 자와 관계된 모든 의식에서 주신 역할을 했고, 마법사로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자들을 소생시켰으며, 어머니로서 생명의 원천이었다.
이시스 숭배는 아마도 하(下)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이집트 전역으로 퍼져나간 듯하다.
아크밈에서 이시스는 풍요의 신 '민'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 전역에 이시스를 숭배하는 중요한 신전들이 있었으며, 후에는 누비아까지
이시스 숭배가 퍼져나갔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이 신에게 봉헌된 신전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이시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항해자들의 수호여신'이 되었다.
이시스 숭배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지중해 전해안 지대로
퍼져나갔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비의식이 발전했는데, 그 핵심은 유명한
그리스의 엘레우시스 신비의식과 유사하다.
▼ 11/14 PM 필레의 소리의 향연은 이집티 신화르 각색하여 빛과 소리로 공연하는 것을
말하며, 내용을 알아들을 수있으면 참 좋았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필레 신전을 빛으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태냅니다.
▼ 11/14 PM 한 곳에서만 위치해서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이동해 가면서
각 장소에 맞는 빛과 소리로 내용을 전파합니다.
▼ 11/14 PM 핫토르신과 호루스신 그리고 이스신의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 11/14 PM 지나는 복도에 새겨진 부조들이 눈길을 끕니다.
▼ 11/14 PM 공연의 마지막 부분으로 멋진 장면이 연출됩니다.
(2018.11.15.수 6일째 일정 )
▼ 11/15(수) AM 기상후 선상부페 조식후 갑판 데크에서 바라본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5(수) AM 나일강의 댐하류에 있는 바위섬등의 전경입니다.
▼ 11/15(수) AM 조식후 버스로 아스완하이댐 견학에 나섭니다.
▼ 11/15(수) AM 아스완댐으로 이동시 바라본 녹지 지역과 사막지역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을 보면
터빈 최대용량 : 175,000 K.W
터빈최대방전량 : 346㎦/sec
저수지 길이 : 500km
저수구역 : 600㎢
저수 총용량 : 162,000백만.㎥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
이집트 아스완에 세워진 이 댐은 1970년에 완공되었으며(1971년 정식으로 개통),
약 10억 달러의 경비가 소모되었다.
이 댐의 높이는 111m, 댐 마루부 길이는 3,830m, 부피는 4,430만㎥에 이르며,
이 댐의 저수지인 나세르 호의 총용적은 1,690억㎥에 이른다.
나일 강의 1년 총방류량 중에서 약 740억㎥의 물이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 555억㎥는
이집트에, 나머지는 수단에 분배된다.이 댐의 건설로 나세르 호는 이집트로 약 320㎞,
수단(상류)으로 160㎞ 이상 확장되었는데, 이때문에 아부 심벨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전이 물에 잠기게 되자 많은 비용을 들여 옮겨야만 했고, 9만 명의 이집트 농부와
수단 누비아 지역의 유목민이 이주를 해야 했으며, 5만 명의 이집트인은 아스완의
북쪽 50㎞ 지점에 위치한 카움 움부 계곡으로 이주해 누바리아라는 새로운 농경지구를
형성했고, 대부분의 수단인은 수단의 카슴 알키바 근처에 다시 정착했다.
아스완 하이 댐은 이집트에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으며, 해마다 발생하는 나일 강
홍수를 사상 처음으로 통제했다.
이 댐은 홍수 때 물을 저장한 후 적절하게 방출하여 관계농지의 효용성을 높이고,
수십만 ㏊의 새로운 땅에 물을 공급하고, 아스완 근처의 운항을 더욱 원활하게 했으며
엄청난 양의 전력(210만kW)을 생산했다.
또한 깊이 90m, 평균 폭 22㎞에 이르는 댐의 저수지는 어업의 육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댐은 몇 가지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나일 강 양쪽
농경지의 생산성 저하이다.
