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의 조계산은 여러차례 방문한 곳이다.
산을 다니기 전에는 가족들과 혹은 직장 동료들과 여행지로 많이 찾았고,
많이 온 만큼 이곳에서의 추억이 많은 편이다.
산을 다닐 때에도 선암사를 들머리로 아니면 송광사를 들머리로 하여 거의 코스를 섭렵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다닌 곳이다.
당초 A,B코스로 산행 계획을 세웠을 때에도 오랜만에 쌍향수가 있는 천자암 쪽으로 택할까도
고민했었지만 코스가 통합되면서 또다시 이 코스로 산행하게 되었다.
(조계산 개략)
높이 884m.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영암의 월출산(月出山)과 삼각형을 이룬다.
산 전체가 활엽수림으로 울창하고 수종이 다양하여 전라남도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동쪽 사면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순천을 경유하여 남해로 흘러 들어가는 이사천(伊沙川)과
합류되고, 서쪽 사면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송광천(松光川)으로 흐른다. 고온다습한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는 애칭이 있는 명산이다.
동쪽 사면에 선암사(仙巖寺), 서쪽 사면에 송광사(松廣寺)가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계곡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 있을 뿐만 아니라 비룡폭포(飛龍瀑布)와 같은 이름난 폭포도 있다.
송광사 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로서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 법보사찰
(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 등과 함께 삼보사찰에 해당하는 승보사찰(僧寶寺刹)로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다.
조계산이라는 이름도 조계종(曹溪宗)의 중흥도량 산으로 되면서 송광산에서 개칭된 것이다.
6·25 전에는 80여동 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60여 동이 있다.
큰 가람답게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43호)·송광사국사전
(국보 제56호) 등 3점의 국보, 송광사경패(松廣寺經牌, 보물 제175호)·송광사하사당(보물 제263호)·
송광사약사전(보물 제302호)·송광사영산전(보물 제303호) 등 12점의 보물, 8점의 지방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88호인 곱향나무 쌍향수가 천자암 뒤쪽에 있다.
송광사 일대는 연산봉을 비롯하여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송광사 내팔경(內八景)과 외팔경이 정해져 있을 정도이다. 송광사 부근에는 말사(末寺)인
광원암(廣遠庵)·감로암(甘露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있다.
산 남쪽에는 높이 800m의 선암(仙巖)이 있다.
동쪽 사면에는 선암사를 중앙에 두고 주위에 향로암(香爐庵)·선조암(禪助庵)·대각암(大覺庵)·
운수암(雲水庵)·청련암(靑蓮庵)·대승암(大乘庵) 등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6·25 이후 대부분
소실되거나 폐암(廢庵)되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 하며, 현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표적인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는 사찰이다.
선암사 경내에 이르는 길의 조계산 계류에 놓인 승선교(昇仙橋)는 하나의 아취로 이루어진
석교로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었으며, 강선루(降仙樓)와 어울린 그림 같은 모습은 선암사의
상징이다.
선암사삼층석탑은 보물 제395호이며, 그 밖에 300년 된 산철쭉과 영산홍·고목동백·왕벚꽃·
목련·부용·구봉화·화염물상봉 등의 아름다운 꽃밭,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화도 일품이다.
송광사 지역의 별미는 산채라고 할 수 있으며, 곡우를 전후하여 마시는 고로쇠약수는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물로 유명하다.
수려한 조계산의 경관과 명찰을 찾아 선암사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등산로에는 많은 등산객이
전국에서 노여든다.
앞으로 월출산·무등산 등과 함께 전라남도의 명산으로, 국민관광지로서의 본격적인 개발이
기대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산행 개요)
1. 산행날짜 : 2014.11.08(토) 날씨 : 흐리고 비
2. 산행시간 : 10시35분 ~ 16시10분(5시간 35분)
3. 이동, 도상거리 : 14.8km, 13.8km/h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2.57km/h
휴식제외 : 2.89km/h
5. 고도 : 906m~ 179m(727m) - 장군봉 최고 높이가 884임을 감안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7.25km, 2.52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6.93km, 3.06km/h
8. 휴식횟수, 시간 : 1회, 35분 정도
9. 산행 코스
선암사주차장 ~ 승선교 ~ 선암사 ~ 대각암 ~ 장군봉 ~ 연산봉 ~ 송광굴목이재 ~ 송광사
~ 주차장
▼ 위성에서본 산행 궤적입니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한 궤적입니다.
