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행은 전북 담양의 추월산(秋가을추,月달월,山, 734m)입니다.
추월산은 산명 그대로 깎아지를 듯한 암봉아래로 가을의 단풍이 뛰어나 가을이면 등산객들로
각광을 받는 산행지입니다만,
올해는 예년과 달리 호남쪽으로 많이 상륙했던 태풍의 영향으로 기대했던 가을색은
그다지 즐기지 못한 한 해였습니다.
추월산은 이미 2차례나 다녀왔고,
이번이 3번째 산행으로 등로의 대략적인 지형은 머리 속에 그려졌지만,
최근들어 각 지자체들이 등로 정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위험지역 등에 필요한
안전시설 등은 전에 비해 많이 보완해 두었을거라는 예측이 가능했고,
실제 산행시 이런 예측이 맞아들어 위험한 곳과 급경사지에는 안전한 데크시설로
안전을 확보해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은 예전같이 로프등을 이용하는 산행의 맛은 많이 반감되어 있었습니다.
추월산은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이 밀재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으며,
호남정맥에 속하는 산이며, 전라남도 5대 명산(조계산 884m, 월출산 809m, 추월산 734m,
천관산 723m, 두륜산 700m)중에 하나로,
산명는 가을하늘의 보름달이 산에 닿을 것같이 드높은 산이란 뜻이라고 하고,
산의 형태는 담양읍에서 보면 스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도 합니다.
※호남정맥?
호남정맥은 호남지방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산줄기라는데서 유래되어 붙여진 명칭으로
전북 진안군 부귀면과 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에 잇는 주화산(565m)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전남 광양시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398.7km의
산줄기를 말합니다.
주요산으로는
곰재, 만덕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산성산, 무등산, 제암산, 방장산, 조계산,
동주리봉, 백운산 등으로 연결됩니다.
추월산 정상은 조망이 빼어난 곳으로 남쪽의 담양호와 무등산, 동쪽으로 고리봉, 북동쪽으로
백운산, 북서쪽으로 내장산과 입암산, 서쪽으로 방장산, 서남쪽으로 태청산이 조망되지만
이날은 미세먼지로 조망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추월산은 고려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창건된 보리암(菩보살보,提리,庵암자암)을 품고
있는데, 이 암자는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수차례의 중건을 통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해발 600m 지점의 천길 낭떠러지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경관이 빼어났고,
1976년 담양호가 생기면서 시원하게 펼쳐지는 호수와 함께 절경의 경관을 보여주는
암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부근의 금성산성과 함께 임진왜란의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동학란 때에도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항거했던 곳으로,
보리암과 추월산 아래에는 임진란시의 슬픈 역사를 담은 여인들의 순절비가 곳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추월산?)
추월산(秋月山)은 가을의 보름달이 산에 닿을 것같이 드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호남의 5대 명산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추월산 암봉 아래에는 단풍나무가 매우 많아 가을이면 이 풍경을
감상하러온 등산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그리고 가을뿐만 아니라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다.
봄에는 진달래와 개나리, 여름에는 울창한 녹음과 시원한 담양호반의 푸른 물결,
겨울이면 설경과 암벽에 매달린 고드름이 매우 인상 깊다.
산줄기는 장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다 금남 호남 정맥 진안군과 완주군의 경계인
주화산에서 두 갈래를 친다.
주화산에서 북쪽으로 금남 정맥을 보낸 호남 정맥이 남진하며, 만덕산, 오봉산, 추령, 내장산을
지나 새재봉[530m]에서 서쪽의 입암산 방향으로 영산강의 분수령인 영산 기맥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남쪽으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달리며 백암산, 대각산, 백암산, 수리봉을 지나
추월산을 솟구치고 강천산 방향으로 뻗어간다.
추월산의 물줄기는 남쪽은 담양호를 통해 영산강에 합수되고 북쪽은 추령천을 통해 섬진강에
흘러든다.
추월산 정상은 조망이 뛰어나다.
남쪽으로 담양호와 무등산, 동쪽으로 고리봉, 동북쪽으로 백운산, 북서쪽으로 내장산, 입암산,
서쪽으로 방장산, 서남쪽으로는 병풍산과 태청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추월산 삼거리에 있는 보리암 뒷산[697m봉]에서도 조망이 좋다.
