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행은 경북 김천의 황악산(1,111m)입니다.
황악산은 백두대간길 선상에 위치한 산으로 천년고찰 김천 직지사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합니다.
통상적으로 황악산은 우리나라 겨울의 눈을 보기 위해 많이 찾는 산 중의 하나인데
오들어 유난히 따뜻한 고온현상으로 전국의 산들에서 눈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조금 내린 눈은 따뜻한 날씨로 거의 녹아버리고 음지에서 잔설을 구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산행일 몇 일전부터 다소 추위가 시작되어 산정상 부근에서 상고대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건 기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황악산 개요)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으로 불리웠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 택리지등에 황악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특징없이 완만한 편이나 온 산에 수림이 울창하고 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은
곳곳에 폭포와 소를 이뤄 그윽한 계곡미를 이루고 있다.
특히 직지사 서쪽200m 지점에 있는 천룡대에서부터 펼쳐지는 능여계곡은 이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봄철에는 진달래, 벚꽃, 산목련이 볼만하고 가을철 단풍 또한 절경을 이룬다.
산행기점은 최근 관광 단지로 크게 조성된 여관촌이 되고 직지사를 경유 백련암, 운수암을 거쳐
능선에 오르거나 백련암에서 왼쪽 계곡길을 통해 주능선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두대간이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인 신경준이 쓴 산경표(山經表)에서 한반도의 산줄기를 대간과 정간, 정맥으로
나타낸 체계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산경표는 1913년 활자로 인쇄된 책자가 많이 남아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나라 땅의 산줄기〔山經〕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지었다.
크게 나누어 동·서 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다시
갈라져 하나하나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대간을 이루는 주요 산은 기점인 백두산(2,744m)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허항령(虛項嶺, 1,401m),
포태산(胞胎山, 2,289m), 최가령(崔哥嶺, 1,527m), 백사봉(白沙峰), 두류산(頭流山, 2,309m) 등
2,000m 정도의 높은 산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을 동·서로 분계하였으며 북동쪽으로
장백정간(長白正幹)을 갈래하였다.
서남쪽으로 후치재〔厚致峙, 1,335m〕, 부전령(赴戰嶺, 1,445m), 황초령(黃草嶺)으로 이어져
압록강의 남쪽과 동해로 흘러드는 분수기를 이루며,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遮日峰, 1,743m),
철옹산(鐵瓮山, 1,085m), 두류산(頭流山, 1,324m)으로 이어져 대동강의 남쪽 정맥인
해서정맥(海西正脈)을 서남쪽으로 두었다.
원산 서남쪽으로 이어진 대간은 마식령(馬息嶺, 788m), 백암산(白岩山, 1,110m),
추가령(楸哥嶺, 752m)으로 연결되어 임진강의 북쪽 유역의 경계를 이루었고 한강 북쪽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시점을 이루었다.
동해안을 끼고 국토의 척추인 양 이어진 대간은 금강산(金剛山, 1,638m), 진부령(陳富嶺, 529m),
설악산(雪岳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3m), 대관령(大關嶺, 832m), 두타산(頭陀山, 1,353m),
태백산(太白山, 1,567m)으로 이어 흐르다가 남쪽으로 낙동강의 동쪽 분수 산줄기인 낙동정맥
(洛東正脈)을 형성시켰다.
대간의 본줄기는 내륙 깊숙이 소백산(小白山, 1, 421m), 죽령(竹嶺, 689m), 계립령(鷄立嶺),
이화령(梨花嶺, 548m), 속리산(俗離山, 1,508m)으로 뻗어내려 한강과 낙동강을 남북으로 분수하였다.
이로부터 추풍령(秋風嶺), 황학산(黃鶴山, 1,111m), 삼도봉(三道峰, 1,177m), 덕유산(德裕山, 1,614m),
육십령(六十嶺, 734m), 영취산(靈鷲山)까지 금강의 동쪽 분수산맥을 형성하며 섬진강의 동쪽 분수령인
지리산(智異山, 1, 915m)에서 백두대간은 끝난다.
백두대간은 장백정간(長白正幹)과 함께 서쪽으로 해안선까지 많은 ‘골’과 ‘들’을 이루며 뻗어 내려간
13개의 정맥, 즉 청북정맥(淸北正脈)·청남정맥(淸南正脈)·해서정맥(海西正脈)·임진북예성남정맥
(臨津北禮成南正脈)·한북정맥(漢北正脈)·한남정맥(漢南正脈)·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금남정맥(錦南正脈)·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호남정맥(湖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낙남정맥(洛南正脈)과 연결되고 있다.
