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산행은 휴가를 겸한 일정으로
산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최근에 코스가 새로 개설되었다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인
일본의 큐슈올레길 탐방을 주목적으로 하고 길을 떠났다.
큐슈는 일본의 4개 큰섬(홋가이도, 혼슈, 시고쿠, 큐슈)중의 하나로
우리에겐 벳푸온천과 아소활화산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특히 큐슈는 내가 살고 있는 부산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어 가격이 저렴한 부관페리로는
저녁 10시에 승선하여 다음날 아침이면 후쿠오카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고속 여객선인 비틀이나 코비를 이용하면 3시간 만에 후쿠오카나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이번 여행은 아침 8시45분에 출항하는 코비를 이용하여 후쿠오카로 향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을 큐슈의 새로 개설된 올레길 중 카라쓰 코스를 탐방하기로 정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통상적으로 방문하는 큐슈 동쪽의 벳푸지역과는 반대쪽으로 큐슈의 서쪽에
있고, 한국쪽 방향의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을 위해 전국 160개 지방 다이묘(영주)들의
군사들이 진영을 설치했던 곳으로 유명한 가라쓰(唐津)지역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가라쓰라는 지역은 도자기와 히젠나고야라는 성터로 유명한 고장이기도 하다.
큐슈의 올레길은 현재 4곳이 개설되어 있고, 이번에 내가 탐방한 코스는 가장 최근에
개설된 가라쓰코스로 약 11.2km의 올레길이고,
나머지 3곳은 고코노에 야마나미코스 약12.2km, 기리시마 노켄코스 약 11km,
다카치호코스는 약 12.3km 정도 된다고 한다.
가라쓰의 올레길은 제주의 올레길과 꼭 닮은 해안가의 코스로 제주도와 큐슈간에
자매결연을 맺고 코스안내 리본과 안내 표식을 제주 올레길과 동일하게 새용하고 있으며,
히젠 나고야 성터를 중심으로 400여년간 역사와 문화의 옛길로, 나고야 성터 주변에있는
195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전국에서 모은 다이묘들의 군사 진영터를
두루 거치는 옛길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의 옛길이므로 일본인이 느끼는 감정과 한국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절대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올레길 탐방은 미치노에키 모모야마텐카이치 특산물 판매장을 들머리로 마에다 도시이애
진영터, 후쿠다 오리베 진영터, 히젠 나고야 성터, 가라쓰도자기 히나타가마, 하토마사키
소년자연의 집, 하토마시키 산책로, 하토마사키 해수욕장의 소라구이 포장마차를
날머리로 하는 탐방거리 약 11km에 3시간30분이 걸린 트레킹길이었습니다.
무더위에 식수 공급이 어려워 무지 고생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임진왜란의
일본국 진영터를 바라보면서, 현재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틈바구니에 있는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아귀다툼이나 하는 위정자들의 책임없는 행동들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올레길 탐방 이후에는 일본 3대 온천지역이라고 하는 우레시노 온천지역과, 일본 국립공원인
운젠 활화산지역,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종전으로 이끌었던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
투하지역이었던 나가사키 지역의 전쟁 평화공원을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이드의 이야기에 의하면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당시 히로시마와 함께
키타큐슈에 투하될 에정이었지만 일기불순으로 당시 항공기 사정으로 시야가 불투명해
나가사키에 투하했다고 합니다.
상세 탐방 일정은
8/4(목) 부산에서 소형쾌속선인 코비를 타고 후쿠오카 도착
올레길코스가 있는 가라쓰 이동중 가라쓰 부근의 해저식당(만보(萬坊)수중식당)에서
이곳 별미인 오징어 회정식(아래 사진 참조)으로 점신식사 후
큐슈 올레길 탐방(약11km, 3시간반),
우레시노 이동후 우레시노 그랜드호요 온천호텔 투숙
8/5(금) 그랜드 호요 온천호텔에서 조식후 일본 국립공원인
운젠화산의 운젠소지역 등 탐방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에서 오리지날 나가사키 짬뽕으로 중식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게한 원자폭탄 투하지역인 나가사키 평화공원 탐방
후쿠오카 이동후 캐널시티에서 석식후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닛세이 비지니스 호텔에서 투숙
호텔부근 포장마차에서 즐거운 뒷풀이 시간
8/6(토) 호텔 조식후 일본 학문의 신을 모신 다자이후텐만궁 탐방
유메타운에서 중식 및 쇼핑후
큐슈 하카타항(후쿠오카항)발 부산행 코비 승선
부산 도착후 해산
(큐슈 요약)
일본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섬, 또는 그 섬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북부지역에는 쓰쿠시 산지[筑紫山地]가 동서로 달리고, 그 남쪽에 지쿠고강[筑後川]이
형성한 쓰쿠시 평야가 펼쳐진다.
중부 화산지역은 구니사키 반도[國東半島]에서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에 미치며,
구주[九重]·아소[阿蘇]·운젠[雲仙] 등 화산이 분출하고 온천도 많다.
규슈 산지는 소보산[祖母山:1,757m]·구니미산[國見岳:1,739m] 등이 솟아 있는 장년기산지로
남·북 규슈의 교통장애가 되고 있으며, 구마강[球磨川]·고카세강[五ケ瀨川] 등 수량이 풍부한
하천들이 많아 규슈의 전원지대가 되었다.
남부 화산지역은 미야자키현 남부와 가고시마현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화산회(火山灰) 대지인
시라스 대지[シラス臺地]를 넓게 분포시키고,
기리시마산[霧島山]·사쿠라지마섬[櫻島]·가이몬산[開聞岳] 등이 분출하는 기리시마 화산대는
사쓰난 제도에서 오키나와 제도로 이어진다.
기후는 전국에서 가장 온난다우하며,
특히 규슈 산지 이남은 연평균기온 16℃ 이상의 온난지대가 되고 해안부에서는 아열대성 기후를
보여 빈랑(檳榔)·소철(蘇鐵) 등이 무성하다.
그러나 규슈 산지 이북에서는 1월 평균기온이 4.7~5.3℃를 보여 눈은 쌓이지 않을 정도로
몇 차례 내린다.
강수량은 일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연안을 제외하고는 전역이 연간 1,500mm 이상이고,
남부에서는 2,000~3,000mm 정도이다.
