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산/경북.가 ~ 사

2019.06.29(토) 사진으로 보는 경주 남산 산행일기

redstone5 2019. 7. 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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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산행은 경북 경주국립공원에 있는 남산의 고위봉(高높을고,位위치위,峰, 496.4m)과

      금오산(金쇠금,鰲자라오,山,466m)입니다.


      요즘 시기의 산행지는 산행도 중요하지만 산행 후 계곡을 따라 이동하면서 알탕과 더불어

      계곡치기를 할 수 있는 산행지가 최상의 산행지입니다.

      당초 이런 산행을 즐기기 위해 선정했던 산행지는 경북 청도의 남산으로, 산행이후 남산의

      계곡인 남산 13곡을 즐기기로 했지만,


      산행 당일인 6/29일의 일기예보는 남부지방에 오전부터 호남지역을 시작으로 점차 폭우가

      예상된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접한 후 대체 산행지를 찾았습니다.


      청도 남산의 경우 들머리인 밤티재에서 삼면봉으로 오르는 급한 경사길과 능선의 암릉은

      우천시 위험을 수반하고,

      남산 13곡은 좁고 긴 협곡으로 폭우시 대피가 어려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

      산행을 강행할 수가 없는 산행지였습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폭우를 동반한 비구름은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므로

      가능한 동쪽 지역의 산행지를 선정해야만 폭우를 피하거나 적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경북이나 경남의 동해안쪽 산이나 둘레길을 선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정한 곳이 위험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의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경북 경주국립공원의

      남산이었고,

      청도의 남산은 다음 맑은 날을 만날 때를 위해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폭우를 피해 동쪽으로 목적지를 바꾼 산행팀이 산행들머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가는 빗줄기가 시작되었으나,

      산행은 포기하지 못하고 가능한 안전한 등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길이 험한 이무기 능선길인 용장골 코스를 피해 이웃에 위치한 등로인 틈수골 옆의

      와룡동천길을 따라 산행이 시작되었고,

      산행 중에 다소 많은양의 빗줄기를 만났지만 무더위에 시원을 느끼는 산행이 이어졌고,

      폭우예보로 인한 타 산꾼들을 만날 수 없이 우리끼리 오붓한 산행이 이어졌습니다.


      아쉬웠던 부분은 우천으로 인한 시계불량으로 조망을 즐기지 못한 일이었지만,

      선경의 세계같은 운무 속에서의 꿈길같은 산행을 맛보았습니다.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해목령(蟹目嶺)·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1.5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산재해 있으며,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다.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현신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나라는 마침내 멸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이 특히 호국의 보루로서 존숭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산행 개요?)
      1. 산행날짜 : 2019.06.29(토)      날씨 : 비

      2. 산행시간 : 09시50분 ~ 15시37분(5시간47분)

      3. 이동, 도상거리 : 12.74km, 11.17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2.20km/h

                        휴식제외 : 2.38km/h

      5. 고도 : 528m ~ 91m(437m) : 최고봉이 496.6m이므로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5.96km, 2.08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6.66km, 2.68km/h

      8. 휴식횟수, 시간 : 1회, 25분(중식시간)

      9. 산행코스

          틈수골 ▷ 와룡저수지 ▷ 외룡사 ▷ 천룡사 ▷ 고위봉 ▷ 백운재 ▷ 이영재 ▷

          금오봉 ▷ 바둑바위 ▷ 상선암 ▷ 삼릉 ▷ 삼릉주차장


      ▼ 실 산행지도로 고위봉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이동코스입니다.


      ▼ 위성도에 나타낸 산행궤적 및 경주 부근 개략 지도입니다.


      ▼ 위성도에 나타낸 산행궤적으로 아래에서 시작하여 위쪽으로 이동 등로 현황입니다.


      ▼ 등고선지도에 나타낸 산행궤적으로 크게 가파른 오르내리막은 없습니다.


      ▼ 해발고도표로 첫봉우리가 고위봉, 두번째가 금오산 정상입니다.