이들 산줄기의 이름은 강줄기의 이름에서 얻어진 것이다.
산과 물이 하나로 자연을 이루고, 언어·습관·풍속 등과 의식주의 다양함이 산줄기와 물줄기의
가름으로 세분화되어 생활 철학을 탄생하게 하였다.
산줄기마다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어 부족국가의 영역을 이루었고 삼국의 국경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연스런 각 지방의 분계선이 되었다.
이 땅의 지세(地勢)를 파악하고 지리를 밝히는 데 있어서 백두대간은 그 근본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두대간 [白頭大幹]
(산행개요)
1. 산행날짜 : 2016. 01. 09(토) 날씨 : 맑음
2. 산행시간 : 09:55분 ~ 16시10분(6시간15분) - 후미 기준임
3. 이동, 도상 거리 : 12.48km, 11.86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1.99km/h
휴식제외 : 2.22km/h
5. 고도 : 1,140m ~ 174m(966m) - 최고봉이 1,111m이므로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3.83km, 1.76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8.47km, 2.47km/h
8. 휴식횟수, 시간 : 1회, 40분
9. 산행코스
쾌방령 ~ 여시골산(620m) ~ 운수봉(680m) ~ 운수사 삼거리 ~ 백운봉 ~ 황악산 정상(1,111m)
~ 형제봉(1,035m) ~ 신선봉(944m) ~ 망월봉(597m) ~ 직지사 ~ 직지사주차장
▼ 황악산 주변 개요도 입니다. 황악산을 거치는 하늘색 라인이 백두대간길입니다.
▼ 산행궤적입니다. 윗쪽 굵은 분홍색으로 시작해서 아래로 이동한 산행궤적입니다.
▼ 등고선에 나타낸 산행궤적입니다.
▼ 고도표입니다. 정상 직전에서 중식시간을 가졌습니다.
첫시작에서 능선(여시골산)까지의 급경사가 힘든 경사길이었습니다.
▼ 09:47 궤방령에 도착했습니다.
(괘방령의 위치 등)
충청북도 영동군의 매곡면 어촌리에서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괘방령(掛榜嶺)'이 기록되어 있고 지명 유래에 대하여 옛날에
관원들과 과거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추풍령은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꺼리고 괘방령을
넘으면 급제한다 하여 이 고개를 즐겨 넘어 다녔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
괘방령은 조선 후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황간)에서 금산(金山)과의 경계에 '괘방령(掛謗嶺)'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지도서』(황간)에는 '괘방령(掛榜嶺)'으로 기록되어 『해동지도』에 표기됐던
괘방령(掛謗嶺)의 '방(謗)'이 '방(榜)'으로 변화된 후 현재까지 표기자 변화 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후 『대동여지도』(황간)에 '괘방령(掛榜岺)'이, 『1872년지방지도』(황간)에
'괘방령(掛榜嶺)'이 표기되어 있다.
현재 괘방령 동쪽인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에는 '아랫재방령'이 있다.
'재방령'의 '재'는 괘방령의 '괘'가 구개음화되어 변화된 지명 표기자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괘방령에 대한 설명이 산행지 입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김천시에서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가꾼 장원급제길 팻말이 들머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들머리 입구에 건축된 산장의 표식석입니다.
▼ 괘방령산장 전경입니다.
▼ 긴시간 버스를 타고 왔고 날씨도 추우므로 안전을 위해 괘방령 산장 앞뜰에서 스트레칭을 합니다.
▼ 09:55 스트레칭과 전달사항을 마친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합니다.
▼ 약간의 경사길을 오르고 난뒤 순한길이 나타납니다.
▼ 10:03 산행시작 약 8분후 임도와 만납니다. 계속 백두대대간길로 이어집니다.
▼ 10:08 산행시작후 약 13분후 괘방령에서 770m를 이동한 첫 이정목을 만납니다.
여시골산까지는 약730m의 가파른 오르막이 남았습니다.
▼ 이정목에서 여시골산까지 이동하는 대간길은 코가 땅에 닿을듯한 가파른길입니다.
▼ 가파름이 심하다보니 진행속도가 느리고 정체가 심하게 일어납니다.
▼ 잡목 사이로 가파른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 여시골산 직전에 다소 완만하 오르막이 나타납니다.
▼ 10:35 여시골산 정상에 있는 이정목입니다. 산행시작 50분만에 도착했습니다.
▼ 첫번째 정상인 여시골산 정상석입니다.
(여시골산)
예부터 여우가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시는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다.
여시골산[약 620m]은 향천리 묘내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5㎞,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윗어둔이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1.7㎞ 떨어진 곳에 있는
백두대간 줄기이다.
