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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1 (2017.11.11(금) ~ 13(월))

redstone5 2018. 2. 2. 15:10

      행은 3가지 요소가 구비될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그  3가지요소인 돈(Money), 시간(Time), 건강(Health)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이 과연

      몇 이나 될까요?

      특히 일반인들은 이 3가지를 만족시킬 즈음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거

      아닐까 생각되어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게 상책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혼자 배낭 메고 다니던 트레킹에서 벗어나 오랜 만에

      집사람과 여행에 나섰습니다.

      부인네들은 대개 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을 선호하지만 나는 역사적이고 많이 걸어다니는

      도보 여행을 선호하다보니 집사람의 의견은 다소 무시되고......


      우쨌던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인류 역사의 보고인 이집트로 10일간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학교시절에 배웠던 4대 문명발상지(중국의 황화문명, 인도의 인더스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메소포타미아문명과 나일강의 이집트문명)에 포함된 이집트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나일강은 에티오피아에서 흐르는 청나일강과 수단에서 흐르는 백나일강이 합류해서

      이집트유역에서는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는 강이기도 합니다.

      이집트 문명은 BC 3,000 경에 풍성했던 문명으로 지금부터 5,000년 전에 이미 상형문자와

      농사짓는 기술이 발달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설의 발달된 문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격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건국신화인 단군조선의 연대가 지금부터 약 4,350년(2,333년 + 2017년) 전

      경인데 이집트는 이미 이때 문물들이나 생활도구들을 현시점에서 상형문자와 함께

      접한다는게 도저히 믿기워지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건조하고 무더운 사막날씨에 유물들의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아 BC3,000년경의

      미이라등과 유물들을 고스란히 눈으로 직접보고 손으로 만지는 감동의 여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스 로마가 신의 나라라고 배워왔지만, 알렉산드대왕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신화를 그리스나 로마에 접목시켜

      이집트신화가 그리스 로마신화에 영향을 미쳐 그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이야기

      였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신(神귀신신)의 종류에는

      모든 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누'

      태양의 신인 '라'

      멤피스 최고의 신인 '프타'

      공기와 습기의 신인 '슈 & 테프누트'

      땅과 하늘의 신인 '게브 & 누트'

      이집트 첫 번째 파라오였으며 죽은자의 왕인 '오시리스'

      오시리시의 부인인 '이시스'

      천둥과 사막, 싸움의 신인 '세트'

      매의 머리를 가진 '호루스'

      사라의 여신인 '하토르'

      지혜의 신인 '토트'

      죽은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아누비스'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크눔'

      진리 정의의 여신인 '마트'

      등으로 크게 알려져 있어, 이집트의 역사를 이해치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신의 역사입니다.


      이집트는 이집트인, 베두인족,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함족이 99%로


      (중동의 역사와 발전단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동인의 조상을 어족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동인의 조상은 함족(Hamite)과 셈족(Semites)으로 구분되는데,

       함족은 동아프리카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약 3천 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후 페르시아나 그리스인, 셈족 등에게 정복되어 사실상 그 정체성을 상실했다.

       다른 하나인 셈족은 성서에 나오는 노아(Noah)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셈(Sem)의 자손들로

       주로 아라비아 반도 남부지역, 이란고원 등지에서 살았던 아랍민족을 지칭한다.

      들 중 일부 셈족은 기원전 3500년경 시나이 반도로 북상해 나일강에 정착,

       함족과 결합해 이집트 문명의 건설자가 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한 일부는 바빌로니아인이 되었고,

       기원전 2500년경 비옥한 초승달지역(Fertile Crescent)에 정착한 일부는 아무르인

       (Amur), 구약성서의 아모리인(Amorites)이 되었다.

       또한 일부는 동부 지중해에 정착해 페니키아인이 되었다.

       셈족은 이후에도 이주를 거듭해 7세기경에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정복해

       이라크에서 모로코까지 주민을 이슬람화 하게 된다.)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리스인, 누비아인,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 민족이 약 1%를 점유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1억명으로 세게 14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는 이슬람교 중 온건파라고 하는 수니파가 약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약 9%가 곱트교도


       (곱트교?)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관할인 이집트 그리스도교의 일파로 이집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기독교 교회다.
       450년경 예수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신인양성론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는 단성설(單性說)을 신봉하면서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콥트교인은 이집트 인구 8000만 명 중 10% 정도가 믿고 있으며 동방정교회에 속해 있다.
       가톨릭계 콥트와 다양한 신교 계열의 콥트로 나뉘는데 이집트에서 무슬림이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왔다.)

      이며 기타가 약 1%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와는 약 7시간의시차가 있고, 공용어로는 아랍어를 사용하며, 화폐는 파운드화
      (한화와의 비율은 1파운드 = 61원 정도)를 사용합니다.
      날씨는 1년을 여름과 겨울로 나누는데 4월 ~ 10월은 하계로 고온건조하고,
      11월 ~ 3월은 동계로 낮에는 조금 덥고 밤에는 서늘하며 건조하여 11월 경이 여행하기
      적당한 시기라고 합니다.

      참조 :  (고대 이집트의 왕조)     

      1.  선왕조 시대 (기원전 3000년 이전)
      2. 원왕조 시대(상하 이집트)

      3. 초기왕조 시대 (기원전 31세기 ~ 기원전 2686년)
          - 이집트 제1왕조,- 이집트 제2왕조

      4. 고왕국 시대(기원전 2686년 ~ 기원전 2181년)
         - 이집트 제3왕조 ~ - 이집트 제6왕조

      5. 제1중간기(기원전 2181년 ~ 기원전 2040년)
         - 이집트 제7, 8왕조 ~ - 이집트 제11왕조 (통일 전)

      6. 중왕국 시대(기원전 2040년 ~ 기원전 1782년)
         - 이집트 제11왕조 (통일 후) ~ - 이집트 제12왕조

      7. 제2중간기 (기원전 1782년 ~ 기원전 1570년)
         - 이집트 제13왕조 ~ - 이집트 제17왕조

      8. 신왕국 시대 (기원전 1570년 ~ 기원전 1070년)
         - 이집트 제18왕조 ~ - 이집트 제20왕조

      9. 제3중간기(기원전 1069년 ~ 기원전 525년)
         - 이집트 제21왕조 ~ - 이집트 제26왕조

      10. 말기왕조 시대 (기원전 525년 ~ 기원전 332년)
         - 이집트 제27왕조 : 아케메네스 제국의 1차 점령기 ~ 

         - 이집트 제31왕조 : 아케메네스 제국의 2차 점령기

      11. 그리스-로마계 왕조
         -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 이집트 제32왕조(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
         - 로마 제국령 이집트


      여행의 시작은
      부산 김해공항에서 에어부산을 이용하여 김포공항에 도착,
      버스로 인천 영종공항으로 이동하여

      11/10(금) 아부다비 국적의 에티하드(ETIHAD)항공편으로 아부다비 향 7시간 비행 후 
      아부다비에서 3시간 대기,
      에티하드 항공을 이용 이집트 향 약 2시간40분간을 비행하여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도착한 후 약 40분 대기후 이집트항공의 국내선을 이용하여 이집트여행의 출발점인
      룩소로 이동후 호텔(Steigenber Nile Palace)에서 1박 후

      11/11(토)
      덴데라의 하토르신전, 카르낙신전, 룩소르신전, 룩소르박물관을 견학한 후
      M/S Blue shadow 크루즈에 체크인 후 민속공연 관람후 휴식을 취합니다.
      이 때부터 크루즈를 이용한 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1/12(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열기구 체험을 1시간 정도하고,
      크루즈로 귀환 후 조식을 마치고
      왕의 무덤계곡으로 알려진 왕가의 계곡과 핫셉수트장제전, 멤논의 거상을
      탐방한 후 크루즈로 돌아와 이집트 민족춤을 관람하는 동안
      크루즈는 나일강 상류방향으로 운항하여 에스나운하(파나마운하처럼 갑문식 운하임)
      를 지나 에두프에 도착합니다.

      11/13(월)
      에두프에서는 아침 크루즈 조식후 마차로 이동하여 호루스신전 탐방, 호루스를 모신
      콤옴보신전 도보 탐방 후 크루즈로 돌아와 누비안 전통쇼 관람후 휴식을 취하는 동안
      크루즈는 운항을 시작하여 종착지인 아스완으로 이동합니다.

      11/14(화)
      아스완에서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버스로 3시간에 걸친 이동 후 유명한 아부심벨에
      도착 후 아스완댐 공사로 수몰 위기에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신전이 있는 산 전체를
      토막내어 옮긴 람세스2세의 대신전과 그의 아내를 위헤 만든 소신전 탐방 후 
      크루즈로 귀환하여 잠시 휴식 후
      일몰 후 펠레신전의 빛과 소리의 공연 관람후 크루즈로 돌아와 휴식을 취합니다.

      11/15(수)
      크루즈에서 조식후 아스완하이댐, 미완성 오벨리스크, 누비안 박물관 탐방 후
      오후 나일강 전통 돛배인 펠루카 체험 후 HELENAN ASWAN HOTEL에 체크인 후
      휴식을 취합니다.

      11/16(목)
      호텔 조식 후 이집트항공을 이용하여 카이로로 이동
      오전 사막지대인 사카라의 계단식피라미드와 멤피스 탐방 후
      오후 이집트국립박물과 견학과 저녁에 이집트 전통 향수가게 방문 후
      Meridian Pyramids CAIRO HOTEL 체크인하여 휴식을 위합니다.

      11/17(금)
      호텔 조식 후
      버스로 3시간 거리인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로 이동
      고대 지하공동묘지인 카타콤, 지중해에 위치한 파로스등대터에 세운
      퀘이트베이 관광지 탐방후 이집트 전통 음식으로 중식 후
      기원전부터 있었다는 알렉산드리아도서관 방문 후 이집트 대통령 하계 별장인
      몬타자궁전 외관을 조망하고 호텔로 귀환하여 휴식을 취함

      11/18(토)
      호텔 조식 후
      쿠푸왕 피라미드와 태양의 배 박물관 견학 후 낙타체험 시간을 거쳐
      스핑크로 이동후 탐방 후 중식 시간을 갖고
      오후 아부다비 국적의 에티하드항공을 이용하여 카이로 출발 아부다비향,
      아부다비 도착 후 환승하여 인천국제공항으로 향발

      11/19(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후 버스로 김포공항에 도착 후 에어부산을 이용하여
      부산 향발, 16시30분에 뷰산 김해 공항에 도착하여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0일이라는 긴 시간의 여행을 지면에 옮기기가 쉽지 않지만 함축적인 내용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 이집트를 방문한다면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아 만들어 봅니다.

      ▼ 11/10 18시 에어부산을 이용하여 김해에서 김포로 이동합니다.     


      ▼ 11/10 PM 김해공항에서 에어부산 탑승수속중입니다.


      ▼ 11/10 18시 출발 에어부산 여객기내 전경입니다. 저가 항공이지만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 11/10 PM 김포공항에 내려 인천공항으로 가기위해 15번 게이트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 11/10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11/11 00:15분 에티하드 항공으로 출국하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합니다.



      ▼ 11/10 AM 인천공항 탑승 게이트 조감도입니다.


      ▼ 11/10 AM 비행기 안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본 항로입니다.

         인천공항에서 중국과 중동 상공을 거쳐 아부다비공항까지 약 10시간동안 이동해야 합니다.


      ▼ 11/10 AM 세계 3대 항공사라는 아부다비의 에티하드 A330항공기 내부 전경입니다.


      ▼ 11/10 에티하드항공사 로그입니다.

         (에티하드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

         에티하드항공은 아랍에미레이트(UAE)의 국영항공사입니다.

         에티하드항공은 2003년 7월 왕실 (아미리) 칙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2003년 11월 상업항공 비행을 시작해 상업항공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항공사가

         되었습니다. 

         에티하드항공은 아랍 최고의 서비스, 동서를 연결하는 서비스, 세련되고 따뜻하며 사려

         깊은 서비스의 중심지로서 아부다비의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에티하드 항공의 목표는 항공업계 기존의 서비스를 변화하고 혁신을 이루어 21세기의

         진정한 글로벌 항공사로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트래블 어워즈의 '세계 선두 항공사'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에티하드가 매년 다양한 상을

         수상한 것은 세계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프리미엄 항공사로서의 지위를 보여줍니다.


         에티하드는 세계 항공 수송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규모를 얻기 위해

         동반 성장 전략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유기적 성장 외에도 탄탄한 공동운항 제휴 기반의 발전과 함께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공사에 대한 소수 지분 투자를 통해 저희 항공기가 운항하지 않는 수 백 개의 취항지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성과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 11/10 AM 10시간의 비행 끝에 환승지인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11/10 아부다비 공항에서 우리가 이집트로 타고갈 에티하드항공 여객기입니다.


      ▼ 11/10 아랍어로 공항명을 설치해놓은 것 같은데 제 눈에는 전부 창이나 칼같이 보입니다.


      ▼ 11/10 에티하드항공사를 이용하여 아부다비에서 이집트 카이로를 향해 약 2시간 이동합니다.


      ▼ 11/10 에티하드항공 A321-200 기종 항공기입니다.


      ▼ 11/10 기내 모니터를 통해본 아부다비에서 카이로까지 항로입니다.


      ▼ 11/10 우리가 타고 온 에티하드항공기 전경입니다.


      ▼ 11/10 카이로 공항에 도착하여 국내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청사를 나오면서 만나는

          이집트 신의 동상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이집트에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배꼽을 엄청

          상징적으로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11/10 카이로 공항에서 룩소로 타고갈 이집트항공 소속 여객기입니다.


      ▼ 11/10 카이로 공항에서 룩소까지는 약 1시간 반을 이동했습니다. 


      ▼ 11/10 사막 가운데 만들어진 룩소공항 전경입니다.