      ▼ 09:34 활천인터체인지에서 내립니다.


      ▼ 09:49 들머리에 도착했습니다. 비에 젖은 '접시꽃'입니다.


      ▼ 09:49 '석류꽃'입니다.


      ▼ 09:50(00h00m) 산행 준비후 산행을 시작합니다. 약한 빗줄기가 시작됩니다. 


      ▼ 09:57(00h07m) 들머리에서 이동후 첫갈림길에서 좌측 방향 와룡동천길로 이동합니다.


      ▼ 10:01(00h11m) 와룡저수지 앞을 지나갑니다. 약한빗줄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10:02(00h12m) '끈끈이대나물'입니다.


      ▼ 10:03(00h13m) 들머리에서 약 500m를 이동했습니다. 고위봉까지는 2.45km가 남았습니다.


      ▼ 10:03(00h13m) 와룡사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10:06(00h16m) 산행 시작 후 700m를 이동했습니다.

          틈수골(闖모양틈,水물수,谷골곡)이란 지명은 천룡사가 있는 골짜기에서 흐르는 여울물이

          돌틈을 통해 항상 마르지 않고 흐른다고 해서 틈수골, 수동(水,洞마을동), 극수동(隙틈극,水洞)

          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이곳의 물을 마을의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 10:07(00h17m) 와룡사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와룡동천 비석입니다.

          와룡골은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와룡사가 들어서 있는 일대를

          말하고, 순산골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 10:08(00h18m) 와룡사 입구 전경입니다.


          (와룡사(卧누울와,龍용룡,寺절사)?)

          와룡사는 틈수골 와룡계곡에 자리하며 조용한 분위기에 묵언 좌선도량이다.

          창건연대는 불분명하지만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두 고승의 부도가 입구에 있다.


      ▼ 10:08(00h18m) 외룡사 입구의 비석으로 내용은

          와룡회상 적멸보궁(卧누울와,龍용룡,會모을회,上위상, 寂고요할적,滅멸망할멸,寶보배보,

          宮집궁)이란 글입니다.

          등로는 이 비석뒤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이동해야 합니다.


      ▼ 10:09(00h19m)  와룡사 전경으로 시간괸계상 탐방은 생략합니다.


      ▼ 10:09(00h19m) 들머리인 틈수골로부터 850m를 진행했습니다.


      ▼ 10:10(00h20m) 계곡을 건너는 철교를 만납니다.


      ▼ 10:14(00h24m) 첫 위치표시목으로 18번 등로는 와룡사에서 고위봉까지 등로입니다.


      ▼ 10:27(00h37m) 1번 위치표시목에서 옹달샘까지 급하지 않은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 10:39(00h49m) 완만한 오르막이 이곳까지 진행되고 운무 가득한 푸르름이 곱게 보입니다.


      ▼ 10:39(00h49m) 2번 위치표시목이 있는 곳 이후부터는 거의 평지길 같이 순한길입니다.


      ▼ 10:43(00h53m) 우천이지만 순한길로의 이동으로 여유로운 산행이 이어집니다. 


      ▼ 10:47(00h57m) 녹원정사 갈림길에서 천룡사 삼층석탑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10:49(00h59m) 산행시작 거의 1시간만에 망초 만방한 천룡사지의 넓은 공터에 도착합니다.


      ▼ 10:49(00h59m) 폐사지인 천룡사 발굴 현장입니다.


      ▼ 10:49(00h59m) 신라의 얼굴 이정표로 자세히 보면

          위쪽에는 →백운암  0.6km, ←와룡사 0.8km, 아래쪽에는 ↖관음사 1km이정표입니다.


      ▼ 10:50(01h00m) 폐사지인 천룡사 발굴현장 안내문입니다.


          (천룡사(天하늘천,龍용룡,寺)?)

          서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高位山) 정상 부근에 자리한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진 부모가 딸들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천룡사는 지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다.