이것은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 강의 홍수를 댐이 통제하기 때문에, 홍수가 실어나르던
풍부하고 비옥한 침적토가 이제 저수지와 수로에 모이게 되어 물이 불어나더라도
경작지에는 더이상 침적토가 쌓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집트는 해마다 약 100만t의 인공비료를 사용하지만 홍수가 공급해주던 4,000만t의
침적토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아스완 하이 댐에서 6㎞ 아래 위치한 아스완 댐은 1902년에 완공되었으며,
1912, 1933년에는 댐 마루를 높였다.
이 댐은 나일 강의 홍수가 끝날 무렵인 늦가을에 약 493억㎥의 물을 저장한다.
한때 2,142m의 댐 마루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긴 댐 중의 하나였던 이 댐은 180개의
수문을 열어 엄청난 침적토과 함께 나일 강의 전홍수량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을 보면
댐의 최대 높이 : 111m
댐의 최고부분의 길이 : 3,830m
댐의 기저부분의 폭 : 980m
댐의 최고부분의 폭 : 40m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댐의 크기 : 기자의 피라미드의 17배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대한 설명입니다.
건설 시작일 : 1960.1월
강줄기 변경 : 1964.5.15
건설 종료일 : 1971.01월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의 단면도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서 바라본 댐 하류전경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바라본 발전 설비 전경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서 바라본 나세르호수 전경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서 이집트 현지 가이드입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의 폭이 40m로 2차선 도로 및 녹지 지역이 있습니다.
▼ 11/15(수) AM 곳곳에 보안요원 및 군인들이 완전무장한채 경비에 임하고 있습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에 있는 대리석에 음각한 댐명인 것 같습니다.
▼ 11/15(수) AM 아스완하이댐을 떠나 아스완 시내의 대리석 광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곳으로 고대 이집트시대 오벨리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화강암 사이에 쐐기나무를 박아 그곳에 물을 부어 나무를 부풀려 절단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으며, 높이 41m에 무게 1,267톤의 미완성 오베리스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11/15(수) AM 미완성 오벨리스크 전경입니다.
▼ 11/15(수) AM 화강암에 나무 쐐기를 박아 물에 부풀리는 방법으로 절단한 모습입니다.
▼ 11/15(수) AM 미완성 오벨리스크의 상부쪽 전경입니다.
▼ 11/15(수) AM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작업 중 상부의 균열로 인해 추가 작업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하고있다고 합니다.
▼ 11/15(수) AM 화강암 채석장에서 바라본 시내의 공동묘지 전경입니다.
▼ 11/15(수) AM 화강암 채석장을 나오면서 뒤돌아본 전경입니다.
▼ 11/15(수) AM 미완성오벨리스크 탐방을 마치고 인근의 누비안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 11/15(수) AM 누비안박물관 앞뜰의 조그마한 오벨리스크입니다.
▼ 11/15(수) AM 누비안 박물관 뜰에 있는 각국의 글씨가 각자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글도 눈에 띄입니다.
▼ 11/15(수) AM 누비안 박물관 앞 전경입니다.
박물관 내 촬영이 불가하여 전시실내 사진은..........
▼ 11/15(수) PM 주간 일정을 마치고 숙소인 아스완의 HELNAN ASWAN HOTEL에
여정을 풀었습니다.
▼ 11/15(수) PM 호텔 로비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 부근의 사막산에 보여지는 주택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에서 바라본 아스완 지역의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5(수) PM 나일강의 전통돛배인 펠루카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의 부대시설인 풀장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호텔 앞 나일강가의 전통 돛배인 펠루카체험을 하기로 합니다.
▼ 11/15(수) PM 전통 돛배인 펠루카에서 공연중인 이집트 청년인데 이 공연 후
선상 즉석에서 기념품 판매가 이루어졌습니다.
▼ 11/15(수) PM 펠루카에서 바라본 건축중인 아파트 전경입니다.
이집트에도 개발 열기가 한창이었습니다.
▼ 11/15(수) PM 나일강의 전통돛배인 펠루카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에서 바라본 이슬람 사원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 선상 즉석에서 벌어진 기념품 판매 전경입니다.