대륙에 가까운 규슈 북부 지방은 일찍이 대륙문물에 접하기 쉬웠기 때문에,
야마토지방[大和地方:현재의 奈良縣]과 함께 일본 고대문화인 야요이식[彌生式] 문화의 2대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고,
그 뒤 대륙과의 사이에 정식거래가 이루어지자 대외교통의 요충이 되어왔다.
13세기 후반에는 2차에 걸쳐 원(元)의 침입을 받았으며,
에도[江戶]시대에는 조총(鳥銃)·그리스도교 등 유럽 문물이 이곳을 거쳐 전래되어 일본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네이버 지식백과] 규슈 [九州(구주)]
(후쿠오카 개략)
하카타만[博多灣]에 면한 현청소재지이다. 규슈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추적 관리도시이다.
일찍이 다자이후[大宰府:일본의 규슈·이키[壹岐]·쓰시마[對馬]를 관할하고 외교·국방을
맡았던 관청]의 외항, 견수(遣隋)·견당사(遣唐使)의 기지로서 번영하였고,
15∼16세기에는 명(明)나라와의 무역과 성읍으로서 번영하였다.
메이지[明治] 때는 후쿠오카와 하카타[博多]가 합병되었고,
쇼와[昭和] 때는 기타큐슈[北九州]의 중화학공업과 지쿠호[筑豊] 등의 석탄광업의 발전에
따라 규슈 제일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공업은 화학·방적·기계·인쇄제본·식료품 공업 등 외에 하카타 견직물·하카타 인형 등의
전통산업도 활발한 상업도시이다.
하카타 어항은 서일본의 원양어업기지로서, 어획량은 전국의 2∼3위를 차지한다.
철도는 산요신칸센[山陽新幹線]·가고시마본선[鹿兒島本線]이 통하고 지쿠히[筑肥]를
비롯하여 4개 지선이 분기하며,
항공노선은 국내 각지를 비롯하여 홍콩·타이베이[臺北]·서울·부산 등지와 연결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쿠오카 [Fukuoka, 福岡(복강)]
▼ 8/4 07:43 부산 국제여객터미날에서 08:45분 코비를 타기 위해 준비중입니다.
▼ 8/4 07:43 휴가철 주말을 맞아 일본(대마도, 큐슈)으로 나가는 여행객들로 붐비는
국제여객터미날 대합실입니다.
▼ 8/4 09:27 부산발 후쿠오카행 코비 탑승후 찍은 승선권입니다.
▼ 8/4 11:51 후쿠오카 도착후 하선시 타고온 코비호를 찍었습니다.
부산 출발 후 약 3시간만에 후쿠오카에 도착했습니다.
▼ 8/4 12:05 후쿠오카 항에 설치되어 있는 일본스러운 웰컴보드입니다.
▼ 8/4 12:13 입국 수속후 바라본 터미날 맞은편의 하카타항 센타빌딩 전경입니다.
▼ 8/4 12:13 하카타항에는 호화유람선도 정박해 있었습니다.
▼ 8/4 14:02 올레길 가는 도중 가라쓰 부근의 수중으로 만들어진 만보(萬坊)식당입니다.
수상 건축물 아래 수중 유리벽으로 수중 건물이 들어있어 수중유리를 통해 바다속의
물고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가현(佐賀縣) 요약)
규슈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현의 북동부는 세후리 산지(脊振山地)가 후쿠오카 현과의 경계를 이루며,
남동부는 후쿠오카 현까지 계속 되는 지쿠시 평야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히가시마쓰우라 반도(東松浦半島)에서 다라다케(多良岳)에 걸친 현 서부는 용암 대지와
완만한 구릉지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북동부의 세후리 산지는 삼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공림으로 임업이 주요 산업이 되고
있다.
현재의 가라쓰 시 남부나 다쿠 시(多久市) 주변의 구릉지대에서는 석탄 채굴이 번성했으나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남동부의 지쿠시 평야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곡창지대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지만
근래 들어서 농산물이 다양화되었다.
현 서부는 숲과 전답이 많으며 각 지역의 특징에 맞춘 다양한 산업 형태를 볼 수 있다.
현 남부의 다라다케가 휴화산인 것을 제외하면 현내에 화산은 없다.
그렇지만 다수의 온천이 입지하여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일반적인 태풍의 진로에 가깝기 때문에 태풍과 홍수 피해는 잦은 편이다.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 비교적 가깝지만 해상운송은 여객에서는 하카타 항(후쿠오카 현)
이나 기타큐슈 항(후쿠오카 현), 나가사키 항(나가사키 현) 등에 밀려 발달하지 못하였다.
화물은 이마리 항(伊万里港)이 규슈 3위의 컨테이너 취급량을 기록한다.
항공 면에서는 1998년에 개항한 사가 공항이 사용되고 있지만,
여객에서는 근방의 후쿠오카 공항이나 나가사키 공항에 비해 취항 도시 수나 탑승객
면에서 많이 적다.
고대에 사가 현과 나가사키 현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히젠 국으로 불렸다.
현재의 이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이어진 것이다.
고대에 벼농사 문화로 번영하였고 가라쓰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요시노가리 정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까지 100여개의 가문이 존재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때 겐카이나다를 따라 마쓰라토라 불리는 사무라이 씨족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류조지 씨는 히젠 국과 지쿠고 국 및 히고 국과 지쿠젠 국의
일부까지 지배력을 확장하였다.
다이묘 류조지 다카노부가 사망한 후에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정치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였고 1607년에 류조지 씨의 모든 영지는 나베시마 씨가 지배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 사가 번은 3개의 지번인 하스노이케 번, 오기 번, 가시마 번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의 사가 현 영내에는 가라쓰 번과 쓰시마 후추 번의 영토가 있었다.
사가 번과 그 지번들은 계속해서 나베시마 씨가 통치하였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방어 비용이 증가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되었고 교호의 대기근으로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1828년에는 태풍이 내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가 번은 광대한 아리아케 해의 매립지 덕분에 1840년대에 200년
전의 두 배에 이르는 67만 석으로 증가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영지의 재정을 건전하게 하기 위해 관리의 수를 줄이고
이마리 도자기, 녹차, 석탄과 같은 지역 산업을 장려하였다.