          그것은 이 절이 계림(鷄林) 땅을 흐르는 한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의

          근원지에 있으면서 객수와 역수의 조화를 유지시키는 위치에 있고 그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를 아는 당(唐)의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는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신라 말기에 와서 어느 사이엔가 절이 폐사가가 되고 과연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신라시대에 천룡사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존숭되고 석가 만일도량

          (萬日道場)이 열릴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천룡사에서 열렸던 석가 만일도량에 관해서는 고려 때 최승로가 지은 글이 남아 있는데,

          10,000일이면 거의 30년에 해당하는 셈인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법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라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천룡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재상 최승로의 아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건한 이야기가 전하므로 고려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뒤의 역사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쉬움을 준다.

          현재 유일하게 옛 터에 남아있는 천룡사 삼층석탑은 본래 무너져 있던 것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발굴 조사하여 1991년 9월 25일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보물 제1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폐석탑이었던 이 탑이 복원되는 데는 용성(龍城) 스님의 유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용성스님은 호국호법도량 천룡사가 흥할 때 국가도 흥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나라

          8백년 국운과 불법 중훙을 위해 천룡사 복원을 제자 동헌 스님에게 부촉했다.

          그리고 동헌 스님으로부터 이 부촉을 이어받은 도문 스님은 20여년에 걸쳐 농가로 변한

          천룡사지 6만여 평을 구입하였다.

          축대석, 초석, 석당(石幢)의 귀부, 맷돌 등과 함께 폐탑의 부재들이 산재해 대가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빈터에서 석탑만이라도 먼저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기로 하고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이 주관하여 90년 11월 탑지 주변을 발론하고 91년 8월~9월에 복원 완공했다.

          이 탑에는 정영호박사가 기증한 4과의 세존 진신사리를 순은으로 된 2중 원통형사리병과

          백자로 된 사리함에 모셔 봉안했고, 호국호법 삼부경과 그외 경전과 소탑 및 순은판에 쓴

          석탑복원 연기문을 함께 모셨다고 한다.(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발췌)


      ▼ 10:51(01h01m)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폐사지 안내간판입니다.


      ▼ 10:51(01h01m)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로 귀부(龜거북귀,趺책상다리부)라고 합니다.

          귀부는 신라초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탑골공원의 대원각사터의 비와,

          경주 서악의 무열왕릉비가 있다고 합니다.


      ▼ 10:52(01h02m) 천룡사지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0:52(01h02m) 천룡사지 석조 유구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0:53(01h03m) 천룡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으로 아래에는 석탑 실물사진입니다.



      ▼ 천룡사지 삼층석탑?

          1989년부터 석탑자리를 비롯하여 주변을 발굴조사한 결과, 석탑의 위치·방향,

          그리고 묻혀 있었던 석탑재들이 확인되었으며, 이후 1991년 현재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석탑의 형태는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지대석 위에 2단의 높직한 굄대를 마련하고 기단 면석을 받았는데, 각 면석에는 양쪽에

          우주[隅柱: 모서리기둥]가 마련되고 가운데에는 1주씩의 탱주[撑柱: 받침기둥]가

          모각되었다.

          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각출되고 상면은

          경사가 없이 평평하며 2단의 높직한 각형(角形) 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1석씩으로 조성하여 올려놓았는데,

          각 층의 탑신석에는 양쪽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하면에 5단씩의 옥개받침이 각출되어 있고 낙수면은 평박하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반전이 있으며, 각 면의 합각(合閣)도 뚜렷하여 경쾌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 상륜에는 2단씩의 각형 굄을 각출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

          위에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煙)·보주(寶柱) 등이 차례로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에 꽂혀 있다.


          이 석탑은 전체 부재가 쓰러져 있던 것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수습 복원한 것으로,

          이때 초층탑신석 상면에 깊이 15cm, 직경 15cm의 둥근 사리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어 9세기를

          대표하는 석탑이라 할 수 있다.


      ▼ 10:53(01h03m) 최근에 지어진 천룡사로 중창 중에 있는 건물들입니다.


      ▼ 10:58(01h08m) 천룡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고위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 11:00(01h10m) 녹원정사로 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이동합니다.