김천시와 영동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능선은 여시골산 일대를 중심으로 추풍령과 괘방령이
있는 북쪽 지역에서는 700~800m 이하의 비교적 낮은 능선을 이루고,
여시골산 남쪽으로 황악산(黃岳山)·형제봉(兄弟峰)·삼도봉(三道峰)을 지나는 지역에서는
1,000m 이상의 고봉과 800~1,000m 높이의 능선을 이룬다.[네이버 지식백과]
▼ 여시골산 이후부터는 가파르지 않고 순한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 10:51 여시굴 옆에 설치된 설명판입니다. 산행시작 55분여가 흘렀습니다.
▼ 여시굴(여우굴)의 실제 전경입니다.
▼ 여시골 이후 순한오르막이 정상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 11:11 여시굴을 지난후 얼마가지 않아 두 번째 목적지인 운수봉에 도착합니다.
운수봉은 직지사 운수암의 뒷산입니다.
이곳에서 북암마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고 좀 더 나가면 운수암에서 올라온 길과도 만납니다.
▼ 운수봉 정상에 있는 국가지점 번호입니다.
국가지점 번호는 전국을 가로,세로로 나누어 표기하며, 긴급사항이나 구조 요청시 활용된다고 합니다.
▼ 운수봉 정상에서 황악산 정상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1:17 운수봉 정상에서 약6분 후에 운수암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운수암 삼거리에서 정상까지는 2.3km가 남았습니다.
▼ 운수암 삼거리에 있는 국가지점번호 라마4367 9253입니다.
▼ 11:36 정상 1.7km전방 이정목을 통과합니다.
▼ 정상 1.7km 전방 이정목과 함께 있는 국가 지점 번호입니다.
▼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이 지속됩니다. 제법 찬바람이 얼굴을 스칩니다.
▼ 11:43 황악산 정상 1.4km이정목을 지나갑니다. 산행 시작 약 1시간45분 여가 흘렀습니다.
▼ 정상 전방 1.4km 이정목이 있는 곳부터는 잔설이 얼어붙어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11:51 국가지점번호 라마 4285 9171지점을 지나갑니다.
▼ 11:51 정상 1.07km전방입니다.
▼ 11:56 산행시작 딱 한시간이 걸린 곳이 정상 1.1km 전방 이정목이 있는 곳입니다.
▼ 11:17 전망대를 만납니다. 조망은 그렇게 좋지가 않습니다.
▼ 정상쪽으로 보아도 잔설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 12:09 정상 610m전방 이정표식을 지나갑니다.
▼ 12:16 바람에 의해 쌓여진 잔설을 이곳에서만 잠시 볼 수 있었습니다.
▼ 이곳부터는 다소 급경사에 얼음이 얼어 정상으로 이동에 다소 부담을 느낍니다.
▼ 12:25 능선 전망대에 조그마한 돌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 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정상 방향 헬기장의 인파입니다.
▼ 12:28 정상 못미쳐 바람이 닿지 않는 적당한 장소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산행 시작 약 2시간 30여분이 흘렀습니다.
▼ 13:04 약 35분간의 점심식사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능선을 조망해 봅니다.
형제봉, 신선봉, 망월봉등이 조망됩니다.
▼ 중식장소에서 바라본 우리가 나아갈 멀리 신선봉(944m) 전경입니다.
▼ 중식장소에서 바라본 김천 직지사 전경과 사하촌의 직지공원 전경입니다.
▼ 중식 장소옆의 암릉을 찍어봤습니다.
▼ 중식장소에서 바라본 황악산 이후의 진행방향인 형제봉(1,035m)과 신선봉(944m) 전경입니다.
▼ 황악산 정상에도 인파로 붐빕니다.
▼ 13:08 황악산 정상 직전의 헬기장 전경입니다.
헬기장 뒤로 보이는 산길은 곤천산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 헬기장에 있는 이정표입니다. 정상은 바람재 방향입니다.
▼ 13:10 정상의 삼각점에 도착했습니다. 산행시작 산행시작 3시간15분이 걸렸습니다.
▼ 정상석 전경입니다. 최근에 새로 설치된 것 같습니다.
▼ 정상에서 단체 입니다.
▼ 정상부근에서 직지사로 하산하는 길인데 폐쇄되어 있습니다.
▼ 13:31 정상을 떠난지 600m지점에 형제봉이 있고, 계속해서 바람재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이정목 바로 옆에 있는 국가 지정번호입니다. 황악산 9번지점입니다.