▼ 11/15(수) PM 나일강에서 선상 공연으로 돈을 벌고 있는 이집트 어린이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에서 바라본 일몰 전경입니다.
▼ 11/15(수) PM 나일강, 펠루카, 일몰의 환상적인 전경입니다.
▼ 11/15(수) PM 펠루카체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 11/15(수) PM 호텔에서 바라본 일몰 전경입니다.
▼ 11/15(수) PM 저녁 식사후 인근 마트에 구경을 나갔습니다.
여기서도 풍성한 과일을 눈으로 즐기고 맛있는 망고를 구입했습니다.
(2018.11.16.목 카이로 이동)
▼ 11/16(목) AM 여행일정의 후반부로 아침에 기상하여 룩소공항으로 이동하여
이집트항공사의 항공기로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로 향합니다.
▼ 11/16(목) AM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하여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 탐방에
나섭니다.
(카이로(Cairo)?)
나일 강 하류가 로제타와 다미에타의 두 지류로 갈라지는 지점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시가지의 대부분은 강의 우안에 조성되어 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이 대도시는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카이로 시는 카이로 주의 거의 전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시의 전체적인 모양은 남쪽으로는 나일 계곡이 사막의 단층애들 사이로 쐐기처럼 박혀
있어 좁고, 북쪽으로는 계곡이 나일 삼각주로 이어지면서 아주 넓어지는 부채꼴이다.
수세기에 걸쳐 이 도시는 나일 강의 한 수로가 유로를 바꿈으로써 홍수의 범람으로부터
벗어난 땅으로 확대되었다.
카이로는 남북 방향으로 길게 연장되었으며 강의 서쪽 기슭으로도 확대되었는데,
다만 지형과 관개에 드는 비용 관계로 서쪽 사막으로의 확장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기후는 사막기후로 낮에는 고온건조하지만 밤에는 나일 강의 강바람으로 서늘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짧은 겨울 동안에만 적은 양의 비가 내린다.
카이로의 경제는 처음부터 행정·상업·무역·공업이 기반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대규모 공업으로는 직물(주로 면직물)·철강·소비재 생산과 식품·담배
가공이 있다.
그밖에 상당한 부분의 전통공예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집트의 주요 은행, 금융회사, 운송회사의 대부분이 카이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카이로의 가장 오래된 3개 지구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슬럼가가 되었으며,
이 슬럼가들은 서구화된 중핵지대를 에워싸고 있다.
이 3개 지구 가운데 가장 큰 지구는 파티마 시로, 이곳에는 바이바르스 1세 사원과
살라딘의 성채를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이 많다.
현대화된 도심지(알아즈바키야)와 도심지 근처의 우아한 상업·주택 지구들은
빈민지역들과 매우 심한 대조를 보인다.
가장 큰 길인 알쿠르니시 중앙로는 강과 평행으로 뻗어 있으며,
길 양쪽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나일 강에 있는 섬들인 앗자말리크와 알루다는 주로 주택과 휴양을 위한 구역이다.
중하류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는 구역의 남쪽에는 '사자(死者)의 도시'로 알려진
지대가 있다.
초기 종교지도자들의 절묘한 성골(聖骨) 사원과 영묘들이 있어 사자의 도시로 불리는
이곳에 카이로의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밀집해서 모여 사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주택난을
알 수 있다.
건축은 고대 이집트, 로마, 중세의 아라비아와 터키, 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어우러져 풍부하고 다양하다.
멤피스 근처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이 대도시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카이로에는 등록된 사적이 400개가 넘어 아프리카나 중동의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모두가 130년부터 19세기초 사이에 건립된 것들이다.
카이로는 이집트의 고등교육 중심지로서 아랍 중동의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교육기관으로는 카이로대학교를 비롯하여 아인샴스대학교, 알아자르대학교,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카대학교 등이 있다.
카이로의 많은 문화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집트 (국립)박물관, 이슬람 미술박물관,
국립도서관이며, 그밖에 많은 사원과 바자(bazaar 市場)가 있다.