또한 국제항인 나가사키 항과 근접한 덕분에 해외로부터 반사로와 증기 기관차와 같은
신기술을 도입하였다.
▼ 8/4 14:02 수중식당 만보로 가는 교량위에서 바라본 가베섬(加部島) 해안 전경입니다.
▼ 8/4 14:05 큐슈섬에서 가베섬으로 이어지는 교량입니다.
가베섬에서 대한해협쪽으로 이키섬, 대마도가 떠있고 부산쪽으로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 8/4 14:08 만보식당에서 점심식사로 먹은 오징어회정식 코스 (2,860엔)입니다.
한화로 약 32,000 원정도가 됩니다.
▼ 8/4 14:08 별미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몸통을 회로 먹고 난뒤 다리는 기름에 튀겨 주었습니다.
▼ 8/4 14:08 주 메뉴가 나오기전에 에피타이져로 나온 오징어로 만든 요리입니다.
▼ 8/4 14:26 주메뉴인 오징어 회가 나왔습니다.
아직도 살아있고, 회로 만든 요리가 예술입니다.
▼ 8/4 15:11 중식을 마치고 가라쓰 올레길 들머리에 도착했습니다.
들머리에 있는 모모야마 덴가이치(桃山天下市) 주차장 전경입니다.
(가라쓰 요약)
일본 규슈(九州) 사가 현(佐賀縣) 북서부 가라쓰 만(唐津灣)에 면한 항구 도시.
옛날 성하촌(城下村)이었다.
이 곳은 옛날 견당사(遣唐使)의 발착항이었기 때문에 가라노쓰라고 했었는데 이것이
가라쓰로 바뀐 것이다.
가라는 중국의 당(唐)나라가 쓰는 항구나 나루터를 가리킨다.
고대부터 이미 대륙 방면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메이지(明治) 시대에는 가라쓰 탄전의 적출항으로 발전하였다.
액화 가스·공작 기계·수산 가공·건축 재료 등의 공장과 규슈 발전소가 입지하고 있으며,
가라쓰 도자기로 유명하다.
동해안과 가가미 산(鏡山) 일대는 겐카이(玄海) 국정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부산일보'에 게재된 가라쓰 올레길 나고야성까지의 설명을 펌글입니다.)
모모야마 덴가이치 올레길.
가라쓰 항에서 자동차로 5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시골 마을에서 출발하는 산책로다.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10분가량 걷다 보면 갈대밭처럼 넓은 평지가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전국의 영주를 이곳으로 불러 모았을 때
그의 오른팔 격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군사를 이끌고 묵었던 진영이 있었던 터라고 했다.
올레길을 계속 걸어가면 호리 히데하루 진영 터,
우에스기 가이케츠 진영 터 등 당시 일본 열도 곳곳에서 몰려온 영주들이 진지를 구축한
곳으로 소개하는 안내판들이 줄줄이 서 있다.
이웃 나라에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준 역사의 현장을 상품화시킨 일본의 의도가 의심스럽지만,
풀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는 올레길은 평화롭기만 하다.
1시간 코스인 올레길 끝자락에는 나고야 성터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전황을 보고받고 작전 계획을 하달했던 곳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전 국토를 황폐화시켰던 사람.
요즘 말로 하면 동북아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전범의 소굴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든 일본 정부의 속내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 8/4 15:11 모모야마 덴가이치 입구 전경입니다.
일본에서 한글로 안내문을 게시해 놓은게 마치 한국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정표나 올레길 상징물도 제주도 올레길과 같은 조랑말 형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8/4 15:11 들머리 우측으로 모모야마 덴가이치(桃山天下市)라는 표기가 보입니다.
▼ 8/4 15:11 큐슈올레 가라쓰코스의 스타트지점이라고 쓰인 들머리로 진입합니다.
▼ 8/4 15:18 초입에는 그늘진 숲길이 이어집니다.
올레길 트레킹시 복장은 강한 자외선과 달려드는 모기를 피하고 풀독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긴팔, 긴바지가 필수이고, 편한 운동화나 트레킹화가 좋고, 그리고 챙이긴모자, 선크림,
손수건, 물등을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이번 트레킹시에도 무더위와 물공급을 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히젠 나고야성 주위에는 160여명의 다이묘가 집결해서 세운 130여개의 진영터가 있습니다.
그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호리 히데하루 등 23개소의 진영터가 일본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돌담과 토담등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편제는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총사령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 풍신수길)
우키다 히데이데(宇喜多秀家 : 우희다수가) - 총대장겸 8번대
이시다미츠나리(石田三成 : 석전삼성) - 총 봉행(奉行)
(제 1번대)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 :소서행장)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유마청신),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 대촌희전),
소오 요시토시(宗義智 : 종의지),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 :송포진신)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 : 오도순현),
(제 2번대)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 : 가등청정)
나베시마 나오시게(鍋渡直茂 : 과도직무), 사가라 요시후사(相良賴房 : 상량뢰방)
(제 3번대)
군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 흑전장정),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 대우의통)
(제 4번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모리길성)
이토스케타카(伊藤祐兵 :이등우병),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 도진의홍)
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 :고교원종), 시마즈 타다토요(島津忠豊 :도진충풍)
아키츠키 다네나가(秋月種長 :추월종장)
(제 5번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 복도정칙),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 장종아부원친), 토다 카쓰타카(戶田勝隆 : 호전승륭)
하치즈키 이에마사(蜂須賀家政 : 봉수하가정),
이코마 치가마사(生駒親正 : 생구친정)
(제 6번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 소조천륭경)
모리 히데카쓰(毛利秀包 : 모리수포), 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 입화종무)
스쿠시 고오몬(筑紫廣門 : 축자광문), 다카하시 나오지(高橋直次 : 고교직차)
(제 7번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모리휘원)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 모리수원) - 모리 데루모토의 종형제이나 잠깐 양자로 있었음
(제 8번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우희다수가) - 총대장 겸임
우키다 타다이에(宇喜多忠家 : 우희다충가) - 히데이에의 숙부
(제 9번대)
하시바 히데카스(羽柴秀勝 : 우시수승)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 세천충흥)
(수군 : 옆의지역은 충무공에게 패했던 지역)
도도 타카도라(藤堂高虎 : 등당고호) - 옥포, 사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 구귀가륭) - 안골포
와키사카 야스히루(脇坂安治 :협판안치) - 한산도, 명량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가등가명) - 명량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統總 : 래도통총) - 명량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 :래도통지) - 미치후사의 형, 당포에서 전사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 : 귀정자구) - 사천, 당포
도쿠이 미치도시(得居通年 ;득거통년) - 당포에서 전사
구와야마 마사하루(桑山貞晴 : 상산정청)
스가이 에몬쇼우(管井石衛門慰 : 관정석위문위)
스기와카 덴사부로(杉若傳三郞 : 삼야전삼랑)
(예비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덕천가강) - 나고야성 진중에 대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전전리가) - 나고야성 진중에 대기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 이달정종) - 진주성 공략을 담당했다가 후에 귀국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 상삼경승) - 가신들을 보내 왜란 참가
▼ 8/4 15:21 올레길 시작후 첫번째 군진이었던 곳을 지나갑니다.
