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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7~08 일본 대마도 시라다케(白嶽山) 산행외

redstone5 2017. 4. 10. 14:19



   이번 주말(2017.04.07(금) ~ 08(토))에는 1박2일 동안 전직장 동료들의 모임에서

   10여년 전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쓰시마(TSUSIMA,對馬島)의 시라다케(백악산,

   白嶽山)를 찾았습니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에서 보면 말 두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라 붙여진 지명 유래가

   전해온다고 합니다.


   대마도는 거리상으로는 일본 본토와는 약 132km, 한반도와는 49.5km로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섬으로 고려시대부터 왜구들이 창궐해 수차례 정벌

   혹은 토벌해온 역사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마도의 크기는 약 708㎢로 제주도의 약40% 정도 크기이며, 현재 약3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고,농경지 면적이 적어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한국인이 대부분의

   관광객들로 주를 이룬다고 합니다.


   시라다케(白嶽山, 백악산)은 대마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성산(聖山)으로 생각하는

   암봉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정상 부위가 암봉으로 우뚝 서 있어 위험하기도 한 산입니다.

   정상은 세이간보(519m)로 숫봉이라고도 하고 바로 옆에 암봉이 있어 우리나라 마이산처럼

   2개의 봉우리로 정상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시라다케는 대마도의 남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울창한 삼림과 환상적인 조망이 빼어나며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아소만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아울러 산행은 아리아케(有名山, 유명산, 558m)와는 별개의 산이지만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7 ~ 8시간이면 종주 산행이 가능한 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종주 산행은 포기하고 스모마을(풍요로운 축복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하여 폭포, 백악신사 토리이, 토간보 옆 소로, 세이간보 정상에 오른 후 다시 같은 코스로

   하산한 산행거리 4.75km에 약 3시간이 걸린 상행이었고,

   산행 후 온천욕으로 피로를 푼 후 기다리던 삼겹살에 해산물 바베큐로 옛동료들과의 운우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튿날인 8일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장례 장소인 수선사와 조선 비운의 옹주인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찾아간 가슴 아픈 비운의 역사현장을 둘러보는 시간으로 일박이일의 일정을

   마쳤습니다.


   다행스러웠던 건 출발 하루 전에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고, 파다도

   호수처럼 조용해서 우리의 여행길을 반겨주었습니다.

   내년에는 큐슈 올레길을 예약하고 아쉬운 헤어짐으로 일정을 무사히 마감했습니다.


   ▼ 대마도의 위치를 이성지도상에 놓고 읽어 봅니다.


   ▼ 대마도의 이동궤적을 위성도 상에 표시하였고,

      노란등로는 아리아케에서 시라다케 연결 종주 등로를 나타낸 선입니다.


   ▼ 이동궤적의 산행 고도표입니다.


   ▼ 부산국제여객 터미날의 대아고속해운 매표소 앞에 집결했습니다.


   ▼ 대마도행 여객선을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상태입니다.


   ▼ 우리가 타고갈 배는 오션플라워호호로 09시10분 부산국제여객터미날을 출발합니다.


   ▼ 이날 아침에 대마도로 향하는 한국인이 무려 1000명이라고 합니다.


   ▼ 부산국제여객터미날에서 바라본 부산 영도의 봉래산 전경입니다.


   ▼ 오래만에 만난 역전의 산우들입니다.


   ▼ 대마도 이즈하라행 승선권입니다.


   ▼ 부산항을 떠나면서 바라본 부산국제여객터미날 신청사 전경입니다.


   ▼ 북항대교를 지나면서 바라본 북항대교 전경입니다.


   ▼ 우측으로 봉래산과 앞쪽으로 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가 조망됩니다.


   ▼ 2시간 여가 지날즈음 대마도 북쪽섬이 오른쪽 멀리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 우리가 이용했던 오션플라워호의 선실내부 전경입니다.

      오션플러워호는 승선 가능인원이 약 400여명이라 합니다.


   ▼ 오른쪽으로 대마도 최대도시인 이즈하라의 건물들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 이즈하라 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 대마도의 통관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먼저 내려서 통관하기 위해 선박이 도착도

      하기전에 승객들이 줄을 서고 난리도 아닙니다. ㅎㅎㅎ


   ▼ 우리가 타고간 배로 쾌속선치고는 꽤 큰 편에 속합니다.