동쪽을 내려다보면 담양호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건너편에는 강천산의 산줄기와 금성산성이
바라다 보인다.
북쪽으로 호남 정맥 수리봉의 암릉도 볼 만하다.
바위 길을 돌아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바위틈에 자리 잡은 보리암과 십자가처럼 보이는 담양호가
장관을 이룬다.
해발 729m의 추월산 산행은 국도 29호선 변의 담양호 국민 관광 단지에서 시작해서
원점 회귀[3시간]를 하기도 하나, 호남 정맥 종주꾼들은 추월산 서쪽 밀재~추월 바위~정상~
인삼밭재[3시간]~천치재[5시간] 코스를 즐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가는 국도 24호선선에서 바라보는 추월산은 산 전체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중턱에 아슬아슬하게 보리암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추월산 암벽 사이사이로 절묘하게 등산로가 나 있어 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산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담양호의 푸른 물결이 펼쳐진다.
담양호의 물이 항상 가득한 것은 지역의 지명과도 연유가 있는데, 담양이 ‘못 담’(潭) 자를
쓰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예부터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고려 성종 때의 지명도 담주(潭州)였다.
추월산은 특히 일출과 일몰 때의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한국향토문화대전 퍼옴)
(산행개요?)
1,산행날짜 : 2019.11.02(토) 날씨 : 맑고 미세먼지 다소
2. 산행시간 : 10시55분 ~ 15시10분(4시간15분) - 후미기준 여유있는 산행
3. 이동, 도상거리 : 8.05km, 7.17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1.96km/h
휴식제외 : 2.29km/h
5. 고도 : 760m ~ 168m(592m) - 최고고도가 734m이므로 GPS오차 참조
6. 오르막 거리, 속도 : 3.54km, 2.10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4.32km, 2.37km/h
8. 휴식횟수, 시간 : 1회, 35분(점심시간)
9. 산행 코스
밀재 ▷ 706.3m봉 ▷ 추월바위 ▷ 추월산 정상 ▷ 호남정맥 분기점 ▷
깃대봉 ▷ 보리암 정상 ▷ 보리암 ▷ 자연동굴 ▷ 주차장
▼ 위성도에 나타낸 궤적으로 하늘색 선이 호남정맥길입니다.
▼ 등고선지도에 나타낸 궤적으로 전체적인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 위성도에 나타낸 궤적으로 추월산 정상에서 위쪽으로 하늘색선이 호남정맥길입니다.
▼ 등고선 지도에 나타낸 궤적으로 추월산 위쪽으로 하늘색 선이 호남정맥길입니다.
▼ 해발고도표에 나타낸 산행궤적입니다.
오르내리막이 그렇게 심하지 않은 정상 능선에 오르면 여유있고 편한 산행입니다.
▼ 10:13 부산에서 07시에 출발한 버스가 옥과IC를 3시간10분만에 통과합니다.
▼ 10:55(00h00m) 출발한지 약 4시간만에 산행 들머리인 밀재에 도착합니다.
도장봉은 산행 진행 반대봉, 천치재는 산행 진행방향 후의 호남정맥길 상의 지명입니다
▼ 10:55(00h00m) 들머리인 밀재의 주소는 추령로 675입니다.
▼ 11:00(00h05m) 들머리에서 만난 '쑥부쟁이'입니다.
▼ 11:01(00h06m)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됩니다.
지금부터 정상까지는 호남정맥길과 겹쳐지고, 정상 이후부터는 벗어납니다.
▼ 11:01(00h06m) 들머리인 밀재는 전북 순창과 담양의 경계지점입니다.
▼ 11:01(00h06m) 들머리인 밀재에 설치된 호남정맥 안내도입니다.
(호남정맥?)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였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 친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
『산경표(山經表)』에 근거를 둔 이들 산줄기의 특징은 모두 강 유역을 기준으로 한
분수산맥이라는 것이다.