▼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한 등고선 궤적입니다.
▼ 산행 고도표입니다. 좌측 높은 곳이 장군봉이고 우측 우뚝솟은 곳이 연산봉입니다.
▼ 선암사 주차장의 단풍입니다. 아직 가을색을 입은 나무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 주차장 옆에 가을색을 뽐내고 있는 은행나무 한그루입니다.
▼ 산행안내를 듣고난 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합니다.
▼ 순천 남도 삼백리길 안내 표지판입니다.
▼ 들머리 입구에서 뒤돌아본 주차장 전경입니다. 가을을 맞아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 들머리에서 좌대를 펴고 동네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가을색에 물들은 단풍잎입니다.
▼ 선암사 매표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 선암사의 역사에 관한 안내글입니다.
▼ 선암사 당우 배치도입니다.
(선암사 개략)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
갓 부화한 물고기의 여린 몸뚱이처럼 야들야들한 신록으로 조계산이 물들기 시작하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절 곳곳에는 벚꽃이며 목련·모란·앵두·모과·철쭉·영산홍·동백·상사화·
옥잠화·치자·파초·부용 등 갖가지 화초와 꽃나무가 잇달아 피어난다.
화훼전시장인 양 그 빛깔과 모습들이 다채로운데, 고풍이 흐르는 전각들과 어울린 분위기는
화려하기보단 새악시 볼에 번지는 분홍색 부끄럼처럼 조신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처였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신라에 한창 불법을 전하던 아도화상이 어느새 이웃나라인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국내외 여러 종파의 불교사상을 두루 익혀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조금씩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 (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 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 동만이 남아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매표소를 통과해서 지나갑니다.
▼ 선암사 가는 길목에서 가을색의 단풍들입니다.
▼ 선암사 입구에 있는 삼나무 군락입니다.
삼나무는 수피가 적갈색이고 세로로 길고 가늘게 갈라진다.
가지가 많이 나오고 수평으로 퍼진다. 잎은 짧은 바늘모양으로 나선상으로 달린다.
모가 지고 단단하며 끝이 날카롭다. 길이 12~25mm 정도로 윗부분에 것은 짧다.
가지가 고사해도 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암수한그루로서 3월에 꽃이 핀다.
가지 끝에 여러 개의 수꽃이 타원 모양으로 달리고 길이 10mm 정도이며 황색이다.
암꽃은 가지 끝에 1개씩 달리고 구형이며 녹색이다.
구과는 10월에 익으며 둥글고 길이가 2~3cm, 지름이 16~30mm 정도이다.
솔방울 조각은 두껍고 단단하며 끝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갈라져 있다.
종자는 각 조각에 3~6개씩 들어 있으며 둘레에 좁은 날개가 있다.
수형이 원뿔 모양이 되는 것이 특징이다.
새로 돋는 잎이 황금색을 띄는 것을 황금삼나무라 한다.
일본이 원산지인 상록침엽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경남, 전남 등지에 조림수종으로
식재되고 제주도에서는 방풍림으로 많이 식재되었다.
볕이 잘 들고 강우량이 많은 곳을 좋아하고 내한성과 내공해성이 약하다.[네이버 지식백과]
▼ 산행안내도입니다. 우리의 산행 코스는
선암사도립공원관리사무소 → 선암사 → 대각암 → 장군봉 → 접치 정상 → 장박골 삼거리 →
연산사거리 → 연산봉 → 송광굴목재 → 송광대피소 → 송광사 → 송광사 주차장 순입니다.
▼ 선암사 가는 길목 좌측 계곡에는 가을이지만 흐르는 물의 수량이 제법됩니다.
▼ 승선교 못미쳐 조계산 선암사라는 사면기둥이 좌측에 서 있고....
▼ 우측에는 선교양종대본산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습니다.
(선교양종이란?)