          이집트의 자연환경 자체가 나일강 주변만 농경지로 되어 있고, 나머지 지역은 거의

          모레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11/10 룩소공항 수속후 출입문의 신전과 오벨리스크 사진들입니다.


      ▼ 11/10 룩소르 공항 전경입니다. 시골 공항답게 조용하게 느껴집니다.


      ▼ 11/10 룩소에 도착후 Steigenberger Nile Palace에 투숙합니다.


      ▼ 11/10 PM  Steigenberger Nile Palace 야간 전경입니다.


      ▼ 11/10 PM Steigenberger Nile Palace의 석식 전경입니다.

         음식이 우리 입맛에 거북하지 않은 맛이었습니다


      ▼ 11/10 PM  Steigenberger Nile Palace 야간 전경은 열대지방이라는 느낌이 팍 다가옵니다.


      ▼ 11/11 AM 아침에 바라본 Steigenberger Nile Palace 호텔로 규모가 엄청 났습니다.


      ▼ 11/11 AM 호텔 조식후 룩소시내에 있는 하토르신전 가는 길에 만난 룩소 시내 전경입니다.


      ▼ 11/11 AM 시내에는 이슬람국가 답게 이슬람사원의 첨탑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덴데라?)     

         고대도시인 타인트네테르트('신성한 기둥에서 나온 여자'라는 뜻, '텐티라'라고도 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단다라는 파라오 시대 상이집트 지방에 있던 여섯번째 주의 주도로서,

         하늘과 번식의 여신인 하토르에게 바쳐진 도시였다.


         하토르 신전은 이집트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신전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남아 있는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BC 305∼30)에 짓기 시작하여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AD 14∼37 재위) 때 완성되었지만, 이 건물이 서 있는 토대는 훨씬 더

         오래되어서 적어도 제4왕조(BC 2613∼2494경)의 2번째 왕인 쿠푸(케오프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암(砂岩)으로 지은 이 신전은 말린 진흙벽돌담에 둘러싸인 8만 3,600㎡의 부지 안에

        약79m의 길이로 세워져 있다.

         신전 안에는 하토르 여신의 머리 모양을 새긴 18개의 둥근 기둥이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홀(hall)을 떠받치고 있어서,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천장에는 천체의 현상들이 조각되어 있고, 벽에는 이 신전을 방문한 왕의 거동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홀 바깥 쪽에는 6개의 둥근 기둥이 있는 작은 홀이 6개의 창고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홀은 다시 2개의 대기실로 이어져 있는데, 2번째 대기실을 지나면 여신상이 담긴

        신성한 배를 모셔놓은 성소(聖所)가 나온다.

         신전의 지붕 위에는 오시리스 신에게 바쳐진 여러 개의 예배당이 있는데,

         한 예배당에서 12궁도가 새겨진 돌과 해시계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현재 파리에 소장되어 있다.

         신전 뒤에는 작은 이시스 신전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신성한 연못이 있다.

         이곳에서는 멘투호테프 2세(BC 2060~2010 재위)의 문도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지(聖池)의 동쪽에는 2개의 조산소(助産所)와 그리스도교 교회가 있다.


      ▼ 11/11 오전에 도착한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입니다.


         (하토르 여신?)

           '세트'와 '호루스'의 전쟁에서 가장 질려 버린 신은 태양신 '라'였다.

         이 늙은 신은 힘센 '세트'가 왕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네이트' 여신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발했다.

         게다가 인간들의 마음도 변하고 있었다.

         '라'가 늙어서 이제는 자신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접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는 다른 신을 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태양신은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는 떠오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자 세상은 난리가 났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니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곡식도 자랄 수 없었다. 시간도 멈춰 버렸다.

         그때 '라'를 달래기 위해 나타난 여신이 바로 '하토르'다.

         '하토르'는 '라'가 태초에 '슈'와 '테프누트'를 만들고 나서 자신의 눈으로 만든 딸이다.

        기쁨과 사랑의 여신 '하토르'는 아버지 '라'에게로 가서 온갖 애교를 부리며, 아름다운

         춤으로  '라'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사랑하는 딸의 애교에 화가 풀린 라는 다시 떠오르기로 한다.

         대신 자신을 화나게 한 인간을 응징하기로 맘 먹는다.

         예전에 물에 빠진 '슈'와 '테프누트'를 구해준 '하토르'에게 '라'의 명령을 집행할 권한을

         준 일이 있다.

         '라'는 '하토르'에게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준 권한을 맘껏 이용하라고 '하토르'를 부추긴다.

     

         머리에 암소의 뿔과 황금 원반을 두른 아름다운 여신 '하토르'는 라의 명령을 집행할 때는

         무시무시하고 힘이 센 암사자로 변한다.

         '하토르'는 암사자로 변해서 '라'를 무시한 인간들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 세상이 비명과 피로 얼룩졌다.

         인간들은 사막으로 도망가면 '하토르'는 끝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잡아먹었다.

         인간의 피 맛에 길들여진 암사자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다.

         이쯤 되자 '라'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혼내주고 싶었을 뿐 완전히 멸망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제사장들에게 술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보리로 술을 만들어라. 오커의 즙을 짜서 거기에 섞어라."

         오커는 물감의 원료가 되는 붉은색 황토다.

        보리로 만든 술에 오커를 섞으니 마치 피같이 보였다. '하토르'가 잠든 사이 그 술을 사방

         웅덩이마다 채워두었다.

         잠에서 깨어난 '하토르'는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보고 피라고 생각했다.

         허겁지겁 마셔보니 피를 먹었을 때보다 맛있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곤 잔뜩 술에 취해서 인간들을 응징하는 일 따위는 잊어버렸다.

         마침내 '하토르'가 라의 궁으로 돌아가 곯아떨어지자, 인간들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라'와 '하토르'를 잊지 않고 술로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어느 날 '하토르'는 사막에서 신음하고 있는 '호루스'를 구해준다.

         '호루스'는 '세트'의 공격을 받아 눈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토르'는 '호루스'의 눈을 치료해 주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덴데라 하토르신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제국은 분할되었으며 이집트는 그가 거느렸던 마케도니아 장군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렸다.

         그의 후계자들은 로마 시대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덴데라에 있는 무덤은 이 시기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암소를 포함한 신성한 동물도 매장되었다.

         '하토르' 여신이 취했던 형상 중 하나가 바로 암소였다.

         그녀는 모든 어린 파라오에게 젖을 주었으며 종종 소의 귀가 달리고 두 개의 뿔 사이에

         태양의 원반으로 치장된 왕관을 쓴 여인으로 묘사된다.

         '하토르'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었으며, '음주를 지배하는 여주인'이라는 칭호로

         춤과 환락과도 연관되었다.

         그녀는 점차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가장 숭배한 신들 중 하나인 '이시스' 여신과 일치되었다.

         덴데라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하토르' 신전은 예전에 있었던 신전을 대체하여

         새로이 지어진 것으로, 그 이후에도 로마의 초기 황제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개조되고

         증축되었다.

         이집트 신전의 독특한 특징은 '치료소'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환자들은 여신이

         보내 주는 치유의 꿈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밤을 보냈다.

         신전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한쪽 외벽에는 기원전 30년에 죽은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과 함께 나타난 커다란 부조가 새겨져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여신과 동일시하기 위해 이러한 이미지를 사용했던 듯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시스에게 바치는 독립된

         사원을 하나 지었다.

         중앙 신전에 있는 그림에는 이후의 황제들이 이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서기 35년경–에는 다주실(hypostyle hall :

         내부 공간이 기둥으로 받쳐진 건물)이 증축되었다.

         이 홀의 기둥머리는 이시스 여신과 연관이 있는 고대 이집트의 타악기인 '시스트럼'

         모양이며, 천장에는 점성학의 12궁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 일부는 55기에 콥트 교회 건물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토르 신전 [Temple of Hathor]


      ▼ 11/11 AM 덴데라 하토르신전 입구입니다.


      ▼ 11/11 AM  신전 입구의 석주와 입구 전경입니다.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 11/11 AM 가운데 두 개의 뿔사이에 태양의 형상을 가진 조각이 하토르여신입니다.

         하토르여신 뒷쪽에는 매의 형상을 가진 호루스신의 형상입니다.


      ▼ 11/11 AM 이집트 대부분의 신전은 외벽에 그림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전은 주로 사암으로 지어졌고, 사암 외벽은 석회로 발라져 부조되어집니다.

         아래 부조중 위가 동그랗고 아래가 십자형태가 앙크입니다.


         (앙크의 의미?)

         앙크(Ankh) 십자가는 이집트에서 신들과 파라오의 상징으로 매듭푸는 열쇠를 뜻한다.

         앙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들과 파라오들의 상징이었다.

         <고리 달린 십자가>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타우 십자가, T자형 십자가 위에 둥근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붙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이시스의 매듭>이라고도 불렀다.

         둥근 고리를 이시스 여신과 동일시되던 생명나무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앙크는 인간이 신성에 도달하자면 어떤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매듭을 푸는 행위denouement를 통해서 인간 영혼의 진화가 대단원denouement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태양신 아톤에 대한 신앙을 창시한 파라오 아크나톤과 태양신을

         섬기던 사제들의 손에 앙크가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특별한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여는 열쇠이자 속인들이 금단의 지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자물쇠로 여겨졌다.

         장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사제들이 십자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장면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앙크는 때로 두 눈 사이의 이마에 그려지기도 했다.

         이것을 죽음의 비의를 깨달은 자에게 그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저승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그것을 발설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발설하는 순간 자신의 알고 있던 것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콥트교도, 즉 이집트의 기독교도들 역시 앙크를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앙크는 인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인들에게 이것은 능동적인 원리와 수동적인 원리의 통일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남녀 양성이 한 몸에 결합되었음을 나타내는 성적 상징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이세욱, 임호경 옮김, 열린 책들,)



      ▼ 11/11 AM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입구 전경입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의 건물 일부입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의 기둥 상부에는 하토르 여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의 기둥입니다. 기둥의 굵기가 눈을 휘둥그레지게 합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의 천정 전경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부조들을 파손했다고 합니다.


      ▼ 11/11 AM 하토르신전내 각 방에는 그 시대의 생활상을 부조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 11/11 AM 나일강에 띄웠던 나일강배 모양을 부조로 남겼습니다.


      ▼ 11/11 AM 여기도 부조들의 훼손이 심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 11/11 AM 가운데 하토르 여신과의 신화의 한 줄기 같은데.....

         우측은 '무트여신'인 것 같습니다.

         (무트(MUT)여신?)

           원래는 테베의 독수리 여신이었으나,

         제18 왕조 때 '아몬'신과 혼인해 양자 '콘스'와 함께 테베의 3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신왕국시대에 '아몬'과 '무트'의 혼인은 매년 테베에서 열린 중요한 의식 중 하나가 되었다.

         하늘의 여신으로 활동하면서 '아몬'이 태고의 바다 '누'에서 하늘에 있는 본래의 거처로

         솟아오를 때 그의 뒤에 서 있는 암소로 자주 등장했다.

         '무트'는 '바스트'와 '세크메트' 같은 다른 중요한 여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대개 독수리나 암사자 머리를 하고 그 위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2중 왕관을 쓴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11/11 AM 하늘의 신인 '누트여신'이 천정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누트(NUT)여신?)

         하늘의 여신 '누트'는 흔히 몸이 대지 위에서 아치 모양으로 길게 늘어난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슈'가 '누트'를 떠받쳤기 때문에, '누트'는 손가락 끝과 발가락만으로 대지를 짚고

         있었다. 

         '누트'는 낮에는 '게브'와 떨어져 있지만 매일 밤 '게브'에게 내려와서 어둠을 만들었다. 

         낮에는 폭풍이 불었기 때문에, '누트'는 도중에 자신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나 산악

         지역을 타고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간혹 '게브'를 태양과 달의 아버지라고도 했다. 

         그리고 '누트'도 어머니 또는 위대한 황소로서 태양과 달과 결합되었다. 

         태양과 달이 바로 황소의 눈이었던 것이다. 

         '라'는 할아버지 또는 아들로서 질투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누트'가 '게브'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누트'가 '게브'와 결혼하자, '라'는 '누트'가 연중 일정한 달에는 아이들을 낳을 수

         없도록 정했다. 

         그렇지만 '토트'가 '누트'를 가엾게 여겨 달과 장기를 두어서 달에게서 72번째 빛을

         획득했다. 

         이 72번째 빛이 5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이 이집트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기

         전에 삽입된 윤일 이었다. 

         '누트'는 이 윤일 동안 연속해서 다섯 아이(오시리스, 호루스, 세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을 수 있었다.

         '누트'는 원래 어머니-여신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아이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트'가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될 때 머리에 쓰고 있는 상형 문자는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궁과 물 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로는 복부에 별을 상징하는 수없이 많은 젖먹이 돼지 새끼들로 덮여 있는 암퇘지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누트'는 매일 아침 이 새끼 돼지들을 먹어버렸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는 아름다운 암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누트'는 '라' -'아툼'이 반역을 일으킨 지상의 왕국을 싫어하게 되고 눈이 자신에게 하늘로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면 이 암소의 모습을 했다. 

         '누트'는 높이 올라갈수록 무서워서 떨기 시작했기 때문에, '누트'의 네 발에 선택된 신들은

         '호루스'와 '세트', '토트','소프두.이며, 이들은 온 대지를 상징한다. 

         '슈'는 '누트'의 배를 떠받쳤으며, 그 배는 태양 돛단배가 항해하는 하늘의 바다 또는 강이

         되었다.

         매일 아침 태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누트'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누트'는 사실상 라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딸이었다. 

         '케프리'가 지하 세계에서 나타날 때의 '누트'의 모습은 이런 관계를 상징한다. 

         이 때 '누트'는 눈이 깊은 바다에서 들어올려지는 태양 돛단배에서 풍뎅이를 데려오기 위해

         내려간다. 