옛날에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마차와 당나귀들은 자동차·버스·교외열차 등으로 거의
대체되었으며, 아프리카 최초의 지하철 시스템인 카이로 지하철이 1987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다.
카이로는 다른 주요도시들과 철도로 연결되며, 헬리오폴리스 너머에는 카이로 국제공항이 있다.
▼ 11/16(목) AM 이집트 사카라지역의 계단식 피라미드입니다.
(사카라(Saqqarah)?)
카이로 남서쪽으로 24㎞ 지점,
지금의 아랍 마을 사카라의 서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북쪽의 아부시르에서부터 남쪽의
다수르까지 8㎞ 정도 뻗어 있는 사막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퍼져 있다.
가장 오래된 유적은 이 고분터의 북쪽 끝에 있는 고대의 무덤지역에 있는 것들인데,
이곳에서 이집트 역사의 아주 초기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진흙벽돌 무덤(마스타바)들이
발견되었다.
분묘 안에서 발견된 저장 단지에는 제1왕조 왕들의 이름이 씌어 있지만,
고대 왕들은 상이집트의 아비도스에 묻혔기 때문에 이 무덤들은 당시 고위 관리들의
것으로 보인다.
고대 무덤지역의 남쪽에는 제3왕조(BC 2650경~2575경)의 2번째 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건축물이 있다.
조세르의 건축가 임호테프는 왕을 위하여 6개의 계단으로 된 피라미드 모양의 새로운
무덤을 고안했다.
맨 밑바닥에 진흙벽돌·나무·갈대로 만들었던 본래의 건축 구조를 바꾸어 처음으로
양질의 석회석으로 거대한 현관과 마당을 만들었다.
제4왕조의 셉세스카프는 관 모양의 무덤인 마스타바트 알파라운을 건축했고,
제5왕조의 여러 왕들도 사카라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제5왕조의 마지막 왕인 우나스 때 처음으로 자신의 피라미드 방 벽에 사후 보호와 내세의
삶에 대한 보장을 위해 피라미드 텍스트를 새겼으며, 지하 밀실에 피라미드 텍스트를
새기는 이러한 관행은 제6왕조 때에도 계속되었다.
테티를 제외한 제6왕조의 왕들은 우나스의 피라미드 남쪽에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남쪽 끝에 있는 것은 제13왕조(BC 1756경~1630경)의 것이다.
왕들의 피라미드 부근에는 고왕국시대(BC 2575경~2130경) 귀족들의 분묘가 있고 무덤
안에는 그들의 일상생활이 묘사된 벽화가 새겨져 있다.
중왕국시대(BC 1938~1600경)에는 지방 무덤이 유행하여 사카라에는 상대적으로 무덤을
적게 지었다.
그러나 신왕국시대(BC 1539~1075)에 들어와서 멤피스가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그때부터 수많은 무덤들이 사카라에 만들어졌으며,
그중에는 BC 1975년에 재발견한, 아름답게 장식한 호렘헤브 장군(후에는 파라오)의
무덤도 있다.
또 그때부터 이집트인들은 사카라에 큰 지하 회랑을 지어 성우(聖牛)를 묻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세라페움이다.
사카라에 지어진 무덤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웅장한 무덤들은 사이스 왕조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 여러 통치자들의 것이다.
사카라 북서쪽 부분에 있는 제3왕조와 제4왕조의 분묘터 아래에는 지하 통로가 있으며,
그 안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아이비스(ibis:따오기류) 미라가 수천 개 들어 있다.
▼ 11/16(목) AM 사카라지역의 오래된 피라미드 모습입니다.
▼ 11/16(목) AM 사카라지역의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훼손으로 보수 중이었습니다.
(조세르 계단식 피라미드?)
사카라 피라미드로 알려진 이 피라미드의 정식 명칭은 조세르 피라미드(Djoser
Pyramid)'다.
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의 조세르왕(BC 2665~BC 2645) 때 지어진 이집트의
첫 피라미드라서 그 이름이 붙었다.
계단식 네모뿔 형상이어서 '스텝(Step)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세계 건축역사의 한 장을 이루는 인류 최초의 피라미드식 석조 건물이다.