   ▼ 여객선 터미날에서 바라본 이즈하라항 맞은편 전경입니다.



   ▼ 무려 2시간의 통관시간을 보내고 점시식사 장소로 이동합니다.

      대마도의 통관은 정말 짜증스럽기도 합니다.

      적은 근무자에 주말에 밀어닥치는 성질 급한 한국인들을 수용하기는.......


   ▼ 우리가 먹었던 점심은 1080엔(한화 약 11000원 정도) 스페샬런치였습니다.


   ▼ 점심식사 실물입니다. 일본 점심치고는 그래도 좀 풍성한....


   ▼ 점심식사후 잠시 주변을 찍었습니다.



   ▼ 대마도의 성산인 시라다케 등산을 위해 도착한 시라다케입구의 폭포 전경입니다.


   ▼ 시라다케 등산안내도입니다.

      통상적으로 18번 카미자카에서 출발하여 7번 시라다케 도리이 삼거리까지 이동후

      9번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7번으로 되돌아 나와 2번까지 이동하는데,

      이날은 시간이 짧아 차로 3번 주차장까지 이동후 하차하여 9번 정상까지 올랐다가

      다시 3번으로 되돌아 나온 짧은 산행거리였습니다.


   ▼ 우리가 산행 시작한 등산로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입니다.


   ▼ 3번주차장까지 이동한 우리가 이용한 버스입니다.

      3번 주차장까지는 승용차외에는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기사님의 배려로.......


   ▼ 산행을 시작합니다. 편백과 삼나무로 울창한 삼림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 출발지에서 정상까지는 약 2.2km로 해발 50m에서 시작하여 519m를 올라야 합니다.


   ▼ 계곡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울창한 삼림이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 막 싹을 틔운 애기단풍의 연두색 이파리가 눈을 시원케 해줍니다.


   ▼ 출발지에서 약 300m를 이동했고, 해발 30m를 높였습니다.


   ▼ 조그마한 편백나무로 만든 나무다리를 지나갑니다.



   ▼ 야생차나무가 눈에 많이 보였습니다.


   ▼ 조그마한 실개천을 지나서 계곡을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 시라다케에서 보이는 대마도의 동식물 현황입니다.


   ▼ 4번 산행안내판을 지나갑니다. 정상까지 약 1.5km가 남았습니다.


   ▼ 이 목교를 지나서부터는 다소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합니다.


   ▼ 시라다케 등산안내도 3번을 통과합니다.

      산행 시작후 약 600m를 이동 했고, 고도를 50m올렸습니다.


   ▼ 애기단풍의 파스텔톤 연두색이 눈을 황홀케 합니다.


   ▼ 대마도의 기후는 습한 지역으로 시라다케의 기온도 굉장히 습하게 느껴졌습니다.

      습한 지역에 잘 커는 콩자계란이라는 덩쿨 식물이 많이 눈에 띄였습니다.


   ▼ 쭉쭉 잘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난 등로로 이동합니다.

      편백나무향이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 출발점에서 400m이동한 4번 산행안내도를 통과합니다. 해방 100m를 올려 놓았습니다.


   ▼ 계곡의 물길이었던 곳으로 이동합니다.


   ▼ 시라다케 5번 산행안나도를 통과합니다. 정상까지는 1km남았습니다.


   ▼ 이정표가 잘되어 있고, 길이 외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 큰바위를 만납니다. 바위밑에 몇 명이 비박하기 좋은 장소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 큰바위를 우회해서 에둘러 갑니다.


   ▼ 큰바위밑에서 누군가가 비박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 시라다케 방향으로 이동을 계속합니다.


   ▼ 시라다케 6번 안내판을 지나갑니다. 정상까지는 900M남았습니다.


   ▼ 6번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705m, 출발점에서 해발 240m를 올라왔습니다.


   ▼ 시라다케 도리이 삼거리에 거의 도착해 갑니다.


   ▼ 시라다케 도리이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 시라다케 도리이 삼거리 이정표입니다.

      진행방향에서 보면 ← 가미자카공원방향, ↑ 시라다케 정상 방향입니다.


   ▼ 시라다케 도리이에 부착되어 있는  시라다케신사(白嶽神社)라는 표식입니다.


   ▼ 시라다케 도리이 전경입니다. 이곳을 지나서 시라다케롤 올라갑니다.