         '누트'가 태양을 낳을 때 흘린 피 때문에 새벽하늘은 핑크색을 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 부활한 태양 '누트'는 '케프리'와 결합되면서 죽은 자를 보호하는 여성 보호자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이 때 죽은 자는 많은 별이 있는 '누트'의 품안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누트'는 이런 역할을 하는 동안 죽은 자 위로 펼쳐지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관 뚜껑 내부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축복을 받고 죽은 자와 합쳐질 수 있도록 '누트'의

         몸인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 11/11 AM 고대이집트시대의 우주의 천체를 나타낸 천정이라고 합니다.


      ▼ 11/11 AM 하늘의 '오시리스신'(머리 원뿔형모자)의 신화에 대한 벽화입니다.


      ▼ 11/11 AM 신전부근의 사막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위는 거의 사막산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11/11 AM 신전에서 외부로 나가면서 바라본 기둥과 부조 전경입니다.

         건조한 날씨에 수천년이 지난 벽화이지만 채색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의 신전중에 이곳의 채색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 11/11 AM 신전 외부에 그려진 벽화에는 클레오파트라와 호루스신, 하토르,

         클레오파트라 아들 카이사리온에 관한 벽화라고 합니다.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은 클레오파트라 재임 중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며,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에 관한 벽화라고 합니다.

         카이사리온은 결국 로마군에 잡혀 가서 처형되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고 하지요.


      ▼ 11/11 AM 신전의 외부에 빗물 저수탱크 수조 전경입니다.

         고대에는 가뭄에 대비하여 빗물을 풍부하게 저장하었다고 합니다.


      ▼ 11/11 AM 신전 외부 벽화와 벽윗쪽으로 빗물을 모으는 수로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1 AM 빗물을 모을 수 있는 시설이 수 천년전인 고대에도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 11/11 AM 이 시설은 고대 건축물에는 다 설치되어 있는, 나일강의 물높이를 측정하는

        시설로 나일강의 범람을 사전에 인지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합니다.


      ▼ 11/11 AM 연꽃 문양이 벽화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고대 이집트에서 연꽃은 태양의 상징으로 신성시되었다고합니다.

         기원전 2700년경 페르넵왕의 분묘 벽면 돌조각에 연꽃을 그릇에 꽂은 모습이 등장한 이래로

         수많은 이집트 벽화에 손에 연꽃을 든 여자들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연꽃은 국왕의 대관식 때 파피루스와 함께 신에게 반드시 바쳐지는 꽃이었다고 하고,

         현재 이집트의 국화도 연꽃입니다.


      ▼ 11/11 AM 오전에 덴데라의 핫토르 신전의 탐방을 마치고 크루즈에 체크인했습니다.

         크루즈는 4박5일동안 이용하면서 나일강변을 따라 형성된 고대 이집트의 고대 문물들을

         주간에는 탐방하고 야간에는 나일강을 따라 이동하는 편한 여행일정으로 채워졌습니다.


      ▼ 11/11 AM 룩소의 나일강가의 선착장에 접안해 있는 크루즈 부근 전경으로 거의가 사막이었습니다.   


      ▼ 11/11 AM 크루즈의 객실은 5성급 시설이었고, 제일 윗층에는 수영장등 오락시설,

         호프 및 바베큐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 11/11 AM 룩소의 크루즈 전경으로 관광객을 태우고 주로 아스원까지 수로를 따라 이동하며

          주간에는 정박, 야간에는 이동하는 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테베의 유적들?)

         테베에는 4군데의 주요유적지, 즉 카르나크, 룩소르, 왕들의 계곡, 왕비들의 계곡이

         있으며 그밖에 왕들의 장제전도 중요하다.

         파라오들이 자신의 무덤을 은밀한 왕들의 계곡에 감춘 신왕국시대에는 무덤보다 장제전의

         겉치레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으며, 왕들은 장제전을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기 위해

         경쟁했다(매장).


         장제전은 지은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건물이었지만

         모두 테베의 최고신인 아몬에게 바쳐졌고, 신왕국 신전의 독특하고 핵심적인 형태를

         갖고 있었다(이집트 종교).

         장제전들은 테베 서부의 골짜기 가장자리에 세워졌는데, 대체로 지형에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죽 늘어서 있다.


         초기에 지어진 장제전은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다.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하트솁수트 여왕의 신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제18왕조의 대규모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장제건축).

         이 여왕의 건축가인 세넨무트는 BC 1490년경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옆에 있는 절벽

         구석에 일련의 주랑과 3층으로 이루어진 안뜰을 설계했다.

         골짜기 쪽으로부터는 스핑크스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통해 접근하도록 되어 있고,

         앞뜰에는 나무와 덩굴식물이 심어진 정원이 있었다.

         계단식 대지를 등지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양쪽에는 회랑이 있었고,

         이 회랑의 지붕은 2줄로 늘어선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다음 층에 있는 안뜰 서쪽에도 이와 비슷한 회랑이 뻗어 있었으며,

         아누비스 신과 하토르 여신의 부속 예배당이 있었다.

         맨 꼭대기층의 테라스에는 기둥이 늘어선 큰 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양쪽에는 예배당 및 뒤쪽 절벽을 파서 만든 성소가 있었다.

         주랑과 예배당에 새겨진 많은 돋을새김 조각은 더없이 아름답고 매우 흥미롭다.

         거기에는 2개의 오벨리스크를 거룻배에 실어 아스완에서 카르나크로 운반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과 하트솁수트 여왕이 기적적으로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이 있으며,

         여왕이 홍해 건너편에 있는 향료의 땅 푼트로 파견한 해상무역단을 묘사한 조각도 있다.


         아멘호테프 3세가 지은 장제전은 테베에 있는 모든 신전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화려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세의 파라오들은 이것을 거의 완전히 파괴해 버렸고,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몇 개의 토대와 높이가 10m나 되는 거대한 돌기둥,

         그리고 멤논거상(巨像)이라고 부르는 2개의 조상뿐이다.

         멤논의 거상은 한때 장제전의 탑문 앞에 있는 통로 양쪽에 서 있었지만,

         지금은 농경지 한가운데에 외로운 파수꾼처럼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조상들은 아멘호테프 3세를 나타내고 있다.

         머리에 쓴 관을 합하면 높이가 거의 22m나 되는데, 각각 하나의 돌덩어리를 잘라서 만든

         것이다.

         북쪽에 있는 조상은 이따금 해가 뜬 직후에 기묘하게 높은 소리를 냈기 때문에 고대에는

         '노래하는 멤논'으로 유명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그의 왕비인 사비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로마 관광객들이

         이 놀라운 소리를 듣기 위해 테베를 찾았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 석공들이 이 조상을 군데군데 수리한 후로

          '노래하는 멤논'은 두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쿠르나에 있는 세티 1세의 신전은 일부만 남아 있고 앞뜰과 탑문은 사라졌다.

         이 신전의 일부는 세티 1세의 아버지인 람세스 1세의 장례식에 바쳐졌는데 세티의 아들인

         람세스 대왕이 완성했다.

         람세스 대왕의 모습은 신전의 돋을새김 조각에 묘사되어 있다  .

         벽은 파라오들이 여러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종교적인

         장면들만으로 장식되어 있다(벽화).


           라메세움이라고 부르는 람세스 2세(람세스 대왕)의 장제전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옛날의

         웅장함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넓은 바깥 탑문은 람세스 2세가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인들과 싸우는 활기 찬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고, 내부 탑문은 카데시 전투 장면과 수확의 신 '민'의 축제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오시리스로 가장한 왕의 커다란 조상들이 안뜰의 기둥들을 장식하고 있다.

         첫번째 안뜰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이 있었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거상의 높이는 18m가 넘고, 무게는 1,000t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2번째 안뜰 너머에 있는 다주식 큰 방은 카르나크 신전의 큰 방과 비슷하다(다주실).

         그 너머에는 기둥으로 떠받친 방들과 지금은 사라진 성역이 있었다.

         장제전 주위에는 높은 벽돌담이 있고, 이 담장 안에는 둥근 천장을 씌운 건물의 유적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군수품 창고, 마구간, 작업장, 그리고 장제전 관리인들이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라메세움을 '오지만디아스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마디나트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신전은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장제전들

         가운데 가장 시대가 늦고 가장 남쪽에 있는 신전이다.

         전체적인 설계는 라메세움을 본떴다.

         넓은 정면 탑문과 2번째 탑문으로 분리되어 있고 주랑으로 둘러싸인 바깥쪽 뜰과 안뜰,

         기둥으로 떠받친 큰 방과 그보다 작은 2개의 전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방들로 둘러싸인

         성역 등이 라메세움과 비슷하다.

         다주식 큰 방은 일부가 파괴되어 있고 기둥들은 첫번째나 2번째 받침대 높이까지

         허물어져 있지만, 다른 것은 잘 보존되어 있다.

         안쪽 방들의 벽에는 왕이 신들 앞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전차를 탄 왕이 리비아인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쓰러뜨리고, 아모리족의 도시를 공격하며,

         포로로 잡은 리비아인과 아시아인 및 해적들을 아몬 신과 무트 신 앞으로 끌고 오는

         전투 장면들도 묘사되어 있다.

         신전의 바깥 벽에는 이집트인이 펠레세트인(필리스티아인)과 셰르덴인 및 셰켈레시인

         등 '해양민족'과 벌인 대규모 해전이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거대한 탑문의 바깥쪽 정면에 새겨진 돋을새김도 뛰어나다.

         이것은 갈대가 우거진 습지에서 파라오가 들소를 사냥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신전 옆에는 궁전 유적이 있다.

         신전을 둘러싼 담장 동쪽에 나 있는 높은 문에는 요새처럼 총안이 뚫려 있다.

         신전 구내에는 작은 신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투트모세 3세와 하트솁수트 시대에

         지은 것이지만, 그후 여러 파라오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및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변형되거나 덧붙여졌다.

        

         또다른 신전은 사이스 왕조의 한 여왕이 지은 작은 장제전이다.

         여기에는 신성한 호수와 우물이 있고, 라메세움과 마찬가지로 진흙벽돌로 지은 집들과

         둥근 천장을 씌운 군수품 창고의 유적이 남아 있다.

         마디나트하부 신전 남쪽에 있는 유적은 테베 서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말카타에 있는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 왕비의 궁전이 그것이다.

         사실은 4개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하나가 '위대한 왕비'의 것이다.

         왕은 왕비를 위해 이 궁전에 호수를 만들었는데, 유람선을 띄울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 호수는 굴착된 커다란 물웅덩이로 판명되었으며 지금도 말카타 남동부까지 뻗어 있는

         흙무더기선으로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난 증거를 토대로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이 호수는 나일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테베 이외에도 대도시가 있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테베만큼 많은 유산을

         남겨준 도시는 없다.

         역사적 장면이 묘사된 테베의 거대한 신전들, 고대인의 일상생활과 종교적 믿음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무덤들, 그리고 오늘날 세계의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을 채우고 있는 그 무수한

         골동품들은 모두 그 유산의 일면이다.

         고대 테베만큼 고대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 유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 11/11 PM 크루즈에 체크인 및 중식후 인근의 카르낙신전으로 탐방길에 나섰습니다.

         아래 모형은 카르낙신전 모형도입니다.

         (카르낙신전?)

           태양신 아몬(Amun) 신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트(Mut) 신전, 몬투(Montu) 신전,

         콘수(Khonsu) 신전 등 룩소르(Luxor)의 수호신들을 모신 신전들이 기본 신전들로

         배치되어 있으며, 투트모세3세(Tuthmosis Ⅲ)의 신전,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Ⅱ)

         및 3세의 신전, 람세스 3세(Ramses Ⅲ)의 신전 등 다수의 소규모 신전들도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제12왕조(BC 20세기) 때부터 건축되기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가(BC 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계속

         증축되어왔으나,

         기본 구조는 제1탑문(Pylon)이 건설된 제25왕조(BC 7세기) 때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신전 배치는 남북으로 되어 있으나, 아문 신전은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 신전 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500m~600m 정도 크기이다.

         아몬(Amun) 신전 제1탑문(정문) 앞 입구에는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스핑크스

         (Sphinx)들이 도열한 스핑크스 대로가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룩소르(Luxor) 신전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아몬 신전의 제1탑문을 지나면 제22왕조 때 건축된 대광장(Great Court)이 나온다.

         넓이가 약 8,650㎡에 달하는 대광장의 북쪽에는 아문 신, 무트 신, 콘수 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두었던 세티 2세(Seti Ⅱ)의 신전이 있고, 대광장의 남쪽에는 람세스 3세(Ramses Ⅲ)의

         신전이 있다.

         대광장을 지나면 제2탑문 앞에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람세스 2세의 석상을 볼 수 있다.

         제2탑문은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헤브(Horemheb)가 건축을 시작하여

         제19왕조인 람세스 2세 때 완성되었다.

         제2탑문을 지나면 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이 나오는데 그 넓이는 5,356㎡로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성 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가 건축하였으며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Seti Ⅰ)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 완공되었다.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 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으며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 있다.

         제3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 때 건축되었으며, 제4탑문은 투트모세 1세(Tuthmosis Ⅰ) 때

         건축된 것을 세티 2세가 복원하였다.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는 작은 광장(Small Court)이

         위치하며, 이 광장에는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다(높이 23m, 무게 143톤).

         제4탑문 안쪽에는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있다(높이 27.5m, 무게 320톤).

         투트모세 1세와 3세가 건설한 제5탑문과 제6탑문을 지나면 태양신 아문의 성소에 도달한다.

         지성소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방되어 일출과 일몰 때 햇살이 아문 신의 지성소를 비출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지성소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실은 투트모세 3세가 건축한 것이며 내실은 기원전 3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ios II)왕조가 건설하였다.

