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교산 + 경남/경남.부산 사 ~ 차

2018.08.25 산청 지리산 백운계곡 피서산행

redstone5 2018. 8. 27. 17:53


      이번 주말 산행은 올해의 마지막 알탕산행으로 지리산 웅석봉 부근의 운리마을 다물민족학교를

      들머리로 하여 웅석지맥을 가로질러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백운계곡 산행에 나섰습니다.


      ※웅석지맥(熊곰웅,石돌석,枝가지지,脈맥맥)

         웅석지맥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쳐 이어지기 시작하여 중봉, 하봉, 왕등재

         웅석봉, 백운산, 황학산, 갈미봉, 석정산을 지나 진양호 귀동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62km의 산줄기로 덕천강의 우측 울타리가 됩니다.


      지리산 백운동계곡은 매년 여름 피서산행으로 빠짐없이 찾는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기 이용했던

      탐방로와는 다른 새로운 탐방로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많이 이용치 않는 운리에서 웅석봉의

      달뜨기능선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백운계곡으로 하산하는 등로를 이용하여,

      긴계곡을 따라 수시로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방법으로 지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했습니다.


      당초에는 운리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둘레길 8구간을 이용하다가 백운계곡 삼거리에서 계곡을

      따라 하산키로했지만 ,

      그래도 산행인데 어느정도의 산행은 해야한다는 일부회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오르막에 조금 힘드는 다물민족학교에서 웅석봉 달뜨기능선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삼거리까지

      산행키로 했습니다만,

      시간과 체력의 문제로 달뜨기능선 마지막 삼거리 전 갈림길까지인 해발 830m까지 산행후

      백운계곡으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8구간(운리 ~ 덕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마을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까지 약 13.9km의 지리산

         둘레길을 말하며, 운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걷다보면 임도를 만난다.

         이 길은 나무를 운반하는 운대로였다.

         임도 아랫부분에 너른길이 울창한 참나무 숲속에 남아 있다.

         참나무 숲을 지나다보면 너들도 만나고 작은 개울도 지난다.

         좁아진 길을 지나 백운계굑을 만나고, 백운계곡에서 마근담 가는 길은 솔숲과 참나무

         숲을 지난다.

         남명 조식 선생이 머물렀던 산천재가 있는 사리에서 바라보는 덕천강과 천왕봉은

         아름다움과 굳센 기상을 담고 있어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의미있게 걸을 수 잇는

         구간이다.


      백운동계곡은 역사적으로도 조선조 유명 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이 즐겨 찾던 곳으로

      유명한데 지리산록 중에도 남명(南남녘남,冥어두울명) 조식(曺성조,植심을식)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계곡이기도 한 곳입니다.

      일찌기 남명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남명선생장지소(南冥先生杖之所)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으며,

      '푸르른 산에 올라 보니 온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글을 지은 작품의 현장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올들어 마지막 알탕 산행이라 생각해서인지 쌍폭포, 직탕폭포, 백운폭포, 용문폭포 등에서

      원없이 알탕을 즐기면서 하산하는 즐겁고 재미있는 산행이 하루였습니다.


      (백운계곡(백운계곡)?)

      지리산 일대의 수많은 계곡 가운데서도 산청군 단성면에 위치한 백운동계곡은 조선시대

      대표 유학자이자 선비정신의 상징인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손꼽힌다.
      그래서 일까.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남명 선생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

      (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등의 글씨가 새겨진 암석을 만날 수 있다.

      백운동계곡은 단성면과 시천면을 구분 짓는 웅석봉 군립공원 자락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들머리는 생비량면에서 단성면, 시천면 중산리로 이어지는 20번 국도를 따라가다 하동군

      옥종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 1km쯤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백운동계곡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웅석봉에서 뻗어나온 산자락이 덕천강에 이르면서 백운동계곡이 되는데,

      생전 덕천강을 사랑해 마지 않았던 남명 조식 선생이 강 줄기를 따라 걷다 백운동에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계곡을 따라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점촌마을로 발을 놀리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백운동’을

      새긴 기암절벽과 ‘용문동천’을 알리는 글자가 쓰인 큰 암석을 마주하게 된다.
      ‘백운’이라는 이름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계곡을 따라 오르면 오를수록 하얀 구름

      위로 마치 신선이 노닐 것 같은 풍광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오르면 몸을 담그면 저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智沼)가 반긴다.

