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행은 전남 순천의 조계산 입니다.
조계산은 크게 2 개의 봉우리인 장군봉(887m)과 연산봉(851m)으로 아루어진 전형적인
육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게산의 산행은 벌써 여러번 다녀왔지만 여러코스를 조합하여 달리하면 새로운 코스의
산행을 맛볼 수 있습니다.
2014년 11월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 이번에 다시 가는 산행이지만 그 때의 가을색을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이번 코스는 그 때의 코스와 달리 6년 전쯤 다녀온 역코스로 송광사에서
시작하여 천자암을 거쳐, 보리밥집, 장군봉, 선암사로 하산하는 꽤 길다는 생각을 머리속에 담고
있던 코스이기도 합니다.
이번 산행은 날씨조차 운무속의 산행이라 마치 선경 속을 걷는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의 산행
이었고, 국내 굴지의 천년고찰인 태고종의 중심사찰인 선암사와 조계종의 중심사찰인 송광사를
품고 있는 그야말로 길지의 산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산길은 스님들이 걷던 무념무상의 사색의 길에 연결된 등로로, 인적이 드물어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구도자의 길이 아니었나 생각되었습니다..
(조계산 개략)
높이 884m.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영암의 월출산(月出山)과
삼각형을 이룬다.
산 전체가 활엽수림으로 울창하고 수종이 다양하여 전라남도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동쪽 사면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순천을 경유하여 남해로 흘러 들어가는 이사천(伊沙川)과
합류되고, 서쪽 사면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송광천(松光川)으로 흐른다.
고온다습한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는 애칭이 있는 명산이다.
동쪽 사면에 선암사(仙巖寺), 서쪽 사면에 송광사(松廣寺)가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계곡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 있을 뿐만 아니라 비룡폭포(飛龍瀑布)와 같은 이름난 폭포도 있다.
송광사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로서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 등과 함께 삼보사찰에 해당하는 승보사찰(僧寶寺刹)로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다.
조계산이라는 이름도 조계종(曹溪宗)의 중흥도량 산으로 되면서 송광산에서 개칭된 것이다.
6·25 전에는 80여동 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60여 동이 있다.
큰 가람답게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43호)·
송광사국사전(국보 제56호) 등 3점의 국보, 송광사경패(松廣寺經牌, 보물 제175호)·송
광사하사당(보물 제263호)·송광사약사전(보물 제302호)·송광사영산전(보물 제303호) 등
12점의 보물, 8점의 지방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88호인 곱향나무 쌍향수가 천자암 뒤쪽에 있다.
송광사 일대는 연산봉을 비롯하여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송광사 내팔경(內八景)과 외팔경이 정해져 있을 정도이다.
송광사 부근에는 말사(末寺)인 광원암(廣遠庵)·감로암(甘露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있다.
산 남쪽에는 높이 800m의 선암(仙巖)이 있다.
동쪽 사면에는 선암사를 중앙에 두고 주위에 향로암(香爐庵)·선조암(禪助庵)·대각암(大覺庵)·
운수암(雲水庵)·청련암(靑蓮庵)·대승암(大乘庵) 등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6·25 이후 대부분
소실되거나 폐암(廢庵)되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 하며,
현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표적인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는
사찰이다.
선암사 경내에 이르는 길의 조계산 계류에 놓인 승선교(昇仙橋)는 하나의 아취로 이루어진 석교로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었으며, 강선루(降仙樓)와 어울린 그림 같은 모습은 선암사의 상징이다.
선암사삼층석탑은 보물 제395호이며, 그 밖에 300년 된 산철쭉과 영산홍·고목동백·왕벚꽃·목련·부
용·구봉화·화염물상봉 등의 아름다운 꽃밭,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화도 일품이다.
송광사 지역의 별미는 산채라고 할 수 있으며, 곡우를 전후하여 마시는 고로쇠약수는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물로 유명하다.
수려한 조계산의 경관과 명찰을 찾아 선암사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등산로에는 많은 등산객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앞으로 월출산·무등산 등과 함께 전라남도의 명산으로, 국민관광지로서의 본격적인 개발이 기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계산 [曹溪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산행개요)
1. 산행날짜 : 2016.11.19(토) 날씨 : 흐린후 이슬비 조금
2. 산행시간 : 10시32분 ~ 16시32분(6시간)
3. 이동, 도상거리 : 14.38km, 13.77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2.39km/h
휴식제외 : 2.62km/h
5. 고도 : 916m ~ 179m(737m) - 최고 해발인 장군봉이 884m이므로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5.27km, 2.21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8.92km, 2.87km/h
8. 휴식횟수, 시간 : 1회, 30분(중식시간)
9. 산행코스
선암사 주차장 ~ 선암사 ~ 대각암 ~ 비로암삼거리 ~ 향로암터 ~ 조계산 장군봉
~ 배바위 ~ 작은굴목재 ~ 장방골 ~ 윗보리밥집 ~ 배도사 대피소 ~ 송광굴목재 ~
~ 천자암 쌍향수 ~ 운구재 ~ 송광사 ~ 송광사 대형주차장
▼ 산행계획도이고, 당초 계획했던대로 산행도 진행되었습니다.
▼ 조계산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위성지도의 축소입니다.
▼ 산행궤적을 나타낸 위성지도입니다.
2014년 산행시에는 장군봉에서 연산봉을 거쳐 작은굴목재에서 송광사로 하산하느 코스를
이용했고, 6년전에는 이날과 같은 코스의 역코스로 산행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등고선지도에 나타낸 산행 궤적입니다.
▼ 산행궤적의 해발고도표입니다.
▼ 10:28 부산에서 7시반에 출발한 버스가 거의 3시간이 걸려서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단풍철이 막 지나서인지 인산인해를 이루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 10:28 주차장의 은행잎을 보는 순간에 오늘 단풍을 즐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 10:32(00h00m)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이란 아치를 지나면서 산행은 시작됩니다.
▼ 10:34(00h02m) 산행시작 2분 후 본격적인 산행로로 들어갑니다.
▼ 순천 - 남도 삼백리길 각 코스 알림판입니다.
▼ 10:35(00h03m) 선암사길은 사시사철 멋있는 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 10:36(00h04m) 선암사에 대한 유래를 게시한 글입니다.