         지성소 남쪽에는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 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가 있고,

         성스러운 호수 입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이 있다.

         호수 입구 쪽에 핫셉수트 여왕의 누워 있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이집트 개황, 2012. 5., 외교부)


      ▼ 11/11 PM 카르낙신전을 사진으로 촬영해서 부착해 놓은 전경입니다.


      ▼ 11/11 PM 제1 탑문 입구에 있는 양의 머리에 사자 몸통을 한 스핑크스가 나타납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 1탑문 앞의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한 스핑크스가 도열해 있습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 제 1탑문 전경입니다.

         제1탑문(Pylon)은 이집트 제25왕조(BC 7세기) 때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 입구 스핑크스 앞에 설치되어 있는 오벨리스크 전경입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세티2세가 세운 오벨리스크라 합니다.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대체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캔 붉은 화강암 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었다.

         피라미드형 꼭대기보다 정4각형 또는 직4각형의 밑바닥을 더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가끔 꼭대기는 호박금이라고 불리는 금·은의 합금으로 씌우기도 했다.

         몸체의 사면에는 주로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나 왕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을

          담은 상형문자로 장식되었다.


         일찍이 제4왕조(BC 2613경~2494) 때부터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 세워진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 때 세워진 여러 태양신전들의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3.3m에 불과해 비교적

         나지막한 편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는 세소트리스 1세(BC 1971~1928)가

         재위하는 동안 세워진 것으로, 한때 태양신 레(Re)의 사원이 있었던 카이로 교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다.

         투트모세 1세(BC 1525경~1512)가 카르나크에 세운 1쌍의 오벨리스크는 높이 24m이고,

         정4각형으로 된 밑바닥 길이는 1.8m이며 무게는 143t에 이른다.

        

         카르나크에 있는 하트솁수트 오벨리스크의 아래쪽에는, 채석장에서 이 거석을 깎아내는 데

         7개월이 걸렸다고 새겨져 있다.

         테베에 있는 하트솁수트 사원에는 나일 강을 통해 나룻배로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장면이 나와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인부들은 흙으로 만든 경사로를 이용해 따로 떨어진 발판 위로

         오벨리스크의 몸체를 들어올리고 그것을 좌우로 움직여 자리를 잡아주었다.

         페니키아인과 카나안인 등 다른 민족들도 이집트인들을 따라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으나

         1개의 돌덩이로 만들지는 못했다.


         로마 제국 동안 이집트에서 지금의 이탈리아로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가 옮겨졌다.

         적어도 12개 정도가 로마 시로 옮겨갔으며, 그중 하나가 투트모세 3세(BC 1504~1450

         재위)에 의해 카르나크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광장에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고대 오벨리스크로서 높이는 32m, 밑바닥 4면체

         길이는 2.7m이며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져 꼭대기의 4면체 길이는 1.88m이고

         그 무게는 약 230t에 이른다.


         19세기말 이집트 정부는 1쌍의 오벨리스크를 둘로 나누어 미국과 영국에 각각 하나씩

         주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뉴욕 시의 센트럴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런던 템스 강변에 서 있다.

         이 2개의 오벨리스크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져 있지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BC 1500년경 투트모세 3세가 헬리오폴리스에 세운 이 오벨리스크는 그와 람세스 2세

         (BC 1304경~1237경)를 위한 비문에 새겨져 있다.

         전형적인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1.2m이고 밑바닥은

         직4각형으로 가로 2.36m, 세로 2.33m이고 무게는 180t에 이른다.

         이런 돌기둥들을 채석해 세웠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역학적 천재성과 무한한

         인력 동원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가 되고 있다.

         오늘날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로서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워싱턴 기념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884년 워싱턴 D. C.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169m로서 전망대와 내부계단 및

         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추고 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스핑크스 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 11/11 PM 양의 머리와 사자의 몸통으로 만들어진 스핑크스상입니다.

         (스핑크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지평선상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스핑크스와는 다르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1탑문을 지나면 만나는 대광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광장(Great Court)은

         넓이가 약 8,650㎡에 달하며, 대광장의 북쪽에는 아문 신, 무트 신, 콘수 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두었던 세티 2세(Seti Ⅱ)의 신전이 있고, 대광장의 남쪽에는 람세스 3세(Ramses Ⅲ)의

         신전이 있다(아래그림중 5번).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에 설치된 석주 전경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의 석주 전경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 석주를 당겨서 찍은 사진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2탑문을 지나 만나는 스핑크스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대광장을 지나 2탑문 앞에서 만나는 붉은 화강암의 람세스2세

         동상입니다.

         람세스2세 동상 앞에는 그의 딸 조각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이 많습니다.

         (람세스2세?)

         람세스 2세(世)(Ramesses II, 1303년 ~ 1213년)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재위: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3년)이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해 번영하였다.

         그는 호전적인 히타이트와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그 후 그들과 평화롭게 되었다.

          람세 2세, 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었다.

         람세스란 이름은 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라 메스 시스'의 그리스어 음이다.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24세에 즉위하여 66년간

         통치한뒤 90세에 죽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첫 번째 왕비 네페르타리와 여러명의 왕비 및 측실과의 사이에서 현자(賢者)로써

         명성이 높았던 카엠와세드, 후계자였던 메르에프타하를 시작으로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양자이며 왕의 아들이란 칭호를 하사받은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무엇보다 람세스왕의 전용 활이라 불리는 커다란 강궁이 남아 있는데,

         왕 이외에는 아무도 당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로 뛰어난 전사였던 그가 많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역시 그들은 왕의 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치세 전반기에는 히타이트와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었다.

         기원전 1274년 카데쉬 전투에서 직접 출정하여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쉬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달라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58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했다.

         또한 카데쉬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방해했기에 훗날 재앙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람세스 2세는 또한 나일 제 1강을 넘어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람세스 2세는 전승 기념비를 많이 세웠고, 현재도 기념비의 상당수가 남아있는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아는 후에 이집트에 동화되어 본가 이집트의 쇠퇴를 구원하는 형태의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는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실리를 추구할 줄도 알아서 히타이트

         휴전을 맺어 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또한 아부심벨 신전, 카르나크 신전, 라메세움 등의 거대한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파라오들에게 있어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알릴 수 있는 건축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록 출애굽기에서는 파라오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지만, 일부 성서학자들은 구약

         출애굽기의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추정에 의하면, 람세스 2세는 모세와 함께 세티 1세의 밑에서 영재교육을 받았으며 

         모세와는 시종일관 파라오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람세스 2세가 20대 초반이던 시기에 모세는 40살이였는데 이 무렵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노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독을 쳐 죽여 혁명을

         획책하였다.

         하지만 모세의 지지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는 파라오 계승권을 박탈당한 채

         광야로 도주했다.

         그 이후 람세스 2세가 파라오로 즉위하였으며 모세가 감독관을 쳐죽이고 도주하던

         시기로부터 40년 후 모세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다시 람세스 2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람세스 2세가 노동력 손실을 우려하여 해방요구를 거부하자 야훼는 람세스 2세를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으로 굴복시킨다.

         그래도 람세스 2세가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자 모세는 자기 민족들을 이끌고 도주하였으며

         람세스 2세는 이를 추격하지만 야훼가 모세를 통해 홍해를 바람으로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건너게 한다.

         이를 뒤쫓던 람세스 2세는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쳐지자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다만 구약의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인지는 논란이 있으며, 이 정도의 시기를 이집트의

         출애굽 시기로 보는 후기설에 따른다고 해도, 오히려 람세스 2세의 아들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또한 출애굽기의 내용은 역사적 진위여부가 부정되기도 한다.

         다만 람세스 2세의 상징성 때문에 매스미디아에서는 람세스 2세가 출애굽 시기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매스미디아를 신뢰하지 않는 부류들은 람세스2세를 모세시대 한참 이후의 애굽왕 으로 본다.

         그 이유로, 성경의 연대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이 이집트18왕조때의 상황과 일치함에서

         알 수 있으며, 람세스2세의 무덤에 새겨진 문양에서도 반유대적인 형상을 찾아볼 수 있다.


      ▼ 11/11 PM 람세스2세의 움직이는 형태의 동상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의 제2탑문 전의 람세스 동상 전경입니다.


      ▼ 11/11 PM 정면에서 찍은 람세스2세 동상과 그의 부인인 네페르타리가 조각된 석상입니다.

         이집트 파라오들의 석상에는 부인을 무릎위에 세워 놓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높이를

         무릎 높이보다 낮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람세스2세와 네페르타리 석상은

         그 불문율을 깬 유일한 석상이라고 합니다.


      ▼ 11/11 PM 제2탑문을 지나 열주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은 그 넓이가 5,356㎡로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성 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가 건축하였으며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Seti Ⅰ)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 완공되었다.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 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으며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 있다.


      ▼ 11/11 PM 제2탑문을 지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가 건축한,

         열주전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전경입니다.

         (아멘호테프3세?) 

           이집트가 번영을 누리며 평화를 향유하던 시대에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이집트와 누비아에

         거대한 건물들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재위 5년째에 이집트의 최남단 아쿠야타라 불리는 지역에 대해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뒤 나일 삼각주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요를 제외하고 그의 통치시대는 평화로웠다.

         이 소요는 하푸의 아들이며 왕의 가장 뛰어난 관리인 아멘호테프가 육상과 해상으로

         조심스레 이집트로 접근해 들어와 진압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아버지인 투트모세 4세와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2세처럼 사냥을 하며

         보냈으며, 자신이 세운 공적을 널리 알려 기념하기 위해 2번에 걸쳐 커다란 스카라베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왕쇠똥구리 모양의 부적)를 만들었다.

         아멘호테프는 집권 초기에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인 티이와 혼인했다.

         정비(正妃)가 된 티이는 뒷날 개혁군주가 된 아크나톤을 낳았다.


         재위 11년째에 그는 룩소르의 북쪽 160㎞ 떨어진 티이의 고향 마을인 아흐밈 근처에

        거대한 인공연못을 파게 했다.

        그는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의 재능을 이용해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였다.

         여기에는 장제전(지금은 왕의 거대한 동상만이 남아 있는 멤논의 거상)을 세우고 누비아에

        대규모의 신전을 세우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대 테베 지역에서는 룩소르 신전의 주요부분을 완성했으며 카르나크의 신전에는 탑문을

         새로 세웠다.

         또한 멤피스에도 많은 건물을 세웠다.

         그는 당시 다른 강국들과 외교문제에 대해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다.

         이 사실은 그와 아크나톤 왕이 주고받았던 외교문서들을 모아놓은 '아마르나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가 황금을 가지고 아시아로부터 말·구리·청금석(靑金石)을 사들였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도 아멘호테프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미탄니(시리아 북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강력한 왕국) 및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히타이트 왕국의 공주와도

         정략결혼을 시도했다.


         그의 외교서신은 아시리아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리아의 여러

         봉신들에게도 보내졌다.

         통치 말기에 병이 들었을 때는 미탄니의 지배자인 투시라타가 그의 치료를 위해 신의

         조각상을 이집트로 보낸 일이 있다.

         말년에는 왕비인 티이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멘호테프가 죽은 후 티이는

         투시라타와 직접 서신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 11/11 PM 열주전의 외곽열주 전경입니다.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Seti Ⅰ)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 완공되었다.

         (세티1세?)

         이집트 제 19왕조의 왕(BC 1290~79 재위).

         단 2년밖에 통치하지 못한 아버지 람세스 1세를 이어 위대한 람세스 왕가를 실질적으로

         연 인물이다.

         통치 초기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 제18왕조 말기의 혼란기에 부분적으로 잃었던

         이집트의 위신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팔레스타인 북부와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적어도 1번 이상 히타이트의 왕인 무

         와탈리스와 싸웠다.

         그뒤 레바논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를 흐르는 오론테스 강가의 카데시를 국경으로 한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집트의 번영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국경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광산과 채석장을 개발하고, 우물을 팠으며, 무너져 내렸거나

         손상을 입은 신전과 제단을 다시 세웠다.

         또한 아버지가 시작한 것으로 카르나크에 거대한 열주전(列柱殿)을 건립하는 일을

         계속했다.

         이 열주전은 이집트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장엄한 기념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물은 자신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아비도스에 세운 신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신전을 오시리스 신을 비롯해 6명의 다른 신들에게 바쳤으며 섬세한 부조물로

         치장했다.

         그때 칠했던 색깔 중 일부는 아직도 선명하다.

         신전 뒤에는 그의 기념비로 보이는 건축물이 하나 서 있다.

         세티의 무덤은 테베 서쪽에 있는 '왕들의 계곡' 중 가장 훌륭하다.

         아들인 람세스 2세가 그보다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세티 1세를 제19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기고 있다.(다음백과)


      ▼ 11/11 PM 열주전의 열주를 확대한 전경입니다.

         (열주전?)

         이집트 카르낙신전이 이집트에서 최대 규모라는 것은 높이 23m, 둘레 15m의기둥들로

         이루어진 대열주전에서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 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으며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있다.


      ▼ 11/11 PM 제3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 때 건축되었으며, 제4탑문은 투트모세 1세

         (Tuthmosis Ⅰ) 때 건축된 것을 세티 2세가 복원하였다고합니다.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는 작은 광장(Small Court)이 위치하며,

         이 광장에는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습니다(높이 23m, 무게 143톤).

         (투트모세1세?)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93~1482경 재위).

         이집트 제국을 누비아(지금의 수단)까지 확장시키고 또 시리아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왕족이 아니었으나 그는 즉위하기 얼마 전쯤에 선왕의 딸과 결혼해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했다.

         또 테베에서 발견된 예배소를 통해 기간은 확실하지 않지만 선왕과 공동 통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위하던 날 그는 누비아의 총독에게 자신의 새로운 명칭과 대관식을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재위 2년째 투트모세는 선왕 때의 국경을 넘어 강을 타고 누비아 깊숙이 원정했다.