이 정맥을 이룬 주요 산은 『산경표』에 웅치(熊峙)·사자산(獅子山)·운주산(雲住山)·
칠보산(七寶山)·내장산(內藏山)·백암산(白岩山)·추월치(秋月峙)·금성산(金城山)·
만덕산(萬德山)·무등산(無等山)·천운산(天雲山)·화악산(華岳山)·가야산(伽倻山)·
금화산(金華山)·금전산(金錢山)·조계산(曹溪山)·동리산(洞裏山)·송현(松峴)·
계족산(鷄足山)·백운산 등으로 기록되었다.
우리 나라 남부의 호남 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이 산줄기는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로,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농경과 산업, 그리고 현격히
다른 생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장흥의 용두산(龍頭山)에서 하동의 섬진강 하구까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산줄기는
지리산에서 김해의 낙동강 하구까지 이어진 낙남정맥(洛南正脈)과 함께 우리 나라 남부
해안 지방의 동일한 생활 문화권역을 형성하게 하였다.
현대 지도에서의 산 이름으로 찾아보면, 곰재·만덕산·경각산(鯨角山)·오봉산(五峰山)·
내장산·백암산·추월산·산성산(山城山)·설산(雪山)·국수봉(國守峰)·무등산·천운산·
두봉산(斗峰山)·용두산·제암산(帝巖山)·일림산(日林山)·방장산(方丈山)·존제산(尊帝山)·
백이산(伯夷山)·조계산·희아산(戱娥山)·동주리봉·백운산 등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옮김)
▼ 11:02(00h07m) 들머리 입구의 계단 전경입니다.
▼ 11:03(00h07m) '작살나무 열매'입니다.
▼ 11:03(00h07m) 들머리 얼마되지 않은 곳의 밀재 이정표입니다.
▼ 11:08(00h13m) 진행중 만나는 임도 갈림길 이정표입니다.
▼ 11:08(00h13m) 이정표가 있는 등로 아래에 보이는 임도 전경입니다.
▼ 11:11(00h16m) 진행중에 바라본 진행 반대쪽 도장봉 방향의 호남정맥 전경입니다.
▼ 11:18(00h23m) 가을을 지나 겨울 분위기가 나는 편안한 등로로 이동 중입니다.
▼ 11:18(00h23m) 가을의 대표적 야생화인 '구절초'입니다.
▼ 11:21(00h26m) 이동길 중에 바라본 등로 좌측으로 산불 피해지역입니다.
▼ 11:23(00h28m) 이 위치부터는 등로가 약간 가플라지기 시작합니다.
▼ 11:24(00h29m) 이동 중에 뒤돌아 본 좌측 수목 속의 등로와 우측 아랫쪽으로 임도가 보입니다.
▼ 11:39(00h44m) 이동 중에 바라본 가을색입니다.
▼ 11:49(00h54m) 정상까지 지속되는 오르막입니다.
▼ 11:58(01h03m) 산행 시작 1시간 즈음에 안부에서 약 30분간의 점심식사를 합니다.
▼ 12:29(01h34m) 약 30분간의 점심식사후 정상을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 12:30(01h35m) 정상 이동 중에 만나는 준,희님의 706.3m봉 표식을 지납니다.
▼ 12:31(01h36m) 낙엽 푹신한 등로가 계속됩니다.
▼ 12:35(01h40m) 이동중 곳곳에서 산죽길도 만납니다.
▼ 12:36(01h41m) 밀재에서 약 2km를 이동했습니다. 정상까지는 약500m가 남았습니다.
▼ 12:43(01h48m) 정상 직전 자연이 만든 멋진 추월바위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 12:47(01h52m) 산행시작 1시간50여분이 지난 시점에 목적지인 추월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 12:47(01h52m) 추월산 정상의 정상석 부근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입니다.
▼ 12:47(01h52m) 정상에서 바라본 호남정맥으로 앞의 무명봉과 뒤로 수리봉이 조망됩니다.
▼ 12:50(01h55m) 정상에서 약 100m이동후 만나는 호남정맥 갈림길 이정표입니다.
월계리, 견양동, 수리봉 방향으로 이동해야 호남정맥길과 겹쳐 이동합니다.
▼ 12:50(01h55m) 호남정맥 갈림길에서 바라본 마지막 목적지인 아래의 담양호 주차장과
멀리는 강천산 방향이 조망됩니다.