      ▼ 11:01(01h11m) 새갓골주차장 방향 갈림길로 우리는 새갓골방향으로 이동합니다.

          틈수골 방향으로 이동해서 열반재에서 고위산으로 가는길도 있지만,

          우리는 새갓골 반향으로 이동하다가 천룡재에서 고위산으로 오르기로 합니다.  


      ▼ 11:02(01h12m) '작살나무꽃'입니다.


      ▼ 11:03(01h13m) '말나리'입니다.


      ▼ 11:05(01h15m) 천룡사지에서 약 8분정도 거리에 있는 또다른 천룡사입니다.

          고즈넉한 산사로 규모가 적지만 아담하게 보입니다.


      ▼ 11:06(01h16m) 이곳도 고위산 천룡사입니다.


      ▼ 11:06(01h16m) 천룡사 법당 전경입니다.


      ▼ 11:09(01h19m) 천룡사를 떠나 천룡재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1:12(01h22m) 위치표시목 07-04번을 지나서 좌측으로 진입합니다.

          07번 등로는 틈수골입구에서 고위봉까지의 등로입니다.


      ▼ 11:16(01h26m) 천룡재에서 고위봉 방향으로 숲길로 들어섭니다.


      ▼ 11:25(01h35m) 산길로 접어들고 보니 비법정탐방로입니다. 

          되돌아나올려니 비가 내리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냥 고위봉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 11:27(01h37m) 위험하지 않은 길을 따라 고위봉 정상으로 이동합니다.


      ▼ 11:27(01h37m) 고위봉 정상 직전 정상적인 등로에 접어들었습니다.

          이길은 백운재로 이어지는 길로 정상에서 중식후 다시 이길을 따라 이동해야합니다.


      ▼ 11:40(01h50m) 정상으로 이동하는 길 전경입니다.


      ▼ 11:43(01h53m)  산행시작 2시간이 되기전에 고위봉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 11:43(01h53m) 고위봉 정상석 뒷면입니다.


      ▼ 11:45(01h55m) 탐방로를 보면 틈수골에서 와룡사, 천룡사를 거쳐 백운암 전 천룡재에서

          고위봉으로  접근한 걸로 나타납니다.

          이어갈 등로는 고위봉에서 백운재, 이영재입구, 이영재, 용장골방향, 금오산으로향합니다.


      ▼ 11:45(01h55m) 국립공원내 음주행위 금지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1:45(01h55m) 약한 비 속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아직까지 많은 비는 아닙니다.


      ▼ 12:04(02h14m) 우천으로 인해 약 20분간의 점심식사를 끝내고 칠불암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2:10(02h20m) 운무로 조망은 꽝이지만 선경의 세계에서 노는 것 같습니다.


      ▼ 12:14(02h24m) 통일전 주차장 방향으로 이동을 계속합니다.


      ▼ 12:15(02h25m) 이동길은 그야말로 운무 가득한 순로입니다.


      ▼ 12:19(02h29m) 칠불암 1km전방 이정표로 등로 06은 고위봉에서 통일전주차장까지 등로입니다. 


      ▼ 12:23(02h33m) 현위치는 산정호수 갈림길인 백운재입니다.

          산정호수는 용장사지 부근의 산중턱에 만들어 놓은 호수를 말합니다.


      ▼ 12:24(02h34m) 백운재 이후 순로가 이어집니다.

      ▼ 12:25(02h35m) 칠불암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12:30(02h40m) 새갓골주차장 갈림길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2:30(02h40m) 숲속의 조용하고 걷기좋은 순로길이 이어집니다.


      ▼ 12:35(02h45m) 칠불암 갈림길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이곳부터는 봉화대 능선길로 이어집니다.


      ▼ 12:37(02h47m) 이동길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돌채송화'입니다.


      ▼ 12:37(02h47m)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慶州 南山 茸長溪 池谷 第3寺地 三層石塔)

          갈림길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다.