         길따라 새겨져 있는 비문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나일 제4폭포를 지나 카니사쿠르구스에

         새 국경을 세웠다.

         이 모험은 원정에 참여했던 2명의 상(上)이집트인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누비아로 깊숙이 밀고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에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금은 제18왕조 때 상당히 채굴되었다.

         또다른 이유는 제3폭포 근처에 중심을 두고 있던 적대세력 쿠시 왕국이 제17왕조 때

         이집트를 크게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누비아 전쟁이 끝난 뒤 투트모세는 얼마 전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던 아시아의 침략자

         힉소스족을 계속 쫓아가 시리아의 카르체미시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밀고

         들어갔다.


         투트모세는 이집트 국내적으로는 테베에 있는 중왕국의 아몬 신전을 완전히 보수했다.

         신전 둘레에 담을 쌓고 서쪽 끝에는 사이에 조그만 회랑이 있는 2개의 탑을 만들었다.

         바깥 탑 앞에는 2개의 오벨리스크를 새로 세웠다.

         투트모세 때 신전의 대칭양식은 신왕국시대 신전의 표본이 되었다.

         그보다 먼저 죽은 두 아들 중 하나는 군사령관이 되어 신왕국시대의 군사 작전

         중심지였던 지금의 카이로 근처 멤피스에서 근무했다.

         후대왕들은 이를 본받아 왕세자를 멤피스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군사기술을 익히게 했다.

         또한 투트모세는 테베에 있는 왕들의 무덤 계곡에 자신의 무덤을 세우도록 한 최초의

         왕인데 자신의 무덤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한 듯하다.

         그밖에 테베 서쪽의 다이르알마디나에 무덤 건설에 동원된 일꾼들의 마을을 세웠으며,

         선왕이 시작한 공동묘지 건설의 지휘조직을 완성시킨 것도 그의 업적으로 추측된다.

         재위기간은 여전히 불확실하나 최고 9년까지 확인된다.(다음백과)


      ▼ 11/11 PM 열주전의 열주를 확대한 전경으로 열주에도 상형문자로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 11/11 PM 신전의 지붕에는 저렇게 두터운 돌로 지붕을 덮어놓았습니다.

         현재 보이는 지붕은 일부가 파괴된 상태로 하늘이 열려 있습니다.


      ▼ 11/11 PM 투트모세1세의 오벨리스크 전경입니다.

         왼쪽 뒤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핫셉수트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입니다.

         (핫셉수트여왕?)

         하트셉수트(Hatshepsut, 기원전 1508년 - 기원전 1458년)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5번째 파라오이다.

         하트셉수트란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이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하트셉수트의 치세를 역대 파라오의 치세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치세로 본다.

         하트셉수트의 재위 기간은 이집트의 여왕 중 가장 길다. (약 20년)

         그녀에게는 하트셉수트라는 이름 외에도 파라오로서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황금의 호루스로서 신성한 모습을 지닌 여인(네테레트),창조의 권능이 풍부한 여인

         (우세레트), 해마다 녹음을 일구는 여인(아우제트 렌푸트),파라오로서 신성한 빛의

         규칙을 상징하는 여인(마아트 카 라),신성한 라의 딸로서, 아몬과 한몸이 된 여인

         (케네메트문)


         하트셉수트는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정비(正妃)와의 사이에서 둔 유일한 자식으로,

         이복동생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다. 병약했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였을 때,

         의붓아들인 투트모세 3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투트모세 3세는 그의 의붓아들인 동시에 배다른 조카이기도 했다.


         하트셉수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여러 고대 사료는 그녀의 치세에 대해 매우 빈약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근대 초기 역사가들은 하트셉수트가 조카 투트모세 3세가 7살이던 기원전 1479년부터

         21살이 되는 기원전 1458년에 이르기까지 투트모세 3세의 섭정으로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기술하였다.

         현대 사학자들은 그녀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였고, 기원전 3세기의 역사가 마네토

         기록한 것처럼 21년 9개월 동안 통치하였다고 보고 있다.(다음백과)


      ▼ 11/11 PM 제4탑문 안쪽에는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있습니다

         (높이 27.5m, 무게 320톤).


      ▼ 11/11 PM 아몬신전의 지성소에 대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


      ▼ 11/11 PM 신전의 벽면을 상형문자로 채우고 있는 고대 이집트 왕들의 이름들이라고 합니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

         이집트 신전이나 유물들을 보다 보면 매나 뱀, 사람을 닮은 그림 같은 기호를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기호들이 바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했던 상형문자라고합니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의미가 다양해서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1799년 8월 이집트의 로제타 마을에서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 등 3개의 언어가 함께 새겨진

         자그마한 돌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이 이 비석에서 세 언어를 비교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햇습니다.

         만약 이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이집트 인이 남긴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거라합니다. 


      ▼ 11/11 PM 신전의 벽면에 있는 람세스2세 벽화입니다.


      ▼ 11/11 PM 신전의 채색된 벽화는 그때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와 당시 생활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 11/11 PM 신전 외부에서 바라본 신전의 일부 건물입니다.


      ▼ 11/11 PM 이집트 고대 유적을 둘러보면 람세스2세 동상이 가장 많은 것 같았습니다.


      ▼ 11/11 PM 태양신을 모신 아몬신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몬신?)

         이름은 이집트어()로 '감추어진 존재'를 뜻한다.

         기독교에서 기도가 끝날 때 사용하는 '아멘'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로마자로는 '아문(Amun)·아멘(Amen)·아몬(Amon)·암몬(Ammon) 등으로 쓴다.

         이집트 창세신화 가운데 '헤르무폴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헤르무폴리스나일강 남쪽에 있는 도시로,

         지명은 그리스신화의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는 나우·헤·아문 등의 여덟 신을 숭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바다에서 활동하였다.

         아몬은 여신 아마우네트(Amaunet)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하며,

         주로 신왕국시대의 테베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뒤에 태양신 (Ra)와 결합하여 아문(Amun-Re) 또는 아몬고 불리면서 오랫동안

         이집트인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아문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아몬신에 대한 숭배는
테베를 수도로 하는 이집트 전성기(BC 2050년경부터 약 1,000년간)

         를 통해서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의 아톤 숭배와 아몬 배척을 제외하고는 널리 행해졌다.

         또한 제22, 23왕조 무렵부터 점차 남하하여 에티오피아의 나파타가 중심이 되었고,

         이집트에서의 아몬 신앙은 오시리스 신앙 속에 동화되어 갔다.

         아몬이는 이름과 리비아 베르베르어()의 아만(aman:물)을 동일시하는 해석도 있다.

         또한 그 이름에 관해서도 일종의 비의()가 전해지고 있다.

         무트와의 사이에 혼스(콘스)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 세 신을 모신 카르나크 대신전(殿)은 유명하다.

         아몬신은 초기에는 숫양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의 동물로 표현되었는데,

         후에는 위가 편편한 관() 위에 한 쌍의 날개를 장식한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몬 [Amon] (두산백과)


      ▼ 11/11 PM 태양신을 모신 아몬신전에 기독교인들의 침공시 그린 기독교 벽화입니다.


      ▼ 11/11 PM 이 석주는 이집트형보다는 유럽양식으로 만든 석주라고 합니다.


      ▼ 11/11 PM 위의 석주를 확대해서 찍은 사진으로 신전의 기둥은 주로 사암을 사용하고,

         외부에 석회석을 발라 그림이나 글을 조각한다고 하는데 이 석회는 시간이 갈수록 시멘트화

         되어 더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 11/11 PM 이 곳은 옛날 가상 식물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아프리카 각국 침략시 보았던

         식물들을 조각해두었다고 합니다.




      ▼ 11/11 PM 신전을 만들때 사용한 석재 한 개의 크기를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 11/11 PM 입구 반대쪽의 문 전경입니다.


      ▼ 11/12 PM 지성소 남쪽의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 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1 PM 지성소 남쪽의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 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 전경입니다. 


      ▼ 11/11 PM 지성소 남쪽의 스러운 호수 입구에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 전경입니다.

         (이집트의 딱정벌레?)

         왕의 벌레.파라오의 벌레라고 신성시 되는 이 딱정벌레들은 쇠똥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쇠똥구리가 이렇게 신성시 되는 것은 "부활"이라는 인식이 강하기때문입니다.

         쇠똥구리의 신인 케프리가 신성시되는 것도 바로 이 인식때문이라고 합니다.

 

         태양신 아문라의 항해로 세상의 시작과 끝을 생각한 이집트인들은

         아문라의 배를 삼켜 항해를 종결시킬려는 거대한 뱀인 아페피의 위협에서 셀케트의

         보호로 항해를 계속 지속시킴으로써 태양의 순환을 부활로써 받아들여  "일출,아침"이

         생겨났다고 믿고 있는데,

 

         쇠똥구리의 생태도 이와 같이 유사합니다.(많은 곤충류의 벌레들도 그러하지만..)

         짝찟기를 통해 굴려놓으며 저장한 똥덩어리와 같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죽은듯있다가..

         다음 활동기에 어둠의 지표를 뚫고 해를 맞이하는 이 벌레야 말로 "부활"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 11/11 PM 지성소 호수 입구 쪽에 핫셉수트 여왕의 누워 있는 오벨리스크가 있습니다.


      ▼ 11/11 PM 3탑문과 4탑문사이의 비밀의 광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 11/11 PM 카르낙신전을 떠나면서 바라본 람세스2세의 벽화 그림입니다.


      ▼ 11/11 PM 카르낙 신전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을 신전을 떠나면서 찍었습니다.


      ▼ 11/11 PM 카르낙 신전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룩소르 신전을 찾았습니다.

         (룩소르?)

         고대 이집트 도시인 테베유적지의 남부지역에 붙여진 이름이다.

         테베 남부는 '아몬 대신전(大神殿)'을 중심으로 성장했다(아몬 레 신전).

         아랍어로 알우크수르인 지금의 이름은 '궁궐'을 뜻하지만 로마의 '카스트라'(castra:

         당시의 유적이 인근에서 발굴되고 있음)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제18왕조 말기 아멘호테프 3세(BC 1390~53 재위)는 나일 강 가까이 있는 이곳에 강둑을

         따라 아름다운 신전을 지어 이집트의 주신(主神) 아몬과 여신 무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콘스에게 바쳤다.

         제18왕조(그 이전은 아닐지라도)에 일찍이 그곳에 신전이 있었겠지만,

         그곳에 먼저 있던 건축물 중 남아 있는 것은 작은 부속건물뿐이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몬 대신전은 투탄카멘과 호렘헤브가 완성했고, 람세스 2세

         증축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에 이를 좀더 증축했다.

         이 신전의 다주식(多柱式) 강당은 한때 그리스도교 교회로 쓰이기도 했으며 신전의

         서쪽으로는 콥트 교회 유적지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아몬 대신전은 주랑(柱廊)으로 둘러싸인 큰 중정(中庭)과 그 너머 여러 개의 강당 및

         작은 방들로 되어 있으며 한 강당에 화강암으로 된 알렉산더 대왕의 사당이 있다.

         기둥이 늘어선 큰 복도의 3면을 멋진 파피루스 다발 기둥이 2줄로 둘러싸고 있는데,

         그 기둥머리는 산형화 모양의 파피루스 꽃봉오리를 본딴 것이다.

         북쪽 끝에 탑문(塔門)들로 둘러싸인 출입구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대신 높이 16m의 기둥

         14개가 늘어선 웅장한 주랑을 증축했는데, 이 주랑은 신전의 가장 뛰어난 구조물이며

         이 기둥머리 역시 파피루스 산형화 모양이다.

         이 주랑은 카나크에 있는 것과 비슷한, 기둥이 많은 강당의 중앙 회중석(會衆席)을 만들려던

         것일 수도 있으나 측면복도가 없고 양쪽 아래를 벽이 둘러싸고 있다.

         람세스 2세는 바깥 뜰을 증축했는데 2열 주랑의 각 기둥 사이에 거대한 자신의 동상들을

         만들고, 축제와 시리아 전쟁 장면을 조각한 높은 탑을 세웠다.

         이 탑 앞에 거대한 파라오 상들과 1쌍의 방첨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남아 있으나 다른 하나는 1831년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옮겼다.

        

         신전의 앞뜰에는 이 지방 이슬람교 성자인 셰이크 유수프 알하가그의 이슬람 사원이 있는데

         이 성자의 축제에는 '오르페 신의 아름다운 축제'라는 고대 의식을 흉내내어 배로 행진을 한다.

         2월 19일에 갖는 이 축제중에 아몬 신이 카나크로부터 크고 아름다운 배를 타고 축제 복장을

         한 테베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룩소르에 있는 다른 신전을 찾아온다고 한다.

         대(大) 주랑 벽의 부조(浮彫)는 이 축제에서 신성한 항해 행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입구에 있는 오벨리스크입니다.

         당초에는 한 쌍이 있었지만 프랑스 침략군에 약탈되어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입구에 있는 람세스2세 동상입니다.


      ▼ 11/11 PM 고대 룩소르의 신전이 있는 테베지역의 위치 안내도입니다.

         고대에는 카르낙신전에서 약 2km대로로 룩소르신전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앞의 스핑크스 상이 도열해 있는데 고대에는 이런 형태로

         약 2km거리의 카르낙신전까지 이어졌다고합니다. 현재는 발굴중에 있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아 오벨리스크 하단에 있는 원숭이상이 아닌가??????


      ▼ 11/11 PM 룩소르신전 중 람세스2세전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내 람세스2세 광장 안내도입니다.


      ▼ 11/11 PM  대리석으로 조성된 람세스2세 동상의 휘손된 전경입니다.


      ▼ 11/11 PM 기둥 사이마다 람세스2세 석조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일부에 세워진 이슬람의 모스크 전경입니다.