      폭 26m, 길이 30m로 꽤 넓어 백운동계곡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다지소 주변의 바위터에서

      피서를 즐긴다.

      다만 올해는 긴 폭염으로 수량이 적어 예년과 같은 청량한 맛이 조금 덜해 아쉬움을 보였다.

      그러나 남명 선생께서 애정했던 그 웅장함이 어디가랴. ‘영남제일천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등천대(登天臺)는 용문동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센 물살에 절로 경외감이 든다.

      백운계곡의 볼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높이 4m에 이르는 백운폭포와 다섯 곳의 폭포와 담(潭)이 있다 해서 ‘오담폭포’라고 이름

      붙은 장소와 옳은 소리만을 듣는다는 청의소(聽義沼), 아함소, 장군소 등의 소와 용문폭포,

      십오담폭포, 칠성폭포, 수왕성폭포 등도 있다.

      백운동계곡은 오를수록, 둘러볼수록 이곳을 사랑한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선생은 이곳에서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동계곡을 탐방하는 느낌은 평생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지리산 자락 덕산에 은거하며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큰 스승인 선생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듯 하다.

      계곡 유람을 끝내고 지친 발을 다지소에 담궈보니 온 몸에 다시 활기가 돈다.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서는 길 하얀 구름이 머리 위를 지난다.(2018.08.13 경남일보 기사 퍼옴)


      (산행개요?)

      1. 산행날짜 : 2018.08.25      날씨 : 맑고 습도 높음

      2. 산행시간 : 10시11분 ~ 15시37분(5시간26분) - 알탕포함시간으로 시간 의미 없음

      3. 이동, 도상거리 : 9.56km, 9.17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1.76km/h

                        휴식제외 : 2.42km/h

      5. 고도 : 877m ~ 224m(653m) - 최고봉이 830m이므로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3.32km, 1.46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5.47km, 3.27km/h

      8. 휴식횟수, 시간 : 4회, 1시간28분(폭포에서의 알탕 횟수임)

      9. 산행 코스

        산청군 단성면 운리마을 ▷ 다물교육원 ▷ 서어나무고목 ▷ 웅석봉 5.8km 이정표 ▷

         웅석봉 5.0km 이정표(달뜨기 능선끝부분 웅석지맥 만남) ▷ 임도 ▷ 백운계곡 삼거리

         (웅석지맥 이탈) ▷ 백운계곡 ▷ 지리산둘레길8구간 4거리 ▷ 백운계곡 진행 ▷

        직탕폭포 ▷ 백운폭포 ▷ 용문폭포 ▷ 영산산장 ▷ 주차장 


      ▼ 위성도에 나타낸 산행지 개략적인 위치로 좌측에 천왕봉이 있고,   

          웅석지맥은 천왕봉,중봉,하봉,항운대,왕등재,도토리봉,웅석봉으로 해서 우리가 산행한 궤적

         우측 붉은선으로 이어진 지맥입니다.


      ▼ 위성지도에 나타낸 백운계곡의 산행궤적으로 석대산과의 사이 계곡이 청게계곡입니다.    


      ▼ 등고선상에 나타낸 산행궤적입니다.    


      ▼ 해발고도표입니다. 지속적으로 올랐다가 내려가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산 산행입니다.    


      ▼ 10:10(00h00m) 산행들머리인 다물교육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직산대 유적비입니다.

         직산대라는 지명 등은 찾을 수 없지만 다음은 직산대 유적비에 적힌 내용이라고 합니다.

         다물평생교육원이 생기면서 세워진 유적비인 것 같습니다.