          201727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예고 절차를 거쳐,

          201747일 대한민국의 보물1935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2000∼2001년까지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선행한 후,

          석탑 부재를 모아 2002년에 복원하였는데 노반석 아래의 부재는 남아있는 원 부재를

          사용하였다.

          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에 관한 문헌기록이 없어 용장계지곡 삼층석탑이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인할 만한 근거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탑지 주변에서 '()'자명을 비롯한 9점의

          명문와가 출토되어 용장사(茸長寺)와의 연관성이 짐작된다.


          용장사지(탑상곡 제 1사지)에는 삼층석탑과 마애불좌상, 석불좌상이 전해오며,

          일대에 여러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곡 제3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을 통해서 이곳의 사찰이 통일신라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석탑지에서 주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편과 백자편 등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찰이 이어져 왔음을 말해준다.


      ▼ 12:48(02h58m)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았지만 운무로 제대로 된 조망이 없습니다.


      ▼ 12:53(03h03m) 이어지는 순로에는 올망졸망 바위들이 공깃돌처럼 흩어져있습니다.


      ▼ 12:55(03h05m) 약간 위험등로에는 데크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안전한 이동길이 됩니다. 


      ▼ 12:58(03h08m) 바위돌 올망조망한 이동길 전경입니다.


      ▼ 13:00(03h10m) 위치표시목 19-05번 목을 지나갑니다.

          19번 등로는 새깃골주차장에서 이영재로 이어지는 등로입니다.


      ▼ 13:07(03h17m) 금오봉 2.05km 전방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고위봉에서 중간 위치입니다. 


      ▼ 13:07(03h17m) 이영재까지 이어지는 봉화대능선길은 순로로 편한 이동길입니다.


      ▼ 13:20(03h30m) 용장마을 갈림길인 이영재에 도착합니다.

          이영재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13:21(03h31m) 이영재에서 금오봉 방향의 순로 전경입니다. 


      ▼ 13:24(03h34m) 이영재에서 365m봉으로 약간의 오르막 길입니다.


      ▼ 13:24(03h34m) 약간의 오르막 이후 수목우거진 순로가 이어집니다.


      ▼ 13:25(03h35m) 이영재 지나서 만나는 임도로 동남산순환로라고하며 포석정까지

          연결되는 등로입니다.(아래 안내도 참조)


      ▼ 13:26(03h36m) 임도상에 설치된 안내도로 현위치 이영재부근에서 금오봉으로 이동합니다.


      ▼ 13:26(03h36m) 동남산순환로는 통일전주차장과 포석정주차장을 연결하는 등로로

          중간에 금오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13:26(03h36m) 동남산순환로는 넓은 대로같이 길이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 13:40(03h50m) 삼화령에서 바라본 고위봉 방향 전경 안내도입니다.

          우리는 이무기능선 뒷쪽 계곡 등로로 고위봉에 올라 백운재를 거쳐 이곳까지 이르렀습니다.


      ▼ 13:41(03h51m) 삼화령(三석삼,花꽃화,嶺재령)에 관한 유래 설명입니다.


      ▼ 13:41(03h51m) 안내문 왼쪽 위쪽으로 보면 연화대가 위치하고 있던 바위가 보입니다.


      ▼ 13:45(03h55m) 현위치 용장골 입구에 설치된 탐방안내도 입니다.


      ▼ 13:45(03h55m) 용장골(茸무성할용,長긴장,谷골곡)에 관한 유래 안내문입니다.


      ▼ 13:46(03h56m) 용장사지 갈림길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용장사지(茸무성할용,長긴장,寺절사,址터지)?)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의 남산 용장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이다.

          일제강점기 '용장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와편이 발견되어 이곳이 용장사 터임이

          밝혀졌다.