▼ 12:55(02h00m) 정상에서 보리암 정상 방향 이동중 만나는 가을색입니다.
▼ 12:59(02h04m)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우리가 하산할 보리암 정상입니다.
▼ 13:03(02h08m) 약간의 오르내리막 등로로 가파른 내리막 전경입니다.
▼ 13:05(02h10m) 보리암 정상 이동중에 만난 가을색 전경입니다.
▼ 13:12(02h17m) 물통길 갈림길을 지납니다.
▼ 13:12(02h17m) 물통골 갈림길 부근의 산죽길 전경입니다.
▼ 13:12(02h17m) 산죽길의 산악회 상징리본입니다.
▼ 13:13(02h18m) 보리암 정상 이동중에 깃대봉의 통신시설 전경입니다.
▼ 13:13(02h18m) 이동길에 만난 야생화인 '용담'입니다.
▼ 13:13(02h18m) 정상 능선 등로길은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 13:14(02h19m) 보리암정상 이동 중에 만난 가을색입니다.
▼ 13:14(02h19m) 보리암 정상 이동길은 많은길이 산죽으로 덮여있었습니다.
▼ 13:17(02h22m) 보리암정상 이동중에 바라본 추월산 정상에서 수리봉 방향 호남정맥길입니다.
▼ 13:17(02h22m) 보리암 정상 이동 중 바라본 산그리메입니다.
▼ 13:19(02h24m) 이동중에 바라본 강천산 방향과 담양호 전경입니다.
▼ 13:23(02h28m) 이동중 일부는 순한 등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13:27(02h32m) 이동중 약간 까칠한 구간인 암릉길 이동입니다.
▼ 13:30(02h35m) 보리암정상인 상봉에서 바라본 제일앞 깃대봉과 뒷쪽 추월산 정상과
정상 우측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길 능성 전경입니다.
▼ 13:32(02h37m) 보리암정상인 상봉의 위치 표시목입니다.
▼ 13:36(02h41m) 보리암정상의 등산 안내도입니다.
▼ 13:36(02h41m) 보리암정상의 이정목입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보리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 13:36(02h41m) 보리암정상석 전경입니다.
▼ 13:38(02h43m) 보리암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담양호의 댐 전경입니다.
(담양댐?)
영산강유역농업종합개발 1단계사업의 일환으로 1973년 8월부터 1976년 9월 사이
농업진흥공사가 건설하였다.
영산강 1단계의 4개댐 가운데 가장 높은 댐으로 높이 46m, 길이 306m, 부피 168만㎥의
경사 코어형 필댐(fill dam)이다.
댐마루는 해발 124m, 홍수위는 해발 121.1m로서 2.9m의 여유고를 보유하고 있다.
경사 코어 차수벽(遮水壁)에 의한 차수가 이 댐의 특성이다.
댐 상류 표면경사는 1:3.8, 하류 표면경사는 1 : 2 구배이다. 댐에 의하여 담양군 용면의
일부가 저수지를 형성하며 유역면적은 66㎢의 자체유역과 인접 섬진강에서 유역변경방식으로
수량보충을 위하여 설치한 취수보지점의 18.4㎢의 간접유역을 합하여 65.6㎢이다.
만수면적 4.1㎢, 총저수용량 6,670만㎥로 풍수년과 갈수년의 유량을 연간 조절하여
6,245ha의 농경지에 충분한 관개용수를 공급하여, 연간 1만여 t의 미곡증산과 댐 하류
담양읍 일원에 일당 3,000㎥의 상수도 용수공급에 기여한다.
초당 최대 8.1㎥의 취수가 가능한 취수시설과 초당 546㎥의 계획홍수량을 조절, 방류하기
위하여 길이 50m의 수문장치 없는 일류(溢流 : 넘쳐 흐름)댐을 가진 측구식 여수로가 댐
우안에 있다.
▼ 13:42(02h47m) 보리암 정상에서 바라본 담양호 전경입니다.
▼ 13:45(02h50m) 보리암 정상에서 보리암 방향으로 이동하는 급경사 계단입니다.
▼ 13:46(02h51m) 보리암 정상에서 보리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13:53(02h58m) 보리암 방향 이동 중 짧은 암릉길도 만납니다.