▼ 8/4 15:22 마에다 도시이에가(前田利家)의 진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이에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 가신에서 출발하여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에 소속되었다.
특히 창을 잘 써서 ‘창의 마타자’라 불리기도 했다.
가쓰이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충돌했을 때,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히데요시의 편
을 들었으며,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호쿠리쿠 방면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5대로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히데요시는 도시이에를 아들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삼았으나
도시이에는 그 이듬해인 1599년 사망하여 이에야스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네이버 지식백과]
▼ 8/4 15:22 마에다 도시이에가 진영을 지나갑니다.
▼ 8/4 15:26 방향 표시형상이 제주도 올레길과 같은 걸 사용합니다.
푸른색 화살표는 순방향길이고 붉은색 화살표는 역방향 길 표식입니다.
우리는 순방향 표식인 푸른색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8/4 15:26 올레길은 옛날부터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을 연결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올레길을 걷다보면 산길과 마을길이 자연적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 8/4 15:27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진영 360m전방 이정표입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이시다 미쓰나리는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에 활동한 무장이다.
어려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총애를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전국통일 이후 일본 전역에서 태합검지를 수행하는데 공헌했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으로 건너와 군감의 역할을 맡았다.
이런 가운데 히데요시의 무장들과 대립하여 결국 도요토미 정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 서국의 다이묘들을 규합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과 대적했으나, 결국 아군의 배신으로 패한 끝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맞섰던 서군의 실질적인 총수
▼ 8/4 15:35 후로다 오리베 진영터를 지나갑니다.
▼ 8/4 15:41 올레길 곳곳에는 상업용이 아닌 자가소비용 밀감밭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 8/4 15:42 편백나무 향이 코끝을 훑고 지나갑니다.
▼ 8/4 15:44 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낮은 구릉사이에는 황금물결의 벼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 8/4 15:44 제주 올레길과 마찬가지로 옛사람들이나 현재사람들이 이용하는 길들로 이어집니다.
▼ 8/4 15:46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진영 쪽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8군 군장을 역임했고 관련 이야기는 아래에....
(임진왜란 관련....)
1593년 음력 2월 12일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왜장 총수 우키다 히다이에는 3만여 군사를 이끌고 총공격을 하였다.
산성 안에 있던 우리 군사는 물론 인근에 사는 부녀자들까지 합세하여 열두 시간 동안
무려 아홉 차례에 걸친 맹공격을 물리치고 왜군 일만여 명을 사상(死傷)한 전투가 바로
행주 대첩이다.
이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길이 빛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당시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랐다고 하여 이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하는데,
행주치마란 용어는 이미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나오는 어휘로서
후대 사람들이 의미를 추가해서 붙인 듯하다.
▼ 8/4 15:49 푸른색 올레길 표식을 따라 이동해야 합니다.
▼ 8/4 15:49 무더위에 바람도 없고, 찌는 듯한 더위속에서 그늘에서도 시원함이 없습니다.
▼ 8/4 15:52 이나바 미치토요 진영이란 표식입니다.
▼ 8/4 15:53 하세가와가문(하세가와모리토리)의 진영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이며서 무장,다인(茶人)으로 알려진 하세가와 무네히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 8/4 15:58 하세가와 모리토리 진영을 지나 5분쯤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길로
이어갑니다.
▼ 8/4 15:58 호리 히데하루 진영터로 향해야 합니다.
삼거리로 우키다 히데이에 진영 방향에서 진행해와 직진
(호리히데하루쪽 미나바이치토요 방향)을 버리고 호리히데루 진영 방향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진행해왔던 우키다 히데이진영,↖ 호리히데루 진영, ↗미나바이치토요진영)
▼ 8/4 15:58 210m후방에서 8군 군장의 진영인 우키다 히데이에 진영쪽에서 이동해 왔습니다.
▼ 8/4 15:59 호리 히데하루 진영 방향으로 길을 이어갑니다.
▼ 8/4 16:00 호리 히데하루 진영의 군진배치도입니다.
호리 히데하루 군진은 건축물은 없었지만 그런데로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호리 히데하루는 다카다번의 영주였다고 합니다.
다카다번은 지금의 니이카타근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호리 히데루 인명 요약)
센고쿠 시대에 에치고 국은 우에스기 겐신의 영국(領國)이었으나,
겐신의 뒤를 이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게이초 3년(1598년),
대신 에치고에는 히데요시의 가신 호리 히데하루가 30만 석 영주로서 입봉하였다.
히데하루는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해,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선동한 에치고 잇키를 진압한 공로로,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 지배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게이초 11년(1606년), 히데하루는 31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이 때문에 호리 가문은 11살 어린 나이인 히데하루의 아들 호리 다다토시가 계승하였다.
게이초 12년(1607년), 다다토시는 에치고의 본성인 가스가야마 성을 폐지하고
후쿠시마 성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다다토시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정무를 집행할 리가 없었고,
실질적인 정무는 히데하루의 숙부로 명신으로서 유명한 호리 나오마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초 13년(1608년) 2월 26일, 나오마사가 사망하자,
호리 가문 내에 내분이 발생한다.