조선조(朝鮮朝) 세종대(世宗代)에서부터 명종대(明宗代)에 이르기까지 존속했던 불교계
전체를 포함하던 종파명(宗派名)인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말함.
혹독한 배불정책(排佛政策)을 폈던 조선조는 태종대(太宗代)부터 불교 종파의 통폐합과
축소를 단행하였다.
먼저 태종 7년(1407)에 종래 11종(宗)이던 종파를 7종(宗)으로 통폐합시켰는데,
당시 11종(宗)은
조계종(曹溪宗)ㆍ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ㆍ법화종(法華宗)ㆍ총지종(摠持宗)ㆍ남산종
(南山宗)ㆍ화엄종(華嚴宗)ㆍ도문종(道門宗)ㆍ자은종(慈恩宗)ㆍ중도종(中道宗)ㆍ신인종
(神印宗)ㆍ시흥종(始興宗)이었다.
이 가운데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화종(法華宗)을 합쳐 천태종(天台宗)으로,
총지종(摠持宗)과 남산종(南山宗)을 합쳐 총남종(摠南宗)으로,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
(神印宗)을 합쳐 중신종(中神宗)으로 만들고 도문종(道門宗)은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계종ㆍ천태종ㆍ총남종ㆍ화엄종ㆍ자은종ㆍ중신종ㆍ시흥종의 7종이 된 것이다.
이 7종은 다시 세종 6년 (1424)에 예조(禮曹)의 계청(啓請)에 따라 선종과 교종 두 종파로
축소되었다.
즉 조계ㆍ천태ㆍ총남 3종이 합쳐져 선종이 되고, 화엄ㆍ자은ㆍ중신ㆍ시흥 4종이 합해져
교종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종파의 통폐합 및 축소는 불교계에 여러 측면에서 큰 타격이 되었다.
우선 태종의 종파 통폐합 때에도 그러했지만, 7종에서 2종으로의 종파 축소시에도 양종에
소속될 사찰 및 승려 수와 전답이 극도로 제한되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해 버렸다.
이때 선종에는 전국에 사찰 18개소, 전답 4,250결(結), 승려 1,970명만이 소속되었고,
교종 역시 사찰 18개소에 전답 3,700결과 승려 1,800명만 남김으로써, 조선 불교종단은
결국 그 세력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국가 정책에 의한 종단의 통폐합은 종단 자체 내부에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즉 종지(宗旨)와 종조(宗祖) 종전(宗典) 등 성격이 서로 다른 종파들을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통폐합시킴으로써, 하나의 종파로 운영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같은 어려움을 안고 출발한 선종은 흥천사(興天寺)를, 교종은 흥덕사(興德寺)를 각각
도회소(都會所 : 총본산)로 삼아 종무를 별도로 집행해 나갔다.
이후 이 선교 양종은 나란히 존속되었으나 여러 차례 심한 억압과 배척을 당하여 간신히
종단의 명맥을 유지해 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주로 조계종 계통에서 유능한 인물들이 나와 법맥(法脈)을 이어갔기
때문에 교종보다는 그 교세가 좀 우세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에 의해 종단이 선교 양종으로 축소된 이후, 성종(成宗) 때에 척불정책(斥佛政策)이
심하였으나 그래도 양종과 승과(僧科)제도는 형식적이나마 존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시에는 그나마 거의 폐지된 상태나 다름없었고, 연산군에
의해 성내(城內)의 큰 절들과 함께 그들의 도회소마저 잃게 된 선교 양종은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에 머물면서 겨우 종단의 명맥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종(中宗)이 즉위하고는 승과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됨으로써 양종은 유명
무실하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선종과 교종이라는 그 이름마저 잃고 말았다.