▼ 형제봉은 황악산의 두번째 봉우리입니다.
▼ 형제봉에서 바라본 우리가 진행해야 할 능선 전경입니다.
▼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신선봉(944m), 그 다음 낮은 봉우리가 망월봉(597m)입니다.
▼ 형제봉에서 바라본 직지사 전경과 사하촌 전경입니다.
이곳에서도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길이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 13:45 바람재 삼거리까지가 쾌방령에서 백두대간길로 이어지고 우리는 신선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 나아가야 합니다. 산행시작 3시간50분이 걸렸습니다.
▼ 바람재 삼거리에서부터는 다소 내리막길이 이어집니다.
▼ 진행방향 앞에 신선봉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 13:53 황악산 13번 지점인 국가지점번호표시점을 지나갑니다. 산행시작 약 4시간이 흘렀습니다.
▼ 14:04 국가지점번호 한구간 통과시 약 11분이 지나갑니다. 황악산 13번지점입니다.
▼ 14:06 황악산 13번 지점 부근에서 바라본 황악산과 형제봉 방향의 능선입니다.
▼ 14;11 신선봉(944m)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석은 없고 이정목에 정상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 신선봉부터는 급한 경사길의 내리막이 이어집니다.
▼ 14:19 육산이어서 그런지 바위만나기가 힘들어서.....
▼ 잘 만들어진 나무조각입니다.
▼ 14:29 급한 내리막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 14:49 직지사로 가는 지름길인데 폐쇄시킨 상태인데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폐쇄된 길입니다.
▼ 폐쇄된 길 옆에 있는 국가지점 번호 황악산 15번 지점입니다.
▼ 직지사 폐쇄된 지름길에서 망월봉방향으로 오르막을 올라갑니다.
▼ 14:55 망월봉(597m)에 도착하여 좌측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망봉에서부터 급한 경사길로 하산하기 시작합니다.
▼ 지겨운 계단길이 이어집니다.
▼ 지속되는 내리막 계단길에 무릎이 좋지 않은 회원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 계단이 끝나고 걷기 쉬운 길을 이어집니다.
▼ 15:28 산길이 끝나고 포장 임도를 만납니다.
▼ 포장 임도를 따라 직지사 방향으로 하산을 계속합니다.
▼ 15:30 직지사 부도군을 만납니다. 절의 역사만큼 부도 수가 많습니다.
(직지사 부도군)
직지사에는 크게 네 군데에 부도군이 있었다.
직지사 부도군 1은 극락전 뒤편 부도 밭에 위치하였으며 13기의 부도와 비좌(碑座)가 있었다.
직지사 부도군 2는 직지사 입구 북암마을 안 솔밭에 4기가 있었다.
직지사 부도군 3은 산내 암자인 백련암 가는 산로 입구인 네은암골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남쪽에 터를 닦고 2기의 부도와 3기의 부도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직지사 부도군 4는 극락전 남서쪽에 있는 임시 주차장인 ‘서전뒤에’ 골짜기 북쪽 산기슭에
2기가 있었다.
2010년 직지사 극락전 뒤편 제2주차장 부지에 5,000㎡ 규모로 조성된 부도전으로 이전되었다.
직지사 부도군 1의 부도 중 두 기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며 나머지는 전형적인 종형(鐘形)이다.
부도의 대좌(臺座)가 마련되어 있고 팔각원당형의 높이는 203㎝, 208㎝이며 종형 부도는 평균 150㎝
전후이다.
직지사 부도군 2 중 1호는 종형 부도로서 ‘추담당탑(秋潭堂塔)’이라는 부도명이 있고,
총 높이는 184㎝이며 하부에 앙련(仰蓮)이 장식되어 있고 상부에 보주(寶珠)가 있다.
2호도 종형 부도로 총 높이는 136㎝이다. 3호도 종형 부도로, 총 높이 122㎝이다.
4호는 상부 보주가 결실된 종형 부도로 총 높이는 58.5㎝이다.
직지사 부도군 3의 1호는 ‘능파당탑(陵波堂塔)’이란 부도명을 가지고 있으며,
하부에는 앙련이 장식되어 있고, 상부에는 옥개(屋蓋)를 얹혀 놓았으며, 총 높이는 78㎝이다.
2호는 석종형 부도로 총 높이 113.5㎝이며, 3호 역시 석종형 부도로 총 높이 93㎝이다.
4호는 앙연의 44㎝의 대좌를 가진 종형 부도로, 총 높이는 117㎝이며, 5호는 종형 부도로 총
높이 143㎝이다.