(선암사 개략)
1. 창건
542년(진흥왕 3)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이 그것이라고 했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2. 중창
1088년(선종 5) 의천(義天)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석종(石鍾)·철불(鐵佛)·보탑(寶塔)·부도(浮屠)·문수전(文殊殿)·
조계문(曹溪門)·청치(圊廁) 등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적연당(寂然堂)·
명경당(明鏡堂)·대장전(大藏殿)·청운당(靑雲堂)·백운당(白雲堂)·배면당(背面堂)·
독락당(獨樂堂)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무집당(霧集堂)·영풍루(迎風樓)·천장전(天藏殿)·지장전(地藏殿)·
문수전·보현전(普賢殿)·용화당(龍華堂)·만월당(滿月堂)·반선각(伴仙閣)·제운료(際雲寮)·
낙성료(落星寮)·서하당(栖霞堂)·성행당(省行堂)·탕자방(湯子房)·청치 등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정문·종각·대루(大樓)·조계문 등이, 그리고 그 뒤쪽에는 첨성각(瞻星閣)·국사전
(國師殿)·오십전(五十殿)·응진당(應眞堂)·팔상전(八相殿)·원통전(圓通殿)·능인전(能仁殿)·
원명각(圓明閣)·성적당(惺寂堂)·진의각(眞疑閣)·활연당(豁然堂)·적조당(寂照堂)·심주각
(尋珠閣)·완월당(玩月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 1)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枕肱)이 많은 당우(堂宇)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除夕)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禁戒)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護岩)과 치현(致玄)이 있었다.
특히 호암은 『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사찰의 중수에 부지런하였다.
1699년(숙종 25)을 전후한 시기에 원통각(圓通閣)·약선궁(若仙宮)·대법당·오십전 등을
새로이 건설하고, 관음상 1구, 소상(塑像) 61구, 화상(畵像)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704년에는 호연(浩然)이 『선암사사적(仙巖寺事蹟)』을 썼다.
1819년(순조 19) 봄에 불이 나자 곧 상월(霜月)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海鵬)·눌암(訥庵)·월파(月波)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1911년 6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발표되고,
다시 같은 해 7월 8일 반포된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가 정해질 때,
선암사 또한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천 선암사 [順天 仙巖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0:36(00h04m) 선암사 안내도 간판입니다.
우리의 산행로는 좌윗쪽의 대각암을 뒷쪽으로 연결되는 등로를 이용합니다.
▼ 10:37(00h05m) 매표소를 지나갑니다. 입장료를 1인당 2,000원을 받고 있습니다.
▼ 10:39(00h07m) 이쁘게 보였던 단풍들이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낙엽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 10:41(00h09m) 주차장을 출발한지 10여분이 지난 시점에 울창한 삼나무 숲을 만납니다.
▼ 10:42(00h10m) 안내도로 나타낸 산행 코스입니다.
산행코스는 선암사주차장 ~ 삼인당 ~ 선암사 ~ 대각사 ~ 비로암 삼거리 ~ 행남절터
~ 장군봉 ~ 배바위 ~ 작은굴목재 ~ 윗보리밥집 ~ 배도사 대피소 ~ 송광굴목재 전 삼거리
~ 천자암 전 삼거리 ~ 천자암 ~ 송광사 ~ 송광사매표소 ~ 송광사 주차장 순입니다.
▼ 10:42(00h10m) 선암사 입구의 부도군과 공덕비군(群)입니다.
▼ 10:43(00h11m) 공덕비군(群)을 지나서 선암사 방향으로 길을 잡아 나아갑니다.
▼ 10:44(00h12m) 선암사 오르는 길 좌측으로 흐르는 개천입니다.
지난밤 많은 비로 수량이 제법 많이 흐르고 있습니다.
▼ 10:44(00h12m) 선암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조게산 선암사란 지주석이 서 있습니다.
▼ 10:45(00h13m) 선암사 가는 길 우측으로는 선교양종 대본산이라는 지주석이 있습니다.
(선교 양종이란?)
조선 초기 억불정책으로 몇 차례에 걸친 불교 종파의 혁파가 단행되었다.
1407년(태종 7) 종래의 11종(宗)을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총남종(摠南宗)·시흥종(始興宗) 등 7종으로 혁파하였다.
1424년(세종 6) 7종을 다시 선종 및 교종의 두 종파로 묶어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해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의 4종을 합쳐 교종으로 하였으며,
양종에는 각각 18개의 사찰만을 공인하였다.
선종에는 흥천사(興天寺)·숭효사(崇孝寺)·연복사(演福寺)·관음굴(觀音窟)·승가사(僧伽寺)·
개경사(開慶寺)·회암사(檜巖寺)·진관사(津寬寺)·계룡사(鷄龍寺)·단속사(斷俗寺)·
기림사(祇林寺)·화엄사(華嚴寺)·흥룡사(興龍寺)·유점사(楡岾寺)·각림사(覺林寺)·
정곡사(停穀寺)·석왕사(釋王寺) 등의 18사가 소속되었는데,
모두 4,250결의 사전(寺田)이 지급되고, 1970명의 승려가 상주할 수 있게 하였다.
서울의 흥천사는 도회소(都會所)로 본산격이었다.
흥덕사(興德寺)·광문사(廣文寺)·신암사(新巖寺)·감로사(甘露寺)·연경사(衍慶寺)·
영통사(靈通寺)·장의사(莊義寺)·소요사(逍遙寺)·속리사(俗離寺)·보련사(寶蓮寺)·
견암사(見庵寺)·해인사(海印寺)·서봉사(西鳳寺)·경복사(景福寺)·표훈사(表訓寺)·
월정사(月精寺)·신광사(新光寺)·영명사(永明寺) 등 18사는 교종에 속하였는데,
모두 3,700결의 사전과 1,800명의 상주승이 책정되었으며, 교종의 도회소는 흥덕사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에 선교양종마저 폐지되어 흥천사 및 흥덕사는 공해(公廨)로 삼았고,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관부에 몰수되었다.
1550년(명종 5) 12월 섭정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하여 선교양종이 부활하여 선종은
봉은사(奉恩寺)를 본사로 보우(普雨)가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취임하고,
교종은 봉선사(奉先寺)를 본사로 수진(守眞)이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에 취임하였다.