▼ 13:54(02h59m) 보리암 이동 중에 바라본 담양호와 목적지인 주차장이 조망됩니다.
▼ 13:55(03h00m) 보리암 이동 중에 바라본 담양호의 인공폭포입니다.
▼ 13:59(03h05m) 보리암 이동 중에 바라본 눈 아래의 보리암 전경입니다.
▼ 14:01(03h06m) 하산 중 하산길을 벗어나 우측으로 보리암 방향으로 이동해야합니다.
▼ 14:01(03h06m) 보리암 방향의 가을색입니다.
▼ 14:02(03h07m) 보리암 방향 가는 길 전경입니다.
▼ 14:03(03h08m) 보리암 입구의 김덕령 장군 부인의 순절처 암벽에 대한 설명입니다,
(김덕령장군?)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광주(光州) 출신.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
그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해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옮겨옴)
▼ 14:03(03h08m) 보리암 입구의 순절비 전경입니다.
'충장공 김덕령장군배 정경부인 흥양이씨 순절비'라고 각인되어 있습니다.
▼ 14:03(03h08m) 또 다른 분들의 순절비 전경입니다.
▼ 14:04(03h09m) 보리암 앞의 순절처 절벽 전경입니다.
▼ 14:04(03h09m) 순절처에서 보리암으로 가는 길 전경입니다.
▼ 14:05(03h10m) 보리암 입구의 보리암에 대한 유래 안내문입니다.
(보리암(菩提菴)?)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이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리사(菩提寺)라고도 한다.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절벽의 끝에 위치하며,
고려 신종 때 국사 지눌(知訥)이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있을 때 나무로 매를 만들어서
날려 보냈는데,
그 매가 내려앉아 불좌복전(佛座福田)임을 점지하여 주었으므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이 절은 이름 있는 기도 및 수도처로서 많이 이용되었으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매우 규모가 큰 것으로서 1980년에 주지 진공(眞空)이 신도 묘월화(妙月華)와
법계성(法界性) 등의 도움을 받아 2억 원의 공사비로 완공한 것이며,
당시 목재의 운반은 미 공군의 헬리콥터 지원을 받아서 옮겨왔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이 절에는 지름 1.2m, 깊이 0.7m 정도의 큰 솥이 있다.
순창에 살았던 기생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절 아래에 있는 굴까지는 운반하였으나,
그 앞의 절벽 때문에 더 이상 옮길 수 없어 애를 태웠는데, 이튿날 보니 불력(佛力)으로
솥이 절에 옮겨져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바위 꼭대기 가까운 절벽인데도 이 절에는 많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이 샘은 부정을
타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파계승이 샘가에서 닭을 잡아먹은 일이 있는데 석 달 동안 물줄기가 끊어져 물이 나오지
않아 아랫동네에서 길어 와서 먹은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옮김)
▼ 14:05(03h10m) 보리암 정면으로 들어가는 입구 전경입니다.
▼ 14:06(03h11m) 보리암 정면을 옆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 14:06(03h11m) 보리암 마당앞에 부착된 '관음굴'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4:06(03h11m) 보리암 마당 아래에 출입통제된 '관음굴'가는 길 전경입니다.
▼ 14:06(03h11m) 보리암에 제반 물자를 실어 올리는 승강기 전경입니다.
▼ 14:06(03h11m) 보리암 정면 전경입니다.
(보리(菩提)란?)
불교에서 최상의 이상인 깨달음의 지혜, 또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수도 과정을
뜻하는 ‘보리’의 본래 발음은 ‘보제(菩提)’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의 한자 음역이다.
‘보리’는 불교의 이상인 깨달음의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자로는 ‘보제(菩提)’라고 쓰고, ‘보리’라고 읽는다.
‘보제’라고 하면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우리말과 발음이 비슷하여 수도하는 데 공연한
연상 작용을 일으켜 방해가 되므로 ‘보리’라고 고쳐서 발음하게 되었다.
보리심〔菩提心〕, 보리문〔菩提門〕, 보리수〔菩提樹〕 등이 그 예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와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수도자의 소명이라고 하지만, 생활 속에서 깨달음과 보람을 구하는
우리들의 목표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우리말 1000가지에서 옮겨옴)
▼ 14:09(03h14m) 보리암 담벼락에서 만난 '쑥부쟁이'입니다.