그 후 명종 5년(1550) 12월에 당시 섭정(攝政) 문정대비(文定大妃)에 의하여 선교 양종은
다시 부활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선종은 봉은사(奉恩寺)를 본사(本寺)로 하여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65)를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 주지(判禪宗事都大禪寺奉恩寺住持)로 삼고,
교종은 봉선사(奉先寺)를 본사(本寺)로 하여 수진(守眞)을 판교종사 도대사 봉선사 주지
(判敎宗事 都大師 奉先寺 住持)로 삼아 한동안 양종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 문정대비가 별세하자 곧 양종제도 또한 폐지되었고, 이로써 선종과
교종이라는 종단 이름은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 정책에 의해 결국 선교 양종은 이름마저 박탈되어 종(宗)도 없고 파(派)도
없는 산승(山僧)의 불교가 되고 말았지만, 양종에서는 여전히 유능한 인물들이 출현하여
법맥을 이어갔는데, 특히 선종에서 적지 않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암흑기를 딛고 일어서서 그 이후의 불교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벽송 지암(碧松智巖, 1464~1534), 부용 영관(芙蓉 靈觀,1 485~1571),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등은 모두 조계종계(曹溪宗系) 선종의
인물들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부도탑군입니다.
▼ 부도중에 화산대사 사리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화산대사 부도(높이 4.1m)로, 사자 네 마리가 비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전남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8호, 8세기 중엽 작품)이나 충북 제천
빈신사터사사자석탑(보물 제94호, 1022년 작품)을 닮았다.[네이버 지식백과]
▼ 은은한 가을색이 빼어납니다.
▼ 입구에 서있는 목장승입니다.
▼ 선암사에서 유명한 승선교(昇仙橋)입니다.
(승선교(昇오를승,仙신선선,橋다리교)
보물 40호로 지정된 승선교는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 (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 보물 400호인 승선교 지명석(指名石)입니다.
▼ 승선교 바로 위의 강선루(降仙樓)입니다. 신선이 내려온다는 뜻의 누각입니다.
(강선루(降내릴강,仙신선선,樓다락루))
조계산 선암사의 문루(門樓) 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이고, 위층은 가늘고 낮은 기둥을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위층에는 계자난간이 둘러져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문을 일주문 안쪽에 두는 데 반해 선암사의 경우 누문을 일주문 밖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이채롭다.
선암사의 실질적인 경역이 바로 강선루에서부터 시작된다.[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부근은 전체가 가을색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 선암사삼인당(仙巖寺三印塘)과 어우러진 가을색입니다.
(선암사 삼인당(三석삼,印도장인,塘못당))
1980년 6월 2일 전라남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862년(경문왕 2) 도선(道詵:827~898)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인데, 이 안에 섬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안에 있는 섬은 ‘자이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를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연못의 명칭에서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장타원형으로 장변과 단변의 비율이 2.2대 1이다.
연못 안의 섬은 난형으로, 장변 11m, 단변 7m이며, 난저부 가까이 4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연못의 내부에 흙이 차고 석축이 좋지 않아 1996년 민간단체인 순천전통문화보존회에서
복원공사를 하였다.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연못 양식으로,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불국사의 구품연지(九品蓮池)와 통도사(通度寺)의 구룡지(九龍池)는
타원형 연못이다.
하지만 모두 정형적인 정타원형의 윤곽선을 가지고 있다.
또 구룡지는 중앙에 가로지른 다리가 놓여 있는데, 구품연지의 형태를 이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선암사의 삼인당은 조성연대가 이보다 훨씬 앞선 신라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삼인당을 지나 선암사 일주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 선암사 일주문입니다.
(선암사 일주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정면 1칸인 맞배지붕 겹처마집으로 서까래와 부연(副椽)을
한 다포식이다.
앞에 9개의 돌계단을 설치하고 그 좌우로 용두(龍頭)와 비슷한 석상을 조각한 이 건물은,
다듬은 돌초석에 기둥은 민흘림의 기둥을 세우고 전후로 보조기둥을 세우도록 되어 있으나
위로부터 30㎝ 중간에서 보조기둥을 절단하였다.
이는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기둥 양편에 설치된 담장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둥 위로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배치하고 그 위로 공포가 결구되었는데,
출목수는 외4출목, 내2출목으로 중앙에 3구(軀)의 공간포와 역시 측면에도 1구의
공간포를 가구하였다.
또, 내부는 좁은 천장인데 공간에 첨차(檐遮)를 부착, 외부와 내부에서 포의 균형미를
꾀하였다.