직지사 부도군 4의 1기는 석종형 부도로 27㎝의 팔각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부도신(浮屠身) 받침은
원형의 연화(蓮花)가 양각되어 있다.
부도의 총 높이는 152㎝이며 상부에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또 다른 1기는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모두 갖추고 있다.
기단부 높이는 90㎝이며, 탑신부는 좌우보다 상하가 짧은 구형(球形)으로 직경 98㎝, 높이 66㎝이며,
옥개의 상륜부는 높이 86㎝이며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직지사의 부도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으로는 『김산직지사중기(金山直指寺重記)』[1776]와
『황악산직지사사적(黃岳山直指寺事蹟)』[1836]이 있다.
『김산직지사중기』에는 부도 위치가 설명되어 있다. 이 사적기에 의하면, 극락전 뒤편에 12기,
부도암에 2기, 능여암에 4기, 태봉에 2기, 묘직암에 1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도 당호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편 『황악산직지사사적』의 ‘영자대사당명’이라는 부분에서 부도의 당호를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데, 능여조사부도, 벽련당 계환대사 부도, 지원당 명례화상 부도, 모운당 진언대사 부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현존하는 부도는 지원당, 모운당 부도밖에 없다.
직지사 부도군 1의 부도 중 부도명을 알 수 있는 것은, ‘운암당(雲巖堂)’, ‘사명당(泗溟堂)’,
‘모운당대사탑(慕雲堂大師塔)’, ‘지원대사탑(智圓大師塔)’ 등 4기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마모가
심하거나 부도명이 없다.
직지사 부도군 2 중에 2호는 전면에 자액(字額)을 마련하고 부도명을 새겼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할 수 없다. 3호는 ‘막□당선사탑(漠□堂禪師塔)’이라는 부도명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부도군을 지나자 천불선원이 나타납니다.
▼ 은선암쪽에서 내려왔고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 직지사 칠불선원 전경입니다. 칠불선원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일반인 통제구역입니다.
▼ 15:34 칠불선원 입구에 있는 석교입니다.
▼ 칠불선원을 나오면서 뒤돌아본 선원전경입니다.
(선원이란?)
우리 나라의 선원은 통일신라 말에 선종(禪宗)이 전래된 이후 설치되어, 승려 양성에 중요한 수행기관으로서
큰 구실을 하여 왔다. 사찰 내에서는 선당(禪堂)·선방(禪房)·좌선당(坐禪堂)이라고도 한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 당시의 비구(比丘)들이 우기(雨期) 이외에는 한 곳에 살지 않고 탁발(托鉢)을 계속하다가,
우기가 되면 작은 벌레나 초목들을 밟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외출을 금하고 한 곳에 머물며 안거(安居)한
것에서 연유한다.
당시에는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에는 좌선(坐禪)을 하거나 교리(敎理)를 연구하게 되어 있었다.
그 뒤의 부파불교 및 중국불교에서는 불교 교단이 일정한 사원과 토지 등을 소유하고 그 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탁발을 꼭 하지 않아도 되었고, 연중 사원에 상주하며 선(禪)과 경론(經論) 등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한 차례 더 동안거(冬安居)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안거의 전통을 선종에서 이어받아 선원은 중요한 수행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 말에 선종이 생겨남과 동시에 전국에 수많은 선원이 세워졌고,
여름과 겨울의 안거를 인정하여 실시하되 하안거(夏安居)를 정법(正法)이라 하여 승려의 나이를 뜻하는 법랍(法臘)은
이로써만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선원의 교육목표는 불교의 진리를 좌선을 통해서 내관(內觀)하고 스스로 살펴 자기의 심성(心性)을 철견(徹見)
함으로써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며 중생제도를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일정한 교육기간이 정해져 있는 강원(講院)과는 달리 선원은 평생교육기관으로서의 의의가 더 컸다.
더욱이 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이 수선사(修禪社)를 세우고 정혜쌍수(定慧雙修)의 학설을 주장한
이래,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강원은 선원의 예비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어 강원수료자가 선원에 들어가
평생수행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선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강원의 사교과(四敎科)와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여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20세 이상이 된 자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하안거는 4월 15일에 시작하여 7월 15일에 끝내고, 동안거는 10월 15일에 시작하여 1월 15일에
끝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결제안거(結制安居) 90일을 법랍 1세로 하고, 법랍은 하안거의 수에 의하여 계산하도록 하되,
다만 본사(本寺)의 허락을 얻으면 동안거도 법랍에 가산할 수가 있었다.
선원의 조직은 강원의 조직과 거의 같다.
선원은 방장(方丈) 또는 조실(祖室)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는데, 그 아래 책임자로서 선주(禪主)를 둔다.