▼ 14:10(03h15m) 보리암 담벼락의 노고목의 보호수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14:10(03h15m) 보리암 담벼락의 노고목 전경입니다.
▼ 14:10(03h15m) 보리암 내부의 불상 전경입니다.
▼ 14:14(03h19m) 보리암을 떠나 목적지인 담양호 주차장으로 이동합니다.
▼ 14:14(03h19m) 가파른 내리막 계단을 통해 하산합니다.
▼ 14:15(03h20m) 하산길에 만난 가을색입니다.
▼ 14:16(03h21m) 바위절벽을 따라 설치된 데크계단길 전경입니다.
▼ 14:22(03h27m) 바위 전망대에 설치된 안내도입니다.
▼ 14:22(03h27m) 바위 전망대에서 올려다본 보리암 전경입니다.
▼ 14:29(03h34m) 보리암 이후 급한 내리막이 이어집니다.
▼ 14:33(03h38m) 하산길 중간지점에서 만난 이정표입니다. 주차장까지는 800m가 남았습니다.
▼ 14:33(03h38m) 하산길 중간지점의 이정목 옆에 설치된 보리암 중창 공덕비입니다.
▼ 14:33(03h38m) 공덕비 옆의 자연 동굴인데 아무 시설은 없었습니다.
▼ 14:40(03h45m) 하산 중에 만난 휴게시설입니다.
▼ 14:42(03h47m) 잘 쌓여진 돌탑 옆을 이동합니다.
▼ 14:50(03h55m) 하산 마무리 지점의 등산 안내도입니다.
주차장 방향에서 산행을 시작할 경우 들머리에 가까운 안내도입니다.
▼ 14:50(03h55m) 하산 마무리 지점에도 설치된 임진란시의 순절비입니다.
(순절비 내용?)
공의 휘는 응회(應會)요 자는 시극(時極)이오 호는 청계(淸溪)이다.
성은 김씨이니 신라왕의 후예로 언양을 본관으로 하고 고려조에는 위열공 취려(就礪)와
익대공 전(佺)이 부자(父子)이시고 평장사가 되어 그로부터 대를 이어 현관(顯官)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공의 증조 삼준(三俊)에 이르러 사헌부 강령이 되고 그 아들이 송무(松茂)이니 경기전
참봉이요 그 아들이 성벽이니 광양훈도이다.
창녕 성씨 이조판서 세미(世美)의 따님을 취하여 명종 10년 을묘(1555)에 한양 저택에서
공을 낳으셨다.
자라서 문간공 우계 성혼 선생에게 수업하고 또 건재 김천일 공과 함께 종유하니 건재공은
동종(同宗)이다.
공은 어렸을 때 부친을 잃고 죽을 마시며 시묘하면서 모부인 성씨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죽에 타서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공은 성현의 글에 마음을 기울여 밤낮으로 게으름이 없었다.
당시의 관찰사가 조정에 천거하려고 했는데 공이 힘써 사양하셨다.
을유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귀후서 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되었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이 소문만 듣고서 와해되니 공이 그때에 담양
집에 있었는데 개연히 분기(奮起)하여 말하기를 나라 종사가 폐허되고 임금이 파천하니
신자(臣子)된 도리로 신명을 바쳐야 할 것이다 하고 처남 덕령(德齡)에게 의거하기를
힘써 권했다.
그는 곧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군이다.
드디어 같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군사가 5천이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공이 종군하여 군무의 제반사를 주관하셨으며 경상도까지 진군하여 왜적을 막는데 조정이
마침 강화하여 해산을 권유하니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김 장군이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국문을 당하여 엄벌이 공에게도 미쳤다.
조정에서 명하여 덕령의 반역한 사실을 공에게 물으니 공은 덕령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절대로 딴마음이 없었음을 극력 소명하였다.
고문을 받아도 언어와 기개가 태연자약하니 위관(委官) 김응남(金應南)이 공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고통하는 빛이 없느냐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임금이 지척에 계시니 어찌
미천한 신하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게끔 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곤장이 끝나면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꿇어앉으며 서명(署名)을 삼가하고 조용히 추주(趨走)
하니 옥에 이르러 보는 이가 모두 장하게 여기었다.