1565년(명종 20)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선교양종제는 폐지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 10:45(00h13m) 선암사 가는길 우측으로 부도비가 모여있는 남부도군을 만납니다.
▼ 10:45(00h13m) 남부도군 전경입니다.
▼ 10:46(00h14m) 남부도군 중에서 빼어난 탑이 화산대사사리탑입니다.
(화산대사 사리탑(華山大師 舍利塔)외 사리탑)
선암사 입구의 도로변 오른쪽에 위치하는 탑비전에는 현재 11기의 부도와 8기의 비가 있다.
11기의 부도는 모두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그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부도는 광봉당 서백사부도, 무암당 성석사부도, 서악당부도, 계음당부도,
침굉당부도, 상월당부도, 연암당부도, 낙허당부도, 해붕당부도, 눌암당부도, 화산대사사리탑
등이다.
이들 부도 형식은대부분 오륜형(옥개석이 있고 탑신이 구형인 형식)이며 석종형은
계음당부도와 침굉당부도가 있고 화산대사부도만의 특수형으로 4사자부도 형식이다.
화산대사부도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구례 화엄사의 4사자3층석탑과 고려시대 작품인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과 같은 형식으로 매우 희귀하다.
이 부도의주인공인 화산대사를 법명이 문신인 해남 화산 출신의 화악선사와 같은 사람으로
보고 부도의 조성시기도 화악선사의 입적연도인 숙종 33년(1707)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동일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사리탑을 만든 석공 황대인은 벽파선사비도 만들었는데 벽파선사비가 1928년에
조성되었으므로 이 부도 역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는 8개가 있는데 상월대사비만이 정조 6년에 만들어졌고 나머지 7개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들이다.[네이버 지식백과] 탑비전
▼ 10:46(00h14m) 우측으로 올라가면 순천 야생차 체험관이 있고, 좌측으로는 선암사 방향입니다.
▼ 10:46(00h14m) 순천 야생차 체험관으로 향하는 길 전경입니다.
▼ 10:47(00h15m) 산행 시작 15분만에 목장승이 있는 곳까지 진행됩니다.
우측 목장승은 코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호범선신(護法善神)'이라는 한자가 써져 있고,
▼ 10:47(00h15m) 진행방향 왼쪽에 있는 목장승인데 아래에 있는 글이 방생정계(放生淨界)
장승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 10:48(00h16m) 선암사의 대표적 구조물인 보물 400호인 승선교(昇仙橋) 전경입니다.
(승선교 설명)
보물 400호로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승선교 [昇仙橋]
▼ 10:47(00h15m) 승선교 근경입니다.
▼ 10:48(00h16m) 승선교를 건너는 산객들을 찍었습니다.
▼ 10:49(00h17m) 당초 승선교에 사용되었던 석부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상세 내용)
선암사 승선교는 조선 숙종 39년인 1713년 호암대사가 축조한 홍예교(무지개다리)
로써 당초 자연 암반위에 설치하였으나 자연 암반에 절리(균열로 떨어져 나가는 현상)
가 발생하여 승선교를 세운지 290년이 지난 떄인 2003년 11월 ~ 2004년 9월 안전히
해체하여 자연암반부에 석재(지대석)을 보충하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석재들은 당초 승선교를 구성하던 147개의 홍예석(아치석)중 노후부식
등으로 강도가 저하되어 재사용이 불가능한 석재 30개를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 10:49(00h17m) 노후 부식된 석재를 전시해 놓은 전경입니다.
▼ 10:49(00h17m)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의 조화로운 모습입니다.
▼ 10:50(00h18m) 선암사 승선교에 대한 설명판입니다.
(상세내용)
보물 제 400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48-1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승선교는 화강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아치형 석교이다.
계곡의 폭이 넓어 아치(홍예,紅霓 : 불을 홍, 무지개 예) 또한 유달리 큰 편이다.
아랫부분에서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이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물에 비춰진 모습과 어우러져 완벽한 하나의 원을 이룬다.
승선교는 그 밑단부분이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급류에도 휩쓸릴 염려가 없다.
가운데 부분은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웅장하며 자연미를 풍기고 있다.
이 다리는 숙종 39년(1713년)에 호암대사가 5년에 걸쳐 완공했다고 전한다.
일선에서는 선암사를고쳐 지을 때 원통전(1698년)과 함께 설치했다고도 한다.
▼ 10:50(00h18m) 강선루(降仙樓) 전경입니다.
(강선루 개략)
조계산 선암사의 문루(門樓) 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이고, 위층은 가늘고 낮은 기둥을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위층에는 계자난간이 둘러져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문을 일주문 안쪽에 두는 데 반해 선암사의 경우 누문을 일주문 밖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이채롭다.
선암사의 실질적인 경역이 바로 강선루에서부터 시작된다.[네이버 지식백과]
▼ 10:51(00h19m) 보물 400호 승선교 표시석입니다.
▼ 10:51(00h19m) 승선교 바로 옆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 승선교 표시입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누각이 강선루 전경입니다.
▼ 10:51(00h19m) 강선루 방향에서 바라본 승선교 전경입니다.
▼ 10:51(00h19m) 선암사 경내의 첫관문인 강선루 누문 전경입니다.
▼ 10:52(00h20m) 편백나무 숲을 지나갑니다.
▼ 10:52(00h20m) '누리장나무'입니다.
잎이나 줄기에서 아주 독특하고 역한 누린내가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 10:53(00h21m) 삼인당 입구에 약간의 가을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10:54(00h22m) 선암사 삼인당 설명석입니다.
(설명석 상세 내용)
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48-1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
선암사 사적에 따르면, 신라 경문와 2년(862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축조한 것이라 전한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涅槃寂靜印)의
삼법인(三法印)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르는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 간다'라는 불교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날에서 이런 독특한 이름과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 삼법인(三法印)이란?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로
인(印)이란 인신(印信)·표장(標章)의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다.
①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온갖 물(物)·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불변·상존하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주기
위하여 모든 것의 무상을 강조하는 것.
②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로 자아인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아(我)에 집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므로, 이를 없애주기 위하여
무아라고 말하는 것.
③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생사가 윤회(輪廻)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이상의 경지인 열반
정적의 진상을 강조하는 것.