         이 직산대 유적비 앞으로 산행 등로가 열려있었지만 우리는 다물교육원내로 이동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 신선이 사는 세상을 유교에서는 이상향을 청학동,

         불교에서는 피안의 언덕, 중국 도가에서는 무릉도원이라 불렀다.

         하늘에 잇닿은 동네가 동천(洞天)이다.

         조선시대 명 풍수 격암 남사고가 말한 이른바 십승지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며 복을 듬뿍 주는 길지(吉地)다.

         물질문명이 빚어낸 오염은 특히 정신세계에서 더 두드러진다.

         옛 사람들이 예토(穢土)에 살면서 낙원을 가정하고 무릉도원을 염원한 것은 건강한 몸에

         맑은 마음으로 살자는 것이었으리라고 본다.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신선이고 군자다. 그래서 십승지가 나왔고, 동천이 등장하였다.

         이곳 청강원 자리가 청학동, 피안의 언덕, 무릉도원으로 불릴만한 근거가 선무대 입구에

         있는 ‘직산대유적비’에 적혀있다.

        

         그 내용을 보면 1만 8천년전에 하늘과 땅의 신령이 하나가 되어 이곳을 만들었다.

         1300년 전에는 금계사, 6백년전에는 정당매, 500년전에는 남명 조식선생,

         1921년도에는 이곳 선비 유림들이 운곡제라는 서당을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유림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나라걱정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자는 교육을 하고 결의를 하였다.

         수백년 전부터 민족을 생각하고 역사를 생각하고, 학문을 닦고 문화를 즐겼다.

         그런 현인 선비들이 모인 곳으로 뿌리가 있는 곳” 


      ▼ 10:10(00h00m) '달맞이꽃'입니다.      


      ▼ 10:10(00h00m) '꽃댕강'입니다.     


      ▼ 10:10(00h00m) '좀돌팥'입니다.    


      ▼ 10:10(00h00m) '자리공'입니다.     


      ▼ 10:10(00h00m) '닭의장풀'입니다.     


      ▼ 10:11(00h01m) 산행 시작전 몸풀기를 합니다.      


      ▼ 10:11(00h01m) '루드베키아'로 수입종입니다.  


      ▼ 10:11(00h01m) '사위질빵'입니다.   


      ▼ 10:12(00h02m) 다물 평생교육원전경입니다.  


         (다물정신이란?)

         고구려의 건국 이념은 '다물정신(多勿精神)'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1권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왕은 그 곳을 다물도라하였다.

         송양을 봉하여 그 곳의 주(主)를 삼았다.

         고구려 국어(國語)에 구토(舊土)의 회복(回復)을 다물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즉 '다물'은 고구려 말로 '옛영토를 다시 찾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서 다시 찾겠다고 나선 '옛영토'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고조선의 땅이다.

         고구려의 옛영토가 고조선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중국 사료들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예와 옥저, 고구려는 원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한서>> 현도군편에도 한무제가 사군을 설치할 때 <그 땅들이 모두 조선, 예,

         맥, 고구려, 만이(蠻夷)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한 것과 연결을 지어 볼 때,

         고구려의 옛영토가 고조선임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왜 '다물정신'으로 전에 고조선이 차지했던 옛영토를

         복구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무튼 추모왕은 고구려 건국 직후 다물정신을 살려 가장 먼저 당시 고구려 다섯 부족국가

         중 가장 큰 세력인 비류국부터 제압하였다.

         고구려는 소노부(또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 5개의 부족국가로

         되어 있었는데, 비류국은 바로 가장 세력이 큰 소노부였다.

         추모왕이 속한 부족국가는 계루부로 건국 초기에는 세력이 약했으나,

         소노부인 비류국을 제압하면서 가장 힘이 센 세력으로 떠올랐다.

         세력이 약한 계루부를 이끈 추모왕이 가장 세력이 강한 소노부를 먼저 친 것은 다른

         부족국가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기선제압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추모왕은 비류국의 송양왕과 세 차례에 걸쳐 싸움을 벌였다. 