이 선주는 선덕(禪德) 또는 수좌(首座)라고도 하며, 방장이 겸하는 경우도 있다.
선주 밑에는 내호법반(內護法班)으로 입승(立繩)·유나(維那)·시불(侍佛)·병법(秉法)·헌식(獻食)·사찰(司察)·
시경(時警)·시자(侍者)·간병(看病)·지객(知客)·정통(淨桶)·정두(淨頭)·삭두(削頭)·마호(磨糊)·종두(鐘頭)·
봉다(奉茶)를 두고, 외호법반(外護法班)으로는 원주(院主)·별좌(別座)·미감(米監)·서기(書記)·원두(園頭)·
채공(菜供)·공사(供司)·부목(負木) 등을 두었다.
특수조직으로는 조실·열중(悅衆)·선백(禪伯)·지전(知殿)·지객·원두·간병·반두(飯頭)·정인(淨人)·서기·
전다(煎茶)·채두(菜頭)·자두(紫頭)·별좌·도감(都監)·원주·화주(化主) 등을 둔다.
이들 중 중요 직책의 임무를 간추려 보면 선주는 정법을 거양(擧揚)하며 선원의 모든 일을 지휘한다.
수좌는 선주를 보좌하고 참선과 염불을 지도하며 선주가 출타할 때에는 이를 대리한다.
입승은 선중(禪衆)을 통괄하고 유나는 내외호법원(內外護法員)을 돕고 사중(寺中)의 일체 집무를
사찰한다. 시불은 법요(法要)를 집행하고, 병법은 불공과 시식(施食)을 담당하며,
사찰은 5일간씩 윤번제로 하여 묵언규칙(默言規則)을 엄히 준수한다.
시경은 일정한 시간마다 고성으로 때를 알리고 대중의 도심(道心)을 견고하게 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선원에서의 하루 수행시간은 8시간 이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조선승려수선제요 朝鮮僧侶修禪提要>에 의하면 해인사 퇴설당(堆雪堂) 선원은 하안거 때 8시간,
동안거 때 11시간, 월정사 및 범어사의 선원은 하안거·동안거 모두 10시간씩, 대원사(大源寺)는 8시간,
파계사(把溪寺)는 6시간으로 되어 있다.
수행방법은 ‘자선자수(自禪自修)·자력자식(自力自食)’을 기본으로 하며, 안거는 좌선을 위주로 하되
선리(禪理)를 연구하고 대소승률(大小乘律)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선원수행의 습독서(習讀書)로는 ≪금강경≫·≪능엄경 楞嚴經≫·≪선요 禪要≫·≪절요 節要≫·
≪도서 都序≫·≪서장 書狀≫·≪치문 緇門≫·≪자경문 自警文≫·≪초심 初心≫·≪염송 拈頌≫ 등이
채택되었고, 권장 경전으로는 ≪화엄경≫·≪원각경 圓覺經≫·≪법화경≫·≪기신론 起信論≫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또한, 조실의 설법 중에는 일체의 질문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의심이 있을 때는 설법이 끝난 뒤
방장실(方丈室)에 들어가 질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선원의 청규(淸規)는 엄하여 파계(破戒)·사행(邪行) 등 모든 폐습이 일체 엄금된다.
안거기간 중에는 일체 동구(洞口)에 나갈 수 없으며, 오직 부모나 스승의 중병이나 사망시,
그 밖의 부득이한 일이 있을 때만 조실의 허락을 얻어 외출할 수 있다.
만약 선원 자체에서 정한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세 차례 권유하고 이에 불응하면
퇴방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결제의 시작 7일, 해제 직전의 7일, 결제와 해제의 중간인 반산림(半山林) 때의 7일 동안은
전혀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며, 매월 1일과 15일에는 조실이 상당(上堂)하여 설법을 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재에도 거의 그대로 준수되고 있으나, 옛날처럼 강원의 대교과를 마친 뒤 선원에
들어가는 전통은 현재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강원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선원에 들어가서 20하안거를 수행하고 법랍이 20년 이상 되어야만
얻을 수 있던 대선사(大禪師)·대교사(大敎師)의 당호(堂號)나 10년의 법랍이 있어야만 될 수 있는
주지의 자격은 현재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선원은 해인사·범어사·통도사·통도사 극락암·봉암사(鳳巖寺)·송광사·망월사·
상원사(上院寺)·내원사·석남사(石南寺)·대원사 등에 있으며, 이곳에서 공부하는 수행승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불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그 정진의 기강이나 노력, 시간 등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참다운 불교수행처가 되고
있는 곳이 우리 나라의 선원이기도 하다.[네이버 지식백과] 선원 [禪院]
▼ 직지사 황악루로 종루를 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직지사 비로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전경입니다.