          신라 때 유가종()의 고승 대현()이 이곳에 머물며 석조장륙상()

          주변을 돌았더니 불상도 그를 따라서 머리를 돌렸다고 하는 설화가 삼국유사()

          에 전하며, 조선 초기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금오신화()

          를 집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동서 70m, 남북 약 40m의 범위 안에 축대와 초석들이 산재하며, 동쪽 능선 위에

          용장사곡삼층석탑(보물 제186), 용장사곡석불좌상(보물 제187),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보물 제913) 등의 유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용장사지 [慶州茸長寺址] (두산백과)


      ▼ 13:46(03h56m) 이정표 활용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산행등로 : 백색글씨 이정표, 문화재안내 : 황색글씨 이정표 활용


      ▼ 13:48(03h58m) 운무 자욱한 등로를 따라 이동합니다.


      ▼ 13:54(04h04m) 넓은 길을 버리고 샛길을 이용하여 금오봉으로 이동합니다. 


      ▼ 13:58(04h08m) 샛길이지만 길은 반듯하게 잘 닦여져있습니다.


      ▼ 13:59(04h09m) 샛길 이동중에 만난 비파골의 전설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망덕사지는 경주 낭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불무사지는 비파곡 제4사지, 석가사는 비파곡 제3사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 14:04(04h14m) 금오봉/삼릉주차장 방향 샛길 이동 중 약수골 갈림길을 지나갑니다.


      ▼ 14:05(04h15m) 산행시작 4시간15분만에 금오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정상에 설치된 국가 측량기준점입니다.


      ▼ 14:05(04h15m) 정상에 설치된 탐방로 안내도입니다.

          좌측 틈수골에서 시작해서 삼릉으로 하산하는 푸른 점선이 오늘의 등로입니다.


      ▼ 14:05(04h15m) 정상에 설치딘 남산과 망산의 유래에 대한 글입니다.


      ▼ 14:05(04h15m) 비에 젖은 차림의 정상 인증사진입니다.


      ▼ 14:05(04h15m) 금오산 정상석으로 볼수록 글씨체가 멋지게 보입니다.

          이 글씨는 경주 출신의 서예가이신 남령(南嶺) 최병익선생의 글씨라고 하며,

          남령선생은 우리나라 추사체의 맥을 잇는 독보적인 서예가로 전국의 대찰 현판은 물론

          많은 작품활동을 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 14:09(04h19m) 금오산을 떠나 하산길인 상선암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14:10(04h20m) 상선암 방향길도 순로로 이동하기 좋은 길이 이어집니다. 


      ▼ 14:10(04h20m) 5번 등로는 금오산에서 하산지점인 삼릉주차장까지 등로입니다.


      ▼ 14:22(04h32m) 가파른 내리막에는 안전을 위해 데크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4:24(04h34m) 상사바위 전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운무낀 경주시내 방향입니다.


      ▼ 14:26(04h36m) 이곳 전망대에도 운무로 조망이 꽝입니다.


      ▼ 14:29(04h39m) 현위치 바둑바위전 상사바위로 상선암 바로 위쪽 현위치 표식입니다.


          (상사바위의 전설?) 

          경주시 남산동에는 아이들에게 저 바위가 무슨 바위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상사바위라고

          하는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국사곡 산정에 서 있다.

          그 바위에는 애닯은 이야기가 어려 있기에 상사바위라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옛날 국사곡 어귀에 외로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할아버지는 혼자 살았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참기 어려워 가끔 식구들 무덤으로 찾아가서 울었다.

          그래도 허전하긴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하였다.

          동리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맛있는 음식 등을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며 기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피리였다.

          어느 해 봄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시중을 들어 주던 피리가 없으니 못 견디게 쓸쓸하였다.

          다시는 못 올 줄 알면서도 피리를 기다렸다.

          어느날도 방안에 앉아 피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그리던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 '피리!' 하고 외치며 일어섰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있고, 이불을 쓰면 이불 속에 있고, 눈을 감아도 눈 속에 나타나서

          피리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다.