          어찌됐는 우여곡절 끝에 추모왕은 송양왕의 항복을 받아내 비류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추모왕은 이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라고 하고, 송양왕으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추모왕이 비류국을 제압한 후 '다물도'로 명칭을 바꾼 것은,

         고구려 건국 이념이 '옛영토를 회복하는 다물정신'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물정신은 고조선의 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에 출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나오듯이 추모왕이 단군의 아들(자손)이라면 분명 홍익인간의

         정신을 이어받았을 것이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다물정신'을 살려 잃어버린 옛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홍익인간' 정신을 통하여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선정을 베푸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물정신'은 고조선의 계승 의식으로 '홍익인간'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초기단계의

         건국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DAUM에서 퍼옴)


      ▼ 10:16(00h06m) 다물평생교육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선무대(仙舞臺)란 비석글입니다. 

         이 곳을 청계소도(淸맑을청,溪시내계,蘇깨어날소,塗진흙도)  선무대(仙신선선,舞춤출무,臺돈대대)

         칭하는 것 같습니다.


      ▼ 10:16(00h06m) 다물평생교육원내로 진입합니다. 


      ▼ 10:16(00h06m) 교육원내 각 시설물 이정표입니다. 


      ▼ 10:16(00h06m) '능소화'입니다. 


      ▼ 10:21(00h11m) 교육시설물 안내도로 우리는 국궁장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0:22(00h12m) 국궁장 방향으로  진입합니다. 


      ▼ 10:25(00h15m) 국궁장 쪽에 있는 웅석봉 이정표입니다. 


      ▼ 10:26(00h16m)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10:37(00h27m) 계단이 끝나는 지점부터 흙길과 포장길의 오르막이 연이어 나타납니다. 


      ▼ 10:39(00h29m) '불두화'입니다.


      ▼ 10:39(00h29m) '참취나물꽃'입니다. 


      ▼ 10:42(00h32m) 산행시작 30분 후 당초 등로였던 다물학교 옆등로와 만납니다.


      ▼ 10:45(00h35m) 등로와 만난 조금후  서어나무 고묵을 만납니다.


         (서어나무?)

         ‘계절의 여왕’ 5월의 숲은 언제나 싱그럽고 아늑하다.

         꽃이 곱고 단풍이 아름답다지만 정말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절정은 여러 넓은잎나무들이

         새싹을 틔우는 순간이다.

         연초록을 기본으로 나무 종류마다 자신의 빛깔을 내지만, 붉은빛을 바탕으로 펼치는

         서어나무의 새싹은 단연 돋보이는 주연배우다.

         같은 서어나무끼리도 약간씩 잎이 피는 시간 차이가 있으므로 갓 피어날 때의 붉음에서부터

         주황색을 거쳐 연한 녹색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숲은 인간이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저희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치른 후 음수(陰樹)의

         특성을 가진 한 무리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차지한다.

         우리나라 남해안과 높은 산꼭대기를 제외한 현재 남한의 대부분을 온대림(溫帶林)이라고

         하는데, 이런 곳의 최후 승리자는 바로 서어나무와 참나무 무리다.

         온대림의 대표주자로서 흔히 서어나무를 내세운다.

         그만큼 넓은 면적에 걸쳐 수천수만 년을 이어온 우리 숲의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가

         서어나무다.

         서어나무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목(西木)’을 우리말로 ‘서나무’라고 했다가 발음이

         자연스러운 ‘서어나무’가 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서어나무는 아무래도 독특한 수피에 먼저 눈이 가기 마련이다.

         줄기의 굵기 자람이 균등하지 않아 회색의 매끄러운 표면에 세로로 요철(凹凸)이 생겨서

         마치 잘 다듬어진 보디빌더(bodybuilder)의 근육을 보는 것 같아서다.