▼ 직지사 대웅전 전경입니다.
(직지사)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자리한 직지사는 선산의 도리사와 함께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니
신라 눌지왕 2년(418년)의 일이다.
이때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처음 창건하였을 때는 지금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절 이름에서 나타나듯 직지사는 선종사찰이다. 불교의 종파는 크게 나누어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지고
교종은 불교의경전에 의지해 깨달음을 구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에 의지해 부처를 이루려는 종파이다.
선종 집안의 가풍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르쳐 본래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것으로 여기에서 ‘직지’ 두 글자를 따서 사찰로 삼은 것이다.
직지사는 창건된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 자장스님에 의해서,
그리고 경순왕 4년(930년) 천묵대사에 의해서 중창된 기록이 있고 그 후 능여대사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태조 19년(936년)에 사세를 더욱 키우게 된다.
신라 경애왕 4년(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이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갔다가 팔공산전투에서 신숭겸·김락 장군을 잃고 자신도 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하게 된다.
이 때 직지사에 있던 능여대사의 도움을 받게 되고 장차 말띠 해에 큰 일이 이루어진다는 예언을 얻게 되는데
역시 그 말대로 말띠 해인 934년부터 후백제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줄곧 큰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조선시대 들어와 임진왜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2대왕인 정종의 태를 묻은 태봉이 대웅전 뒷봉우리에 모셔지는 인연으로
수호사찰로 지정되면서 예전의 규모를 지탱해 나갔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직지사는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승군의 지도자 사명당의 출가사찰이고 그가 30세 때에는 이 절의 주지를
하기도 했다. 왜군은 이런 이유로 혹독한 보복을 가해 대웅전 앞에 있던 5층 목탑을 비롯해 40동의 건물이
불타고 모든 유물들이 유실돼 버렸다.
상탑을 거느린 직지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이 지난 선조 35년(1602년)에 새로 지었고 영조 11년(1735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대웅전 안에는 1735년 중건 당시의 벽화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용을 탄 관세음보살, 구름을 탄 신선,
문수동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세 분 불상 뒤에는 길이가 6m가 넘는 세 점의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는데 영조 20년(1744년)에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적색·녹색·황색을 주로 사용하여 차분하고 안정감이 있는 배색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세부묘사도 아주 치밀하여 영·정조시대의 대표적 걸작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670호이다.
세 분 부처님이 앉아있는 수미단은 ‘순치 8년 신묘 4월’이라는 먹으로 쓴 한문글씨가 남아있어 임진왜란 후인
1602년에 중창된 후 1651년에 수미단을 다시 손댔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735년에 다시 중건된 기록이 뚜렷함으로 수미단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점은
수미단 조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수미단은 정면의 폭이 10m가 넘는 장방형으로 옆면은 2m 가량 된다. 하대·중대·상대의 3단구도에 다시
보단을 따로 설치하였는데 적색·청색·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대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궁글린 하대목 4개를 서로 연결하여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는데
족대의 배치나 족대 사이의 용조각 등이 없어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하대목의높이가 33cm이고 두께도 알맞아 매우 튼실해 보인다.
중대는 3단으로 구성하였는데 반원형 띠살 같은 가는 나무로 단을 나누고 각 단도 역시 그런 나무로
여러 칸을 나누었다.
거기에 바깥쪽으로 다시 둥근 기둥을 양쪽 끝에 세우고 대나무 마디처럼 깍은 작은 나무 기둥들을
안쪽으로 2개씩 4개를 세웠다. 중앙에 있는 2개의 기둥을 자세히 보면 용이 일어서 있는 모습으로
기둥을 조각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곧 용머리를 부처님 쪽으로 두고 등을 바깥쪽으로 향한 모습을 일직선 기둥으로 하여 세움으로서
부처님을 지키는 호위의 역할과 불법을 향한 마음을 함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중대 하단에는 수중생물들이 연꽃 속에 숨거나 나타나며 조각돼 있다.
특이하게도 쏘가리와 조개가 보이는데 이는 다른 사찰의 수미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쏘가리는 한문으로 ‘궐어’라 부르며 우리나라 하천의 맑은 물에 살면서 작은 물고기나 새우 등을 잡아먹는다.