         가이드의 표현을 빌리면 당초 모스크가 지어질 위치까지 모래로 덮혀 있어  신전의 규모를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발굴해보니 모스크가 신전위에 설치된 걸 알수 있었다고 하네요.


      ▼ 11/11 PM 룩소르신전내 람세스2세 전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에 대한 생활상들이 벽화로 남아있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에 대한 생활상들이 벽화로 남아있었습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 석상 뒷면의 상형문자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의 좌상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의 좌상의 측면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와 그의 왕비 네페르타리 좌상 전경입니다.

         (네페르타리?)

          네페르타리(Nefertari, 기원전 1290년경 ~ 기원전 1255년)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로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부인 중 한 명이다.

         람세스 2세가 매우 총애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녀를 위해 아부 심벨에 따로 신전을 만들었다

         한다.

         근처에 그녀의 무덤이 있는데 네페르타리의 무덤인 QV66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무덤이다.

         그녀의 이름인 네페르타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 많은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네페르타리가 13살 때, 15살의 람세스와 혼인을 하였고 람세스가 파라오에 오르자

         이세트노프레트(Isetnofret)와 함께 왕비에 책봉된다.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초기 20년간 네페르타리는 왕비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람세스 2세가 파라오에 오른 지 25년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하며 슬하에 아들인 왕세자

         아문-헤르-케페셰프(Amun-her-khepeshef)와 딸 메리타멘(Meritamen)을 두었다.

         네페르타리가 죽자 메리타멘은 아버지 람세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람세스2세 전을 지나 아멘호테프3세 전으로 이동합니다.

         아멘호테프3세는 카르낙신전의 제2탑문을 지나 열주전의 12개 열주를 세운 왕으로 

         이집트가 번성하던 시기의 왕이라고 합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아멘호테프3세 전 광장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을 기독교 번성시 곱트교도들이 성전으로 사용하던 시기의

         기독교 벽화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지붕을 거대한 돌로 덮어서 마감한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의 재생작업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지,박쥐 및 새배설물 등을 청소하여 기존 채색벽화를 재생하는 방법을 설명한 사진입니다.


      ▼ 11/11 PM 룩소르신전 내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채색벽화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 11/11 PM 호루스신으로부터 생명을 불어받는 의식인 것 같습니다.


      ▼ 11/11 PM 동물을 미이라로 만드는 방법을 묘사한 벽화라고 합니다.


      ▼ 11/11 PM 일몰시 룩소르 신전 전경입니다.


      ▼ 11/11 PM 신전내 웅장한 석주들에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 11/11 PM 오벨리스크를 뒤로하고 룩소르 신전 탐방을 마칩니다. 


      ▼ 11/11 PM  버스에서 바라본 해질녘의 룩소르신전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박물관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나일강의 석양 전경입니다.


      ▼ 11/11 PM 룩소르박물관 외부 전경입니다. 람세스상이 주를 이룹니다.

         박물관 내부는 별도의 돈을 지불해야 촬영이 가능하므로........


      ▼ 11/11 PM 룩소르박물관 탐방후 크루저로 돌아와 선상부페를 즐긴후 선상에서 공연중인

         이집트 민속 춤을 관람합니다.



      ▼ 11/11 PM 크루즈갑판에서 바라본 룩스르 부근의 사막산 전경입니다.


      ▼ 11/12 AM 예정에 없던 새벽 열기구 체험을 신청했습니다. 

         열기구 탑승장소로 이동할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위해 아침일찍 나오면서 바라본 크루즈입니다.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위해 강을 건너는 보트 위에서 일정을 촬영하는 팀입니다.

         아직도 비디오테이프로 제작한다고하니, 

         USB에 저장해야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하니 우리에게는 판매를 기대하지 못하고....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위해 강을 건너는 보트 위에서 찍은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2 AM 따뜻한 공기를 주입한 열기구가 상승하고 있는 전경입니다.


      ▼ 11/12 AM 열기구를 띄우기 위해 램프에 불을 붙인 전경입니다.




      ▼ 11/12 AM 타고 있는 옆쪽의 열기구를 찍었습니다.



      ▼ 11/12 AM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왕들의 묘지가 있는 왕가의 계곡 전경입니다.


      ▼ 11/12 AM 사막 상공에 펼쳐진 열기구 전경입니다.


      ▼ 11/12 AM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발굴중인 유적지입니다.


      ▼ 11/12 AM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왕비들의 묘지인 왕비의 계곡 전경입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아멘호테프3세 신전으로 현재 발굴 중이었습니다.

         멤논의 거상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11/12 AM 신전의 지붕은 두터운 돌로된 사각형 육면채로 덮여져있었습니다.


      ▼ 11/12 AM 오후에 가볼 멤논의 거상 전경입니다.


      ▼ 11/12 AM 열기구에는 25명 정도가 타고 체험을 합니다.


      ▼ 11/12 AM 낮게 떠서 마을 바로 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11/12 AM 멤논의 거상의 크기를 옆의 당나귀수레와 비교하면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 11/12 AM 아직 준비 중인 열기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농부와 단봉 낙타입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발굴중인 아멘호테프3세 신전 전경입니다.


      ▼ 11/12 AM 공중에서 바라본 사막과 농경지와의 구분이 담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11/12 AM 일출장면과 열기구와의 조화입니다.


      ▼ 11/12 AM 열기구에서 바라본 사막에서의 일출 장면입니다.


      ▼ 11/12 AM 열기구 체험을 마치고 크루즈로 오는 길에 바라본 나일강 전경입니다.


      ▼ 11/12 AM 크루즈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인근의 하셉슈트 장제전으로 가는 길에

          거쳐야하는 기념품가게 전경입니다.


      ▼ 11/12 AM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하셉슈트장제전 모형입니다.

         규모의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셉슈트장제전?)

         고대 이집트 문명을 낳게 한 나일강은 총길이가 6,695km나 되며 그 양쪽 기슭에

         여러 가지 다른 자연 환경과 기후 조건 아래 무수한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터스(Herodotus)의 말대로 이집트인들은 '지나치게 종교적'

         이었으며 그들의 독특한 영혼관()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건축물들을

         짓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이며 잘 알려진 예가 고왕국(, 기원전 3100~2181년경)의 피라미드

         일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나일강 서안(西)에 위치한 고대 도시 테베(Thebes)의 데엘바흐리

         (Deir-el-Bahari) 산 밑에 있는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殿, Mortuary Temple,

         기원전 1458년경) 역시 그 못지 않게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피라미드가 고왕국 파라오(Pharaoh, 신격화된 이집트 왕들을 지칭하는 말)들의 사후

         세계를 위한 구조물이었다면 바위 절벽을 뚫고 축조된 무덤들은 중왕국(, 1567년까지)

         왕들의 무덤이었으며,

         신왕국시대(기원전 약 1085년까지)에는 왕들의 무덤을 골짜기에 숨겨놓고 거기서 약간

         떨어진 곳에 대규모 신전을 짓는 풍습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피라미드에 많은 보물들이 비장()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잘

         알려져 이들은 처음부터 도굴()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왕들은 계속 무덤의 형태를 변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등극하자마자 무덤이나 자신들의 사후를 위한 장제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육신과 영혼(ka)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영혼은 육신 사후에도

         계속 그 시체에 들어가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을 방부() 보존하는,

         즉 미라로 만드는 기법을 발달시켰다.

         또한, 미라화()한 시신이 그래도 훼손될 것에 대비하여 왕의 형상을 돌로 만들어

         무덤 안에 넣어두기도 하여 ka로 하여금 언제나 깃들일 장소를 보장하고 육신이 생존시와

         다름없는 편안한 생활을 영유하도록 갖가지 부장품을 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특한 영혼관으로 인하여 당시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인류 문화사를

         위하여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집트 문명에 관한 연구는 나폴레옹이 1798년 이집트에 들어가 저 유명한

         로젯타 스톤(Rosetta Stone)을 찾아온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돌에는 세 가지 언어로 된 명문()이 적혀 있었으며, 그 중 그리스어가 있었으므로

         이를 기초로 19세기 초에 프랑스 언어학자 샹폴리옹(Champollion)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무덤이나 건물들의 벽을 가득 채운 상형문자 기록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20세기 초기부터 좀더 과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핫셉수트 여왕(재위 기간 기원전 1479~1458년)은 신왕국 제18왕조(기원전 1567~

         1320년)의 다섯 번째 통치자이며 이집트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다. 

         그녀는 남편인 투트모시스 2세(Thutmoses Ⅱ)의 사후 자신의 친자()가 아닌

         어린 왕이 등극하자 실권을 쥐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역사상 여자가 왕이 된 예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모든 조각상이나 부조상에

         남장()의 형태로 나타난다. 

         제18왕조는 이집트 역사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토가 확장된 때였다. 

         즉, 남쪽으로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Nubia : 현재의 Sudan)까지 정복하였고 핫셉수트

         여왕대에는 푼트(Punt : 현재의 Somalia)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신왕국 왕들의 무덤이 밀집해 있는 '왕들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 근처의

         데엘바흐리에 위치한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태양신 아문(Amun)과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이중 기능을 가진 건물이므로 엄격히 말하면 신전-사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건물은 모형에서 보는 것처럼 각각 램프로 연결된 세 단계의 열주식() 테라스

         구조로 되어 있다. 

         모형(핫셉수트 여왕 신전 및 다른 신전들의 모형 참조)에 표시된 다른 신전들은 현존하지

         않으며 이 신전 역시 수만 톤의 모래 속에 몇 세기 동안 묻혀 있다가 재발견된 것이다.


         이 신전은 1961년부터 폴란드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제일 위의 열주식 뒤로는 역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사각형의 공간이 있고 그 뒤로

         바위산을 뚫고 들어간 곳에 신전의 성역()이 위치한다.

         이 곳은 태양신의 돛단배(bark)를 두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 공간에서 더 뒤쪽으로 제2의 성역이 후대인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어졌으며 이곳은

         신격화된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제일 위층 테라스의 기둥들 가운데 몇 개는 지하의 신()

         오시리스(Osiris)의 형태로 표현된 여왕 자신의 조각상으로 되어 있다.

         다른 기둥들은 사각형, 또는 16각형으로 되어 있다.

         열주식 기둥 뒤의 내부에는 여왕의 치적()과 생애를 미화한 부조들이 있다. 

         이들 부조나 신전 앞에 있던 여왕의 얼굴 모습을 한 스핑크스들은 그를 미워한 세력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몇 개는 조심스럽게 재구성되어 카이로 박물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장제전을 무엇보다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뒤의 천연 배경인 바위산이다.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드높은 바위 절벽은 신이 만든 열주식 구조인 양 대략

         수직으로 파인 결이 또렷하여 그 아래 신전의 열주식 기둥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세계의 모든 건축이 어떤 형태로든지 자연과의 조화를 도모하기 마련인데 이 건축물처럼

         그 자연 배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조화를 이루면서도 인위적인 구조물이라는 것을 변별할

         수 있는 건물은 아마 다른 곳에서 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 세네무트(Senemut)는 여왕의 총애하는 신하이자 애인이었다고도

         하며 그 공로로 여왕의 무덤 가까이 묻히게 되었다고도 한다.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이다.

         고왕국 이전의 이집트 무덤 건축에서는 아치와 궁륭식 천장이 일부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기원전 3000년경 이후에는 모두 이 건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기둥과 상인방 구조

         (post & lintel system)를 사용하였다. 

         직선적인 석재 기둥의 장엄하고 엄숙한 느낌이 신전 건축에 더 적합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건축 양식이 후에 그리스 열주식 신전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카이로에서 이곳까지는 비행기로, 또는 유람선으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두 방법이

         있다. 

         대개 왕복 중 편도는 배를 이용하게 되어 있으며 이 뱃길이야말로 수천 년의 세월이 멈추어

         선 듯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세계를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 영원을 향한 집념

         (내가 본 세계의 건축, 2004. 7. 10., 대원사)



      ▼ 11/12 AM 하셉슈트장제전 실제 모습입니다.

         모형에서 보는 건물들 중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되고 없습니다.


      ▼ 11/12 AM 거대한 바위산에 둘러쌓인 모습이 장관입니다.


      ▼ 11/12 AM 고사목이 한그루 있었는데 이는 하셉슈트여왕이 푼트지방(현재의 소말리아)

         원정시 가지고 왔던, 벽화를 그릴 때 사용한 나무라고 합니다.



      ▼ 11/12 AM 유적지가 넓어 이동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 11/12 AM 장제전 앞의 하셉슈트여왕의 얼굴을 가진 황금색 스핑크스입니다.


      ▼ 11/12 AM 각 층으로 연결되는 램프를 통해 건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1/12 AM 기둥에는 남장을 한 오시리스형태의 하셉슈트여왕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습니다.


      ▼ 11/12 AM 건물 왼쪽의 사각기둥이 있는 하토르여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하토르여신전이라고 합니다.


      ▼ 11/12 AM 하셉슈터여왕시대 원정군의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라고 합니다.


      ▼ 11/12 AM 소의 형태로 변한 하토르여신입니다.


      ▼ 11/12 AM 건물터였던 곳으로 현재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 11/12 AM 나일강의 배가 벽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 11/12 AM 장제전 앞에는 매의 형태를 한 호루스의 석조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호루스?)

         하이집트의 다산의 신이자 죽은 왕들의 화신인 오시리스와 보호의 여신인 이시스의

         아들이다.

         매를 상징하는 호루스는 모든 자연물과 동일시한 신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눈은 태양과 달을 상징한다.
         네켄에서 왕은 호루스의 화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즉 살아 있는 왕은 호루스와

         동일시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호루스와 오시리스의 동생인 세트가 각각 하이집트와 상이집트의

         신이었다.

         그러나 세트는 오시리스를 살해했고 호루스와 적이 되었다.

         이집트의 왕좌를 놓고 호루스는 세트와 싸워 승리했고, 이집트의 새 왕이 되었다.