나오마사의 두 아들인 호리 나오쓰구와 호리 나오요리가 번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다다토시는 둘 중 나오쓰구 쪽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분쟁은 게이초 15년(1610년)에 들어 격화되었고,
같은해 2월에는 마침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중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오쓰구가 정토종과 일련종의 승려를 논쟁시키고,
논쟁에서 패배한 쪽의 승려들을 모두 처형한 일이 발각되면서,
이에야스는 격노하여 다다토시가 유약하여 참언하는 신하에게 미혹하고,
대국에 봉해질 그릇이 아니라 하여,
다다토시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를 무쓰노쿠니 이와키(岩城)로 유배보냈다.
나오쓰구도 영지를 몰수당한 뒤 데와 국 모가미(最上)로 유배되었다.
▼ 8/4 16:01 문을 세웠던 문초석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 8/4 16:01 문초석 아래에서 진영쪽으로 진입하는 도로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8/4 16:02 호리 히데하루 진영의 중심부에 도착합니다.
▼ 8/4 16:02 호리 히데하루 진영의 혼구로와(本曲輪) 배치도와 발굴 과정을 설명해 두었습니다.
▼ 8/4 16:04 큰방이 있던 곳이라 합니다.
▼ 8/4 16:04 혼구로와(本曲輪)인 중심부에서 벗어납니다.
▼ 8/4 16:05 호리 히데하루 진영의 북서쪽 중심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존해야할 필요성 및 잔존하는 문화재, 발굴 방 및 시기에 대해 알림글을 게시했습니다.
▼ 8/4 16:05 호리 히데루 진영의 북서쪽 중심부의 진영터 유적들입니다.
▼ 8/4 16:09 역사탐방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임진왜란시 출정 다이묘들의 진영을 위주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곳은 하타치까시(波多親 :はたちかし )와 마쯔라시게노보(松浦鎭信 : まつらしけのぶ)의
진영에 대한 설명입니다. 인물 설명은 아래에 있습니다.
▼ 8/4 16:09 기시다케성(岸岳城 : きしたけじょう)과 사자성(獅子城 : ししがじょう)에 대한
설명입니다.
▼ 8/4 16:09 하다 찌까시(波多 親 : はた ちかし)에 대한 설명입니다.
히젠노쿠니키시다케(肥前國岸岳 : ひぜんのくにきしだけ) 성주였다고 합니다.
▼ 8/4 16:09 마쯔라 시게노부(松浦鎭信 :まつらしけのぶ)에 대한 설명입니다.
히젠노쿠니히라도(肥前國平戶 : ひぜんのくにきしだけひらど) 성주였다고 합니다.
▼ 8/4 16:14 관도(串道)라고하는데 나고야에서 관포(串浦)까지 이르던 길로
소화(昭和)시대까지 사용되던 길이라고 합니다.
▼ 8/4 16:14 관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관도는 나고야에서 관포까지 이르는 길로 쇼화시대까지 사용해왔다.
이 길은 관의 집합지역에서부터 풍신수길의 보좌진영까지 이르는.....
▼ 8/4 16:15 관도는 오래된 길어서 그런지 깊게 패여있었고 음산하게 느껴졌습니다.
▼ 8/4 16:15 기무라 시게타카(木村重隆) 진영이라고 합니다.
(기무라 시게타카 인물 요약)
출신지, 출생연도를 모르지만 일설에 의하면 근강(近江)의 기무라씨로 태어났다고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고 하고, 일찍부터 토요토미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일했고,
임진왜란시 3500명을 이끌고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군진의 면적은 총 2만㎡(6050평 정도)로 국가특별사적지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생년 미상 ~ 분로쿠 4년 음력 7월 15일(1595년 8월 20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다이묘이다.
도요토미 씨의 가신. 별명은 사다미쓰(重隆), 시게타카(重隆, 重高).
▼ 8/4 16:21 기무라 진영을 지나니 기노시타 진영을 지나갑니다.
▼ 8/4 16:22 이 한자음은 아무리 찾아도....
내용은 대충 어려서부터 풍신수길 밑에서 일했고, 신뢰를 받아서 교토 방광사 대불전의
보청봉행과 검지봉행 등의 일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 8/4 16:22 여기도 군진영같았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습니다.
▼ 8/4 16:23 4차선 대로 위로 가로지르는 올레길입니다.
▼ 8/4 16:24 숲이 울창해서 깜깜한 동백길 터널로 지나갑니다.
▼ 8/4 16:25 이 다이묘 발음도....
▼ 8/4 16:25 밭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늘진 곳이 없어서 무더위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8/4 16:25 가라메데구치(?수구)는 보조 출입구를 표시한 글인 것 같은데 우리 옥편에 찾기가
쉽지 않네요. 우땠던 히젠 나고야 성으로 가는 길을 표시한 이정표입니다.
▼ 8/4 16:29 히젠나고야 성으로 오르는 길 전경입니다.
▼ 8/4 16:30 가라메데구찌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8/4 16:30 나고야 성의 유적으로 가라메데구찌에 대해 설명한 현황판입니다.
가라메데구찌는 성을 침략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호구형태의 성문을 만드는 것으로
외측에 호구형태의 큰출입구가 1개 있고 가라메데구찌는 호구형태의 작은 출입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히젠 나고야성 개략)
* 이 칭 :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
* 시 대 : 1591년
* 소재지 : 일본 사가현 히가시마츠우라군 친제이쵸 (日本 佐賀縣 東松浦郡 鎭西町)
* 규 모 : 170,000㎡(약 51,425평 정도)
* 지정사항 : 특별사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 측의 전진기지로 축성된 성.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로 출병을 하기 위해
가라쓰 히젠(肥前)을 출병지로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쌓은 성이다.
성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와 터만 남아있다.
성의 명칭은 나고야 성[名護屋城]인데 발음은 아이치현[愛知縣]의 나고야 성[Nagoyajo,
名古屋城(명고옥성)]과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원래 이곳은 나고야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쓰네노부가 살았던 가키조에[垣添城]
성(城)이었는데, 전쟁을 위해 대대적인 증축을 하면서 이름을 나고야 성으로 불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등청정)],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등이 성의 축성을
담당하였고 전국의 다이묘에서 추출한 인력과 경비로 8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했다.