그리고 양 기둥 위인 주두에 꼬리를 두고 서로 중앙을 향하여 곧 구름의 조화를
일으킬듯한 용두를 조각하여 승(僧)과 속(俗)의 경계에 위엄을 더하고 있다.
전면에 종서로 된 ‘曹溪山仙巖寺(조계산선암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유재란의 병화를 입지 않았다는 사전(寺傳)에 의해 건립시기는 조선 후기로
보인다.[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밑으로 난 이동로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太古叢林曹溪山仙巖寺(태고총림조계산선암사)"란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 선암사 대웅전입니다.
(선암사 대웅전)
1974년 9월 24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6월 8일
보물 제1311호로 격 지정되었다.
875년(헌강왕 5) 선암사의 창건 당시 함께 건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0년(현종 원년) 경잠(敬岑)·경준(敬俊)·문정(文正)의 3대사가 주동이 되어 중건하였다.
1766년(영조 42) 재차 화재를 만나, 1824년(순조 24) 재중건하였다.
대웅전은 선암사 가람(伽藍) 배치의 중심에 해당하는 건물로, 일주문(一柱門)과 범종루를
잇는 중심선에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높직하게 다듬은 돌의 기단에 원형주춧돌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단청을 하였는데, 문양이 지금도 선명하다.
건축양식은 기와집으로 외3출목, 내4출목의 다포식이다.
외공포의 살미첨차 끝은 앙서로 되어 있고, 연봉을 조각하였다.
내공포는 초제공부터 삼제공까지 하나의 판형을 이루고, 연봉을 조각하였다.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 준다.
《선암사사적기(仙巖寺寺蹟記)》에 따르면 542년(진흥왕 3) 아도(阿道:?~?)가
비로암(毘盧庵)으로 창건하였던 것을 875년(헌강왕 5) 도선(道詵:827~898)이 창건하여
선암사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이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다.
특히 이 절은 선종·교종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삼층석탑입니다.
높이 4.7m. 보물 제395호.
대웅전 앞에 동서로 건립된 2기의 석탑 중의 하나로 2층기단 위에 건립된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중석(中石)을 한데 붙여서 짰고 중석 각 면에는 우주
(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 하나씩을 새겼다.
갑석(甲石)은 윗면에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그 상하에 각형(角形)을 붙인
3단의 굄이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하나씩 모각(模刻)되었고, 밑에 부연(副椽 :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으며, 윗면은 약간 경사진 가운데 하층기단
갑석에서와 같은 형식의 3단 탑신굄이 있고 추녀가 약간 반전되었다.
탑신부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씩이며, 각 층 옥신에는 우주형이
모각되었으나 장엄조각은 없다.
옥개석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받침수는 각 층 4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각각 각형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는데, 석재들은 원래의 부재가
아니다.
이 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상하기단의 탱주수가 하나로 줄고 옥개석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씩으로 감축되어
건립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네이버 지식백과]
▼ 선암사 불조전(佛祖展) 전경입니다.
순천 선암사 불조전은 정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사역내의 여러 전각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건립된 조선후기 건물로 건립 연대에 관한 자료가 확인되고
가구는 보조가구재를 채용하여 구조적 안정성을 증대시켰고,
공포는 출목익공의 중요한 사례로써 사내 다른 전각의 것과 함께 건축학적으로 충분한
연구가치가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선암사 650년 된 와송 부근 전경입니다.
▼ 선암사 해우소 전경입니다. 한창 보수공사 중이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는 사찰의 해우소를 노래하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화장실을 이토록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문학작품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 싶다.
선암사의 해우소는 400년 역사의 하나의 문화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선암사를 둘러보고 장군봉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선암사 해우소 앞을 통과하여 대각암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선암사를 벗어나면서 바라본 선암사 전경입니다.
▼ 선암사를 벗어나 대각암으로 가는 길 우측에 있는 마애불인데 보수공사중인가 봅니다.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높이 17M,
넓이 2M에 이르는 마애불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마애불을 지나 대각암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주위는 가을색을 듬뿍 칠해져 있습니다.
▼ 대각암 전경입니다. 시간관계상 둘러보지는 못하고 지나쳐 갑니다.