* 열반적정인 대신에 일체개고인(一體皆苦印: 모든 것은 괴로움)를 넣기도 한다.
이 세 가지 법으로써 부처의 말씀과 마군(魔軍)의 말을 관장하는 인(印)으로 삼는다.
(삼인당 개요)
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
장변과 단변이 2.2:1의 비를 갖는 기다란 계란 모양의 연못 속에, 장변 11m, 단변 7m의
크기를 갖는 계란 모양의 섬이 저부(底部) 가까이 4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는
중도형(中島形) 타원형 연못이다.
이와 같은 특이한 양식의 연못 형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기 힘든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정원에서는 직선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연못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앞의 구품연지(九品蓮池)는 정타원형 못이다.
통도사의 구룡지(九龍池)는 구품연지와 비슷한 타원형 연못이기는 하나 모두 정형적인 정타원형
윤곽선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가로지른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서 볼 때 선암사의 삼인당은 조선시대의 양식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성연대는 훨씬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추정된다.
선암사의 사적에 의하면, 이 연못은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며,
연못의 장타원형의 안에 있는 섬은 ‘自利利他(자리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自覺覺他(자각각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뜻한 것으로, 이 연못은 불교의 이상을 배경으로 한 ‘삼인당’이라는 명칭과 독특한 양식 등이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선암사삼인당 [仙岩寺三印塘]
▼ 10:54(00h22m) 삼인당 전경입니다.
▼ 10:54(00h22m) 삼인당 바로옆에 송광사로 직진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선암사를 둘러보고 선암사 뒷길인 대각암 가는 길로 이동해야 합니다.
방향으로 보면 ← 송광사로 가는 둘레길, ↑ 선암사 일주문 가는 길입니다.
▼ 10:57(00h25m) 선암사 일주문에 대한 설명입니다.
(설명 상세 내역)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96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 48-1
이 일주문(一柱門)은 누문(樓門)인 강선루(降仙樓)를 지나 처음 들어서게
되는 문으로 1719년에 세워진 것이다.
《조계문 창건 상량문》에 의하면 원래의 건물은 화재로 인해 없어지고
1540년에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당하였다가 1719년에 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단층맛배기와집〈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원형의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기둥의 중간이 굵고, 위 아래로 가면서 가늘게 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3군의 공포를 배치해 놓은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 10:57(00h25m) 일주문 전경입니다.
현판은 '조계산 선암사(曺溪山 仙巖寺)로 되어 있습니다.
▼ 11:00(00h28m) 선암사 대웅전 앞의 보물 제 395호인 삼층석탑 전경입니다.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개략)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선암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 3965호.
높이 4.7m.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받침돌은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과 받침돌의 면석(面石)을 한데 붙여서 만들었다.
면석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었다.
덮개돌은 윗면에 경사가 있는데, 가운데 부분에 둥근 굄의 위아래에 각진 굄을 둔 3단의
굄을 두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 역시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겼다.
덮개돌은 추녀가 약간 반전되었는데,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두었고,
약간 경사진 윗면에는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처럼 가운데 부분에 둥글고 각진 3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지만 다른 장엄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면의 받침 수는 각 층마다 4단이며, 윗면인 낙수면의
정상에는 각진 2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위에 작은 돌이 놓여 있는데, 원래의 모습은 아니다.
이 석탑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위아래층 받침돌의 가운데 기둥 수가 하나로 줄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도
4단으로 줄어서, 건립 시기는 대체로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順天仙巖寺東·西三層石塔]
▼ 11:00(00h28m) 삼층 석탑 중 서탑 전경입니다.
▼ 11:01(00h29m) 태고종 종정스님의 거처로 알려진 종정원 전경입니다.
종정원 주변에 봄이 되면 오래된 매화나무의 매화를 볼 수 있습니다.
(선암사 선암매)
순천 선암사 경내에는 수령이 350~650년에 이르는 오래된 매화나무 50여 그루가
서식하고 있다.
경내 원통전 각황전 담길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주로 종정원(宗正院) 돌담길에 있는 이들 매화나무를 가리켜 선암사 선암매(仙巖梅)라고
부른다.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는 수령 650년, 나무 높이 11m의 백매이며,
이들 선암매는 2007년 11월 26일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선암매 여러 나무들은 각기 수령과 나무 높이가 다르나 대체로 수령 350~650년 사이이며,
나무 높이는 5~12m까지 다양하다.
경내 이곳저곳에 널리 분포하여 자라고 있는 매화나무들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는 봄철에 특히 그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매화를 보기 위해 선암사를 찾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선암사의 매화는 3월에서 4월에 걸쳐 피는데 3월 말경에 만개한다.[네이버 지식백과]
▼ 11:02(00h30m) 선암사 팔상전 설명입니다.
(상세 내용)
전라남도 무형문회재 제60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302
석가여래릐 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팔상도'라고 하고, 팔상도(八相圖)를 모시고 석가여래를 기리는 불전을 팔상전이라고
한다.
앞 면 5칸, 옆 면 3칸의 단층 및 맛배지붕(옆에서 볼 때 '人'자 모양)으로 된 이 팔상전의
기둥 윗몸은 평방없이 창방(昌坊)만으로 짜여져 있다. 기둥 위에만 주두(柱頭 : 공포를
받치는 네모형의 부재)를 놓고 첨차(첨遮 : 공포를 이루는 부재로 윗부재를 받친다.)를
짜 올렸으며, 기둥사이의 창방 위에는 꽃받침(花盤)을 놓아 도리 밑의 장여(혓바닥 모야의
부재)를 받치고 있는 익공식(翼工式)에 가까운 주심포식(柱心包式 : 치마를 받치는 부재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형식)건축이다.
숙종 30년(1704년)과 33년(1707년)에 각각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보아 18세기 초 이전의
견물임을 알 수 있다.
▼ 11:02(00h30m) 팔상전 전경입니다.
▼ 11:03(00h31m) 조사당 전경입니다.
(조사당 개략)
선암사 조사당(仙巖寺 祖師堂)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각이지만 정면은 넓게 지어졌다.