가라쓰 나고야 성은 5층 7단의 덴슈카쿠(천수각)과 망루가 있었으며,
기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금박을 입혔다.
그리고 서원과 다실 등의 부속시설이 있었다.
성채의 내성에 속하는 혼마루[本丸]는 일본성(日本城)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역인데
천수각이 북쪽 바다를 바라보는 모퉁이에 위치했다.
니노마루(二の丸)는 혼마루 서쪽 옆에 있는 중요한 구역으로 무기고와 군량미 등을 보
관하는 장소였다.
산노마루(三の丸)는 성채를 경비하는 구역으로 혼마루와 니노마루로 출입을 관리하고
성을 수비하는 구역이었다.
단조마루는 성채 남서쪽에 있는 외성에 속하는 구역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척인
아사노 단조 나가마사가 거주했던 공간이며 그의 이름을 따서 단조마루라고 부른다.
야마자토마루에는 고타쿠지라는 사찰이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용하는 어전과
다실이 있었다.
유케키마루는 명나라의 사절인 심유경이 이곳을 방문하여 머물렀던 곳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곳이다.
다이도코마루, 가미야마자토마루, 시모야마자토마루 등 성내 여러곳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성채의 면적은 약 17만 제곱미터였는데 일본 에도시대 최고의 성이라고 불렸던 오사카성과
함께 당시 최대 규모의 성채로 지어졌다.
당시 조선으로 출병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다이묘들이 이곳 나고야 성 주변으로 모여들었으며
반경 3킬로미터 이내 약 130개 소의 다이묘 진영이 발견되었다.
가라쓰 히젠의 앞바다는 가베시마(加部島)가 앞에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내항이 보이지 않도록
숨을 수 있었고 조선 침략을 위해 집결한 선박이 외부에 노출이 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천혜의 항구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기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발대가 부산포를 공격하여
임진왜란이 일으키며 승승장구 했던 왜군이 남해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을 만나 고전하면서
울산과 거제 등지에서 왜성을 쌓아 버텼지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군하였다.
이후 히젠 나고야 성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여러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철군하였고
히젠 나고야 성은 황폐화되었다.
이곳에서 뜯어낸 부재는 가라쓰 성(城)을 축성하는데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성터로 들어오는 입구 남쪽에 나고야성박물관이 있으며 당시 유물과 유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고야 성터 [名護屋 城址]
▼ 8/4 16:31 호구형태의 본 출입구 유적인 오오태(大手)문 전경입니다.
▼ 8/4 16:31 나고야성을 둘러싸고 진을 쳤던 다이묘들의 진영위치입니다.
▼ 8/4 16:36 건물들이 있었던 자리를 수목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 8/4 16:36 곳곳의 고목들을 보면 오래된 고성(古城)터였음 실감할 수 있습니다.
▼ 8/4 16:37 카라메데구치(からめでぐち)/단조마루(だんじょまる)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8/4 16:38 나고성의 본층(本丸 : ほんまる) 남서쪽 축성 방법을 설명해 놓은 글입니다.
▼ 8/4 16:43 나고야성 혼마루(本丸 : ほんまる)터 전경입니다.
▼ 8/4 16:43 나고야성 혼마루(本丸 : ほをまる) 남서쪽 유적에 관한 설명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 8/4 16:44 니노마루(にのまる)의 무기고가 있던 유적이라 합니다.
▼ 8/4 16:45 혼마루(本丸 : ほんまる)의 넓은 터에 기념비만 우뚝 서 있습니다.
▼ 8/4 16:44 나고야 성지였다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 8/4 16:47 1933년 태합(太閤) 청목월두(청목월두 : あおきけつと)라는 사람이 방문한
기념비인 것 같습니다. 히젠 나고야성 혼마루(本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8/4 16:47 위 기념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 8/4 16:47 혼마루에서 발본 인근의 마을 전경입니다.
▼ 8/4 16:48 나고야성 혼마루 한쪽켠에 세워져 있는 비석입니다.
내용 글씨는 명호옥성천지대지(名護屋城天至臺址)로 나고야성 하늘에 이르는 터 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 8/4 16:49 혼마루(本丸 : ほんまる)에서 니노마루(二丸 : にのまる)로 내려와 후문쪽으로
이동합니다.
▼ 8/4 16:53 히젠 나고야성을 벗어나서 마을로 접어들었습니다.
▼ 8/4 16:57 마을을 따라 이동하니 마을 한가운데 일본 특유의 가족 공동묘지가
나타납니다.
(일본 장묘문화의 과정)
1982년 처음 상조가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장례 역사는 기본적으로 알아두면 좋다.
일본에서는 죽으면 반드시 절에 가서 장례를 치루고 시신을 절로 모시고 가서 장례
절차를 밟는다.
▼ 8/4 16:57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직접 심었다는 시오가마 벚꽃을 찾았지만 시간관계상
찾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습니다.
▼ 8/4 17:00 육조사(六助社)라고 표기된 간판 앞을 지나갑니다.
육조사에 대해 대략 읽어보면
이길을 따라 들어가면 육조사라는 사당이 나오는데 모시는 신은 가부끼로 유명한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합니다.
▼ 8/4 17:00 큐슈올레길 중에 있는 가라쓰 도자기 마을 입구입니다.
▼ 8/4 17:02 가라쓰도자기 마을을 알리는 상징물들입니다.
시간이 없어 도자기 가마 등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사가현의 도자기와 조선인 '이삼평' 이야기)
일본이 자랑하는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자기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삼평(李參平,
출생년 미상~1655).
그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침략에 나선 히젠 국(肥前国) 사가 번(佐賀藩)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의 군대에 사로잡혔다.
나베시마는 임진왜란 때에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휘하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삼평이 조선에 살 때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출
생지가 충남 공주(1990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기념비가 세워짐)로 추정되지만,
경남 김해설과 전북 남원설도 있다.
공주 근처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 도편(陶片)들과 아리타 지역의 초기 도편들이 같다는 점이
공주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나베시마의 사위이자 가신인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졌다.