         이를 통해 왕권신성의 개념이 신화의 교의 속에 정립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호루스를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건조된 호루스 신전이 이집트 에드푸에 있다.



      ▼ 11/12 AM 장제전 앞에 있는  매의 형태를 한 호루스 석조물의 뒷모습입니다.


      ▼ 11/12 AM 오시리스형태의 남장을 한  하셉슈트여왕 조각상으로 신과 동격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 11/12 AM 장제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은 아문신의

         기도실입니다. 현재 기도실 주위 공사로 어수선합니다.

         (아문신?)

          아문 (Amun 또는 아몬 Amon, 암몬 Ammon, 아멘 Amen)은 고대 이집트 신화

          신의 이름으로서 "숨겨진"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문은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테베에서 숭배되던 바람과 공기의 신으로서

          후에 태양신 (레)와 합쳐진 후 아문-라 또는 아문-레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신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기독교에서 기도가 끝나고 외치는 아멘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케도니아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에 입성한 기원전 332년, 고대 이집트의 문명을

          보고 스스로를 ‘아문의 아들’이라고 칭하였다.

          아문은 주요 신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제우스, 로마인들은 주피터와 동일시하였다.




      ▼ 11/12 AM 장제전 탐방을 마치고 아침에 지나왔던 기념품가게를 지나옵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

         신왕국 시대에 테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룩소르 시 서쪽 다이르알바리의

         바위산 깊은 계곡 속에 역대 파라오들이 건설한 공동 묘지가 있다.

         이곳이 바로 투탕카멘 왕의 유적으로 유명한 '왕들의 계곡'이다.

         '왕들의 계곡'이라는 명칭은 로제타스톤(비문이 새겨져 있는 고대 이집트의 돌.

         이 비문으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옮긴이)

         해석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의 고고학자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명명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거듭되는 도굴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무덤을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엘쿠른 산 계곡에 조성했던 것이다.

         이곳은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쉽사리 도굴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 지역에 묘를 조성한 것은 제18 왕조 토트모세 1세부터 제20왕조 람세스 11세까지의

         역대 파라오들로, 현재까지 계곡 동쪽에서 58기, 서쪽에서 4기 등 모두 62기의 묘가

         발견되었다.

         왕들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바위를 파서 만든 암굴묘이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위에 조그만 굴을 뚫거나 계곡 밑바닥을 파서 조성한 이 무덤들은,

         입구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의 거리가 100미터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이다.

         무덤 내부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계단과 경사로, 부속실(사적인 생활용품들을 넣어둔 방),

         전실(종교 의식 등에 사용되는 도구를 넣어둔 방), 현실(관을 넣어둔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제18~19왕조에서 조성한 무덤에는 도굴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샤프트'라

         불리는 깊은 수직갱(수직으로 떨어지는 깊은 갱)을 만들어놓은 것이 많다.

         전실을 눈에 띄게 만들고, 주묘는 깊은 암굴 속에 숨기는 등 도굴 대책을 세웠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발굴된 무덤 중에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투탕카멘 왕의 무덤뿐이었다.


         제20대 왕조 람세스 11세의 무덤이 마지막으로 조성된 후 왕들의 계곡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B.C.30년) 때까지는 그리스와 로마의

         여행자들이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들의 계곡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세기 들어서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따라온 고고학자들이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을 발굴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영국인 탐험가 조반니 베르지오니가 람세스 1세와 세티 1세의 무덤을 발견하자,

         세계 각지에서 고고학자와 탐험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하워드 카터에 의해 투탕카멘 왕의 무덤이 발견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왕들의 계곡에 들어 있던 보물들은 고고학자들이 발견하기 전에 이미 그 대부분이 도굴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왕들의 계곡이 가치가 떨어지는 유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도굴당한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보물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벽화였다.

          제18왕조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는 『지하세계의 서() Book of That Which

          is in the Underworld』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하세계의 서』는 지하세계[]에 내려간 태양신이 새벽에 다시 솟아오르는 과정(재생)을

         묘사한 것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 제19왕조 세티 1세의 무덤에서는 앞서 말했던 『지하세계의 서』와 천체도, 다수의 종교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천체도는 상당히 뛰어난 것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좌를

         통해 시간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제20왕조 람세스 6세의 무덤에서는 세티 1세의 무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종교 문서와

         『낮의 서와 밤의 서』라 불리는, 태양신의 움직임을 기록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또 대지의 신으로서 지하세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인 아켈을 칭송하는 벽화도 남아 있었다.

          이렇게 왕들의 무덤에는 고대 이집트 세계를 알 수 있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

         비록 도굴꾼들이 보물은 털어갔지만 고대 이집트의 문화만큼은 약탈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들의 계곡 [vally of the king] (고대유적, 2007. 6. 4., 도서출판 들녘)



      ▼ 11/12(일) AM 왕가의 계곡의 묘 위치도입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입구의 출입 통제소로 위험 물건 등의 반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 11/12(일) AM. 출입통제소 통과후 이동거리가 길어 연결차량을 이용해서 이동해야 합니다.


      ▼ 11/12(일) AM. 많은 무덤 중 가까운 곳 한 곳을 다녀오기로 합니다.


      ▼ 11/12(일) AM 19왕조의 메란타프8세 묘지 설명입니다.


      ▼ 11/12(일) AM. 20왕조의 람세스9세 왕의 묘지 설명입니다.


      ▼ 11/12(일) AM. 람세스9세 묘지 입구 전경입니다.


      ▼ 11/12(일) AM. 투탕카멘와의 묘지이지만 현재 보관한는 것이 아무것이 없다고해서 통과힙니다.


      ▼ 11/12(일) AM. 20왕조의 람세스4세의 묘지 설명입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 전경입니다. 계곡 안에 왕들의 묘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 11/12(일) AM. 왕가의 계곡내 왕들의 묘지 위치안내도입니다.



      ▼ 11/12 PM 왕가의 계곡을  나와 멤논의 거상을 탐방합니다.

          탐방객들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한 개의 돌로 이렇게 조각했다니....




      ▼ 11/12 PM 거상의 어깨에는 비둘기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 11/12 PM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크루즈로 복귀하였습니다.


      ▼ 11/12 PM 선상에서 수영 및 썬탠을 즐기는 외국인들을 보니.....


      ▼ 11/12 PM 거상의 숙소에 들어오니 수건으로 만들어 놓은 하트가 반깁니다.


      ▼ 11/12 PM 이건 새의 모양입니다.


      ▼ 11/12 PM 저녁식사후 크루즈는 운항을 시작하여 에두프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옆에 붙은 작은 보트는 크루즈를 따라 다니면서 특산물 장사를 하는 장사꾼입니다.


      ▼ 11/12 PM 선상에서 찍은 나일강의 일몰 전경입니다.



      ▼ 11/12 PM 갑문식 운하인 에스나운하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 11/12 AM 아침에 기상하여 선상에서 조식후 마차로 에두프의 호루스 신전으로 이동합니다.  


      ▼ 11/12 AM 에두프의 마을 전경입니다.

         (에두프?)

           나일 강 서안에 있는 도시이다.

         고대에 이 도시의 주신(主神)은 베데티테라고 불린 날개 달린 원반의 호루스(Horus of

         the Winged Disk)였다.

         호루스의 부인은 단다라의 해더 여신으로, 신왕국시대에는 해마다 공식방문 의식으로

         이 여신상을 배에 실어 이드푸로 실어오곤 했다.

         고대 이드푸의 주요기념물은 사암으로 만든 길이 138m, 너비 76m의 거대한 호루스 신전으로,

         제18왕조(BC 1567~1320)의 사원이 있던 자리에 건립된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BC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짓기 시작하여 BC 57년 프톨레미 11세가

         완성했는데, 이 건설작업은 상이집트 지방에서 민족주의 반란이 일어나 자주 중단되었다.

         양각의 글과 장면들로 장식된 벽은 종교적 형상을 한 민족주의와 사원 예배의식의 독특한

         모음집과도 같으며,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설계는 이집트 사원의 고전적 전례이기도 하다.

         고대 도시에 흩어져 있는 많은 무덤과 공동묘지에서 많은 오스트라카(Ostraka:글씨가

         새겨진 그릇 조각)와 파피루스에 쓴 문서들을 발굴했으며, 도시의 서쪽과 북쪽에 있는

         네크로폴리스(死者의 도시)에서는 고왕국 관료들의 석실분묘들과 중왕국의 많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현대의 이드푸는 곡물·면화·대추야자열매 등의 거래 중심지이며, 제당공장이 있다.

         나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이면서 카이로-아스완 철도선과 연결되었다.



      ▼ 11/12 AM 마차로 호루스 신전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입장료가 100이집트파운드이므로 우리 돈으로 6100원 정도로

         적은 돈이 아닙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전경입니다.

         이집트의 신전 중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신전이라고 합니다.

         (호루스신?)

           그의 눈은 태양과 달이다.

         그는 원래 하(下)이집트의 신이었다.

         그러나 네켄(그리스어로는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왕이 호루스의 화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집트가 네켄 출신 왕들에 의해 통일된 후 이 개념은 교리로 받아지게 되었다.

         이집트 왕의 5개 별칭 중 첫번째가 호루스였고, 그 별칭으로 인해 왕과 호루스는

         동일시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호루스와 세트 신(神)은 각각 하이집트와 상(上)이집트를 대표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BC 2400년경 오시리스 숭배가 이집트 전역에 퍼졌을 때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아들로서

         신화 속으로 들어왔다.

         자격을 갖추게 되자 호루스는 세트의 적대자가 되었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살해했고 호루스의 유산인 이집트의 왕좌를 놓고 호루스와 경쟁했다.

         신화에 의하면 호루스는 세트를 패배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통치권을 장악했다.

         싸움에서 호루스의 왼쪽 눈(즉 달)이 상처를 입었는데(이것은 달의 형상에 대한 신화학적 설

         명이다) 신 토트에게 치료를 받았다. 회복된 눈의 모양은 강력한 부적이 되었다.


         후대에 호루스는 많은 곳에서 지역 신으로 나타났고, 다양한 이름과 별명을 취했다.

         예를 들어 하르마키스(하르엠아케트, 지평선 위에 있는 호루스)·하르포크라테스

         (하르페크라드, 어린아이 호루스)·하르시에시스(하르페에세,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

         하라크테(수평선의 호루스) 등이며, 카움움부(콤옴보)에서는 하로에리스(하르웨르,

         연장자 호루스)라고 불렸다.


         후에 호루스는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아폴로와 동일시되었고,

         에드포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아폴리노폴리스(아폴로의 도시)라고 불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주요 호루스 신전들은 이집트 민족주의의 중심지가 되었고,

          세트를 항복시킨 것은 점령자에 대한 이집트인의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에드포에서는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 신전에서의 일을 방해했지만, 호루스를 하마 모습의

         세트를 창으로 찌르는 파라오로 묘사한 제의적 연극이 주기적으로 상연되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탑문 전경입니다.

         (호루스신전?)

         '하늘의 주인'인 호루스 신이 고대 이집트의 주요 신들 중 하나가 되자,

         이후 모든 파라오는 자신을 '살아 있는 호루스', 지상 만물의 올바른 질서의 수호자와

         동일시했다.

         호루스를 둘러싼 신화는 서로 차이를 보이지만,

         그는 주로 이시스와 오시리스 신의 아들로 숭배된다.

         그는 종종 매의 머리를 한 인간, 매의 머리를 한 동물, 혹은 매 그 자체로 묘사된다.

         에드푸 신전의 주 안뜰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조각상에서 호루스는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위풍당당한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호루스 신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신전에 있는 비문들은 고대 이집트의 의식과 축제, 사제들, 그리고 신화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현재의 신전은 보다 먼저 세워졌던 신전을 대체한 것으로, 여러 대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자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리스 출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집트의 신들과

         신앙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이 신전은 180년이 지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입구 관문에는 호루스와 다른 신들, 그리고 적을 무찌르는 모습의 파라오가 나타나 있다.

         관문 위에는 태양의 원반이 있는데, 양쪽으로 뱀이 둘러싸고 있다.

         신전의 내부 성소에는 안에 황금으로 된 호루스 상을 감추어 두었으며 연마한 돌로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신전에는 방대한 도서관과 향수 제조소가 있었는데,

         공장의 벽에는 향수와 향()의 제조법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일 년에 한 차례, 호루스의 어머니인 이시스 여신의 조각상이 북쪽 덴데라에 있는 그녀의

         신전으로부터 금을 입힌 배에 실려 나일 강을 따라 에드푸로 실려 왔다.

         그녀는 강변에 늘어선 환희에 찬 군중들 사이를 지나 '아름다운 만남의 축제'에서 행복과

         환락 가운데 상징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생명을 주러 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루스 신전 [Temple of Horus]



      ▼ 11/12 AM 호루스신전 탑문에는 호루스 신화에 대한 부조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호루스 신전과 부조?)

         호루스 신전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6대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기간에 건립되었습니다.

         신전은 BC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BC 57년 유엘게테스 1세 때 끝났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5세 때의 불안한 상황으로 대부분의 공정은 주로 이 기간 중의 20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호루스와 세티 신 사이에 펼쳐졌던 거대한 전적지에 신전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의 신전은 오랜 시기에 걸쳐 이 곳에 연속해서 세워졌던 신전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신전 건축물은 호루스 상의 보호물로 고대의 초원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 곳에는 일찍이 지금의 건물 쪽으로 90도 각도로 람세스 2세의 작은 탑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 열주실을 포함한 주 신전은 1860년 마리에뜨(Mariette)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만남의 축연과 호루스와 그의 부인 하토르의 결혼기념일을 묘사한

         거대한 부조들이 있습니다

 

         이들 부조들은 대부분 첫 탑문 안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름철 세번째 달에는 성직자가 덴데라 신전에 있는 하토르의 범선(의식상의 배) 위에

         그녀의 조상을 모셔두었다가 호루스와 하토르가 부부애를 나누기 위해 찾았던 것으로

         믿었던 에드푸 신전으로 가져갔습니다.