           '피리!'하고 할아버지는 크게 외쳐 보고는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처녀 피리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안되지? 안돼'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며칠 안가서 낙엽처럼 질 몸이 꽃봉우리같이 피어나는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짐해 봐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나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겠다는 욕심이 머리 속에서 쉴새없이

          싸우고 있건만 끝내 무서운 욕망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차지하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날 할아버지는 국사곡 산정에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메어 죽어 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후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몸부림을 치며 깨어나면 그것은 꿈이었으나 너무나 소름끼치는 무서운 꿈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리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를

          찾아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던 피리가 어느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나이를 아니먹는 바위가 되어

          원한 맺힌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하고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핏자국이라 한다.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


      ▼ 14:30(04h40m) 상사바위와 포속곡 제9사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상사바위 앞쪽의 위험으로 통행을 제한한 등로 앞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14:30(04h40m) 상사바위 위험지역에 대한 경고 안내문입니다.


      ▼ 14:32(04h42m) 상사바위 뒤쪽으로 우회하는 암릉 등로입니다.


      ▼ 14:33(04h43m)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 14:33(04h43m) 암릉등로에서 바라본 마애석가여래좌상 전경입니다.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

          1982224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광배형의 높이 7m, 너비 5m 되는 거대한 자연 암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앉은

          모습의 석가여래상()이다.

          남산의 좌불()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전체적인 느낌은 바위 자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 조각되어 있는

          불상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과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다.

          대좌의 연꽃은 2겹으로 피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곳에 있는 다른 불상들의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 불상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준다.

          , 눈은 가늘고 코는 길며, 입술은 매우 두꺼워서, 얼굴 모습이 투박하고 소박한 지방

          양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옷은 통견()으로 옷주름이 가늘게 선각되었다.

          몸체 뒤에는 다소 굵게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었다.

          머리만 사람이 조각을 했을 뿐 몸 전체는 천연의 바위 그대로 두었다.

          , 몸체에서는 인공적 가공을 생략하고 선각()으로 손발을 그림으로써 주위의

          바위산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머리부분과 몸부분이 각각 다른 시기에 조각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 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그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머리 부분은 8세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선각으로 처리된 몸부분은

          9세기의 기법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 14:37(04h47m)  등로상에 나타난 바둑바위로 산중 우체통이 이색적입니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입니다.


      ▼ 14:37(04h47m) 바둑바위에 설치되어있는 조망도이지만 운무로 지척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 14:43(04h53m) 상선암 갈림길에서 상선암/삼릉주차장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하산길에 접어듭니다.


      ▼ 14:45(04h55m) 상선암 100m전방 이정표입니다.

          날머리인 삼릉주차장까지는 1.7km가 남았습니다.


      ▼ 14:47(04h57m) 상선암 전경입니다.


      ▼ 14:48(04h58m) 상선암내에 있는 선각보살상 조각입니다.


      ▼ 14:48(04h58m) 선각보살상 실물 조각입니다.


      ▼ 14:49(04h59m) 상선암 법당 전경입니다.

          상선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라고 합니다.


      ▼ 14:57(05h07m) 산행 시작5시간을 지나면서 위치표시목 05-03목을 지납니다.


      ▼ 15:04(05h14m) 하산길에 만난 제6사지 유적이지만 등로에서 떨어져 있어 안내문으로만

          참조하고 지나옵니다.


      ▼ 15:05(05h15m) 석조약사여래좌상 방향 이정표입니다. 삼릉주차장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15:09(05h19m) 말라있을 계곡에는 우천으로 인해 물줄기가 생겼습니다.


      ▼ 15:10(05h15m) 날머리인 삼릉주차장까지는 약 1.1km가 남았습니다.


      ▼ 15:14(05h24m) 등로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는 선각육존불 안내지만 시간관계상 패스합니다.


      ▼ 15:15(05h25m) 날머리인 삼릉주차장까지는 약 900m가 남았습니다.


      ▼ 15:18(05h28m)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으로 목이 없는 상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15:18(05h28m) 석조여래좌상 실물 사진입니다.


      ▼ 15:19(05h29m) 위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상세 설명입니다.


      ▼ 15:19(05h29m)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애관음보살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 15:22(05h32m) 위치표시목 05-01번으로 마지막 위치표시목입니다.


      ▼ 15:25(05h35m) 삼릉곡 제1사지에 대한 탑재와 불상 설명입니다.