나중에 이삼평은 가나가에 산베이(金ヶ江三兵衛)라는 일본 이름을 얻는데,
출신지 공주의 금강(錦江)에서 한자를 바꾸고 ‘삼평’이라는 조선 이름의 발음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가나가에 산베이, 즉 이삼평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653년경의 기록으로, 이삼평 자신이 다쿠 가문에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삼평은 일본에 도착한 다음 몇 년간 다쿠 야스토시를 위해 일했으며,
18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쿠 지역에서 아리타로 1616년에 이주했다.
일부 학자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에도 큐슈 사가현 북부 가라쓰(唐津)의 하타(波多)
가문 영지에 조선인 자기장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다 가라쓰의 하타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생산 시설이 파괴되고
장인들도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
앞서 언급한 기록에는 이삼평과 함께 이주한 18명 중 ‘다쿠에 본래 있던 도공들’ 3명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에 와 있던 조선 자기장들이라는
추측이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이삼평이 본래 자기장이 아니었으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기술을
배웠으리라 보기도 하지만 근거가 희박한 추측이다.
▼ 8/4 17:13 가라쓰 도자기마을 지나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8/4 17:14 포장길에서 다시 숲길로 접어듭니다.
▼ 8/4 17:15 울창한 숲길이어서 깜깜하게 어둡기까지 했습니다.
▼ 8/4 17:15 길 한켠에 으아리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 8/4 17:17 하토 미사키 소년의 집 영내로 접어듭니다.
켄카이(玄海 : けんかい) 국립공원내에 하토 미사키해수욕장 등 휴양시설이 있습니다.
▼ 8/4 17:19 하토 미사키 소년의 집에서 바라본 맞은편 해안 단애가 멋지게 조망됩니다.
▼ 8/4 17:23 켄카이국정공원내에 하토 미사키(波戶 岬) 소년의 집 전경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청소년수련원 정도 된다고 할까요.
▼ 8/4 17:25 하토 미사키(波戶 岬) 청소년의 집 부근에 있는 해수욕장의 주차장쪽으로 이동했습니다.
▼ 8/4 17:27 주차장에서 바라본 하토 미사키(波戶岬) 청소년의 집 전경입니다.
▼ 8/4 17:28 일본인들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 8/4 17:28 아직 갈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늘진 곳이 없어서 이동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 8/4 17:31 하도 미사키 캠프장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8/4 17:28 좌측 제9번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 ほそかわ ただおき) 진영
쪽으로 이동합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 요약)
호소카와/나가오카 다다오키(細川/長岡忠興)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를 거친,
무장, 다이묘이다.
단고 미야즈 성주를 거쳤으며 부젠 고쿠라 번의 초대 번주였다.
또, 부친 호소카와 유사이 만큼이나 교양인으로도 유명하며, 센노 리큐의 일곱 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다도의 유파인 산사이류(三斎流)의 개조(開祖)이다.
친부(親父)는 호소카와 유사이(후지타카(藤孝)),
양부(養父)는 오슈 호소카와 가문(奥州細川家)의 호소카와 데루쓰네(細川輝経)이며,
정실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 다마코(일반적으로 호소카와 가라샤로 알려져 있다).
통칭은 요이치로(与一郎)이다.
다다오키(忠興)의 '다다(忠)'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이름 글자
중 하나인 '다다'(忠)를 물려받은 것이다.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추방 당한 후에는
나가오카 씨(長岡氏)를 칭하였으며,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시바 씨(羽柴氏)를 하사받아 하시바 씨를 칭하기도 하였지만,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호소카와 씨로 돌아왔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당대의 실력자를
섬기며 현대까지 이어지는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 8/4 17:36 올레길중 벼가 피어있는 논둑길을 지나갑니다.
짐승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전기가 통하는 전선을 가로 막아 놓았습니다.
낮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으니 건너도 된다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 8/4 17:40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 うえすぎ かけかつ) 진영 유적쪽으로 이동합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 요약)
우에스기 가게카쓰(일본어: 上杉景勝, 1556년 1월 8일 ~ 1623년 4월 19일)는 센고쿠 시대,
도요토미 정권의 오대로(五大老) 중 한 명이며, 무쓰 아이즈 번주, 데와 요네자와 번 초대
번주이다.
어릴적 이름은 나가오 우노마쓰(長尾卯松)이며, 초명은 나가오 아키카게(長尾顕景)이다.
통칭은 기헤이지(喜平次)이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당시 권력의 공백상태에 있던 북시나노를 침공하여 일부를 손에
넣었다.
또 덴쇼 13년(1585년)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를 일시적으로 종속시키기도 했다.
덴쇼 14년(1586년) 6월, 노부나가가 죽은 후 대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신하가 되어, 가문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때 엣추(우오즈와 마쓰쿠라 등)와 고즈케 등의 영지를 포기했지만,
대신 사도(佐渡)와 데와(出羽)를 공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또 이무렵 가게카츠는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을 알현하여 우근위소장(右近衛少将)에
임명되었고, 덴쇼 16년(1588년)에도 교토로 올라가 종3위 참의(参議)에 임명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반역을 일으켰던 시바타 시게이에를 처단하고 덴쇼 17년(1589년)에
사도의 혼마 가문(本間氏)을 토벌하여 사도를 평정했다.
덴쇼 18년(1590년) 히데요시가 호조 가문을 정벌할 때에도 참전했다.
덴쇼 20년(1592년) 6월 6일에서 9월 8일까지 가신 다카나시 요리치카(高梨頼親) 등을
보내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이때 최전선기지로 웅천왜성을 축성했다.
게이초 2년(1597년) 고다이로 중 한 명이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고다이로가 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이즈(会津)로 영지가 옮겨졌고,
120만 석으로 녹봉이 올라갔다.
계속 영유할 수 있도록 인정받은 옛 영지는 사도와 에치고의 일부 그리고 혼조 시게나가
(本庄繁長)가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와 격렬한 쟁탈전 끝에 빼앗은 쇼나이(庄内) 지방
등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다테 가문의 영지였던 데와의 오키타마(置賜) 지방, 무쓰의 다테 군(郡),
시노부 군(信夫郡), 갓타 군(刈田郡),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정복지였던 아이즈 지방
등이었다.