대각암은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대각암에는 대각암 부도가 있다고 합니다. 다음 기회에는 대각암과 비로암으로.....
▼ 대각암을 우측으로 끼고 잠시 오르니 비로암과 우리가 가야할 장군봉으로 나뉘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비로암은 조그마한 암자로 백제 성왕 7년(528년)에 아도화상이 지금의 조계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청량산 해천사라 하였고. 후에 조계산 비로암으로 개칭하였으며,
선암사의 모태가 된 암자라고 합니다.
▼ 우측에 대각암 옆길로 지나갑니다.
▼ 대각암 옆길로 지나자 마자 제법 가파른 오르막으로 이어집니다.
▼ 아직 빛을 잃지 않은 가을색이 연이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 폐사지를 만납니다. 둘러봤으면 하는 마음만 가지고.....
▼ 가을색들이 멋진 향연을 벌리고 있습니다.
▼ 폭이 좁은 너덜길도 만나 지나갑니다.
▼ 넓은 평지의 안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기로 합니다.
▼ 중식장소로 잡은 곳입니다.
▼ 모두가 모여 앉아 산행 중 제일 기다리던 점심시간입니다.
▼ '산수국' 입니다. 꽃은 지고.....
▼ 고목 틈에 자라는 덩굴식물의 파란잎이 여리게 보입니다.
▼ 나무의 생김새가 하도 재미있어서..... 거꾸로 뒤집어서 상상해보시길.....
▼ 중식후 장군봉을 향해 길을 이어갑니다.
▼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중식장소입니다.
▼ 중식후 장군봉까지는 급한 경사길로 이어집니다.
▼ 장군봉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선암사 방향에서 올라와 장박골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장군봉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 장군봉 정상에 있는 돌무더기입니다.
▼ 장군봉 정상에서 바라본 우리가 진행해야할 연산봉 방향에는 운무로 자욱합니다.
▼ 가파르지는 않지만 오르막 내리막 계단이 이어서 연결됩니다.
▼ 능선을 휘돌아가는 길에는 수북히 쌓인 낙옆길도 있습니다.
▼ 도립공원이라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 접치 정상쪽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장막골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송광사방향, ↑접치 방향, 우리가 지나온 선암사 방향 →)
우리는 송광사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산죽길이 제법 길게 이어집니다.
▼ 헬기장을 통과합니다.
▼ 장박골 삼거리를 향해 내리막 계단길을 이어갑니다.
▼ 장박골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송광사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육산이라 길은 유순하고 걷기좋은 힐링 산길입니다.
▼ 연산4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연산봉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헬기장이 있는 연산봉에 도착했습니다.
▼ 851m 연산봉 정상석입니다.
▼ 연산봉을 뒤로하고 송광굴목이재를 향해 이동을 시작합니다.
▼ 송광굴목이재 직전 산죽길을 통과합니다.
▼ 송광굴목이재에 도착했습니다.
▼ 송광굴목이제 4거리입니다.
(← 선암사 방향, ↑ 쌍향수가 있는 천자암 방향, → 송광사 방향, ↓ 지나온 연산봉 방향)
▼ 송광사까지는 2.5km남았습니다.
▼ 송광굴목이재에서 송광사쪽으로 급한 하산길이 어느정도 이어집니다.
▼ 하산시간에 제법 빗방울이 굶어집니다. 너덜길이 이어집니다.
▼ 대피소 건물입니다. 조계산에 대피소가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우천시에는....
▼ 하산길 첫번째 계곡을 건너는 목교입니다.
▼ 계곡에는 수량이 적어 시냇물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 송광사 입구에 설치된 교량인데 이곳에 설명판이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안내표시가 쉽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송광사방향으로 길을 이어 나갑니다.
▼ 송광사에서 장군봉으로 굴목이재를 거치지 않고 오르는 길 삼거리입니다.
▼ 송광사 입구 우화각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건물 설명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왜 이곳에 있는지..
▼ 계곡을 건너는 시멘트길위에 뿌려진 가을 낙엽이 눈에 들어옵니다.
▼ 가을의 막바지를 보내는 길을 이어갑니다.