높이가 6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여서 맑은 날씨에는 약 30㎞ 떨어진 카이로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쿠푸왕 대피라미드(144m) 높이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지만 이전 파라오의 묘에 비해선
압도적인 크기다.
이전 왕들의 직육면체 형태 '마스타바' 묘보다 60배 이상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세르 피라미드 원형은 세계 최초 피라미드라는 말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보존돼 있다.
지난 10월 현장을 찾아갔을 때 정면과 우측면 1층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4천700년 전에 지어졌다고 믿기가 어려울 만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듯했다.
이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얼마나 강력한 왕권과 기술력이 필요했을까?
요즘의 일반적 주거 형태인 아파트로 따지면 대략 20층 높이다.
밑변의 길이는 동서로 121m, 남북으로 109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웅대함은 고대 파라오가 신과 같은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어떤 귀족이나 지방 토호 세력도 파라오의 권위에 덤비지 못했다는 얘기다.
조세르 파라오는 이 피라미드를 통해 영생을 꿈꾸면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었을
것이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축은 당시 재상이자 탁월한 건축가였던 임호테프가 총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호테프는 이집트 고대사에서 '건축의 신'이나 '창조의 신 프타의 아들'로 기록될 만큼
신격화된 인물이다.
그는 당시로써는 기존의 마스타바 왕묘 설계에서 최소 6발짝을 더 나아가 거대한 마스타바
6개를 쌓아 올린 새로운 모양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창조했다.
왕묘 조성과 건축에 관한 당시 사고와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조세르 피라미드 단지에는 6층짜리 석조 건축물만 있지 않다는 점이다.
피라미드의 유일한 출입구와 연결된 기둥형 복도와 더불어 거대한 안뜰,
장제신전 등이 피라미드 복합체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신전의 담벼락에는 13개의 가짜 문과 남쪽 끝자락에 1개의 진짜 문이 있다.
이 진짜 문이 지금의 유일한 출입문으로 남아 있다.
이 문을 거쳐 신전 내부로 들어서면 높이 6.6m의 기둥 20개가 나란히 서 있는 장엄한
분위기를 맞게 된다.
기둥 복도를 지나 안뜰의 중앙에 서면 바로 오른편에 세트 신전이 보인다.
파라오가 내세에 위대한 신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기원했던 신성한 장소다.
직선과 곡선 형태의 암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신전이다.
신전 곳곳의 기둥 돌 이음새 부분을 둥글게 표현한 점도 눈길을 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일찌감치 건축과 예술의 조화를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기둥 복도를 나서면 안뜰이 나오는데 지금은 사막으로 변해 있다.
이 때문에 모래 위를 걸으면서 피라미드를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파라오 시대에 안뜰에서는 왕위갱신제라는 세트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안뜰 가운데에 이 축제의 흔적이 남이 있다.
세트는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이 끝나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겨울철 초반에
진행된 축제다. (연합이매진 2017.12.13일 기사 퍼옴)
▼ 11/16(목) AM 계단식 피라미드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6(목) AM 측면에서 바라본 죠세르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죠세르피라미드 옆의 신전 입구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옆 신전과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 신전의 통로입니다.
▼ 11/16(목) AM 신전을 지나 바라본 조세르피라미드 측면 전경입니다.
▼ 11/16(목) AM 보수중인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피라미드 주위의 체험용 낙타와 계단식 피라미드 전경입니다.
▼ 11/16(목) AM 게단식 피라미드 옆의 물을 모아 놓았던 수조설비물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에 붙은 신전으로 우리가 지나왔던 건물입니다.
▼ 11/16(목) AM 조세르피라미드를 떠나 멤피스 가는 길에 바라본 야자수 과수원전경입니다.
▼ 11/16(목) AM 농촌지역의 전경으로 야자수가 경계표식으로 심겨두었습니다.
▼ 11/16(목) AM 멤피스에 있는 수상 유적으로.....
▼ 11/16(목) AM 멤피스에 도착했습니다.