또 각 지방은 산지로 단절되어, 지금도 교통이 불편한 고갯길로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가장 마지막에야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의 영지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돌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게카쓰가 이곳에 배치된 것은 실각한 가모 가문(蒲生氏) 대신 일본 동북부의 여러 영주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가게카쓰는 다테 가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에게 30만
석의 영지를 주어 요지 요네자와 성(米沢城)에 배치하였고,
▼ 8/4 17:46 무더위에도 땀을 흘리면 남의 나라 역사 탐방길이 계속됩니다.
이 이정표시 앞 벌판에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 うえすぎ かけかつ) 진영과
나오네 가네쯔구(直江兼續 : かねつぐ) 진영이 있었다고 합니다.
▼ 8/4 17:47 포장된시골길을 계속 나아갑니다.
▼ 8/4 17:50 올레길 18개 지점 중에 16번째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 8/4 17:50 진행방향은 우측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 しまず よしひろ) 진영 유적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개략)
일본 규슈[九州]의 호족(豪族).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제4진으로 모리[毛利吉成]와 더불어 1만여 명을
이끌고 김해(金海)로부터 구로다[黑田長政]의 제3진과 합세하여 창원(昌原)을 점령,
성주(星州)ㆍ개령(開寧)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서울을 점령 후 강원도로 향했다가
종전과 더불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다른 장군들과 함께 14만 1천 5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재차
내침, 먼저 동래ㆍ울산 등지를 점령하고 대장 우키타[宇喜田秀家]ㆍ선봉장 고니시
[小西行長]와 함께 장군으로 5만 명의 군사로써 사천(泗川)으로부터 하동(河東)을 거쳐
구례(求禮)ㆍ함양ㆍ남원ㆍ전주 등지를 함락한 후 시마즈의 부대는 사천에 주둔했고,
그 해 11월 5백여 척의 해군을 이끌고 노량(露梁)을 습격했다가 이순신(李舜臣)의 함대와
해전이 벌어져 대패(大敗)하고 겨우50여 척을 건져 가지고 도망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 8/4 17:51 큐슈 올레길 옆의 담배꽃입니다.
▼ 8/4 17:51 담배 재배지 옆을 지나갑니다. 생각보다 꽃이 예쁩니다.
▼ 8/4 17:3 하도 미사키 국민관광 휴양지 경내로 들어갑니다.
▼ 8/4 17:54 현위치는 하도 미사키공원으로 좌측 위쪽의 캠프장 부근이고 우측 해수욕장 쪽이
종점지역입니다.
▼ 8/4 17:55 이곳으로 들어가서 바로 우측 샛길로 내려갑니다.
▼ 8/4 17:57 바닷가길로 연결되는 올레길이 이어집니다.
▼ 8/4 18:02 하도 마사키공원내 주상절리 전망대입니다.
▼ 8/4 18:02 주상절리의 형상이 제주도와 흡사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상절리란?)
주상절리는 화산폭발 때 용암이 굳는 속도에 따라 4∼6각형 등 다면체 돌기둥으로
나타나는 것.
암석이 지각변동에 의하여 어떤 힘을 받을 때나 화성암이 급히 냉각하여 수축될 때 생긴
틈을 '절리(joint)'라 하며, 이는 단층과는 달리 절리면을 경계로 양쪽부분의 상대적인
이동이 없다.
절리는 절리의 방향에 따라 주상절리, 판상절리, 방상절리 등으로 구분된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급속히 냉각된 현무암에서 잘 나타난다.
화산폭발 시 용암의 표면이 먼저 냉각 수축되면 표면에서 아래쪽으로 갈라지면서 수축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절리(갈라진 틈)가 6각형의 망을 이루며 형성되고,
하천이나 해안에서 아래 부분이 먼저 침식되면 기둥모양으로 무너져 내린다.
남아있는 암벽은 높은 절벽상태를 이루게 되는데 특히 해식이 활발한 해안근처에서 더욱
잘 발달되며 이런 곳에 하천이 유입되면 해안 폭포가 형성되게 된다.
국내에는 제주도 중문관광단지 앞 해안과 경북 포항 앞바다 등지에서 발견됐다.
제주도 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유명한 정방폭포와 천지연 폭포가 이런 지형에 형성된 폭포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8/4 18:06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 しまず よしひろ) 진영을 지나갑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에 대한 내용은 앞 사진에 참조
▼ 8/4 18:12 바닷가 올레길이 제주 올레길과 흡사합니다.
▼ 8/4 18:17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 ました ながもり) 진영을 지나갑니다.
(마시타 나가모리 요약)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1545년 ~ 1615년 6월 23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동생은 나가토시(長俊), 자식은 모리쓰구(盛次), 나가카쓰(長勝), 신베에(新兵衛) 등.
관위는 종오위하ᆞ우에몬쇼죠(右衛門少尉).
▼ 8/4 18:17 마시타 나가모리 진영의 유적지도 수목으로 우거졌지만 넓고 평탄한
지형이었습니다.
▼ 8/4 18:18 하도 미사키공원의 국민숙사 전경입니다.
▼ 8/4 18:19 하도 미사키 공원내에 일중불재전(日中不再戰)이란 비석입니다.
▼ 8/4 18:21 국민숙사를 지나 올레길 마지막 코스인 사가현의 '하도 미사키'해수욕장으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 8/4 18:21 큐슈 가라쓰 올레길 종점인 '하도 미사키' 해수욕장 전경입니다.
▼ 8/4 18:23 사가현에서 게시한 해안보존구역이라는 표시판입니다.
▼ 8/4 18:24 하토 미사키 해수욕장 입구입니다.
입구에 제주 하루방 한쌍이 서 있습니다.
▼ 8/4 18:25 일몰시에 바라보는 하도 미사키 해수욕장 전경입니다.
▼ 8/4 18:26 하도 미사키 해수욕장에 돌하루방이 설치되어 있는 연유를 설명해 둔 글입니다.
▼ 8/4 18:26 하도 마사키 해수욕장을 날머리로하는 큐슈 올레길과 역사탐방길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 8/4 18:34 하도 미사키 해수욕장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힘들었던 큐슈 올레길
가라쓰 코스를 마감했습니다.
시간이 늦어 하도 미사키의 소라고동을 안주로 한 쏘주 한 잔이 생각나는 시간이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이미 철시를 하였고, 미리 준비해둔 소라고동 맛만 보고 다음 이동코스가
길어 서둘러 우레시노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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