조사당은 중국에서 선을 전한 달마대사를 시작으로 육조 혜능 마조대일 등의
중국 5대 선자 진영과 태고종의 종조인 태우 보우국사 그리고 선암사의 선을 널리 알린
침굉현번선사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7년(529년)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지은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1년(861년) 도선국사가 세워 선암사라 이름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고려 선종 5년(1088년)에 의천이 새롭게 고쳐 세웠으나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그뒤 여러 스님들이 중창 불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11:03(00h31m) 조사당 앞에서 바라본 좌측 대웅전과 운무에 쌓인 주변 산 전경입니다.
▼ 11:04(00h32m) 선암사 명물 중의 하나인 와송 전경입니다.
선암사 선암매는 원통전·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위치한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문헌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 수령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 부터 약 600여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하고 있어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긴 세월을 지내 왔음을 알 수 있다.
매화 꽃이 필 때면 매화를 보기위해 선암사를 찾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1:05(00h33m) 선암사 약수터 주위에 철모르는 철쭉이 피어 있습니다.
▼ 11:06(00h34m) 선암사 측간(화장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상세 내용)
순천 선암사 측간(順天 仙岩寺 測間)( 암자의 표기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巖.)
선암사의 대변소이다. 이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옆에서 볼때 '人'자 모양)
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 평면은 정(丁)자 형으로 북쪽에서 출입
하도록 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이다.
건물은 전후좌우 자연지형의 고저차를 지혜롭게 이용하여 상부층과 하부층을 분리한
특징이 돋보인다.
정면의 풍판은 가운데와 양끝을 들어 올림으로써 곡선미를 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를 배려하였다.
건물의 짜임새도 튼튼하고, 보존 상태 또한 비교적 좋은 편이다.
▼ 11:06(00h34m) 선암사의 명물인 화장실 전경입니다.
뒤깐이란 글씨가 독특합니다.
▼ 11:09(00h37m) 화장실 맞은편의 약수인데 마지막 Y자로의 분리대가 아이디어 입니다.
▼ 11:13(00h41m) 선암사를 나와 대각암 방향으로 약 4분 정도 이동하면 만나는
마애여래 입상 설명입니다.
(상세 내용)
선암사 마애여래입상(仙巖寺磨崖如來立像)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48-1
이 불상은 평평한 암벽위에 조각되었는데, 높이가 5m에 달하는 거대한 입상이다.
얼굴모습은 원만하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뚜렷하며, 눈 코 입 등이 대체로
균형잡힌 모습이다.
불상 아래쪽에 갑진삼월일(甲辰三月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나 연호(年號)가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표현 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고려 중/후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11:13(00h41m) 마애여래 입상 전경입니다.
▼ 11:15(00h43m) 마애여래 입상을 지나 대각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 11:17(00h45m) 대각암 입구 삼거리에서 산길로 접어듭니다.
대각암은 ↗방향이고, 장군봉 방향은 ↖방향입니다. 우리는 장군봉 방향으로....
▼ 11:18(00h46m) 이동길에 대각암 건물만 겉훑기로 바라보고 갑니다.
(대각암 개략)
대각암은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경내와는 달리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산턱에
자리잡아 시야가 탁 트여서 시원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화엄종과 법상종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천태종을 개창한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 불사할 때 이 대각암에 머물렀다고 한다.
대각암 뒤편 언덕에는 대각국사의 것이라고 알려진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부도는 높이 2.5m의 팔각원당형으로, 지붕돌의 귀꽃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 기단부에서
상륜부의 보주에 이르기까지 각 부재가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선암사
▼ 11:19(00h47m) 비로암 삼거리를 지나갑니다.
비로암방향은 ↖, 목적지인 장군봉 방향은 ↗입니다.
비로암을 거쳐 장군봉을 오를 수 있지만 산행계획은 우측으로 되어 있습니다.
(국가지점번호란?)
노란 바탕에 검은 색 글씨로 전국에 걸쳐 설치되어 있습니다.
국토 및 이와 인접한 해양을 격자형으로 일정하게 구획한 지점마다 부여한
번호(도로명주소법 제2조15호)를 말하며, 전 국토의 위치안내 및 표시방식을 통일하여
재난재해 등 긴급상황에서 신속한 대응 및 대국민 위치안내서비스 제공 등 국가안전망을 구축
하기 위하여, 100km 단위는 문자를 사용하고 이하부터는 가로와 세로를 각각 10,000으로
나눈 정수를 연결하여 사용(도로명주소법 시행령 제11조의13)한다.
예를 들면 설악산대청봉 : 라아 8485 1333(기준점에서 동쪽 384.85km, 북쪽 713.33km지점)
으로 표기하며,
산악·해안 등 건물 및 도로 등이 없는 지역의 위치표시로써 재난·사고 등 응급상황 발생시
신속한 위치안내와 인명구조 등 관계기관 공동 활용하기 이해 설치한 표식이다.
※ 도로명주소법 제8조의5 참조 (국가지점번호판 규격 등 고시 참조)
▼ 11:19(00h47m) 비로암 삼거리 지나 대각암 옆에 난 길을 따라 이동 중입니다.
▼ 11:21(00h49m) 오르막 경사가 다소 급해지면서 산죽길도 나타납니다.
▼ 11:27(00h55m) 산행시작 55분이 지난 즈음에 국가지점번호 다라 8394 6687구간을 지납니다.
▼ 11:27(00h55m) 계단길이 시작됩니다.
▼ 11:43(01h11m) 산행시작 1시간10분여가 지났을 즈음 다소 완만한 능선길에 도착합니다.
▼ 11:43(01h11m) 남아있는 추색(秋色)은 이정도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 11:54(01h22m) 고도가 높아 질수록 가파름이 다소 급해집니다.
▼ 12:00(01h28m) 산행 시작 1시간30분 즈음에 국가지점번호 다라 8359 6741점을 지납니다.
▼ 12:04(01h32m) 고도룰 높일수록 운무가 심해지면서 너덜길을 만납니다.
▼ 12:06(01h34m) 너덜길이 끝나는 시점에 만난 돌무더기입니다.
▼ 12:10(01h38m) 중식장소인 향로암 터에 도착했습니다.
▼ 12:12(01h40m) 산행시작 1시간 40분만에 즐거운 점심시간입니다.
▼ 12:42(02h10m) 약 30분간의 점심시간을 가진 후 정상을 향해 출발합니다.
▼ 12:42(02h10m) 중식 시간 이후 진행해야 할 계단길입니다.