(멤피스(MEMPHIS)?)
멤피스는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3000년 경 파라오 메네스에 의해 창건되었다.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제 1주(州)였던 이네브 헤지(Aneb-Hetch)의 수도이자
기원전 2200년까지의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수도였다.
그 후 중왕국 시대에 테베스로 수도를 천도한 뒤에도 멤피스는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으며, 신왕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의 중심지였다.
멤피스의 고대 이집트 이름은 이네브 헤지(흰 담)였으며, 중왕국 시대에는 앙크 타위라고
불리기도 했다.
의미는 두 땅의 생명이라는 뜻으로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 사이의 전략적인 요충지임을
강조하는 이름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멘네페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콥트어로는 멘페였으며, 멤피스라는 이름은 이것의 그리스식 변형으로 원래는 이집트 6왕조
페피 1세의 피라미드의 이름이었다.
현대의 도시 미트 라히나, 다슈르, 사카라, 아부시르, 아부 고라브와 자위에트 엘라리안,
카이로 남부가 멤피스의 행정 영역내에 위치하였다.
멤피스의 유적은 카이로에서 20 km 남쪽 나일강 서쪽에 있다.
▼ 11/16(목) 미국의 지원으로 고대멤피스 유적을 발굴한다는 안내문입니다.
(멤피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승(傳承)에 따르면 멤피스는 BC 2925년 무렵 메네스가
세웠다고 한다.
메네스는 선사시대의 두 왕국인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를 통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왕이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으나,
그가 멤피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든가 또는 그 도시가 아주 일찍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곳은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두 왕국의 경계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분명히 정치적인
이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멤피스가 받들었던 신(神)은 수공업자와 장인(匠人)의 수호신이자 어떤 점에서는
창조주이기도 했던 프타였다.
프타 대(大)신전은 그 도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멤피스 신학이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한 문헌에 따르면, 프타는 마음과 말씀의 힘으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즉 인간이라는 개념이 창조주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다음 신의 말씀 그 자체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헌은 창조의 행위를 물리적인 것에 빗대는 인습적인 관례에서 벗어나 있고
추상(抽象)의 정도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이집트에서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것이며,
또한 멤피스 사제들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도시의 원래 이름은 '하얀 벽'으로 원래는 회반죽을 칠한 벽돌로 벽을 쌓은 왕궁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얀색은 하이집트 왕의 색깔이었으므로 그 색깔은 또한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도시의 부지 자체에서는 메네스 시대의 유물이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멤피스의 묘역에서 나온 유물로 보면 그 도시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에 대한 전승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사카라에서 발견된 제1왕조 및 제2왕조 시대(BC 2925경~2650경)의 정교하게 안치된
커다란 무덤들은 왕들의 무덤이었다고 주장되어왔으나,
일부 학자들은 멤피스가 그 두 왕조의 유일한, 심지어는 주된 수도였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다.
BC 3세기의 역사가인 마네토에 따르면 제1왕조와 제2왕조는 상이집트의 아비도스
근처에 있는 티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4각형 돌로 만든 이 시대의 무덤들이 아비도스에서 발굴되었는데, 학자들은 그 무덤이
초기 왕조 시대의 왕릉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타르칸이나 아부루와이시 같은 곳에도 그 시대에 속한
중요한 무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이들 무덤 가운데 어떤 것이 왕이나 대신의 무덤이고, 어떤 것이 단순한 기념물인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 11/16(목) AM 멤피스에서의 람세스2세 석상 설명입니다.
▼ 11/16(목) AM 건물내에 보관되어 있는 람세스2세 석상입니다.
(람세스 2세?)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왕(재위 B.C. 1304경~1237경) 세티 1세의 아들.
100세까지 산듯하다.
치세초기(B.C. 1300경) 시리아의 가데슈에서 히타이트 연합군과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즉위 21년에 히타이트왕 하타실리스(Khatasilis)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치세 후반에는 누비아 지방도 안정되어, 이집트 왕국은 평화리에 번영하였으며
다니스, 멤피스, 테베, 누비아 등 전국토에 걸쳐 그가 좋아하는 기념적 건조물이 건립되었다.