      ▼ 15:25(05h35m) 탑재와 불상 실물 전경입니다.


      ▼ 15:25(05h35m) 날머리 이동길 전경으로 삼릉직전입니다.


      ▼ 15:26(05h36m) 날머리인 주차장 550m전방입니다.


      ▼ 15:27(05h37m) 국립공원 날머리 계수기를 지나갑니다.


      ▼ 15:27(05h37m) 유적지로 가득한 삼릉계곡 문화유산 설명입니다.

          ① 탑재 및 불상, ② 석조여래좌상, ③ 마애관음보살상,  ④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⑤  삼층석탑터, ⑥ 석조여래좌상, ⑦  선각여래좌상, ⑧  약사여래좌상터,

          ⑨ 마애선각여래좌상, ⑩ 선각보살입상, ⑪ 석조여래입상, ⑫ 마애여래좌상입니다.


      ▼ 15:28(05h38m) 공원알림판의 이정표 활용방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 15:28(05h38m) 삼릉 직전의 탐방로 안내도입니다.


      ▼ 15:28(05h38m) 운무속의 소나무 우거진 삼릉 전경입니다.


          (삼릉?)

          사적 제219호. 남산(南山)의 서쪽에 동서로 세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불리고 있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능으로 전하고 있다.

 

          아달라이사금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왕릉소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달라이사금의 원손(遠孫)인 신덕왕은 『삼국사기』에서는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화장해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또, 신덕왕의 태자로서 왕위를 이은 경명왕은 『삼국사기』에서는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황복사에서 화장해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덕왕릉이나 경명왕릉의 위치는 불분명한 상태이고, 게다가 신라 초기의

          아달라이사금과 700여 년이나 시간적 간격이 있는 하대 신덕왕과 경명왕의 능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보기도 어려워서 이 삼릉이 앞의 세 왕의 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 고분 모두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규모와 비슷하나 아무런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고, 현재 놓여 있는 3개의 상석도 모두 최근에 만들어놓은 것이다.

          신덕왕릉은 1935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도굴을 계기로 내부가 조사되었다.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서 평면은

          사각형에 가깝고, 궁륭형(穹窿形) 천장으로 되어 있는 널방은 자연괴석(自然塊石)으로

          축조되었다.

          널방의 남벽 가운데는 널길이 달렸고 널방과 널길 사이는 판석(板石) 2매로 된 널문으로

          막았다.

          널방 각 벽면의 길이는 3.04∼3.09m이고, 널방 바닥에서 천장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3.91m이다. 널길은 전체 길이 2.2m, 너비 1.2m이다.

          널방 바닥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높이 35㎝의 방형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께 5㎝ 가량의

          판석 2개를 남북으로 놓아 주검받침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 고분은 두 사람의 시신이 동서방향으로 봉안된 어울무덤[合葬墓]이라 할 수

            있다.

          널방과 널길의 모든 벽면과 천장 그리고 주검받침의 측면에는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이 고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북벽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연속해 마치 병풍을 돌려세운

          것처럼 채색된 벽화가 있는 것이다.

          입구에서 볼 때, 정면인 북쪽 벽면에 6폭, 그리고 그 좌우로 연속해 동서 벽면에 각각 3폭씩

          모두 12폭으로 된 채색면이 있다.

          높이는 1.4m이며 이를 다시 각 폭마다 상하로 양분해 모두 24면으로 구분하였다.

          24면의 각 면에는 다른 문양이나 그림은 없이 주(朱)·황(黃)·백(白)·군청(群靑)·감청(紺靑)

          등 5색으로 구별해 순서 없이 배색하였다.


      ▼ 15:30(05h40m) 남산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글입니다. 


      ▼ 15:30(05h40m) 날머리인 삼릉주차장까지는 300m가 남았습니다.


      ▼ 15:31(05h41m) 삼릉전경입니다.


      ▼ 15:32(05h42m) 산행 마지막 이정표입니다.


      ▼ 15:35(05h45m) 삼릉탐방지원센타를 마지막으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