         서어나무는 비중이 0.74나 되어 비교적 단단한 나무지만 표면이 고르지 않아 당연히

         쓸모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표고버섯을 키우는 나무, 방직용 목관(木管), 피아노의 액션 부분 등에 조금씩 쓰일

         따름이다.

         서어나무는 중부 이남에서 주로 자라며 키 10~15미터, 굵기가 한 아름이 넘게 자랄

        수 있다.

         밀양 상동면 안인리의 마을 뒤편에서 자라는 서어나무는 키 9.4미터, 둘레 530센티미터,

         나이가 약 200년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다.

         긴 타원형의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끝은 꼬리모양으로 길어진다.

         암수 한 나무로 꽃은 잎보다 조금 먼저 피며 열매는 이삭처럼 밑으로 길게 늘어진다.

         손가락 길이만 한 열매 대궁에 긴 손톱같이 생긴 포엽(苞葉)이 수십 개씩 붙어 있고 쌀알

         굵기만 한 씨앗은 포엽 밑에 숨어 있다.


      ▼ 10:56(00h46m) '은꿩의 다리'입니다. 


      ▼ 10:57(00h47m) 조그마한 계곡을 건너갑니다. 


      ▼ 11:04(00h54m) 이용이 적은 희미한 계곡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 11:04(00h54m) 마치 건물이 있었던 것 같은 석축을 지나갑니다. 


      ▼ 11:15(01h05m) 이어지는 숲길입니다. 


      ▼ 11:18(01h08m) 당초 이길을 따라 올라와야 했는데 약간 우회해서 도착했습니다.

         좌측으로 가면 웅석봉 방향, 이정표 방향인 우측으로 가면 지나온 서어나무 방향입니다.


      ▼ 11:38(01h28m) 웅석봉 5.8km전방 지점인 능선에 도착,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이동합니다. 


      ▼ 11:47(01h37m) 웅석봉에서 이어지는 달뜨기 능선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1:52(01h42m) 철쭉꽃의 결실인가 봅니다. 


      ▼ 12:06(01h56m) '황금무당버섯'이라고 하는데 문외한이라..... 


      ▼ 12:16(02h06m) 달뜨기 능선방향으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이어갑니다. 


      ▼ 12:24(02h14m) 산행시작 2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에 달뜨기능선에서 웅석지맥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웅석봉까지는 5km입니다. 


      ▼ 12:24(02h14m) 웅석지맥상 등로에서 점심 식사를 합니다. 


      ▼ 13:01(02h51m) 약35분간의 점심식사후 웅석지맥길을 따라 백운계곡쪽으로 이동합니다. 


      ▼ 13:04(02h54m) 웅석지맥으로 이어지는 길을 순한 흙길입니다. 


      ▼ 13:13(03h03m) 임도를 만납니다. 이 길은 웅석지맥길로 이어집니다. 


      ▼ 13:14(03h04m) '참취꽃'입니다.


      ▼ 13:14(03h04m) 웅석지맥길을 따라 백운계곡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 13:18(03h08m) 웅석지맥길에서 우측으로 벗어나면서 백운계곡으로 접어들어야합니다.


      ▼ 13:18(03h08m) '마타리'입니다.


      ▼ 13:18(03h08m) 백운계곡 상류부분에서부터 본격적인 알탕이 시작됩니다. 


      ▼ 13:48(03h38m) 많은비로 계곡이 많이 훼손되어 이동시 어려운 지점도 만납니다. 


      ▼ 13:49(03h39m) 백운계곡 상류지점에 곳곳에 작은 소와 폭포가 이어집니다. 


      ▼ 13:53(03h43m) 하산길 좌측으로 이어지는 계곡 전경입니다.


      ▼ 14:00(03h50m) 쌍폭포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역시 알탕으로 시원함을 만끽합니다. 


      ▼ 14:00(03h50m) 쌍폭포가 있는 곳 부근 전경입니다. 


      ▼ 14:02(03h52m) 쌍폭포가 있는 곳 아래 계곡 전경입니다. 