         매일 밤이면 신과 여신들이 탄생지(Mamissi)나 범선의 정박소에서 은거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아직까지도 탄생지로 가는 열주로 된 입구가 있으며,

         주 신전의 바깥쪽 부조들은 여전히 색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그림들은 호루스와 하토르의 아들 하르소모투스(Harsomtus)의 탄생에 관한

         의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 신전의 탑문은 약 36m 높이로 적들과 싸움을 벌이는 파라오의 전투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탑문 안의 열주 안마당에는 잘려진 원주들이 있고, 이것은 대 열주실로 이어집니다.

         안마당 양쪽에 있는 문은 신전 뒷쪽과 벽면 안쪽으로 연결됩니다.

 

         이곳에는 민간의 기록에서 나온 땅의 기부를 기록하고 있는 비문들과 호루스가 세티에게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호루스의 승리(10개의 작살)'로 불리우는 의식이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세티의 상징인 하마를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제1 열주실의 전면에는 호루스와 하토르를 경배하는 그림이 있고, 이곳에 매의 형상을

         한 약 3m 높이의 하토르 신의 거대한 조상(맞은 편 호루스상은 파괴되었음)이 있습니다.

 

         18개의 원주가 있는 대 열주실로 들어서면 1백여년전에 세워진 빛의 사용에 대해

         주시하게 됩니다.

         빛의 흐름과 기울음이 신비감을 느낄 만큼 아주 조화롭습니다.

         홀 안쪽으로는 작은 방들이 있는데, 서쪽의 방은 예복을 입던 곳이고,

         동쪽의 방은 성직자들이 그 날의 종교 의식을 준비하던 도서관이 있습니다.

         이 홀 안에는 신전의 건립 의식을 포함해 신에게 봉납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 열주실을 지나면 제2 소 열주실이 나타납니다.

 

         이 곳은 성직자들이 순결한 신성수를 얻었던 '나일의 방'이라 부르는 곳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덴데라의 신전과 비슷한 배치를 보여줍니다.

         서쪽의 방에 있는 문은 매일 호루스의 조상을 바르는데 사용되었던 작업장과 봉납품을

         저장하던 보고가 있습니다.

         제2 열주실을 지나면 봉납소가 나타나고, 이어 전실(前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성소(至聖所)가 있습니다.

         이 곳에는 넥타네보 2세가 지은 화강암으로 된 안치소가 있는데, 이 신전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입니다.

         안치소 위에는 약 60cm 크기의 황금으로 장식된 목조 호루스 상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조상은 성직자들에 의해 옷이 입혀지고, 씻겨주고, 성유를 바르는 등 인간처럼

         보호되었습니다.

         지성소는 사당과 방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북쪽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호루스의

         유물들이 저장되어 있었던 방들이 있는 '민의 사당'이 나타납니다.

         신들의 왕관의 방, 오시리스의 방, 베스트의 방, 오시리스의 무덤, 승리자의 방(호루스),

         복원된 의식용 범선, 콘수와 하토르의 사당, 태양신 레와 날개를 펴는 사당 등 주로

         부활을 향해 여행하던 영혼들의 길을 수호해주었던 암사자 메히트 신에게 받쳐진

         것입니다.

         동쪽 사당의 앞면에는 덴데라의 태양의 뜰과 같은 '새해의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의 천장에는 누트 신의 모습과 함께 하루 12시간을 지나는 태양의 배의 여정을

         묘사해놓고 있습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정면에서 바라본 탑문 전경입니다.

        하토르와 호루스 새겨져 있는 신전 외곽벽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탑문 입구 좌우에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석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12 AM 관문위에 태양의 형상을 하고 있는 원반에 뱀의 형상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 11/12 AM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신입니다.


      ▼ 11/12 AM 이곳 벽화에도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인들의 벽화훼손이 심각했습니다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석상의 배경으로 하토르여신과 호루스신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 11/12 AM 신전 전 광장과 신전 전경입니다.

         새들의 신전 훼손을 막기위해 앞에는 그물을 쳐놓은 상태입니다.


      ▼ 11/12 AM 신전 기둥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기둥 벽화 전경입니다.

         생명의 문을 여는 앙크십자가는 어느 신전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석문을 지나면서 바라본 윗쪽 벽화 전경입니다.


      ▼ 11/12 AM 향수를 붓고 있는 호루스신 등의 벽화 전경입니다.


      ▼ 11/12 AM 신전 문앞을 지키고 있는 한 쌍의 호루스 석상중 좌측 석상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 안 광장에서 바라본 들어온 외부 전경입니다.


      ▼ 11/12 AM 왼쪽에 설치되어 있는 호루스 석상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께 선물을 바치고 있는 벽화그림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에 상형문자로 향수를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 11/12 AM 호루스의 어머니인 이시스여신의 조각상을 싣고오는 나일강의 배 벽화 전경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의 지성소에 있는 신성한 배의 모형입니다. 


      ▼ 11/12 AM 이곳에도 나일강의 범람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나일강 수위계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 11/12 AM 이집트의 신전에 잇는 부조를 보면 이렇게 전부 배꼽을 과대표현하는 걸 볼

         있는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인지??????


      ▼ 11/12 AM 호루스신전의 규모를 측정할 수 있는  벽면의 높이입니다.


      ▼ 11/12 AM 호루스지방을 안내한 현지인 가이드 인물사진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 부조로 나일강에서 그물을 이용 어로작업하는 내용과 창으로

         하마인지 물개인지를 잡는 부조내용입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 벽에 난 구멍에는 참새들의 보금자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 천정이 시컿게 그을린 자국은 이교도 침입으로 이곳이 한동안

         생황터전으로 이용되면서 그을림의 흉터라고 합니다.


      ▼ 11/12 AM 호루스신전내의 부속건물들이 많았지만 훼손이 심한 상태였습니다. 그 이유는.....


      ▼ 11/12 AM 신전 경내에 지어진 일반인들의 주거지로, 신전의 자재로 지었기때문이라고.....

          지금은 신전의 정화를 위해 주변 민가를 철수시키고 복원작업중이었습니다.


      ▼ 11/12 AM 크루즈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가 있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 11/12 PM 크루즈로 돌아놔 중식 후 숙소로 들어오니 오늘은 타올로 악어를 만들어 놨습니다.


      ▼ 11/12 PM 크루즈가 에두프를 떠나 콤옴보로 이동합니다.

         나일강의 풍요로움이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11/12 PM  나일강의 풍요로움 반대쪽은 사막산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강변을 따라 화물열차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 11/12 PM  콤옴보 이동중에 바라본 나일강의 어부들 전경입니다. 


      ▼ 11/12 PM  나일강의크루즈 전경입니다. 룩소르에서 시작해서 아스완까지 이동합니다.


      ▼ 11/12 PM  나일강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중 우측은 녹지와 녹지넘어 사막지형입니다.



      ▼ 11/12 PM 우측 강안에는 물소와 녹지 그리고 회교사원의 첨탑이 조망됩니다.


      ▼ 11/12 PM  곳곳의 강안(江岸) 초지에는 물소나 말들의 방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 11/12 PM  나일강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흐름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습니다.


      ▼ 11/12 PM 우리가 타고 있는 크루즈의 상부 데크 전경입니다.


      ▼ 11/12 PM  콤옴보 항에에 도착하여 선상에서 신전을 조망합니다.

         콤옴보 신전 앞에 진열된 이집트 전통의상의 칼라풀한 색상들입니다.

         (콤옴보?)

         아스완 주에 있는 아스완 하이 댐에서 북쪽으로 48㎞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카움움부 시는 농산물시장이자 사탕수수 가공 및 조면업 중심지로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주요간선도로와 카이로-아스완 철도 사이에 있는 나일 강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동쪽에서 나일 협곡이 북에서 남으로 길이 32㎞, 너비 16㎞에 달하는 계곡으로

         변한다.


         1959~70년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면서 나세르 호가 새로 생기게 되자 거주지가

         물에 잠기게 된 6만 명 이상의 누비아족 이집트인들이 이 계곡 근처로 이주해와 사막을

         개간하여 만든 마을과 계획도시에 정착했다.

         이주민들은 오늘날 댐의 수로를 통해 관개되는 경작지에서 사탕수수와 다른 여러

         환금작물들을 재배하여 예로부터 자급해오던 밀과 옥수수의 부족분을 충당한다.


         역사적으로 카움움부 남쪽에 펼쳐진 나일 강 유역에는 주로 누비아족 및 이집트인과

         누비아족의 혼혈인들이 거주해왔다.

         혼혈인들은 이외에도 수단 북부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카움움부에서 남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대 옴보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유적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와 로마 시대에 지어진 독특한 이중 신전으로

         유명하다.

         이 신전은 악어신인 세베크(수코스)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에게 봉헌되었던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신전의 탑문과 안뜰 일부가 강물에 쓸려 허물어졌다.


         이 고대도시 터의 발굴조사는 1980년대초 이집트 고대유적 관리국에 의해 실시되었다.

         카움움부 시는 나일 강 및 누비아에서 나일 강 유역에 이르는 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건설되어 헬레니즘 시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BC 305~30) 때는 독립된 옴보스 주의 주도로서 크게 번성했다.



      ▼ 11/12 PM  콤옴보 신전 전경입니다.

         (콤 옴보신전?)

         콤옴보 신전은 왕조시대에 건축되어졌으며,

         외양은 하나의 신전이지만 모든 구조가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이 신전에  악어의 신 소멕과 나이 먹은 호루스(호루스 신들 중 하나) 의 하나인

         하르-와르의 두 신만을 모셨기  때문에 다른 신전과는 다른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집트 물의 신이며 악어의 신인 소벡은 나일강을 관장하는 신으로, 

         이 지역이 예로부터 악어의 도시라고 불리워지고 있다고 하며, 특히 이 지방에서는

         악어의 신인 소벡을 우주 창조 당시 혼돈의 물에서 나타난 조화의 신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악어에 대하여 음식물도 바치기도 하고,악어의 행동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 등 악어를 숭배하는 사상이 성행했다고합니다.

 

         이 지역은 악어들이 나일강으로부터 기어 올라와 햇빛을 쪼이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또한 호루스를 도와 세티를 물리치는 일을 돕고, 호루스의 아들들을 나일강에서

         구해주었다고 믿기 때문에 소벡을 다른 신의 보호자같은 존재라고 인식되어 오고

         있어 소벡을 파라오의 권력의 상징이라고도 합니다. 


      ▼ 11/12 PM  콤옴보 신전 옆의 열주 전경입니다.


      ▼ 11/12 PM  측면에서 바라본 콤옴보 신전 전경입니다.


      ▼ 11/12 PM  오에게 생명의 열쇠인 앙크를 전달하는 모습의 부조입니다.

         토트신, 하토르여신, 호루스신 등이 보입니다.


      ▼ 11/12 PM  신들에게 재물을 바치는 부조 전경입니다.


      ▼ 11/12 PM  콤옴보 신전 석주에 새겨진 파라오가 악어형태의 소벡신 제물을 바치는 부조입니다.


      ▼ 11/12 PM  소벡신인 악어입니다.


      ▼ 11/12 PM  매의 형상인 호루스신의 문양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 11/12 PM  태양력을 표시한 상형문자라고 들었는데........


      ▼ 11/12 PM  여기에도 나일강의 수위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춰놓았습니다.



      ▼ 11/12 PM  측면에서 바라본 콤옴보신전 전경입니다.



      ▼ 11/12 PM  크루저로 돌아와 저녁 식사후 즐긴 누비안 전통 공연 전경입니다.

         (누비아족?)

         누비아족(Nubian)은 아프리카 수단 나일강 유역의 누비아 지방에 살며 동 수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며, 고대로부터 누비아인은 피부색으로 보아 북부의 <빨간노바>

         와 남부의 <검은노바> 로 구분된다.

         그들의 사회 조직, 관습,신앙 등은 아프리카적 요소가 강함으로,

         수단,이집트 국경인 와디할파로부터 수단 중앙부의 할툼 사이에 30만 명 정도가 살며,

         아나그, 바라브라,  빌크트,  디린,  미도비,  니마 등이 주된 종족이다.


         원래 흑인계 인종이었으나,

         이집트인 또는 아랍인과의 혼혈로 유럽적인 신체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바라브라족의 성인 남자는 신장 170 cm의 후리후리한 체격, 청동색의 피부, 계란형의 얼굴,

         반듯한 코, 두툼한 입술, 물결 모양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다.

         빌크트족은 유목으로, 그 밖의 누비아족은 농업으로 생활한다.

         주식은 조와 피이며, 그 밖에 수박, 보리,  대추야자,  콩 등을 재배한다.

         소로 수차를 돌려 [灌漑(관개): 물대기]를 하지만, 쟁기는 거의 쓰지 않는다.

         모든 종족이 소 ·말 ·염소 ·양 등을 기르며 고기와 젖, 버터를 이용한다.

         돼지는 니마족과 디린족만이 기른다.

         집은 통 모양의 벽에 풀로 원추형의 지붕을 이은 것이며, 바라브라족만이 북아프리카식의

         평평한 지붕에 직사각형을 이룬 가옥에서 생활한다.

         디린족,  빌크트족,  미도비족은 王制(왕제)를 채택하였으나,

         그 밖의 누비아족은 중앙집권 정부를 두지 않는다.


         BC 2000년경부터 이집트 ·수단의 흑인왕국, 아랍의 베드윈족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 누비아족의 대부분은 부계제를 지키나, 디린족과 미도비족은 動産(동산)의 모계 상속,

         아나그족과 미도비족은 정치적 직위의 모계 계승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어,

         일찍이 누비아족 사회에서 모계제가 시행된 흔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