▼ 12:47(02h15m) 중식 장소에서 조금 올라간 지점에 향로암으로 가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 12:48(02h16m) 중식시간 이후부터는 장군봉까지 가파름이 다소 급해집니다.
▼ 12:55(02h23m) 올라온 운무낀 길을 뒤돌아 봅니다.
▼ 12:59(02h27m) 정상 직전에 계단길이 이어집니다.
▼ 13:12(02h40m) 산행 시작 2시간40분만에 정상인 장군봉에 도착합니다.
▼ 13:12(02h40m) 장군봉 인증샷을 남기고 배바위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 13:23(02h51m) 운무에 쌓인 배바위 전경입니다.
▼ 13:34(03h02m) 산행시작 약 3시간만에 작은굴목재에 도착합니다.
작은굴목재는 4거리로 ← 비로암 방향, ↑큰굴목재 방향, → 윗보리밥집 방향이고,
윗보리밥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일반적으로 직진해서 큰굴목재로 이동 하는데, 가보지 않은 윗보리밥집 방향으로 갑니다.
▼ 13:34(03h02m) 작은굴목재에 설치된 산길 안내도입니다.
▼ 13:36(03h04m) 윗보리밥집 방향으로 이동하는 내리막 계단길입니다.
▼ 13:37(03h05m) 계단이 끝나자 걷기 좋은 유순한 길이 장박골 계곡을 따라 이어집니다.
▼ 13:38(03h06m) 국가지점번호 다라 8264 6669 지점을 지나갑니다.
▼ 13:38(03h06m) 작은 굴목재를 지나 현위치에 도착해있습니다.
▼ 13:41(03h09m) 장박골 계곡을 따라 윗보리밥집 방향으로 유순한 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 13:42(03h10m) 장박3교를 지나갑니다.
▼ 13:43(03h11m) 장박2교를 지나갑니다.
▼ 13:43(03h11m) 장박2교에서 바라본 상류쪽 전경입니다.
이맘때쯤이면 계곡물이 메말라 있어야 할 시점인데 어제 내린 비로 계곡물이 제법 많습니다.
▼ 13:44(03h12m) 계곡을 따라 산죽길도 나타납니다.
▼ 13:49(03h17m) 국가지점번호 다라 8256 6615 지점을 통과합니다.
▼ 13:50(03h18m) 장막골 마지막 목교인 장막1교를 지나갑니다.
▼ 13:50(03h18m) 장막1교 상류쪽으로 바라본 전경입니다.
▼ 13:51(03h19m) 참나무 고목에 붙은 버섯이 꽃처럼 보입니다.
▼ 13:53(03h21m) 윗보리밥집 직전 계곡의 윗길을 지나갑니다.
▼ 13:57(03h25m) 조계산의 명물인 보리밥집 중 윗보리밥집 뒤를 지나갑니다.
여름철 평상 위에서 보리밥을 먹는 상상을 하면서.....
(윗보리밥집 개략)
37년 된 맛집으로 굿모닝대한민국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산속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식탁 없이 평상에서 먹는 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6~9가지의 유기농 채소와 통통한 보리밥이 맛이 좋다.
주메뉴인 보리밥과 야채전, 도토리묵도 같이 판매하고 있다.
▼ 13:57(03h25m) 현위치가 보리밥집이고, 송광사 방향으로 길을 열어갑니다.
▼ 13:58(03h26m)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보리밥집이고 우측으로 이어가야 송광사 방향입니다.
▼ 14:07(03h35m) 송광사 방향으로 이어가다가 보리밥집에서 올라오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 14:07(03h35m) 보리밥집 삼거리에서 보리밥집 가는 길 이정표입니다.
▼ 14:13(03h41m) 보리밥집 삼거리에서 약 5~6분을 가면 배도사 대피소를 만납니다.
배도사 대피소 유래를 읽어보면 재미있는 내력이 있습니다.
▼ 14:13(03h41m) 배도사 대피소 전경입니다.
▼ 14:13(03h41m) 대피소에서 송광사까지는 3.3km이지만 우리는 천지암으로 우회해서
가기 때문에 거리가 늘어 납니다.
▼ 14:13(03h41m) 배도사 대피소를 지나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고 있습니다.
▼ 14:25(03h53m) 천자암 삼거리인 송광굴목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 길은 남도삼백리 천년불심길로 송광굴목삼거리입니다.
▼ 14:32(04h00m) 송광굴목 삼거리부터는 그야말로 구도자의 길인 호젓한 오솔길로 연결됩니다.
▼ 14:37(04h05m) 산행시작 4시간 5분만에 국가지점번호 다라 8130 6556번 지점을 통과합니다.
▼ 14:44(04h12m) 천자암을 거치지 않고 송광사로 가는 삼거리 이정목을 지나갑니다.
여기서 천자암을 거쳐 송광사로 가면 4.2km가 됩니다. (천자암에서 송광사까지 3.4km임)
▼ 14:47(04h15m) 운무낀 호젓한 오솔길이 마치 선경(仙景)으로 향하는 길 같이 황홀합니다.
▼ 14:50(04h18m) 현재 송광굴목 삼거리와 천자암 중간 정도에 있습니다.
▼ 14:55(04h23m) 아래보이는 임도는 장안마을로 하산하는 임도이고
우리는 천자암 방향으로 길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 14:57(04h25m) 천자암 가는 길목에 이읍으로 하산하는 삼거리를 지나갑니다.
▼ 15:00(04h28m) 천자암에 도착했습니다.
송광사의 명물인 천자암 쌍향수가 우리를 반깁니다. 쌍향나무 전설을 알리는 글입니다.
(쌍향수 개략)
천연기념물 제88호. 면적 1,983m2. 수량 2그루. 1962년 12월 3일 지정. 추정수령 800년.
지정사유 노거수. 송광사 소유.