▼ 실물을 보니 도저히 대들보늪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 대나무 아래로 보이는 보소(褓沼)의 실물 크기입니다.
▼ 홍골에 대한 유래 설명판입니다.
▼ 홍골 설명판 맞은편의 조그마한 폭포전경입니다.
▼ 송광사로 향하는 하산길 두 번째 목교를 지나갑니다.
▼ 하산길 송광사 직전 시멘트 교량을 지나갑니다.
▼ 노랗게 물든 단풍잎이 멋지게 보입니다.
▼ 송광사 뒤편 천자암으로 가는 삼거리를 통과합니다.
▼ 만추의 색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산사입니다.
▼ 송광사에서 기르는 배추밭의 규모입니다. 밭 좌측끝으로로 천자암 가는 길이 있습니다.
▼ 송광사 직전 가을색 뛰어난 곳에서 산객들이 촬영에 여념이 없습니다.
▼ 송광사로 들어가는 교량인 우화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 삼청교와 우화각 전경입니다.
(삼청교와 우화각)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다리(삼청교)와 그 위에 지은 건물(우화각)이다.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고도 한다.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중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그 뒤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거쳤다.
삼청교 위에 지어놓은 우화각은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만든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옆면에서 볼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을 올렸고, 나가는 쪽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나가는 쪽
의 지붕이 옆 건물과 가까이 닿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본다.
비록 웅장한 모습은 아니나, 두 유물이 다리역할도 하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도 하는
2중 효과를 보이고 있다.
▼ 가을철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 가을색이 제일 멋진 것 같았습니다.
▼ 입구 방면에서 바라본 삼청교와 우화각 전경입니다.
▼ 삼청교 아래의 조그마한 연못 전경입니다.
▼ 입구쪽에서 바라본 우화각과 삼청교 앞 전경입니다.
▼ 척주당과 세월각 전경입니다.
이들 건물은 죽은 자의 위패를 모시고 죽은 자의 혼을 실은 가마인 영가의 관욕처로서
사용되는 전각이다.
영가가 사찰에 들어오기 위해서 남자의 영가는 척주각에서 여자의 영가는 세월각에서
각각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해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건너기 전에 작은 건물 두채가 나란히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우화각에서 바라본 윗쪽 개울 모습입니다.
▼ 삼청교 위에 설치된 우화각의 근경입니다.
▼ 우화각을 지나 사천왕상 건물을 지나갑니다.
▼ 송광사 대웅전 전경입니다.
(송광사 개략)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때까지 송광산이라 불렸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 (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렸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승려 취봉(翠峰)·
금당(錦堂)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
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
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國師殿:국보 56)을 비롯해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90), 경질(經帙:보물 134), 경패(經牌:보물 175),
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179),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
(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204),《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보물 205),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206), 《금강반야경소개현초
(金剛般若經疏開玄鈔)》(보물 207), 하사당(下舍堂:보물 263), 약사전(藥師殿:보물 302),
영산전(靈山殿:보물 303), 《고려문서》 즉 노비첩(奴婢帖),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보물 572)가 있다.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
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며,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에 있다.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6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송광사의 큰행사시 사용했던 밥을 담던 큰나무통입니다.
▼ 일주문에는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 大乘禪宗 松廣寺)라는 현판이 붙어있습니다.
▼ 송광사앞에 있는 공덕비군입니다.
▼ 뒤돌아본 송광사 일주문 전경입니다.
▼ 주차장 가는 길 전경입니다. 가을이 많이 깊어갑니다.
▼ 주차장을 지나 송광사 입구에 있는 극락교와 청량각입니다.
송광사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게 되는 곳이 청량각이다.
정면 2칸 측며 4칸의 팔작지붕으로 석조의 홍교(虹橋)를 쌓고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라는 사명석입니다.
▼ 마지막 문인 매표소를 지나면 사하촌으로 이어지고 사하촌 아래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 송광사 입구에 있는 송광사 연혁 설명판입니다.
▼ 송광사 가람 배치도 입니다.
▼ 조계산 도립공원 현황 설명판입니다.
▼ 이로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걷기 좋고 기 듬뿍 받은 육산의 매력에 푹빠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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