아부 심벨 신전, 테베 서지구의 장제전(라메세움), 아비도스의 신전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조상은 매우 많아, 특히 아부심벨과 멤피스에 있는 거상을 비롯 토리노의 이집트
미술관소장인 좌상(테베 출토, 흑색 화강암제, 높이 194cm)은 걸작으로서 알려져 있고,
왕명을 고쳐서 자기 이름을 새긴것도 적지 않다.
왕묘는 ‘왕가의 계곡’에 있으나(제7호), 벽면장식은 거의 파손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람세스 2세 [Ramesses II]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 11/16(목) AM 람세스상의 상반신 전경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박물관 내의 람세스2세상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박물과 내에 보관된 부조 부분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 박물관내에 보관된 유물로 용도를........
▼ 11/16(목) AM 멤피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6(목) AM 멤피스의 3인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에는 프타, 그의 부인 세크메타, 그의 아들 네페르템 그리고 람세스2세에 대한
설명입니다.
(프타(Ptah)?)
프타 (Ptah, Ptaha, Peteh, Tathenen, Tanen)는 고대 이집트 신화의 창조신이다.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의 남편이다. 하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지배한 최고의 신으로
일컬어지며, 미라가 된 남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프타의 이름은 건립자라는 뜻이 있으며, 지혜의 신인 토트의 명령에 따라 천지창조를
마치고 정의를 확립하였다고 전해지는 신이다.
파괴와 재생의 여신인 아내 세크메트, 농작물의 신이자 의술의 신인 아들 네페르템과
더불어 멤피스의 3신이며, 이집트의 신들 가운데 아몬,라에 이어 제3위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장인과 예술가의 보호신, 모든 기술의 위대한 발명가로 불리며, 신·인간·가축 등 모든
생물체는 프타의 심장과 혀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멤피스 곳곳에 신전이 세워져 해마다 화려한 제의가 치러졌는데, 미라로 만들어진 프타는
머리에는 꼭 달라붙는 모자를 쓰고, 턱에는 긴 가짜 수염을 달았으며, 몸은 모시 옷으로
감겨 있다.
왼손에는 생명·힘·영속·전지전능을 상징하는 왕의 지팡이를 들고 있다.
우주의 창조신, 가축의 신으로도 불린다.
그리스신화의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 로마신화의 불카누스와 동일시된다.
▼ 11/16(목) AM 위 글이 설명한 멤피스의 3인방과 람세스 부조입니다.
▼ 11/16(목) AM 핫토르여신의 흉상입니다.
▼ 11/16(목) AM 람세스2새 상 전경입니다.
▼ 11/16(목) AM 아몬 오피스2세를 상징한 설화석고 스핑크스라고 합니다.
아몬 오피스2세는 룩소르신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파라오라고 합니다.
▼ 11/16(목) AM 스핑크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6(목) AM 스핑크스의 정면상 전경입니다.
▼ 11/16(목) AM 람세스2세의 정면상 전경입니다.
▼ 11/16(목) PM 멤피스탐방을 마치고 이집트국립박물관을 탐방합니다.
박물관 탐방시 찍은 유물은 별도 작성합니다.
▼ 11/16(목) PM 이집트국립박물관을 떠나 숙소로 돌아오면서 바라본 일몰전경입니다.
▼ 11/16(목) PM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본 피라밋 전경입니다.
▼ 11/16(목) PM 멤피스 부근의 마을 전경입니다.
▼ 11/16(목) PM 이집트의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쓰레기도 거의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지등을 수집해서 재활용한다고 합니다.
▼ 11/16(목) PM 일정을 끝내고 잠시 시간을 내어 이집트 유명 향수가게를 들렀습니다.
우리나라말을 섞은 안내가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 11/16(목) PM 한국어로 만들어진 향수 종류표입니다.
▼ 11/16(목) PM 숙소로 돌아오는 길 전경으로 이곳에도 교통난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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