      ▼ 14:09(03h59m) 지리산 둘레길8번 구간을 만납니다.

         진행방향에서 ← 운리방향, ↑ 백운계곡 방향, → 마근담(사리) 방향입니다. 


      ▼ 14:09(03h59m) 지리산둘레길 8번구간에서 만나는 지점에 있는 목장승들입니다. 


      ▼ 14:09(03h59m) 직진하는 백운계곡은 앞으로 2km여를 더 내려가야 합니다. 


      ▼ 14:10(04h00m) 지리산둘레길 8번구간 운리방향으로 이동하는 목교 전경입니다. 


      ▼ 14:12(04h02m) 이름없는 폭포를 만나서 시원한 알탕을 즐깁니다. 



      ▼ 14:12(04h02m) 알탕지점 하류 방향 전경입니다. 


      ▼ 15:03(04h53m) 백운폭포 전경입니다. 이곳에서도 시원한 시간을 보냅니다. 



      ▼ 15:20(05h10m) 즐거운 알탕시간을 보내고 주차장 방향으로 이동 중입니다.

          비포장길이 끝나고 포장길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 15:21(05h11m) '등골나물'입니다.


      ▼ 15:23(05h13m) 계곡 위험을 알리는 대형스피커 타워가 백운계곡에 2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15:26(05h16m) 남명 조식선생이 자주 찾았다는 백운계곡에 대한 설명입니다. 


         (남명 조식(南남녁남,冥어두울명, 曺성조,植심을식)?) 

         조선 중기 이황과 함께 영남유학의 지도자였던 조선의 학자. 건중,

         호는 남명으로 1548년 전생서 주부를 시작으로 종부시 주부, 사도시 주부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됐지만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해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로 인해 명성이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고 정인홍, 하항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해 지리산 기슭에 산천재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 15:26(05h16m) 하산길 우측으로 풍부한 수량의 계곡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 15:26(05h16m) '용문천''용문폭포'라는 음각 한자어가 보입니다. 


      ▼ 15:27(05h17m) '남명선생장구지소'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지팡이장)屨(짚신구) 之所)?) 

         백운동 계곡의 백운 또한 “밝은”으로 보면 딱 어울린다.

         바위가 희어서 밝고, 골짜기가 양지쪽이라 밝고, 깎아지른 산이 그늘을 드리우면 음습할텐데

        그렇지 않아서 밝다.

         알다시피 이 밝은 골짜기는 남명선생이 자주 찾았던 곳이며,

         또「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 각자(刻字)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구지소(杖屨之所)는 지팡이[杖]와 짚신[屨]을 끌고와 놀던 곳이니,

         이름난 사람이 거닐던 자취를 가리킨다.

         가끔 구(屨) 대신 리(履)를 써서 장리지소(杖履之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구(屨)와 리(履)는 뜻(*신발)이 같아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관용적 표현은 장구지소였다.

         전국의 명승지에는 웬만한 곳에는 다 ‘누구누구杖屨之所’라 새겨져 있다.

         가까운 것으로는 법계사 옆 가짜 문창대에 ‘고운최선생장구지소’가 있고

         왕산에도 ‘농은민선생장구지소’가 있다.


      ▼ 15:28(05h18m) 백운계곡 곳곳에 소와 작은 폭포들이 즐비합니다. 


      ▼ 15:30(05h20m) 폭우시 계곡의 급류로 사고를 막기 위한 대피안내입니다. 


      ▼ 15:30(05h20m) 차량 통행이 가능한 곳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5:31(05h21m) 용문폭포 전경입니다. 



      ▼ 15:34(05h24m) 백운계곡을 찾은 각 단체들의 상징물들입니다. 


      ▼ 15:35(05h25m) 백운계곡 하류부분은 거의 사유지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 15:37(05h27m) 날머리 가까운 곳의 전경입니다. 



      ▼ 15:38(05h28m) 주차장에서 바라본 내려온 계곡 전경으로 오늘하루 산행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