   ▼ 시라다케 정상까지 600m를 남겨 둔  8번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 숲이 우거진 급한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 시라다케 7번 이정표를 지나갑니다. 정상 405m전방이고, 해발 360m 고도 입니다.


   ▼ 시라다케 산행 중 첫번째 만나는 신사입니다.


   ▼ 시라다케 산행 중 두 번째 만나는 신사인데 이곳이 시라다케 신사인지 모르겠습니다.


   ▼ 시라다케 안내판 9번을 지나갑니다.

      이정표와 안내판이 이중으로 서있어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 시라다케 이정표 8번을 지나갑니다. 정상까지 105m남았고 해발고도 480m입니다.

      정상 직전 약간 넓은 공터에 서 있는 이정표입니다.


   ▼ 약간 넓은공터 옆 경사지에 있는 신사입니다.


   ▼ 정상직전 공터에 있는 석등입니다.


   ▼ 정상 갈림길 직전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로프에 의지해 올라갑니다.


   ▼ 시라다케 암봉 아래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시라다케는 숫봉과 암봉으로 이루어진 2개의 방위봉우리로 형성되어 있고

      우리는 숫봉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 시라다케 정상 직전 가파른 암릉길입니다.



   ▼ 시라다케 정상직전 갈림길에 있는 신사 전경입니다.

      진행방향에서 ← 숫봉 방향이고 → 암봉 방향입니다.


   ▼ 우리가 올라갈 숫봉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 바위에 붙은 이끼들에서 아직 푸르름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 시라다케 숫봉 직전 신사에 차려진 제물들입니다.


   ▼ 시라다케 정상부의 숫봉방향에서 바라본 암봉 전경입니다.


     ▼ 시라다케 숫봉 정상 인증사진입니다.

      모자에서 보듯이 바람이 세어서 일어서기가 힘들 정도였고 주위는 천길 낭떠러지입니다.


   ▼ 시라다케 정상에서 바라본 가미자카 방향의 암릉 전망입니다.


   ▼ 시라다케 정상은 바위 정상으로 오르고 내릴 때 조심해야 합니다.


   ▼ 시라다케 정상에서 바라본 아소만 방향인데 운무로 절경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 시라다케 정상으로 오르고 내리는 길이 깅장히 위험스럽지만 어떤 안전시설도 없습니다.


   ▼ 정상에서 하산하면서 바라본 엄봉 정상 전경입니다.



   ▼ 시라다케는 습한 기온으로 인해 고목 곳곳에 꽁자계란이 붙어 기생하고 있습니다.


   ▼ 땅바닥에 붙어 있는 제비꽃입니다.


   ▼ 등굴나무도 아닌데 뒤틀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 시라다케 정상에 올랐다가 도리이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카미자카공원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아쉬움을 남기고 원점회귀로....


   ▼ 출발지였던 스모 방향의 폭포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 목이버섯을 보고 ......


   ▼ 관리가 뛰어나 곧게 솟은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 출발지역 600m를 남긴 곳까지 하산했습니다.



   ▼ '홀애비꽃대'라는 약초식물입니다.


   ▼ 계곡을 끼고 편백나무 울창한 공기 좋은 숲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 출발지인 스모 폭포에서 산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 간단한 온천 후 두마당이란 곳의 석식 장소로 이동합니다.



   ▼ 이곳에서 해물바베큐로 간단한 식사와 약주를 즐겼습니다.





   ▼ 식사후  2차로 이동한 골목길 전경입니다.


   ▼ 메모가야라는 곳에서 간단한 여흥을 즐긴후 숙소로 돌아와 취침!


   ▼ 이즈하라 시내의 민숙집에서 아침식사 전경입니다.


   ▼ 민숙집 1층은 한국으로 수출되는 붕장어 집하장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굵은 붕장어를 싼 값에 사서 준비해 달라고 하고 이즈하라 시내구경에 나섰습니다.



   ▼ '딸기꽃'입니다.


   ▼ '광대나물'입니다.


   ▼ 이즈하라 항구 전경입니다. 이즈하라는 대마도내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 수선사(修善寺) 이동합니다. 수선사는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입니다.


   ▼ 수선사 가는 길목에 핀 철쭉꽃입니다.


   ▼ '광대수염'입니다.


   ▼ 밑에서 바라본 수선사(修善寺)경입니다.


   ▼ 정토종 수선사입니다.


   ▼ 대마도 수선사 입구 전경입니다.