궐어의 ‘궐’이 궁궐의 ‘궐’과 음이 같아서 쏘가리 그림은 과거에 급제하여 대궐에 들어가 벼슬살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민물고기 종에서는 가장 힘이 좋은 종류여서 수중의 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수미단에는
동물의 왕인 사자, 꽃의 왕인 모란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개는 수중생물이지만 잉어처럼 자손창성의 의미로도 써 왔다.
이는 화재로부터 법당을 보호하고 신도들의 자손창성을 기원하는 의미를 함께 포함한 것이다.
중대 하단 오른쪽 끝에서부터 2째칸에는 연꽃 위에 파랑새가 조각돼 있다.
이 파랑새는 원효대사와 관계가 있으니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해안 양양 땅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하게 된다.
그 후 원효대사도 이곳에 관세음보살을 참배하러 오는 도중에 산 밑에서 흰 옷 입은 여인과 말을 주고받게 된다.
다시 길을 가다가 빨래하는 여인과도 문답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스님에게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숨어 버린다.
원효대사는 그 소나무 아래에서 신 한 짝을 보았는데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자리 앞에 똑같은 신 한 짝이 있어
앞의 여인들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파랑새는 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해 지성으로 기도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게 된다. 곧 좋은 징조를 알리는 상징으로 쓰게 되고 자연히 수미단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중대의 중단부분에는 땅 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왼쪽부터 첫째 칸에는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이 새겨져 있다.
용이 수미산 밑의 구름 사이로 여의주를 쫓으며 솟아오르고 큼직한 바위들로 둘러싸인 도리천에는 탑과
건물들이 숲속과 바위 밑에 배치돼있다.
도리천 위로는 바로 허공중에 설치된 하늘세계이므로 중대 상단은 용만 배치하게 된다.
이 중단 부에는 나비와 잠자리도 나타나고 이는 불교의 최종목표인 해탈과도 관계가 있다.
나비나 잠자리나 애벌레 기간을 거친 후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날개가 달린 성충이 되어 날아다니게 되는데
이를 불교의 수행에 빗대어 자유로운 해탈을 얻은 중생으로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곧 모든 중생들도 올바른 수행을 통해 자유로운 해탈을 맛볼 수 있다는 상징성을 번데기에서 나비나
잠자리가 나온 것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중대 중단 오른쪽 끝에는 희한한 조각이 하나 있다.
푸른색의 병의 입구로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물을 따르는 주둥이로는 용의 몸이 빠져나오고 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동화적인 풍경인데 이 조각의 정체는 분명하지가 않다.
우선 선가의 화두 중에 ‘병 안의 새를 꺼내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화두는 일종의 문제인데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문답을 말하며 이를 참선하는 수행자가 항상 염두에
두고 궁구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항상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부처님의 성품)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과 어긋남으로 수행자는 이 화두를 잡고 앉아 본질을 꿰뚫으려고 하고 이 문제를
완전히 극복한 것을 ‘화두를 타파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화두들이 1700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앞에 말한 ‘병 안의 새’이다.
병을 깨지 않고 어떻게 새를 꺼낼 것인가? 병 안에 있는 것이 새이든 용이든 상관없이 이 화두를
타파한 내용이 바로 병에서 나오는 용 조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중생이 자기의 본래성품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깨침의 순간을 병에서 나오는 구름과 용,
그래서 걸림없이 날아다니는 용으로 나타낸 것으로 믿어진다.
중대 상단은 구름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용의 모습을 담았다.
용을 정면에서 본 모습으로 새기기도 하고 측면 모습으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는 수미산 정상 도리천 위의 하늘세계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시 그 위에 부처님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대의 정면 조각은 밑에서부터 수중세계, 지상세계, 하늘세계로 나누고 거기에 맞는 생물들을 배치하고
그 위에 다시 부처님을 모신 형태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세계관을 축소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수미단 좌측면과 우측면은 중대 부분에 양쪽 끝으로 세로로 나눈 칸을 두고 가운데 공간을 3단으로
나누었다.
정면에 나타난 생물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 배치돼 있다.
부처님 좌대 밑에 가리개 겸 꾸미개로 설치된 보단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의미로 여러 가지 꽃이
어울려 조각되었고 중앙에는 부처님과 법당 수호의 역할로 용을 모시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15:47 황악산직지사 일주문입니다.
▼ 15:50 직지사 산문 직전의 석교를 지납니다. 산행 시작 5시간55분이 흘러갑니다.
▼ 직지사 산문 안쪽에는 '각성임천고치(각성임천고치)'라고 쓰여 있습니다.
▼ 직지사에 대한 설명 현판입니다.
▼ 직지공원 전경입니다. 주차장에 도착하고 오늘 산행을 마칩니다.
'경북산 > 경북.아 ~ 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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