나무높이 1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4m 및 3.24m이다. 가지퍼짐은 남쪽의 것이 동쪽 5m,
서쪽 3.8m, 남쪽 5.8m, 북쪽 3.5m이고, 북쪽의 것은 동쪽 3m, 서쪽 4m, 남쪽 3.8m,
북쪽 3.5m이다.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曹溪山)에 천자암(天子庵)이 있고 그 경내에 2그루의 향나무가
근접한 상태로 자라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수도를 끝내고
귀국할 때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것이 이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나무들은 줄기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어 특이하다.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눈높이 줄기둘레가 각각 3.10m, 3.85m로서 쌍향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게시물 상세내용)
순천 송왕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88호
소재지 : 순천시 송광면 이읍리 1번지
천자암(天子庵) 뒤쪽에 잇는 나무로 두 그루가 인접하여 엿가라처럼 꼬인 모양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澹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한다.
한손으로 밀거나 여러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지이며,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 15:00(04h28m) 운무속에서 바라본 쌍향수의 자태입니다.
▼ 15:00(04h28m) 가까이서 바라본 쌍향수 전경입니다.
▼ 15:03(04h31m) 천자암 전경입니다.
(천자암 개략)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산내암자이다.
송광사의 제9세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하였으며, 담당이 금나라 왕자였으므로
천자암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 11)설묵대사(雪默大師)가 중창하였고,
1730년(영조 6)자원대사(自願大師)가 중건하였으며, 1740년지수(指修)·자징(慈澄) 등이
만세루(萬歲樓)를 중건하였다.
1797년(정조 21)제운(霽雲)·두월(斗月)이 중건, 1893년(고종 30)구연대사(九淵大師)가
성산각(星山閣)을 신축하였으며, 1924년기산(綺山)·해은(海隱)이 중수, 1939년금당화상
(錦堂和尙)이 칠성각을 건립하였으며, 1992년에 법당을 지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을 비롯해서 나한전·산신각·법왕루·요사 등이 있다.
암자의 뒤쪽에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쌍향수(雙香樹)가 있다.
이 두 그루의 곱향 나무에는 창건자인 담당국사와 연관된 전설이 전한다.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하여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짚고 온 지팡이들을 암자의 뒤뜰에 꽂아둔 것이 자란 것이라고
전한다.
이 나무는 수령 800년에 높이 12.5m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연대적 차이가 100여년에 이르므로 이 전설을 믿기는 어렵다.
천자암은 대표적인 조계종 참선도량의 하나로서 수행자들의 정진 장소가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자암 [天子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5:04(04h32m) 천자암 출입문 전경입니다.
▼ 15:04(04h32m) 천자암 범종이며, 종각 전경입니다.
▼ 15:04(04h32m) 천자암을 떠나 송광사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송광사 3.4km남았습니다.
▼ 15:05(04h33m) 천자암 입구에 있는 음각비석입니다.
(나무아비타불(南無阿彌陀佛)의 뜻?)
염불할 때 외우는 글귀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귀의 또는 귀명한다는 뜻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려는 신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계시는 부처님을 말한다.
이 나무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살고 있는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인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거나 왕생을 구하고자 외우는 염불의 글귀다. 불
교에서는 부처님의 신령스런 힘으로 악도를 면하고 서방정토 극락에 나기를 발원하며
이 문구를 외웠다.
그러나 원불교에서의 나무아미타불은 무량수각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무량수각이란 생멸이 없는 가운데 소소영령하여 매하지 아니한 우리 각자의 근본 마음자리를
말한다.
저 멀리 밖에 계시는 부처님에게 돌아가거나 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래마음인
자성불에 귀의하여 자성극락을 누리고자 부르는 글귀이다.
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하고 고뇌가 영멸한 자리이기 때문에 염불을 통해
그 자리에 합일함으로써 극락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나무아미타불의 글귀는 천만 가지로 흩어진 정신을 일념으로 만들기 위한 공부법이요,
순역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심 공부법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
▼ 15:05(04h33m) 마을에서 천자암으로 들어오는 길목 전경입니다.
▼ 15:19(04h47m) 천자암을 지나 송광사 가는 길도 호젓한 구도자의 길 같습니다.
▼ 15:22(04h50m) 산행 시작 4시간 50분이 흘러갑니다.
▼ 15:24(04h52m)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면서 나를 한 번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 15:33(05h01m) 산행 시작 5시간만에 국가지점번호 다라 8008 6601지점을 지나갑니다.
▼ 15:33(05h01m) 호젓하고 운치있는 산죽길이 이어집니다.
▼ 15:40(05h08m) 운구재를 지납니다. 지금부터는 하산길의 내리막이 시작됩니다.
▼ 15:40(05h08m) 운구재 전경입니다.
▼ 15:43(05h11m) 운구재에서 송광사로 하산 산길 전경입니다.
▼ 15:53(05h21m) 쇠락해버린 추색에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 15:55(05h23m) 국가지점번호 다라 7974 6661 지점을 지나갑니다.
▼ 15:57(05h25m) 송광사 못미쳐 울창한 편백림 숲을 지나갑니다.
▼ 15:57(05h25m) 가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며 남아 있는 단풍잎 전경입니다.
▼ 16:02(05h30m) 송광사 직전 큰 은행나무에 남은 가을색 전경입니다.
▼ 16:07(05h35m) 송광사에서 재배하는 배추밭을 지나갑니다.
▼ 16:07(05h35m) 아랫길은 송광굴목이재를 넘어 선암사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 16:09(05h37m) 송광사 직전의 대나무 밭을 지나갑니다.
(송광사 개요)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松廣寺)는 절집의 ‘큰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송광사를 ‘큰집’답게 하는 것은 송광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이라는 명예이다.
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불(佛)·법(法)·승(僧) 가운데 승,
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데,
그런 국사가 한 절에서 열여섯 분이나 배출되었으니 세세손손 절의 자긍심이 될 만하지 않겠는가.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을 말한다.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보조국사는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은 이 절의 이름을 정혜사(定慧社)로 바꾸고자 했지만
가까운 곳에 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이 있어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
수선사라는 이름은 ‘깨달음[悟]은 혜(慧)이고 닦음[修]은 정(定)이므로 정혜(定慧)를 아우르는
것이 선(禪)이 된다’는 뜻을 드러내며, 정혜결사 의지를 담고 있다.
즉위 전부터 보조국사를 매우 존경한 희종이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주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면 수선사라는 절 이름은 송광사로 바뀐다.
송광사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어른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싶다.