위관이 상계(上啓)하기를 공은 혹독한 형벌에 임해서도 난언(亂言)이 없으니 충직합니다
하여 임금께서 특별히 사면하셨다.
출옥하니 친구들이 다투어 찾아와 위문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고문받을 때 그 고통을
몰랐고 다만 서까래 같은 곤장이 와서 내 다리뼈를 치는데 그 소리가 쿵하고 거문고의 굵은
줄 소리와 같았다 하니 만좌가 크게 웃었다.
이에 앞서 전라감사 홍세공(洪世恭)이 공과 정송강(鄭松江)이 친함을 미워하여 중상해서
담양 옥에다 가뒀다가 곧 의금부로 압송하여 국문을 받게 하고 국문이 끝나자 나주 옥에
가두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이 함락되자 출옥할 수 있었다.
모부인 성씨를 모시고 추월산에 피난하셨는데 왜적과 부딪쳐 모부인 성씨를 해하려 하자
공께서 몸으로 감싸고 모자가 같이 순절하시니 선조 30년 정유(1597) 9월 16일이었다.
그 후 담양고을 매곡(同府東梅山)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장사하였다.
광해 5년 계축(1613)년에 왕명으로 학동리에 효자정문을 세우고 어진 선비들이 구산
(龜山)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배(配)는 광산 김씨 참봉 붕섭(鵬燮)의 따님이시며 2남 1녀를 두셨으니 충원과 부원이며
따님은 진사 임득신에게 시집가셨다.
공의 성품은 충순(忠純)하고 기상은 출중하여 선과 의리를 행하시고 뜻은 고결하셨다.
오호라 공의 족형 건재 김공은 임진왜란에 창의사로 진주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훈공과
예절과 의리가 세상을 진동하고 장무공 김준(金浚) 또한 공의 친족으로 정묘호란 때
안주를 사수하다 순절하셨다.
공(公)과 이공(二公)과는 위열공의 한 후손이요 이공은 다 충절에 순절하시고 죽음으로써
충과 효를 다 하셨으니 어찌 장하고 훌륭타 아니하리요.
공의 5대손 언휴(彦休)가 삼공(三公)의 사적을 합편하여 한 책을 만들어 언양 김씨 충렬록
(彦陽金氏忠烈錄)이라 명명하고 문충공 민진원(閔鎭遠) 선생이 서문을 썼다.
또 수은 강항(姜沆) 선생이 공의 정문기(旌門記)를 짓고 거기에다 우산(牛山) 안방준 선생이
지은 세 분의 충절에 대한 기사(記事)는 상세하니 백세에 증명되도다.
언휴의 손자 노윤이 제서(諸書)를 손수 써서 청풍 김종후(金鍾厚)에게 보이기에 공의
행장을 지어 입언(立言)할 군자(君子)의 채택재성(採擇裁成)을 기다린다.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 찬(撰)
▼ 14:50(03h55m) 하산 마무리지점 순절비 부근의 의병 전적지비입니다.
▼ 14:57(04h02m) 하산 마무리지점의 이정표입니다.
▼ 15:00(04h05m)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안내문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세계적으로 지질학적·생태적·역사적·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보호·관리되는 공원.
1972년 '지질유산' 개념이 파생되었고, 이후 1992년 국제연합환경개발회의에서
지질유산의 보호를 천명한 뒤 2000년에 와서야 4개 지질공원이 유럽지질공원 네트워크를
결성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2001년 공식활동이 시작되었으며, 2004년 2월 유네스코와 유럽지질공원 네트워크가
세계지질공원 네트워크를 추진하는 것을 결의하면서 세계적인 활동으로 진전되었다.
2019년 기준 전 세계 41개국 147개 공원이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제주도·청송·무등산권이 속해 있다.
▼ 15:00(04h05m) 최종목적지인 주차장으로 대형버스 주차장으로 가야합니다.
▼ 15:08(04h13m) 담양호의 인공폭포 전경입니다.
▼ 15:09(04h14m) 대형버스주차장에 도착하면서 하루의 산행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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