   ▼ 수선사에 있는 항일운동가인 최익현 선생 순국비전경입니다.


      (최익현 선생?)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찬겸()이며 호는 면암()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을 기남()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노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갑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선생의 정치사상은 이항노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의 왕도정치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선생은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

      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공포되자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소위 을사 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등 을사 5적()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린 일 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1906년 2월 21일(양력 3월 15일), 선생은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사람들과

      이별,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상소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참담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판서 이용원, 김학진, 참판 이성열, 이남규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난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였던 고석진의 소개로 임병찬을 만나게 된다.

      임병찬은 낙안 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임병찬이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고 고하자 선생은 남으로 내려가

      영호()와 호서(西)가 기각의 행세를 갖추어 서로가 성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뜻을 굳힌 다음 거사에 앞서 세의 규합에 힘썼다.

      이후 두 달 남짓 동안 거의()가 준비됐다.

      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 2백여 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4월 13일(양력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불꽃에 민족혼을 일깨운 의병들은 이날 정읍에 무혈입성, 총칼과 탄환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했다.

      또한 일제의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정읍에서 흥덕으로, 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 읍내로

      행군하였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 명을 넘게 되었다.

      힘을 얻은 선생의 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남원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병은 8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4월 20일(양력 6월 11일),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황제의 칙지를 전해왔다.

     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미 소장()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

      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남원 진입을 꾀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 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다. 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하였다.

      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뿐이었다.

      4월 23일(양력 6월 14일), 선생 등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끝에 한 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1906년 11월 20일(양력 1월 4일) 일본 대마도 수선사()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이틀 후에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시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이하였으며 영구()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하여 그 해 4월(양력 5월) 노성

      무동산에 안장되었다.

      위대한 유학의 거봉()이요 항일의 선봉이 되어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된 선생의 충혼은

      영원히 불멸의 빛이 되어 오늘에 사는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 수선사의 묘지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묘지들도 일본식을 닯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 '찔레꽃'입니다.


   ▼ 면암 최익현 선생의 비문입니다.


   ▼ 수선사 지붕의 이모저모입니다.



   ▼ 일본 사찰의 전통적인 형태로 대나무가 사찰 뒤를 감싸고 있습니다.


   ▼ 이곳은 부유층의 유골함을 모셔 둔 곳인 것 같습니다.


   ▼ 수선사의 앞뜰 전경입니다.


   ▼ 수선사의 출입문 전경입니다.


   ▼ 수선사의 건물에 붙어있는 현판입니다.


   ▼ 수선사내의 전경들입니다.






   ▼ 수선사를 떠나 금석성(金石城) 방향으로 도보로 이동합니다.


   ▼ 대마도의 제일 큰도시인 이즈하라시청 전경입니다.


   ▼ 금석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 금석성 입구 전경입니다.



   ▼ 금석성에 대한 설명 안내문입니다.


   ▼ 금석성 이정표입니다.


   ▼ 뒷산 중턱에 금석상의 유적이 보입니다.


   ▼ 교토에서 막부의 사신으로 왔던 사람의 숙박지였다고 합니다.


   ▼ 비운의 고종 황제 고명딸인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입니다.


   ▼ 닥혜옹주 결혼 기념비를 세운 동기에 대해 안내해둔 글입니다.


   ▼ 조산과이 선린외교의 역할을 했던 대마도인에 대한 기념비입니다.


   ▼ 위 기념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 조선시대 통신사들의 첫관문인 대마도릐 위치라 '조선국통신사지비'라는 기념비입니다.


   ▼ 조선 후기 통신사들의 활동에 대해 적은 글입니다.



   ▼ 시미즈산성 유적 주변 관광안내도입니다.


   ▼ 이즈하라시에 있는  대마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합시장 전경입니다.


   ▼ 우리나라의 국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조선시대 우리땅이었던 것을 나타내는지.....


   ▼ 아침에 잡아놓았던 붕장어구이 입니다. 일본에서 먹는 맛을 별미였습니다.


   ▼ 이즈하라항 부둣가에 세우져 있는 옛날 등대입니다.


   ▼ 1876년에 세워진 이즈하라항의 등대레에 대한 설명입니다.


   ▼ 우리가 타고 귀국할 오션플라워 전경입니다.




   ▼ 부산항에 정박항 우리가 타고온 우션플라워호 전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