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처럼 송광사는 사격(寺格)이나 규모 면에서 우리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송광사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그런 것만이 아니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송광사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과 시원한 솔숲,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 산세가 이어져 가벼운 산행길로 안성맞춤이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기쁨을 “빽빽하여지는
송림과 철철거리는 계류와 둥글뭉수레한 멧부리가 유양불박(悠揚不迫)하게 짜놓은 동부(洞府),
조계산의 첫 인상은 드부룩함이었다.
무어랄 수 없어도 푸근한 생각이 나는 장자(長者)집 호정(戶庭)에를 든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벌써 70년이 지난 송광사의 풍광이지만 최남선의 송광사에 대한 감동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중(衆, 무리의 뜻)의 뜻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
안거(安居)는 범어로 varsa, varsika의 번역으로 우기(雨期)의 뜻입니다.
이 안거기간 동안 비구(比丘)는 승원, 소옥(小屋), 암굴안 같은 데서 한사람이나 두사람
이 안거는 부처님 성도 다음해부터 열반때까지 계속되었고,
율원은 율사가 머무르는 사원(寺院)이며, 율사(律寺)라고도 합니다.
지계(持戒) 생활이 없는 곳에는 승가도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율원은 부처님의 지고지순
우리나라에는 조계총림이 있는 송광사와 가야총림이 있는 해인사의 두 곳에 율원이 있어 율장의
▼ 16:12(05h40m) 계류위에 무지개 다리를놓고 누각을 지어 올렸는데 이를 우화각이라 하고,
날개가 나는 집이란 뜻이니 이곳에 오르면 신선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 16:12(05h40m) 우화각 전경입니다. 송광사를 들어가는 실제적인 문 역할을 합니다.
▼ 16:12(05h40m) 우화루 앞에 있는 작은 건물 2동인데 척주각과 세월각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두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기능면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
생전 인연을 끊으려는 남녀가 최후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듯 건물 모습에조차 처연한
분위기가 풍긴다.[네이버 지식백과] 송광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 16:13(05h41m) 우화각 입구에 송광사란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 16:13(05h41m) 고향수입니다. 고향수에 담긴 의미가 대단합니다.
(게시글 내용)
고향수는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년 ~ 1210년)께서 심은 나무로 입적하시기 전에
자신의 불멸을 입증하고자 한 나무이다.
높게 솟아있는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있다.
▼ 16:13(05h41m) 송광사 일주문인 조계문 설명입니다.
▼ 16:14(05h42m) 일주문 전경입니다.
(일주문 요약)
일주문은 기둥이 짧고 화려한 공포가 다소 버겁게도 보이지만,
고색이 흐르는 단청과 일주문 양옆으로 낮게 질러놓은 담장에서 한결 품위를 느낄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일주문에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와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수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돌 끝에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세월에 많이 닳기는 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살며시 들어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송광사는 돌사자조차 깨달음을 얻는 곳일까.[네이버 지식백과]
▼ 16:14(05h42m) 송광사 역대 고승과 공덕주들의 비를 모아놓은 비림(碑林)입니다.
▼ 16:14(05h42m) 비림을 지나 송광사 입구로 향합니다.
▼ 16:14(05h42m) 일주문을 지나 뒤돌아본 일주문 전경입니다.
▼ 16:16(05h44m) 송광사 입구의 하마비입니다.
▼ 16:16(05h44m) 하마비의 유래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마비 유래)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하마비는 또 왕이나 장군·고관·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인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1413년(태종 13) 2월에 처음으로 예조에서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나무로 만든 표목(標木)을 세웠다.
표목 전면에는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다르게 거리를 표시하고 있는데,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표목은 후일 석비로 만들기도 하여 오늘날까지 그 실물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다.
▼ 16:16(05h44m) 송광사의 전체적인 안내도입니다.
(가람 배치 및 당우)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전쟁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해청당(海淸堂)·행해당(行解堂)과 서쪽의 문수전(文殊殿)·
임경당·도성당(道成堂)을 이른다. 동구(洞口)에서부터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된
가람의 모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청량각(淸凉閣)·일주문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虹橋)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② 척주각(滌珠閣)·세월각(洗月閣)·우화각(羽化閣)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齋式時)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③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년(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난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
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잡지·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④ 대웅보전·설법전·수선사
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아(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수선사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⑤ 상사당(上舍堂)·하사당(下舍堂)·응진전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하사당·향적전(香積殿)·응진전·성수전(聖壽殿)·산신각·진여문·청운당·
백운당·설법전·차안당(遮眼堂)·조사당·국사전·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湛堂)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後佛幀畵)는
1724년(경종 4)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년,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回眼)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⑥ 국사전·진영각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⑦ 약사전·영산전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怜僧)은 의겸(義謙)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⑧ 관음전·지장전·화엄전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인조 19)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佛)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월조헌(月照軒)이 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천 송광사 [順天 松廣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6:16(05h44m) 송광사에 대한 제반 설명입니다.
▼ 16:17(05h45m) 송광사 입구의 공덕탑 전경입니다.
▼ 16:22(05h50m) 입구에 조계총림대도장이라는 큰 입석이 서 있습니다.
▼ 16:24(05h52m) 송광사 입구 계류에 구름다리 모양의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세워
극락교라는 현판이 붙어있습니다.
▼ 16:25(05h53m) 송광사 입구에 서 있는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라는 비석입니다.
▼ 16:27(05h55m) 송광사 산문을 나가면서 오늘 산행을 서서히 마무리 합니다.
▼ 16:29(05h58m) 조계산 도립공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계산 도립공원)
선암사와 송광사라는 두 거찰을 끼고 있는 조계산(884.3m)은 전남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위치하고 있다.
조계산은 비교적 낮은 산으로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하다.
선암사 둘레에는 월출봉, 장군봉, 깃대봉, 일월석 등이 줄지어 솟아있다.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12월에는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상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좌우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소장군봉(우측) 연산봉(좌측) 등 조계산 도립공원 전체가
발 아래에 펼쳐진다.
송광사와 선암사의 유명세 탓에 절을 찾는 관광객이 사시사철 끊일 새가 없을 뿐더러
등산을 목적으로 조계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조계산 산행은 송광사나 선암사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비슷한 시간에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평탄한 길이 많아 가족단위 소풍코스로도 알맞다.
▼ 16:24(05h55m) 도립공원안내도를 끝으로 송광사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6시간에 걸친
오늘의 산행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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